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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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백년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샹뱌오(項)는 중국출신의 인류학자이다. 1972년생으로 새로운 시대의 ‘중국공공지식인’이다. 영국 옥스포드대학 인류학과 교수이고, 독일막스플랑크연구소 사회인류학 연구소 소장으로도 재직중이다. 20대에 베이징대학에서 작성한 석사논문이 중국인문사회과학계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학부시절부터 6년간 베이징 근교의 저장촌(浙江村)이란 마을에 모여든 동향출신 서민들의 삶을 민족지형태로 기록했다. 그가 관찰하고 묘사한 것은 당-국가가 규정하는 사회 바깥에 개혁개방이후 중국내의 유동하는 인구가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 ‘민간사회’의 모습이었다.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유럽에 자리잡은 그를 중국문화학술계가 다시 발견했다. 모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연구를 통해 세상에 직접 개입하는 방법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졌던 그 역시 이 호출을 반겼다.

청년들과의 사회적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다양한 모색을 하는 가운데 2020년 출간된 책 <방법으로서의 자기>는 2022년 5월 현재 14쇄를 찍으며 중국 지식대중들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필자는 서울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중국인으로 구성된 두명의 청년연구자들과 함께 이 책과 그의 다른 글들을 번역중이며 올 하반기에 한국어판이 출간될 예정이다. 책이 출간되기에 앞서 마침 그를 한국의 공론장에 소개할 기회를 잡았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의 배경이 된 것으로 짐작되는 러시아 철학자 알렉산더 두긴과 그의 사상에 대해서 일찍부터 주목했다.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그에게 이웃과 동료 독일인들이 바라보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남다른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또, 알렉산더 두긴과 네오유라시아니즘이 인류학적 논거를 중시하는 것도 그의 관심을 끌었다. 왜 푸틴과 청년들을 포함한 러시아 사회가 그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는지 알아보고, 중국사회와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유추해봤다. 요는 한 사회의 청년들이 일상생활의 의미구성에 실패할 경우, 그리고 그 사회가 이 변화를 설명할 적절한 담론을 상실했을 때 어떤 위험성에 노출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애국주의가 자주 국내외적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중국 사회에 미리 경고를 하고 싶었다. 

그림 1) 시사인 기사에 실린 샹뱌오 박사의 사진

다른백년의 신임이사장 이병한 박사는 한국에 알렉산더 두긴을 처음 알린 인물이다. 그는 2017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칠고초려끝에 두긴을 직접 만나서 긴 인터뷰를 진행했다. <유라시아견문록>의 저자로서 비서구문명들의 중흥현장을 관찰하고 있는 그에게 러시아와 두긴은 빼놓을 수 없는 탐방대상이었다. <k- 를 생각한다>의 저자 임명묵 작가도 일찌감치 두긴을 주목했다. 대학원에서 아시아지역학을 공부하고 있는 그의 레이더에 포착된 두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푸틴의 결정과 행동을 설명하는 유력한 단서였다. 이 주제를 놓고 한중 세 지식인간의 온라인 토론이 벌어졌으며 5월중순 시사주간지 <시사인>의 지면을 통해 공개됐다 (제766호, “러시아의 국뽕에서 한중이 위기를 읽다”). 지면의 제약으로 네시간에 걸쳐 한중순차통역으로 진행된 내용의 일부밖에 담길 수 없었다. 전체 대담 내용은 추후에 별도로 정리되어 다시 공개될 예정이다. 

그림 2) 다른백년의 이사장인 이병한 박사는 두긴을 한국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다.

 공론장에서의 활발한 토론, 국경과 언어를 초월한 대화는 샹뱌오 박사의 일상이다. 그의 일과를 빽빽히 채우고 있는 것들이 이런 만남과 대화이다. 그는 중국문화지식인들뿐 아니라 중국과 세계의 관계를 탐구하는 전세계의 학자, 연구자들과 교류한다. 이를테면 3월에는 마이클 센델과 미중사회의 “메리토크라시(능력주의)”를 논했고, 4월엔 제럿 다이아몬드와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토론했다. 대화의 상대에 따라서 이런 토론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이메일 등을 통해서 지속된다. 한국지식인들과의 토론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에서는 온라인 회의에 통역으로 참여했던 필자가 시사인 지면에 담기지 못했던 내용중 일부와 그 후의 이메일 교환에서 논의된 내용을 공유한다.

샹뱌오 박사가 온라인 회의를 통해서 시종일관 강조했던 점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정치경제철학(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y)에서 철학이 정치경제라는 기반을 놓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는 철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도덕의 문제, 보다 정확하게는 ‘도덕화’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물질적 일상의 의미를 놓친 사회에 현실과 유리한 과도한 도덕적 요구가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매일매일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는 매우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동물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런 범속함을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초월성과 숭고함을 추구하는 모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간은 자신의 그런 ‘도덕적 측면’이 남들에게 인정 받기를 원한다. 우리의 이야기로 눈을 돌려보면, 한국사회에서 현재 극렬한 갈등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도 여기서 기원한다. 민주개혁세력과 보수진영이 무대위에서 다투고 진보좌파가 조연역할을 하며 연출하는 살벌한 도덕성 논쟁이 그것이다. “평등과 정의 그리고 공정과 상식”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샹바오의 이런 문제의식은 짐작컨데 여러가지 연원을 갖는다. 이 부분은 이 글의 끝에서 다시 자세히 다뤄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과연 어떤 문제들이 발생했는가? 우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이 있다. 푸틴의 개전결정 원인을 한가지로 특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푸틴과 러시아의 엘리트들, 그리고 청년들이 장기간 두긴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여기서 두긴의 사상에 대해서 자세히 다룰 생각은 없기 때문에 그 내용과 배경은 이병한 박사의 <유라시아견문록>이나 책으로 정리되기전에 인터넷 지면에 실린 프레시안 기사(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79779?no=179779)를 참조하기 바란다. 샹뱌오에 의하면 두긴의 사상은 토론 상대방과의 논박이 불가능한 자체적으로만 정합한 폐쇄회로형 논리구조에 갇혀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결국 물리적 충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폭력의 사용이 너무나 쉽게 정당화하는 것이다. 왜 두긴의 사상은 러시아에서 인기를 끌게 됐나?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문자 그대로 몰락이 가속화하면서 러시아 사회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몰락의 배경이 된 역사적 상황, 특히 그 정치경제적 맥락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 너무 적었고, 또 몰락이전 소련사회가 발전하고 영향력을 확대시켰던 시절의 경제적, 사회적 성취들이 너무나도 간단히 부정된 것이다. 그렇게 물리적 실체와 변화의 디테일에 대한 설명이 거부된 채, 타락한 일상의 의미를 설명할 길이 없어 아노미상태에 빠진 러시아 사회에 제시된 숭고하고 초월적인 사상이 두긴의 네오유라시아니즘이었다. 처음에는 서구사회와의 대화를 중시하던 독재자 푸틴도 지속적으로 상대방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가운데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그래서 설령 푸틴과 두긴이 자신들의 전쟁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영미가 중심이 되는 대서양주의와 러시아가 중심에 선 대륙주의가 대립하는 ‘문명의 충돌’이라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결과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진짜 근본적 원인은 “정치경제적 설명부재”에 있다. 이러한 공들인 설명이 생략될 때, 사람들은 단순하고 부호화한 간단한 설명을 더 선호하게 된다. One-size-fits-all이 되는 문제해결 방법, 그리고 그럴듯한 적을 찾는 것이다. 푸틴이나 두긴은 그들의 현재 적인 우크라이나의 현정권과 서구사회뿐 아니라 과거 레닌과 소련의 성취도 부정했다. 

그림 3) 알렉산더 두긴의 사상과 주장은 흥미로운 점들이 있지만, 그는 논쟁의 상대로서 적합하지 않다. 자신의 폐쇄논리속에서 대화의 불가능성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샹뱌오는 여기서 신냉전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냉전은 코앞에 닥쳐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냉전과 신냉전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구냉전은 이른바 “진보의 시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미국이 중심이 되는 자유주의 세력과 소련의 사회주의 세력은 진보의 경쟁을 펼쳤고, 양대진영은 사실 많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지금은 승자인 미국의 시각으로 그 성취가 부정되고 있지만, 19세기말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던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농업국가들이 공산주의 진영에 편입한 후, 좋은 성과를 거뒀던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산업화, 현대화, 과학화, 그리고 생활복리 측면에서 모두 커다란 진전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공산진영이 해체되면서 비극적인 민족분쟁을 겪게 된 유고슬라비아연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새로운 냉전시대의 목전에 선 각 냉전주체들은 다양한 사회경제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진보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있습니다. 중국을 적으로 돌리며 신냉전을 준비하는 미국의 현실을 보세요.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좋아하던 시절이 있지만, 인종문제가 더욱 악화돼 Black Live Matters운동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인종뿐 아니라, 금융기술엘리트와 농민, 공장노동자들간의 빈부격차, 문화자본차이가 확대되는 정치경제 문제가 전혀 해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도 경제성장이 둔화하면서 누구나 가만히 앉아서도 과실을 따먹을 수 있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부적 문제로 군사력과 금융능력외에는 점차 힘을 잃고 있는 미국이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냉전국면을 원합니다. 그냥 ‘냉전’이라는 단어로 퉁칠 것이 아니라, 그 배경의 차이를 짚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

자연스럽게 중국사회의 의미 상실과 도덕화 문제로 넘어가보자. 샹뱌오 박사는 애국주의와 여성에 대한 공격이라는 두가지 사례를 들었다.

” ‘동아시아 서사’가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끊임없이 경제가 성장하고 삶의 여건이 나아진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선두에 섰고, 아시아의 네마리 호랑이가 뒤를 이었으며, 중국이 가장 큰 변화의 물결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그 흐름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동아시아 지역의 여러나라에서 순차적으로 더 이상 성장의 신화를 꿈꿀 수 없게 된 청년들이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중국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사실 이런 변화는 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분화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도시 중산층출신 청년들은 상대적으로 학력도 높고 집안형편도 좋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의 노력에 의한 가시적 성취를 얻는 것이 어려워져서, 노력해봐야 소용없으니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냥 누워있자는 탕핑(躺平)”을 주장합니다. 동아시아에 유행하는 ‘소확행’이나 ‘YOLO’와도 비슷하고, 한국이라면 ‘N포세대’와도 통하죠. 어찌보면, 당장의 생계위기에 직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여유있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 여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농촌출신, 저학력 청년들의 반응은 또 다릅니다. 맹목적인 애국주의 성향을 보이고, 타자에 대해서도 공격적입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위대한 중화민족서사”가 이들에게 제공된 초월성과 숭고함을 담고 있습니다. 민족과 국가가 그렇게 좋다면, 자신에게 그에 걸맞는 도덕적 행동과 규범을 요구하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게 ‘도덕화’하면서 타인에게 그런 가치관을 강요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이에 부합하지 않으면 비난을 퍼붓는 것입니다. “

중국내에서 늘 공격의 대상이 되는 페미니즘과 여성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급격한 고령화와 인구감소문제가 부각되면서 작년부터 세자녀낳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경제적 약자인 여성들이 육아와 가사에 대한 부담을 토로하면서 아이를 낳지않겠다고 하니까, 이를 비난합니다. 마치 여성으로서의 사람된 도리를 하지 않는다거나 국가와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논조입니다. 여성들은 개인적으로 구체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 뿐인데 (역자주: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결정권을 둘러싼 페미니즘 수준의 사회적 논쟁이 아니다. 훨씬 더 소극적인 의미의 거부와 저항을 말한다.) 거기에 갑자기 민족과 사회, 국가에 대한 책임이 부과됩니다. 전형적인 도덕화의 문제입니다. 작년에 도입된 “이혼숙려기간제도”도 여성의 처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시행되다보니, 이 기간에 가정폭력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제도 자체가 문제가 있어도 참아야 한다는 전통사회가치관에 기반한 도덕화 요구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

동아시아 서사가 초래한 문제는 그 전개과정에서도 같은 문제적 양상을 보인다. 영국에서 오래 생활하고 지금은 독일로 이주한 그에게 더 눈에 잘 띄는 것일 수도 있다. 

“정치경제적 격차가 계급의 분화로 이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계급이 나뉨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그렇게 진화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귀족계급, 중산층, 노동자 계급이 각기 다른 문화를 공유하고, 다른 정치경제적 요구를 지지정당을 통해 반영시키고 있는 것을 아실 겁니다. 폴로, 럭비, 축구의 차이같은 것이죠. 그리고, 노동당과 보수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중산층, 화이트칼라가 되고 싶어합니다. 단결해서 자신의 계급요구를 관철하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학력자본을 높이고 출세의 사다리에 올라타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중국 내에서 탈출구없는 경쟁이 강화하는 ‘네이쥬안’(內卷 involution)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자신이 속한 지역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모바일을 통해 유사한 대중문화를 공유합니다. 틱톡은 해외에서도 인기있지만 중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죠. ‘국민오락앱’입니다. “

한편 서구에서 유래한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이유는 샹뱌오에 의하면 역시 중국 사회 내에서 논의되는 페미니즘과 PC의 정치경제적 디테일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디테일이 생략된 이유는 두가지 때문이다. 첫째, 이러한 윤리적 요구가 서구사회에서 논의되는 맥락이 배제된 채 유학파를 비롯한 고학력 엘리트들에 의해서 직수입되어 소개되다 보니 “진보적인 상위층의 도덕”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적용된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둘째, 역시 중국사회의 구체적인 맥락보다는 추상적인 도덕적 윤리관 논의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회적 논의가 구체화되거나 깊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중국사회내의 공론장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샹뱌오 박사가 이에 대해서 더 깊이 설명한다. 

“그런데 과연 페미니즘이 탈정치경제적인 고상한 논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50~60년대에 페미니즘이 제기됐을 때 핵심은 남녀의 성별차이라는 본질주의나 상대주의적인 논의가 아니었습니다. 가부장제와 가정을 둘러싼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구체적 불평등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이자 실천적 주장입니다. 소련과 중국에서 페미니즘이 탈역사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는 여성의 사회참여 권리를 획기적으로 신장시켰고, 중국사회에 아직도 그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

그는 이 특히 중국사회의 이 ‘도덕화’ 문제를 ‘잔혹한 도덕주의(Brutal Morality)’라는 글로 정리하면서 발표를 준비중이다. 그가 설명하는 잔혹한 도덕주의의 핵심 속성은 놀랍게도 ‘진정성’이다. 

“네가 얘기하는 페미니즘이나 PC는 추상적이고 위선적인 ‘가짜 도덕’인 반면, 내가 말하는 남성주의는 “나는 네가 싫다라는 나의 진심”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내 도덕은 너의 도덕보다 ‘진짜배기’이다. 너는 여성이고 나는 남성이라는 본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서로의 본분을 지키는 것만으로 평화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이죠. 두긴이 대서양주의의 언어와 대륙주의의 언어와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고, 오로지 힘의 균형만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논리와 같습니다. 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전랑외교’도 마찬가지로 ‘진정성’에 호소합니다. “서구국가들이 이야기하는 도덕적 언설의 위선을 직시하라. 우리는 오로지 결과로서 우리의 도덕을 입증한다.”  ”  

하지만 그는 단순히 누군가 주장하는 도덕이 이념적으로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로 사안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발화하는 주체와 평가대상의 정치경제적 디테일이 유기적으로 통합돼있는지를 우선 보고, 그 역사성을 함께 살피고 나서 다시 도덕적 기준을 설정한다.  

“분명히 중국내에서 논의되는 PC나 페미니즘이 과도하게 주장될 때, 구체성을 결여한 추상적 언설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

이 토론의 계기가 됐던 그의 중국내 두긴 관련 대화가 팟캐스트에 공개된지 5일만에 7만명을 찍었을 때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아래 댓글이 그런 사례이다.

“이런 정복, 확장, 야성론과 같은 언어와 사상은 느낌상 전세계적으로 남성들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그래서 더 많은 영토를 얻고 싶어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 

“정치를 장악한 것이 생물적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따라서 그 폭력성이 결정된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말하기 쉽지 않은 명제입니다. 역사적으로 여성이 정치를 장악한 사례가 너무 적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반례도 충분히 많습니다. 마가렛 대처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되겠죠. 인디라 간디, 힐러리 클린턴, 콘돌리자 라이스는 어떻습니까? 모두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념적 입장이든 정치경제적 디테일을 생략하고 문제를 단순화시키면서, 부호화한 적을 찾는 순간 오류의 가능성이 발생합니다. “

하지만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는 문제는 아니다. 정말 위험한 것은 테크노크라트들이다. 

“오늘날 중국과 다른 사회에서 테크노크라트들은 엘리트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해서 그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받은 교육도 대중이 받은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기술지식의 많고 적음, 지능이 높고 낮음에 따라 합격 여부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이들도 일상적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들이 선발되는 과정에 정치이념은 개입되지 않습니다. 실은 범용한 사람들입니다. 자연히 숭고함과 초월성을 부여하는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죠. 이들에게는 사회의 중요한 의제와 정책에 대한 결정권이 주어지는데, 이들이 논증이 불가능한 파시즘에 가까운 위험한 사상에 노출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요?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범용한 이들이 권력을 소유하고, 초월적 사상을 받아들였을 때, 전체 사회를 위험한 지경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 

이 말을 들을 때 소름이 돋았다. 법조권력을 위시한 한국사회 테크노크라트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제 한국사회를 검찰권력으로 좌지우지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이나 신임법무부 장관 한동훈, 그리고 그 뒤에서 한국사회를 디자인하고 있다는 검찰원로들의 싱크탱크까지 생각이 났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측면도 있다. 워낙에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는 속물들이라서 굳이 어떤 숭고한 이념에 경도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주위의 정치인들중에는 MB계가 많다고 하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조금 다른 의미의 초월성으로 미신에 빠지는 것이 걱정이기는 하다. 실은 이념과 도덕주의, 도덕화에 더 목숨을 거는 것은 민주개혁진영이다. 그러고 보면, 보수와 민주개혁진영 모두 “자신들만의 숭고한 이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보수의 경우 반공주의나 미국에 대해 피로 맺어진 혈맹관계를 강조하는 극우적 정치관과 시장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수사적 자유 민주주의’가 있다. 그래서 상대를 ‘종북좌빨’이라고 부호화한다. 민주개혁진영 역시 보다 전통적인 의미에 부합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숭배자들이다. 이들은 팬데믹 2년을 거치며 이 이념과 문화적 기호들을 K로 성공적으로 브랜드화했다. 이들은 상대를 ‘토착 왜구’라고 부호화한다. 또, 자신의 자녀들에게 최대한 학력자본을 계승시켜 중산층 위치를 유지하거나 나아가 테크노크라트를 만드는 것에 대한 열망은 진영과 상관없이 강렬하다. 샹뱌오가 앞에서 지적했던 동아시아적 서사와 탈계급화한 ‘국민XX’의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문화적 전통이 봉건제가 빠르게 해체되고 등장한, 시험으로 선발된 관료가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궁금해 하던 필자는 얼마전 이와 관련해서 실증적 문헌연구를 진행한 중국책을 발견하고 서평을 쓴 적이 있다(“선거사회”,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205131510001  보다 자세한 서평은 몇달 후 다른백년에 실릴 예정이다).

온라인 토론에서 다뤄진 또다른 주목할만한 논의는 한국사회에 나타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이었다. 아래 질문을 제기한 것은 이병한 박사다. 

“한국사회에서 90년대에 대학에 진학한 저와 같은 X세대가 등장했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페미니즘 맥락에서 개인과 일상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대화를 강조하고요. 이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K-컬쳐의 주역이 되기도 했죠. 그런데 이 때 태어난 Z세대가 지금은 2030세대로 자라나 샹교수님이 말씀하신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이 제기하는 방법론은 그럼 포스트-포스트-모던으로 봐야 합니까?

샹뱌오가 국경을 넘으면서 의미를 드러내고 있을뿐 아니라 역사적 변증법 과정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있는 질문이라면서 답했다. 

“제가 말하는 일상의 의미와 정치경제적 디테일은 오히려 모더니즘에 가깝습니다. ‘자기’와 한국어로는 ‘주변’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부근’, 즉 주위환경에 대한 구체적이고 총체적 이해를 강조합니다. 저는 추상적인 이론적 사유가 아니라 하루하루 일상의 실천을 통해서, 조금씩 실증적으로 (empirical)으로 물질적인 자신과 이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를 파악할 것을 권합니다. 90년대의 포스트모던적 사유속의 절대적 개인이나 개인이 이해하는 세계와는 다를 것 같습니다. 당시 IMF금융사태속에서 탈산업화와 금융화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들었습니다. 각성하는 개인은 페미니즘과도 연계해서, 어렸을 때부터 자신에게 고통을 준 주변의 가부장적 권력을 비판하고 이것의 해체를 주장했죠. 그런데 이때 개인은 비판적 사고를 통해서 자신이 조금씩 구성해 나간 주체라기보다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외재적 이론에 의해서 주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둘러싼 세계는 자신과 불화하는 단순한 이항대립구조가 아니라 실제로는 훨씬 복잡한 정치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그 당시에 출생한 90년대생들에게는 더욱 극적으로 다가옵니다. 개인의 자유와 평균적인 경제적 풍요를 포함한 이 모든 이념적, 경제적 환경은 그들 자신이 역사적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그냥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과 출생후 개인적 경쟁을 통해 누리게 된 것들의 총합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안정적이 않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방법론을 포스트-포스트 모던으로 불러야 할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림 4) 임명묵 작가는 청년문화를 통해 대중작가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아시아지역전문가로서 역량을 쌓아가고 있다

필자는 온라인 회의에 대한 피드백 삼아, 한국의 테크노크라트들에 대한 개인적 염려와 함께 포스트포스트모던 논의에 덧붙여 그의 방법론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한국과 중국사회를 포함해서 과연 대중들의 초월성 혹은 영성에 대한 요구가 이런 지식인의 끝없는 반성적 사유라는 수행과 같은 방법으로 만족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 “이념적 도덕화” 요구가 세계 어떤 나라보다 강력한 한국의 역사적 전통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런 전통은 얼마전 한국어판이 출간된 예일대학교의 냉전사 연구자 오드 아르네 베스타드 교수의 <<제국과 의로운 민족>>내용을 빌려 제3자의 시각이 뒷받침 된 것임을 논증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ztR_bvVksIU&t=2s). 한국의 (법조)관료중심주의나, 외재적 이념에 의해 강제된 ‘도덕화 요구’ 전통은 역사적으로 중화문명 2천년, 일본의 식민지배이념과 그 잔재가 존속한 해방후 산업화, 군사독재정권의 상당기간을 포함한 100년 가까운 기간, 그리고 미국의 정치적, 이념적 영향력하의 70년이 차례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사실 이 두가지 주장은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기보다 과거 이병한 박사, 임명묵 작가와의 교류를 통해서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예상치 못하게 샹뱌오가 상당히 진지한 답변을 돌려줬다.       

In this message you once again raised many fundamental issues. An important theme emerging from your comments is probably the relation between (1) systematic bureaucratic rationality as a way of organising public life, and (2) spiritual and transcendental pursuits of the population. For instance, the imperial Chinese politics is legitimated through certain notion of divinity 天命, but the way that the government is organised is rational and pragmatic. The current South Korea politics seems very “rationalized” in operation (dominated by lawyers), but is moralized in discourse. The two sometimes stand apart from each other.

“이 메시지에서 몇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걸 정리해보면 (1) 공공생활을 조직하기 위한 시스템적인 관료주의의 합리성과 (2) 대중이 추구하는 영성, 초월성의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전통 제국시대 정치를 살펴보면 천자는 하늘이 부여한 신성과 권위를 통해서(天命) 합법성을 인정 받았지만, 실제로 정부는 합리성과 실용성에 기반해서 조직되고 운영됐습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도 운영상 매우 “합리화”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법조인들이 주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담론 차원에서는 도덕화되어 있는 것이죠. 이렇게 상반되어 보이는 두가지 요소가 공존하는 것은 중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예외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 

The liberal assumes that rational bureaucracy would render transcendentalism unnecessary for politics and even for daily life (disenchantment). Public life is a matter of proceduralism, managed fairness and justice. The socialist revolutionaries assumes that a deep politicisation of politics (public affairs are not organised in a hierarchical bureaucracy, but through mass participation, direct debate, direct democracy) also means we don’t need a transcendental moral justification that stands out of outside of practice, because everyone already engages in specific moral and ideological debates in practice. Both liberal and socialist thinking have proved wrong. The rise of far right and authoritarianism could be responses to this.

“자유주의자들은 합료적인 관료주의덕분에, 초월성이 정치에서 나아가서 일상에서 불필요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막스 베버가 이야기한 탈주술화입니다.) 공공생활은 공정성과 정의에 의해서 관리되는 절차주의의 문제일 뿐입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정치의 심층정치화를 주장합니다. 계급적 관료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참여와 논쟁, 직접 민주주의에 의해서 공공사무가 조직될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실천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도덕정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구체적인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늘 실천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실을 보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적 주장이 모두 틀린 것으로 입증됐습니다. 전지구적으로 극우가 발호하고 권위주의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      

그가 다른 지면을 통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 자신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By 想細 and 想開I was referring to empirical observations–you think more carefully and more broadly by paying more attention to more details. Then you will see the complexity, historicity and specificity of the problem that you face. This will make the problem more manageable. This has something to do with 佛思維 “mindfulness” (acute awareness of your physical surrounding as well as your own physical being), but is different from what 冥想 (transcend physical surrounding)

“저는 실증적인(empirical) 관찰을 재차 강조한 것입니다. 더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더 넓게 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디테일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복잡성, 역사성 그리고 자신이 직면한 문제의 구체성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문제가 더 다루기 쉬워집니다. 이건 불교의 “마인드풀니스”와 비슷하지만 명상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마인드풀니스는 자신의 물리적 존재와 이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을 더욱 명징하고 날카롭게 깨닫는 것이지만 명상은 자신의 물리적 환경을 초월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지요. “

魯迅 is very modern for me. Subjectivity 主体性 is absolutely crucial for him. His transcendence is self denial. This is why Nietzsche is important for him. Dare to question, dare to doubt, dare to destroy the self in order to rebuild the self. Traditional transcendentalism starts with an unquestioned and unexamined self, for instance being a true Chinese is like this and this, and being a true Russian is like this and this.

“제게 루쉰은 매우 근대적인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주체성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가 초월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자기부정이었습니다. 그에게 니체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과감히 묻고, 의심하고, 스스로를 부정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냅니다. 전통적인 초월성은 자기에 대해서 묻지 않고, 검증도 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진짜 (애국주의적) 중국인이라면 (의문의 여지없이) 반드시 이러저러해야 한다. 진정한 러시아 사람이라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라는 말이 그런 겁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못하고 천공이나 건진법사 스캔들이 문제가 된 윤석열 대통령의 샤머니즘 신봉 의혹이 자세히 보도된 중국언론의 기사를 공유하며 한국사회의 관료주의적 합리성이 조금 의심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한국사회내에서 유독 기복신앙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성공과 한국의 급속한 근대화 성공을 추동한 과도한 ‘열정’의 근원이 단순히 유교가 규율하는 근면성에 기반한 동아시사 서사에서만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지 늘 궁금하다는 개인적 의견도 피력했다. 답변은 다음과 같다.

“The shamanism story is distributingly fascinating. Shamanism and other folk religions are of course important parts of many people’s Nearby. They link the nearby to the larger cosmos in a way that they can’t observe let alone question. Shamanism offers answers but disallow questions. This makes me think of the question of scale again. Scale makes the connection between the local to global observable.”

“샤머니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매우 흥미있습니다. 샤머니즘과 다른 민속종교는 물론 많은 이들의 부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질문할 수도 없고 관찰할 수도 없는 더 큰 우주와 자기의 부근을 샤머니즘을 통해 연결합니다. 샤머니즘은 질문은 허락하지 않지만 답을 제시해줍니다. 그래서 스케일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적절한) 스케일은 지역과 관찰이 가능한 세계를 연결시켜줄 수 있습니다. “

실은 이 글을 쓰게 된 목적은 이 대화의 기록을 남겨두기 위한 것이다. 당초 온라인 대담 내용의 전문 녹취록은 나중에 별도로 공개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대담에 포함되지 않은 이메일 교환을 통한 대화도 샹뱌오가 공론장에 남겨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취해서 글로 옮겼다. 

마지막으로 초반에 언급했던 그의 이런 태도와 방법론이 나온 배경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하겠다. 나중에 출간될 책에 이런 내용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자세히 설명된다. 그는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 사람이다. “중국의 유태인”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서너군데 있다. 그중에서도 이곳이 손꼽힌다. 이 지역 사람들을 유명하게 만든 것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경공업이다. 세계의 경공업수도로 불리는 이우(義烏)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지역의 산업구조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원저우상인들이다. 두번째는 부동산 투기이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부동산 가격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바로 이곳 출신 사람들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인연으로는 2006년 베이징에 살 때 세들었던 아파트와 2016년 상하이에서 머물렀던 아파트의 집주인이 모두 바로 원저우출신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은행 레버리지를 이용해 적게는 수채에서 많게는 수십채의 아파트를 사들이고, 임대수익을 통해서 빚을 갚은 후에 소유권을 확보하는 탁월한 이재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이런 아파트들은 모두 지금 한채에 수십억원을 호가한다. 나는 후자의 사례를 통해서 원저우 사람들의 재력이나 금전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경험했지만, 막상 원저우 사람들의 진면목은 십수년 후에 샹뱌오를 통해서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물질적 세계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신념과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능력이 오늘날의 원저우와 이우를 만들어냈다. 샹뱌오가 그의 석사논문에서 기록한 민간사회조직화의 동력이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다. 샹뱌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이 “베이징대학 출신의 천재 소년”보다는 “원저우 출신의 라이터 만드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원저우의 도자기 직업학교가 신입생모집을 취소하지 않았다면 그쪽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낮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향신과 교사집안의 자식이었는데도 말이다.   

그의 또다른 면모이자 우리가 번역하는 책의 핵심 키워드중 하나는 그가 세계와 지식을 바라보는 향신(鄉紳)관점과 태도이다. 이것을 우리 말로 옮기자면 시골선비에 해당한다. 향신은 지역에 그 기반이 존재하는 사인(士人)계급의 일원이다. 사인계급, 즉 사대부와 사민은 중화문명전통의 핵심정신을 설명하는 존재이다. 천년간 유지된 봉건제도에서 거의 과도기없이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간 서구와 달리, 중국은 신분을 세습하는 봉건제가 서주에서 춘추시대까지 비교적 짧게 지속됐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기 전에 2천년간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된 엘리트 선발제도가 유지됐다. 유교와 자신의 학교를 열어 출신에 관계없이 제자로 받아들인 공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과거제도라는 엘리트 선발 시스템에 의해서 일종의 이른 계몽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를 일정한 근대성으로 해석해도 좋다. 이에 참여해서 선발된 사람들이 바로 사인계급이다. 그런데 중국은 명청을 거치며 신분제가 거의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누구나 재능이 있고 노력을 한다면 이 경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관과 민이라는 신분과 계급이 세습되지 않고 그 사이에 계속 활발한 유동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사인은 고정된 신분이 아니라, 귀족도 평민도 아니면서 동시에 귀족도 될 수 있고 평민도 될 수 있는, 모호하고 유동적인, 계급 아닌 계급이었던 셈이다. 특히, 중앙에 머물지 않고 지역에 기반을 둔 사인들이 바로 향신이다. 그래서 이들은 성리학의 추상적인 이념보다 자기가 기반한 지역의 물질적 환경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지역민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었다. 마침 황제에게 실망한 왕양명이 정립한 양명학은 이미 “민중속으로”를 외치고 있었다. 샹뱌오는 향신의 현대적 이름은 그람시가 이야기한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말한다. 

끝끝내 적서차별과 신분제를 철폐하지 못한 조선에는 과연 이런 지식인들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영화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정약전의 각성은 보다 많은 지식인들에게도 동의를 얻을 수 있었을까? 역사학자 백승종에 의하면 18세기부터 나타난 평민지식인들의 존재가 이에 가까운 것 같다. 19세기에는 이들이 중심이 돼 동학으로 민중을 조직하고 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왜 조선에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늦게서야 나타난 것일까? 아마도 근대화 이전에 농업이 중심이 되는 경제적 생산력과 상공업을 포함한 산업의 발전이 너무 더뎠기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념의 족쇄와 이와 맞물린 경제적 후진성이 역사발전의 지체현상으로 나타났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끝으로, 샹뱌오가 우연히도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교수로 임용돼 오랜 기간 생활한 것도 그의 일관된 태도와 정체성 유지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유럽 대륙의 관념적 합리주의 전통과 대조되는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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