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시작
작년이 가고 올해가 왔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작년에 있다. 그리고 내년(어쩌면 세기말)이 두렵다. 시계는 2022년 1월 3일을 가리키지만 마음과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다. 여기서 문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올해가 확실한가. 우리는 시작과 끝이 서로 다른 지평에 있다고 여기나, 이는 법칙 이전에 하나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한국철학의 문맥에서는 시작과 끝이 섞여 있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사발통신 같이 원형으로 쓰여진 글자들이 하나의 상징이고, 불교의 윤회 개념도 그 예라 하겠다. 녹색의 말들에서도 시작과 끝은 순환하는데, 생명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자연은 형성된다. 2022년의 우리들은 줄곧 ‘지금, 여기’를 말하며 살지만, 불가피하고 당연하게도 우리들은 과거의 시작과 그 전 과거의 끝, 미래의 끝과 그다음 미래의 시작에 연동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는 건 결국 혼자라는 ‘개인적’인 견해가 다시 유행이지만, 누구의 배를 빌리지 않고 태어난 이가 없고,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이도 없다. 태초에, 그리고 최후에 홀로일 수 없는 존재가 어찌 개인일 수 있고, ‘지금, 여기’ 뿐일 수 있을까. 우리는 빚져 있는 존재다. 이 글의 시작도 마찬가지로, 가깝게는 어느 방랑자의 제안에, 멀게는 선생(先生)들이 남긴 족적과 말들에 빚져 있다. 그리고 이 부름과 환대에 응하여 쓰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들어가기 앞서 시작과 끝에 대해 말하는 것이 먼저이겠다.
1. 한국철학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시작은 이 물음이었던 것 같다. 한국철학이 시작하는 문장을 여기에 둔 것은 함석헌의 말처럼 ‘앎은 앓음’ [1]이기 때문이다. 가장 아픈 물음을 앞에 두고 다음을 생각하는 게 한국철학의 바탕이라고 여긴다. 실존의 차원에서 생의 목적은 상실되고 무의미함이 기본값이 되기 일쑤지만, 현실의 세계에서 고통은 정직하다. 나에게 나, 가족, 사회, 지구는 경이로움과 감사함 이전에 혼돈이었다. 세상에는 말 못할 일들도, 억장이 무너지는 일들도 너무 많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기에, 아픔이 길이 되려면 다른 생각과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한국철학이, 앎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은 이와 같이 개인적인 화두이지만 수천 년간 이어져온 사회적이고 지구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나의 생명에 대한 고민이 조화롭게 자리잡을 때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일종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랄까, 이 물음은 스스로의 발전에 관한 것인 동시에 세상의 변화와 전환에 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를 위해 몇 걸음 더 가보자. 물음을 풀어 안에 담긴 여러 속물음을 다음과 같이 놓아본다.
[ㄱ] 존재: 주체적으로 살 것인가. 관계 속에서 있을 것인가. [ㄴ] 시간: 어떤 시대에서 어떤 시간을 살 것인가. [ㄷ] 공간: 어떤 공간에서 어떤 역사에 기반해 살 것인가. [ㄹ] 목적: 무엇에 가치를 둘 것인가.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무엇을 목적할 것인가. (혹은 무엇도 가치·지향·목적하지 않을 것인가.) [ㅁ] 방법: (비판)부술 것인가. (형성)만들 것인가. [ㅂ] 정도: 얼마나 추상/구체적일 것인가. 얼마나 이상/현실적일 것인가. 얼마나 관념/물질적일 것인가. 얼마나 급진/실질적일 것인가. [ㅅ] 과정: (돌봄)어떻게 살릴 것인가. (평화)갈등을 어떻게 여길 것인가.
다양한 층위의 복잡한 물음들은 계속 주어진다. 그렇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은 정신없이 길어지는 모양새다. 나에게 이 축들을 혼합하면 다음과 같이 물음이 진화한다. 이 시대의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배태되어 여러 조건 속에서 역사와 뿌리를 감안하여, 어떤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하는가. 다분히 혼란스러운 물음들이다. 그러나 한국철학의 문제의식은 위와 같은 혼란 속에서 출발한다. 분명하지도 명료하지도 않기에 총체성이 가능하고 통합의 사유로 나아갈 수 있다. 속물음 하나하나마다 길들이 있다.
[ㄱ] 존재와 관계는 분리될 수 없다. 개인과 사회와 자연은 언어적으로만 구분될 수 있을 뿐 늘 하나이다. 그렇기에 나의 실천은 사회의 전환과 자연의 힘과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리하여 사고하는 경향은 대게 습관적으로 익혀진 근대적 관행이다. [ㄴ] 우리는 시대의 표정을 드리우며 살아간다. 기후위기라 부르는 시대다. 인류세라 부르든 생태학살이라 부르든 난리난 때다. 유한한 행성에서 한계를 넘어갈 지경으로 찍고 마는 생태적 부하가 초래한 시한부 생은 우리 각각의 생의 시간과 연동된다. 나의 시간은 지구의 시간과 무관할 수 없다. [ㄷ] 우리는 한국이라 불리는 한반도에 산다. 공간은 역사를 지닌다. 우리의 행위는 모두 공간성을 지닌다. 정책에는 경로의존성이라는 것이 있어, 공간이 지닌 역사의 관성을 따르기 마련이라 그 맥락을 간과하면 필패한다. 부동산이라 불리는 주거 정책이 그 예이다. 땅에 발을 딛고 뿌리내리는 법을 잊은 이들에게는 공간이 없다. 혹은 공간이 없기에 뿌리내리는 법을 잊는다. [ㄹ] 목적은 하나일 수 없다. 혹은 목적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해야 한다. 철학이 공시되지 않고 숨겨져 있을 때 이는 이데올로기이다. 뜻을 분명히 드러내고 그것이 경합하며 정도를 지향하는 정치가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정치가 부재한 시공간에 있다. [ㅁ]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방도가 길항작용을 이루어야 한다. 전환을 위해서는 악습은 부셔야 하고 새로운 습관은 길러야 한다. 석탄발전소를 막으려면 기업을 혼내주는 것을 전제로, 무해한 에너지를 기반으로 하는 대안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쉬이 부숨과 형성을 헷갈리지만 세상은 부서짐과 동시에 만들어진다. [ㅂ] 방법의 구체성은 정도에 달려있다. 이상주의자도 현실주의자도 관념론자도 유물론자도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저마다 생각하고 있는 상이 현재의 이 시공간과 열 발걸음 멀찍이 떨어져 있는지 아닌지, 추상적인지 구체적인지 감안해야 한다. 정도의 바로미터를 확인하는데서 현실성과 실천력이 담보된다. [ㅅ] 목적이 다가 아니다. 자전거여행의 백미는 길가의 들풀이다. 과정이 있다. 대개 옳고 그름의 준거가 쉬이 돌봄과 평화의 지향보다 앞세워지곤 한다. 무언가를 살리는 것, 갈등을 딛고 평화를 이루는 것은 모든 목적의 과정에서 스며들어야 한다.
기후위기를 몇 년째 붙들고 살아오며 위에서 본 존재, 시간, 공간, 목적, 방법, 정도, 과정 등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들은 사회, 정치, 경제, 기술, 정치, 심리 등 모든 학문 주제의 문제들로 이어지고 상세하게는 부문으로서 정의로운 전환, 에너지전환, 건물주거, 교통이동, 지역자치분권, 농업먹거리, 돌봄복지, 생물다양성, 문화예술, 사회적경제, 순환경제 등과 같이 이어지기도 한다.[2] 이것은 우리가 갈 길을 논하는 바탕이 모든 것의 문제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의 문제라는 철학의 문제이다. 철학은 총체성의 학문이자 세계관의 학문이기에. 이상의 것들을 총체적으로 우려내어 새로운 체계를 설정하지 못하면, 우리가 말하는 전환은 각각에 한정된 각론이 될 뿐이다.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새로 갈 길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에는 새 뜻이 필요하다.
2. 녹색
녹색을 걸었지만, 녹색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때를 살고 있다. 녹색 분칠이 난무하다. 작년, 이 맘 때 나와 우리 청년기후긴급행동은 ‘개와 늑대의 시간’ 이라는 말을 썼다. 누가 늑대이고 개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안개가 자욱한 때, 그린뉴딜 정책과 탄소중립 목표를 내건 정부가 베트남에 마지막 석탄발전소 붕앙-2를 짓겠다는 결정에 대한 일갈이었다. 12월, 고대하던 붕앙 발전소가 착공되며 우리의 투쟁은 일단락되고, 그 과정에서 비롯된 형사·민사 양대 기후재판만이 남았다.[3]
녹색은 꾸준히 참패의 역사를 걸어왔다. 녹색의 역사는 전쟁이었다. 평화가 전쟁으로 인해 태동한 낱말이라면 녹색은 자본주의나 물질문명이라 일컫어지는 성장·개발주의가 낳은 낱말이다. 새만금, 4대 강에 이어 붕앙까지, 우리는 그 무엇도 막지도 지키지도 못하고 이 지경까지 왔다. 한강의 기적은 아직도 추앙받지만 붕앙의 기적은 없었다. 기후위기의 상황은 암중에 있다. [4] 우리는 점점 지구 기온을 1.5도 내로 안정화시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인간 동물 목숨 70억을 비롯해 수조가 넘는 생명을 건 도박의 위험 값이 점점 올라간다. 절망은 이르지 않다. 그렇지만 확률론적 우울은 건강에 좋지 않다. 실은 붕앙을 막으려는 암중전투를 한 해 동안 치르고 나니 고되기도 할뿐더러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의 서슬 어림은 결국 자기도 베는 법이다. 싸워야 하는 혁명의 시대이기에 칼의 벼림을 가지고 탓할 수는 없다. 다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어디서 살지? 땅을 일구고 집을 짓는 형성의 마음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녹색에 철학이 필요한 까닭이다. 녹색은 전쟁만으로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녹색은 짓는 것이다.
그간의 물질문명이 도외시한 것들, 그로는 모자라 파괴된 것들, 뿌리 뽑힌 것들을 기억한다. 한강의 기적 아래 무시되었던 그 아우성, 그것들을 듣고 채록하는 일들이 우리 앞에 남아있다. 녹색에 한국철학이 필요한 까닭은 여기서 나온다. 뽑히고 죽어가는 앓음이 낳는 앎, 생명을 다시 살리려는 앎, 어떤 것도 두고 가지 않고 모든 것을 품는 앎이 나와야 한다. 그런즉 나에게 녹색은 보이는 아픔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존중이다.
녹색의 역사와 한국철학의 역사는 닮았다. 한국철학은 수난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 제도화되지 않고 풀뿌리 민중의 언어로 두루뭉술하게 간간히 이어져왔다. 수탈과 폭압이 없었더라면 한국철학이 정립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철학의 색이 녹색인 까닭은 아프고 약하고 넓고 깊기에 그렇다.
여기서 녹색 한국철학을 정의하는 것은 섣부르기에 한 해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철학의 여러 면이 연구되지도, 이야기되지도 않았다고 생각한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자라는 풀뿌리들을 하나하나 말 걸고 짚어보는 일들이 앞으로의 과제로 잔뜩 남아있다. 무엇보다 녹색은 우리말로 다시 써야 한다. 녹색 철학, 녹색 역사, 녹색 정치, 녹색 사회, 녹색 경제, 녹색전환을 우리말로 쓰면 어떨까.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는 문명전환을 요청하지만, 이 길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길 중에서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분명 한국은 새 뜻이 자라나기 어려운 토양이다. 그렇지만 역사 속에서 씨알은 곳곳에 있어왔다. 눈에 띄게 발아되지 못했다고 죽은 것이 아니다. 열매가 열리지 않은 나무라고 나무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씨알이고 나무이다. 우리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희망은 늘 발굴을 기다리고 있기에, 한국철학과 녹색의 연결고리를 찾고 만들어가는 작업이 기다려지는 까닭이다.
3. 끝
연재는 아마도 다음의 전개를 따르며 끝을 향해갈 것이다. 지도제작자의 마음으로 그려보면 이렇다.
- 시작과 끝
- 한국의 현주소
- 서로주체적 녹색전환
- 한국철학과 녹색
- 한국철학과 빨강색
- 한국철학과 보라색
- 한국의 전통 생태학: 땅의 마음을 찾아서
- 한국의 녹색 사상사: 녹색의 계보를 찾아서
- 사회연대경제와 두레경제
- 어떻게 사회를 전환할 것인가
- 녹색당과 녹색 정치
- 끝과 시작
이르게도, 연재의 끝과 함께 시작을 상상하고 있다. 철학 체계는 늘 그다음의 실현을 예고하는 법이다. 철학자 김상봉은 이를 다음과 같이 썼다. “서로주체성의 이념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홀로주체성의 현실태를 극복할 수 있는 서로주체성의 현실태가 생성되어야 한다.”[5] 서로주체성을 문장으로 풀면, 나는 너를 통해 내가 되고 우리가 되는 법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쪼가리는 만남을 통해서만 빛을 얻으리라 생각한다. 끝에 가봐야 알 테지만 이 글들이 낳은 만남들이 언젠가 서로를 우리라고 부르게 하지 않을까. 그러기를 바라옵고, 새해 복 실하게 짓기를 바라본다.
[1] 함석헌, 『인간혁명(1961)』, 한길사, 2016
[2] 이것은 녹색전환연구소의 녹색전환 분류 카테고리이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https://greenduck.kr/home
[3] 상세한 이야기는 다음을 참고. 장윤석(2021), “그들의 마지막 석탄발전소”, 바람과 물 제 1호, http://www.wnwmagazine.kr/news/articleView.html?idxno=66
[4] 녹색당 기후정의위원회(2021), “기후정의, 탈성장, 녹색전환의 청사진”, IPCC의 6차 보고서를 기준으로 2020.1.1. 기준시점 지구 기온을 67%의 확률로 1.5도로 제한하는 세계 탄소예산을 평등 원칙에 따라 나누면 한국에 29억여 톤이 할당된다. 한국의 줄어드는 기미가 없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7억 톤 가량이고, 2020, 2021년이 이미 지나갔으니 이대로라면 3년 안에 한국에 주어진 탄소예산은 고갈된다.
[5] 김상봉(2007), 『서로주체성의 이념』, 도서출판 길, 311쪽
학자 꿈나무, 였는데 기후위기를 알고 나서 연구자와 활동가 사이 어딘가에서 살았다. 실은 한국철학과 녹색을 생의 화두이자 과제로 여기고 있다. 녹색당과 녹색전환연구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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