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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관계의 그물이다. 그물은 날줄과 씨줄, X축과 Y축으로 교차한다. 다시 말해, 관계는 수평과 수직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진리를 담은 상징이 십자(十)다. 삼라 만상이 그렇듯이 십자는 고정 불변이 아니다. 끊임없이 돌아간다. 이러한 진리를 담은 상징이 만자(卍), 스와스티카다. 수평과 수직으로 빚어진 관계가 돌고 도는 것이 우주의 역사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인간 이전까지 동물의 몸은 수평이었다. 머리와 항문이 같은 높이였다. 위아래보다 앞뒤가 중요했다. 직립 보행은 인간의 효시다. 네 발로 다니던 동물이 두 발로 섰다. 약 4백만 년 전의 일이다. 영장류 중 꼬리가 없으면 유인원이고, 유인원 중 두 발로 걸으면 인간이다. 인간다움이란 꼿꼿이 일(1)자로 서는 것이다. 수평인 땅 위에 수직인 사람이 솟아났다. 앞뒤보다 위아래가 중요해졌고, 위는 곧 머리였다. 이것이 인류를 만든 최초의 혁명이다.

혁명은 본디 돌아감(revolution)이다. 수평(一)이 돌아가면 수직(1)이 된다. 꼿꼿이 서면서 등장한 인간은 그 자체가 오랜 영장류 혁명의 결과다. 수직인 나무에서 수평으로 다니던 원숭이가 수평인 땅으로 내려와 수직으로 일어났다. 안테나처럼 머리를 위로 세우고 대지를 활보했다. 직립 보행은 인간의 두뇌가 폭발적으로 커질 수 있게 했다. 앞다리가 자유로워지고 시각 의존도가 커지자, 감각과 운동을 관장하는 두뇌 영역이 재조직되고 확장됐다. 골반이 좁아지자 태아의 두개골이 작고 유연해졌고, 그래서 뇌가 커졌다는 이론도 있다. 어쨌든 인류의 두뇌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됐고, 호모 하빌리스(약 230만~160만년 전)와 호모 에렉투스(약 200만~10만년 전)를 거치면서 그래프의 무릎, 굴곡부를 지났다. 호모 사피엔스(약 20만년 전~)에 이르러 오늘날 우리와 같은 크기의 두뇌가 나타났다. 인간의 전두엽은 지구상 가장 복잡한 생명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다. 바로 그곳에서 5만년 전, 또다른 혁명이 일어난다. 바로 인지 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다.

대략 7만년 전에서 3만년 전 사이, 인간의 언어는 질적으로 바뀌었다. 과학자들이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라고 부르는 유전자가 등장하여 사피엔스의 두뇌 회로를 새로 감았다. 상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 감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시대 다른 인간 종인 네안데르탈인의 언어와는 차원이 다른 복잡성이었다. 선악을 구분하고, 죽음 이후를 상정했다. 종교와 형이상학의 시원이다. 사회 조직 능력이 발달하여 자연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사피엔스는 곧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고,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를 전부 식민했다.

인지 혁명이 곧 천지창조이며 천개지벽이다. 우주는 본디 하나다. 우리가 하늘이라 부르는 것과 땅이라 부르는 것이 원래는 하나의 연속체다.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둘로 나누어 이름짓고 따로 부른다. 하나를 둘로, 셋으로, 여럿으로 분석하는 것이 언어의 역할이다. 인간은 인지 혁명을 통해 우주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주가 인간을 통해 스스로를 여럿으로 나누었다고 볼 수도 있다. 태극이 처음으로 갈라져 음과 양이 되었다. 창세기 1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운을 떼지만, 요한 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한다. 하나의 혼돈(카오스)이었던 우주를 천지, 하늘과 땅으로 나눈 것은 언어라는 뜻이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덕경 1장도 같은 내용이다.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머니다. 다시 요한 복음: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인간이 말을 쓰고 이름을 지음으로서 만물이 비롯되었다. 

하나인 우주, 하나님을 하늘과 땅, 두 님으로 나누어 부르는 행위가 천지창조이자 천개지벽이다. 하나(一)가 둘(二),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으로 갈라졌다. 창조와 개벽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도 원래 우주와 하나다. 하나님이다. 천지창조와 천개지벽을 일으킨 하나님은 바로 사람이다. 하늘 땅, 위 아래를 가르고 나니, 그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둘이 셋(三)이 되었다. 태극이 삼태극이 되었다.

인류는 오랫동안 하늘과 땅이 평평한 줄 알았다. 스스로 땅(土)이라는 수평선(一) 위, 하늘(天)이라는 수평선(一) 아래 서있다(人)고 인식했다. 그러한 세계관은 수직적이다. 위아래가 분명하다. 사회도 수직적으로 조직되었다. 하늘의 아버지가 위고 대지의 어머니가 아래다. 우두머리가 위고 수족이 아래다. 수직적인 세계관은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 가운데 있는 동물 중 인간만 수직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 5백년 전 또다른 혁명이 일어난다. 바로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다.

과학 혁명의 시작은 갈릴레오(1564~1642)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망원경으로 발견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로 땅이 둥글다는 사실도 널리 인식된 때였다. 평평한 줄만 알았던 땅이 알고 보니 해와 달처럼 둥그런 구였다. 지구는 모든 천체와 마찬가지로 뱅뱅 돌고 있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면서 자기도 돈다. 공전과 자전이 모두 레볼루션이다. 바로 이 레볼루션에 대한 인식이 인간의 우주적 위치를 바꾼다. 하늘과 땅이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자각, 지구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자각이 과학 혁명의 골자다.

인지 혁명이 첫번째 천지창조, 선천개벽이었다면 과학 혁명은 두번째 천지창조, 후천개벽이다. 우주가 인간을 통해 그렸던 자화상을 완전히 새로 고쳤다. 하나인 님을 하늘과 땅으로 나누는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했다. 새로운 세계, 새누리가 등장했다. 하늘 땅이 평평하다고 가정했던 선천시대에는 천상 세계와 지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다. 하늘이라는 지붕 위에 천국(天國)하늘나라가 있었고 땅이라는 바닥 아래 지옥(地獄), 땅 감옥이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지상 세계는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과학 혁명 이후, 천상과 지상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땅은 둥글고 하늘은 무한하다. 땅이 아닌 곳은 전부 하늘이다. 땅 위가 하늘이라고 할 수도 없다. 둥그런 것에 위아래가 어딨나? 땅끝에서 하늘이 시작하고 하늘 끝에서 땅이 시작한다. 생각해보자. 어디서부터가 하늘인가? 백두산 꼭대기는 하늘이고 내가 사는 남산 자락은 하늘이 아닌가? 사람이 발딛고 있는 땅바닥부터가 하늘이다. 내가 마시는 공기가 하늘 기운, 사는 나라가 하늘 나라다. 과학 혁명 이후, 사람은 더이상 하늘과 땅 사이에 끼인 존재가 아니다. 두 개의 수평선(二) 사이에 수직으로 우뚝선(人) 생명이 아니다. 지구(O)와 하나되어 돌고 도는 님, 하나님이다. 지상이자 천상에 사는 땅님, 하늘님이다. 과학 혁명이라는 제2차 천지창조, 후천개벽은 하늘/땅 이원세계를 하나의 지구님으로 일원화했다. 원래 하나지만, 인간의 말씀, 로고스, 이성으로 인해 둘이 되었던 우주가 다시 하나됐다. 후천개벽은 또 한 번의 천지창조이자 천지통일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늘나라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천상 세계, 천국이 죽은 뒤에 영혼으로 승천하는 내세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라는 진리를 뒤늦게 깨달았다. 인간은 여태 하늘님이었지만, 자신을 부정하고 저 위, 저 너머, 하늘의 신령을 숭배했던 것이다. 헛으로 상상하며 우상을 만들었다. 이 땅의 중생, 짐승을 천시하고 오직 사람의 영혼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나라의 아랫것들, 백성이 굶어 죽어도 저 위의 조상님이 드실 밥상은 꼬박꼬박 챙겼다. 이원적이고 수직적인 세계관의 치명적인 오류다. 그런데 16세기 과학 혁명이 천지통일과 신인합일을 낳았다. 하늘과 땅이 하나고 신과 사람이 하나의 님이다. 이걸 직시하니까 기존의 수직적인 관계도 무너졌다.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모두 과학 혁명의 산물이다. 수직이 수평으로 돌아가는 혁명, 레볼루션이다. 후천개벽의 참뜻을 사람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스스로를 하늘과 땅 가운데 세워두었던 인간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둥그런 지구와 함께 돌고 도는 하늘님으로 거듭났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서방에서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제일 먼저 깨달았다. 17세기 잉글랜드는 카오스였다. 1640년 혁명이 발발하고 온갖 종파들이 득세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조지 폭스의 퀘이커다. 폭스는 묵상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하늘님이 내 안에 있다. ‘내면의 빛(Inner Light)’, ‘내면의 소리(Inner Voice)’가 곧 하나님이다. 폭스는 그 빛, 그 소리를 따르는 것이 기독교의 참뜻이라고 믿었다. 본인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이 있었다. 예수도 결국 ‘사람의 아들’ 아닌가.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다르지 않다. 하나의 님이다. 퀘이커의 공식 명칭은 종교친우회(Society of Friends)다. 벗들의 모임이다. 폭스는 신자를 프렌드, 벗이라고 불렀다.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따지지 않았다. 퀘이커 모임에는 신부나 목사가 없다. 십자가 걸린 벽을 보며 미사나 예배를 올리지 않는다. 둥그렇게 앉아서 다같이 묵상한다.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퀘이커(Quaker)는 ‘떠는이’라는 뜻이다. 묵상하다가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면 자연스레 말을 하고 빛이 보이면 떨기도 한다. 하늘의 떨림을 몸으로 표현한다. 폭스와 ‘떠는 벗들’은 평등 세상을 꿈꿨다. 농민 혁명이 실패하자, 평화주의를 내걸었다. 백여년 뒤, 퀘이커 교도인 윌리엄 펜이 건설한 펜실베니아에서 퀘이커 교도인 토마스 페인이 쓴 <상식>이 또다른 혁명을 일으켰다. 미국 혁명은 제2의 청교도 혁명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 독립 전쟁은 제2의 잉글랜드 농민 봉기였다. 사람 안에 하늘님이 있다고 믿는 순간, 인권과 평등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유교가 지배하던 동방에서는 한국의 동학도들이 제일 먼저 깨달았다. 19세기 조선은 혼돈이었다. 최제우는 1860년 신비 체험을 한 후 주문을 외었다. ‘시천주(侍天主)’, 하늘님을 모신다. 최제우가 말하는 하느님은 사람 안에 있다. 천지인, 그러니까 하늘 땅 사람이 모두 한울, 한 우리, 한 울타리다. 최제우의 제자 최시형은 향벽설위(向壁設位) 대신 향아설위(向我設位)를 가르쳤다. 벽을 향해 밥을 올리지 말고 나를 향해 밥을 놓으라는 것이다. 조상님과 하느님의 신령은 벽 뒤, 하늘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최시형의 제자 손병희는 동학 사상을 인내천(人乃天)으로 요약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퀘이커의 교리와 같다. 동학도는 인권과 평등이 보장되는 세상을 원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혁명과 마찬가지로 동학 혁명도 실패했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고 평화주의를 내걸었다. 1919년, 그는 민족대표로서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다. 삼일운동은 제2의 천도교 혁명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 독립 운동은 제2의 동학 농민 봉기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믿는 순간, 인권과 평등은 반드시 따라온다.

퀘이커와 동학, 청교도와 천도교를 통해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유교는 수직에서 수평으로 전환했다. 나의 바깥, 위에 두었던 하느님을 안으로 모셨다. 교황과 황제를 위시하던 질서를 무너뜨렸다. 위아래로 보던 사람들을 평등하게 봤다. 사람 뿐만 아니라 뭇 생명과 무기물까지도 그리 보았다. 인간은 더이상 하늘 땅 가운데 있는 중심이 아니었다. 우주라는 무궁한 울타리 안에 있는 티끌이었다. 모든 티끌이 한울이자 하늘이었다. 수평선(一) 두 개(二)로 나눠졌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 창조된 우주는 어떤 모습인가? 수평과 수직(十)이 빠르게 돌아가면(卍) 무엇이 보일까? 원(O)이 나온다. 1916년, 박중빈은 묵상을 하던 중 깨달음을 얻는다.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확립한다. 그는 직접 일원상을 그리는데, 깔끔한 동그라미다.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 박중빈 사후 창립된 원불교는 인격신을 숭배하지 않고 일원상(O)으로 상징되는 우주 만유의 본체를 모신다.  

1972년, 아폴로17 승무원은 달로 가는 길에 본 지구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는다. 블루 마블, 푸른 구슬이라 불리는 유명한 사진이다. 인지 혁명 이후 5만년 간, 인류 사상을 지배했던 이원론적 천지관(二)이 과학 혁명 이후 5백년 만에 일원론적 지구관(O)으로 업데이트됐다. 우주관이란 하나의 본체인 우주가 인간을 통해서 스스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그려보는 것이다. 제1차 천지창조, 선천개벽 때는 하나님이 둘이 되었다. 혼돈에서 하늘과 땅, 빛과 어둠이 생겨났다. 태극이 음과 양으로 나뉘었다. 인지 혁명으로 인해 말씀(로고스), 말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2차 천지창조, 후천개벽 때는 둘이 다시 하나가 되었다. 과학적으로 따져보니 천지가 둘이 아닌 하나의 원, 지구였다. 천지인문학, 후천개벽학은 그래서 지구학이다. 수직적인 이원세계를 뒤로하고 수평적인 일원세계의 문을 여는 학문이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움직이는 혁명이다. 

우주는 집 우(宇), 집 주(宙), 집집이다. 갈라진 두 천지(二) 가운데 살던 사람의 집은 좁다. 좁은 집에 살던 선천시대 인간은 자기중심적이었다. 반면 무한한 우주 속에서 돌고 도는 사람의 집은 넓다. 무궁무진하다. 후천시대 인간은 더이상 자기가 중심이 아니다. 얼마나 해방적인가! 최제우는 무극대도를 얻고 그 감흥을 <흥비가>로 불렀다.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윌리엄 블레이크는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라는 시로 같은 마음을 노래했다. “인식의 문이 열리면, 모든 것이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보인다. 인피니트(Infinite).” 천국과 지옥을 결혼시켜서 무궁하고 인피니트한 일원세계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 후천개벽이다. 선천개벽 때와 마찬가지로 그 창조자, 크리에이터는 사람이다.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 하늘님, 한울님이다. 중심으로부터의 해방을 노래하면서 다시 하나된 마음을 그려보자! 수평과 수직의 그물이 뱅뱅 돌아가며 빚어내는 우주를 안아보자! 이 시대에 사람으로 태어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혁명의 춤을 추고 개벽의 소리를 내는 것뿐이다.

사진 출처 : https://ar.pinterest.com/pin/2955555997594292/

전범선

전범선 /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 199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밴드 ‘양반들’ 보컬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포르체, 2021)와 '해방촌의 채식주의자'(한겨레출판, 2020)를 썼다. '왜 비건인가?'(피터 싱어 지음, 두루미, 2021), '비건 세상 만들기'(토바이어스 리나르트 지음, 두루미, 2020) 등을 번역했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의 자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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