근대체제를 바꿀 새로운 기운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일어나고 있다. 다른 백년은 이미 시작되었다. 백 년이 아니라 천 년일지도 모른다. 파국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서에서 동으로의 반전도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도 아니다. 그 새 기운이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새로운 기운은 사상도 이론도 운동도 아니다. 새로운 기운은 기후변화다. 기후변화를 줄여 말하면 기화(氣化)다. 기후는 바람, 비, 햇볕, 온도 등이 아니다. 우주의 기운, 작게는 지구의 기운이다. 기후는 기운이다. 기화는 기운의 변화다.
마르크스는 생산력, 생산수단, 생산관계에 주목했지만 지구의 기운 그 자체에 대해서는 사유가 깊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사람의 평화와 공생을 위해 생산수단의 노동자적 소유를 주장했다. 하지만 지구는 여전히 대상이지 주체가 아니다. 그것이 근대였다. 기후변화시대는 생산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라면 자연 즉 지구를 생산의 원료로 대상화하고 단지 소유의 문제로만 삼는 것에서 더 나가야 한다. 마르크스는 생산관계의 모순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하였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지구의 기운 변화인 기화다.
1860년에 수운은 이미 기화를 동경대전에서 수도 없이 언급한다. 동학의 주문에도 있다. 지금 시대의 신유물론은 정동(情動affect), 마음, 정서, 영성 등을 물(物)과 따로 분리하지 않는 일원론적 사유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직된 유물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생성체제에서는 인간사회만이 아니라 자연도 주체적 생명이 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확장되어야 한다. 어찌 인간만의 사회이며, 인간의 소유에 지나지 않는 물일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수운이야말로 진정한 유물론자였다. 그는 마음과 기를 분리하지 않았다. 지구의 기운(우주영성)과 사람의 영성이 함께 하는 것을 그는 시천주라 하였다. 천주를 모시는 시/천주가 아니라 시천한 시천/주(님)다. 시천한 님들의 공동체다. 수운은 기화로서 다시개벽한다고 하였다. 지구 기운과 사람은 서로 조화정 관계다. 동학주문의 조화정(造化定)은 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 잘 어울린다는 조화(調和)로 생각하기 쉽지만 지을 조 화활 화의 조화(造化)니 다른 말로 하면 생성이다. 조화는 생산이 아니라 생성이다. 생산이 사람 중심의 일방적 지구 수탈, 대상화, 이원적 세계라면 생성은 서로 공감하며 서로를 기르고 모시는 관계다. 조화정의 정(定)을 수운은 하늘의 덕과 마음에 합당한 것이라 하였다.(정자 합기덕정기심야定者 合其德定其心也) 그런데 하늘이 누구인가? 오심즉여심이라 하였으니 모든 너가 나이고 나가 곧 너다. 서로 기르고 모시는 생성 이것이 농시(農侍)다. 생성에는 통치라는 권력이 없다. 지구와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없다.
농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이 생전에 그리도 강조하시던 ‘농본문명’, ‘땅의 정서’는 농사짓고 살자는 뜻이 아니다. 필자의 말로 바꾸면 삶(생명)의 다양성과 착한 순환, 자연과 사회의 상호생성 살림(경제), 호혜적 분배, 지역화한 문명들의 진화, 농사와 공업의 상호순환 등일 것이다. 줄여서 농은 서로 착하게 기르며 먹인다는 뜻이다. 지금은 인터넷도 이 농의 범주에 있다. 김종철 선생의 ‘농’과 동학의 모실 ‘시’를 융합하여 ‘농시’라 이름한 것이다. 농시는 농의 원리를 문명화하자는 개념이다. 농시는 생명문명의 한 원리로 제시한 것이다. 농시는 산업문명, 도시, 시장, 시민, 주민 등과 대칭된다. 시장에서 다투는 시민(市民)이 아니라 서로 모시는 시민(侍民)이어야 한다. 행정관리 용어인 거주하는 주민(住民)이 아닌 주인인 주민(主民)이어야 한다. 시장이 아니라 장터여야 한다.
근대가 수탈하는 생산체제라면 다가올 시대는 기르고 모시는 자유로운 생성체제이기를 희망한다. 기후변화 기화라는 새로운 기운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고 예비하는 것이 할 일이다. 새 기운이 근대의 권력이 집중된 도시를 해체하고 농시를 기른다. 인터넷 덕으로 도시를 탈출해도 기회와 접속의 길이 있기에 대도시는 기후와 인터넷이 해체한다. 기의 변화가 시장, 노동, 교환, 지정학 근대체제의 모든 것을 바꾼다.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결코 대안이 아니다. 농시를 만드는 근본동력은 기화고 인터넷이 수단이 된다.
새길을 누가 여나? 2017년 새벽닭이 울면 조중러 삼국이 함께 깬다는 두만강 하류 접경지 방천에서 새길을 생각했다. 평상시에는 사람이 세상을 만든다. 기후변화 시대는 지구가 세상을 만든다. 길이 세상을 만든다. 초원길, 실크로드, 대항해 시대, 철의 실크로드, 일대일로, 신유라시아길, 이슬람길…아니다. 지금은 기후변화가 새길을 연다. 기로(氣路)다. 기로(氣路)가 인류문명의 기로(岐路)다. 기후변화의 길에 따른 노동 이동, 거주 이동, 식량 이동, 교역로 이동의 변화가 세상을 바꾼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필자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래서 희망한다고 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기후변화가 북극항로를 연다. 지구를 가장 짧게 돌 수 있다. 북방의 탄 국가와 시베리아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국의 고통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여타 생명의 오아시스가 그곳에서 열리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 고대 서사에서 나오는 신시(神市)- 거룩한 곳이 될 수도 있다. 대서양, 태평양의 대항해로부터 시작된 근대가 저무는 것이다. 새길이 열려서 지정학이 변하고 지정학이 변하면 새 문명이 자란다. 더하여 말하자면 남북이 안 만날래야 안 만날 수 없다. 통일이 단일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는 몽골, 탄 국가, 한국, 조선(북한)이 같다고 생각하는 북방일가라서 자유왕래면 족하다. 연방이니 연합이니 복잡하다. 이것은 큰 차원의 농시다.
대한민국에서만 보면 아마도 20년쯤 후면 도시 대탈출이 일어나지 않을까? 지역소멸이라고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그곳은 자본과 권력이 소멸한 곳이다. 대한민국 국토면적은 100,413㎢다. 개발면적인 도시화률은 18.1%인 18,174㎢다. 나머지 81.9%가 농지, 살림, 내수면 등이다. 이곳이 대안의 땅이다. 소멸한 것은 지역이 아니라 문명 상상력이다. 이미 본 것들에만 의존하는 경로의존성이 병이다. 발달된 기술과 인터넷이 거대 산업단지와 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무엇보다도 대도시는 기후변화가 해체한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와 간디의 ‘자치경제’가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되었다. 이른바 저개발국에서 태양광이 거대발전소와 송전선로 단계를 거치지 않고 마을에 전기를 가져다 준 것처럼 말이다.
거제조선소 노동파업을 황망히 쳐다보았다. 아! 역시, 그래도 노동계급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대우조선은 국영기업이다. 노동계급이 국가의 민낯을 폭로하지만 그 대안은 노동국가다. 그런가? 노동과 생명의 접점이 필요하다. 노동이 생명의 본질은 아니다. 노동은 생산하지만 생명은 생성을 한다. 생산으로 노동해방, 나아가 생명해방을 할 수는 없다. 기존 마르크스주의와의 결정적 차이가 이것이지 않을까? 국가체제 자체가 반노동, 반생명이다. 노동자가 공장 안에서 노동자가 아닌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은 가능한가? 노동국가란 말 자체가 여전히 반생명이다. 자원배분의 동일성이 평등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누가 이 불평등 시대에 자원배분의 동일성을 거부할 수 있는가? 생명문명이 노동계급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공장의 전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직주분리 대량생산인 포디이즘 체제에서 유연분산화된 직주일체 생성체체가 필요하다. 기술은 발전되었기에 발전 그 때문에 유연분산화가 가능하다. 발달된 첨단소공업은 자연과 사회가 서로 존중하는 생성체제를 만들 수 있다. 유연분산화되어야만 지휘와 통치가 아닌 자기통치, 자기생성, 자기주체성을 가진 생성장을 만들 수 있다. 공장이 아닌 생장(生場)이다.
만일에 사람들이 명품이라는 허황된 욕망에 빠지지 않는다면 작은 마을작업장에서 지능형 설비와 3D출력기로 생명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 옷, 신발, 스마트팜에 의한 먹을거리(마을소유라면 지지한다.), 집, 가구 등을 생성할 수 있다. 작지만 첨단 작업장이다(Smart micro factory). 여기에 마을의 교육, 의료, 복지가 함께 할 수 있다. 기술 발전의 덕이다. 이것이 농시다. 새로운 생명체제 말이다. 시장이 완전히 새롭게 변모한다. 경제는 생명을 기르고 모셔서 살리는 ‘살림’으로 전환한다. 시장이 거룩해진다. 해월의 말을 빌리면 장마당에 비단이 깔린다. 거대도시에 있어야 할 까닭이 없다. 자기통치, 자기생성(생산), 자기주체 시대, 자기 손으로 직접 기르고 생성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당연히 근대정치체제 이른바 대의과두제도 역사의 박물관으로 사라진다. 작은 지역들이 자치자급의 생성력을 가진다면 국가나 다른 지역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작은 지역은 직접민주체제가 되고, 더 큰 지역은 연합의 연합으로 구성된다. 단일 중앙주의를 가진 시장화한 국가가 아니라 자치연합의 연합에 의한 연합서비스기구로서 국가다. 이 정도가 되면 근대국가 개념은 사라진다. 국가가 아니라 연합기구일 뿐이다.
생명사상연구소 회원이자 동학하는 사람으로 세상의 집을 짓지는 못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목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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