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우리동네사람들이라는 커뮤니티에서 살고 있습니다. 줄여서 우동사라고 부르는데요. 10년째 살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기르며, 대부분의 일과 놀이와 배움을 커뮤니티에서 하고 있습니다. 종종 우동사를 30~50여 명 정도 되는 공동체 혹은 커뮤니티라고 소개하는 일이 있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 커뮤니티가 무엇일까 하고 되묻곤 합니다. 특히 우동사처럼 가입명부가 따로 없는 경우에는 사람들 역시 종종 자신이 우동사 멤버인가 아닌가 하는 혼란을 겪기도 하는데, 재미난건 커뮤니티의 실체는 오히려 그런 혼란스러운 상태로부터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혼란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본질을 향하게 합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커뮤니티의 이미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관계맺고 있는 실제 사람들에게 시선이 향하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존재
‘관계맺고 있다’는 것은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현대사회의 주요 문제로 관계의 단절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관계는 단절될 수가 없습니다. 개인은 독립된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관계속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지금 이순간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자신의 생각, 감정, 사상과 같은 정신세계는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관찰해보면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존재의 고유성을 크게 부풀려 마치 개인과 같은 고유한 실체가 있다는 착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이 아닐까 합니다. 차별할 수 없는 세상을 기어이 우열로 나누고, 경쟁을 일으켜 서로가 서로를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 감각 속에서 다툼이 멈추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중하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는데서 생겨나는 스트레스를 불안정한 물질적 성과로 위안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범죄자를 대할 때도 범죄를 저지른 개인에 주목하지 그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그가 처한 조건을 보며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사람 고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논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가 처한 가족과 사회를 빼놓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범죄는 범죄자가 처한 사회의 결과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개인과 사회를 두루 살펴 치유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근본적인 치유로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전후맥락을 살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실 동양의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이라는 책을 보면 서양에서도 최근들어 이런 관점이 부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총기 사고가 빈번한 미국에서 총기규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졌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총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으니 총을 규제해야 한다고 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총은 사람의 명령을 따를 뿐 총 자체가 잘못한 것이 아니므로 그걸 사용하는 사람을 처벌해야지 총을 규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다고 합니다.
프랑스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총기는 사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 역시 총의 쓰임에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총이 살상용도로 쓰여지는 것은 그 고유성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사람 역시 총이 없었으면 가벼운 다툼으로 끝났을 수도 있는데 총이 있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총과 사람을 그 역할이 고정된 개별로 파악하는 것과 총과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쓰임이 변화한다는 관점은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을 규제해야 한다는 말이냐,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는 말이냐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체계와는 전혀 다른 시선입니다. 인(人)이 아니라 간(間)에 주목하는 관점입니다.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은 앞으로 펼쳐질 사회에 적합한 사상적 대안을 제시합니다. 인공지능, 자율주행차량, 사물인터넷 등 생명이 아니지만 생명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 사물들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인간 중심적인 감각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인간과 사물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주체적인 존재로 인식하며 공존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논의들이 생명과 무생명을 재정의하며 또다른 존재론(계급론)에 그치는가, 아니면 관계성에 기초하여 만물을 동등한 입장으로 대하는 새로운 문명의 단초로 삼는가는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명 역시도 나와 나 아닌 것과의 관계성의 총체라고 합니다.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을 무자르듯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人)에 사이 간(間)자를 넣어서 인간(人間)으로 표현하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계론적 세계관
새로운 세계의 기초는 세계관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을 일으켜 상대를 적대시하는 적자생존의 방식이 아닌 자연과 우주의 요소를 포함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환경이 되어주고 있는가에 주목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세계관의 전환은 특별한 사상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관찰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의 몸과 정신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어떤 배경에서 일어난 것인지, 개인에서부터 지역 사회, 한 국가, 전 세계, 나아가 우주에 이르기까지 서로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시작입니다. 알면 감각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아가 공부를 통해 일상에서의 실천방식을 연구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날카롭고 차가운 정신이 아니라 주변을 두루두루 넓고 깊게 살피는 따뜻한 시선이 아닐까 합니다.
끝으로 작고하신 신영복 선생님의 글 일부를 전하려 합니다. 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지난 시절 커뮤니티에서 노력한 방식들을 되돌아보며, 관계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사회라는 틀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길러지고 익혀지는 감각이라는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저는 20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자신은 나름 지식인에서 민중으로 ‘성분개조’를 했다는 자부심을 안고 감옥을 나왔어요. 역사상 수많은 실천가가 끝내 하지 못했던 일하는 사람의 정서로 자신을 바꾸어냈다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출소한 후에 개조되지 못했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돼요. 20년 30년만에 만난 친구들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바뀌지 않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인 의식은 많이 바뀌었지만 사고의 기본적인 패턴, 인간적인 바탕 즉 정서적인 부분은 좀체로 바뀌지 않는 것 같았어요. 제가 느낀 낭패감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버리거나 잃어버리고 오직 한 가지 이룩한 것이 자기개조였다고 생각했던 만큼,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굉장한 낭패감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낭패감이야 말로 제가 아직도 존재론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반성을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변화는 이웃의 키 이상을 넘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어깨를 기대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키만큼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개조에 있어서 그것을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달성하려고 했고 그렇게 생각했던 잘못에 대해 저는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의 관계속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들만큼 변화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정서도 관계 속에서 길러지고 관계 속에서 지탱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가슴 좋은 사람만 못하고, 가슴 좋은 사람은 손 좋은 사람만 못하고, 손 좋은 사람은 발 좋은 사람만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이다.” 제가 이 구절을 적은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20대는 돈벌 궁리로 바빴다. 직장생활하며 주식으로 일확천금을 꿈꾸었으나 실패했다. 대신 돈벌고 싶은 욕구의 바닥에는 불안감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30대는 친구들과 우동사라는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10년 동안 커뮤니티를 주제로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주변 사람들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 40대에 들어서 다음 10년을 그리고 있다. 볼음도라는 섬을 오가며 농사짓고, 새로운 관계망 실험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환경으로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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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주는 글, 감사합니다. 강연을 들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