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 비교 관점으로 본 현대중국의 생태문명건설과 향촌진흥전략(1) – 바로가기)
3. 동서방국가형태 정치문명의 형성 및 그 변화
사람들이 동아시아의 ‘4대강문명’과 서아시아의 ‘양대강문명’ 형성의 차이와 문화전승에 대해서 고찰할 때, 농업이 형성한 사회생존방식 관점에서 4대 고문명국가중 오직 중국의 화하문명만이 지속해서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고대이집트는 다원화 농경사회에 장기적으로 의존하면서 계속 살아남아 국가형태를 수천년 유지하다가 결국은 중단되었다.
사실 우리가 토론해봐야 할 것은 중화문명이 국가형태로서 장기 존속한 원인이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진한秦汉 동시대의 로마제국 지도를 중국의 그것과 비교하면, 지중해 연안에 형성된 고리모양의 제국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로마는 노예제에 기반한 노동잉여점유를 기초로 형성된 무역상업의 제국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소위 자유도시국가의 주변은 모두 피지배 당하는 노예지대였다. 상층사회가 직접 점유하는 노예노동에 의해서 생산되는 농업잉여를 최대로 늘리고, 연해의 무역상업 도시를 통제함으로써 수익을 얻는다. 그래서 로마의 굴기는 이집트, 카르타고와 지중해 해상무역 항로의 통제권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두 국가는 배후의 거대한 사막에 둘러싸여 있다. 그 밖으로는 벗어날 도리가 없으니 국가는 점점 쇠락할 수 밖에 없다. 로마인은 먼저 이집트를 정복했다. 왜냐하면 길이 방향으로 나일강 강안을 따라서 농업지대에 의존하는 선형 국가이기 때문이다. 광대한 토지와 그 종심縱心을 이용해서 방어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에는 반도형의 카르타고 (지금의 튀니지아)를 정복한다. 이 국가 역시 종심을 이용한 방어가 불가능하다. 로마인들은 지중해 해상무역로의 통제권을 쥔 연후에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로마인이 카르타고를 정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한니발의 정벌’이 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카르타고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넘어서 스페인에 들어갔고, 다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진출했다. 거의 로마를 멸망시킬 뻔 했다. 하지만 최후에는 로마가 승자가 됐고, 대학살을 벌인 끝에 70만의 카르타고 인구는 3만명 밖에 남지 않았다.
로마제국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지중해 유역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지중해를 둘러싼 고리모양의 제국을 건설했다. 이후에 로마는 외부에 적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부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고, 사치향락이 극에 달하여 사회문화가 타락하며 천천히 전투력을 상실한다. 또, 고리모양 형태인 로마 제국은 종심을 이용한 방어전략을 구사할 수가 없었다. 한편 주변은 모두 피지배 노예 노동 지역. 노예가 로마인을 대신해서 전쟁에 나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후에 로마에 침략한 야만인에 의해 로마의 핵심부가 멸망하게 된다. 이때부터, 유럽에는 오랜 기간 하나의 통일국가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수천 수만의 소규모 영주국들이 난무하는 천년의 암흑기, 중세의 봉건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동아시아는 국가의 기본제도가 유럽과 달랐다: 우선 농업입국, 또 한편으로 진한제국은 호떡 모양의 국토 때문에 종심으로 방어를 할 수 있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다시 소농경제의 가치를 사람들이 재인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소농촌 마을 공동체만이 지속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역사상 소농촌 마을 공동체 제도는 동부의 태평양 계절풍과 강수량의 불평형 때문에 중국인들이 부득불 수리 시스템을 건설한 것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중국은 복잡하고 다양한 기후대에 놓여 있다. 그래서 장기적 농업 생산을 위해서는 반드시 수리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 관개시설이 없으면 밭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즉, 한뼘의 땅위에도 종횡의 干간、支지、斗두、毛모로 구성되는 수로가 있고, 다양한 단위로 구성된 수리 시스템을 통해서 복잡한 사회구조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마을 공동체의 자치는 수로를 공유하고 취락을 형성하면서 생겨났고, 이러한 점과 사이짓기 (간작) 농업관리는 또한 깊은 관계가 있다. 수천년에 걸쳐, 우리는 수리를 통한 취락의 마을을 만들고, 또 수리를 이용한 입국의 덕치를 전승해왔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우왕의 치수사업 이야기를 알고 있다. 대우大禹는 치수의 공적을 통해서 마을의 지도자가 됐고 그래서 국가의 통치권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 줄 수 있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황권을 계승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농업사회가 지속되어온 춘추전국시대에 왜 북방의 제후들은 만리장성을 쌓았을까? 왜냐하면 기후가 추워질 때, 장성이 당시의 정보전달 시스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정보는 유목민족의 기마병이 남침한다는 소식이었다. 즉 봉화대의 기능이 있다. 불과 연기로 군사 소식을 전달한다. 이것이야말로 단시간내에 내륙까지 정보를 전달하여 대항군을 조직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어떤 이들은, 중국의 옛 사람들이 왜 이리 미련했냐고 이야기한다. 민중을 동원하여 노동력을 착취하고, 재화를 낭비해 가며 장성을 쌓아서, 정말 적을 막을 수 있나 ? 고대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왜 진은 전국군현의 도로 역참 시스템을 만들었나 ? 그것은 각 군현정권의 군사력을 쉽게 동원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세계에서 최초로, 쌍방향 고속도로를 뚫어 놓은 셈이다. 이러한 도로는 진나라 시대에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수레의 규격을 통일했다. 이러니, 말이 끄는 큰 수레를 몰던 옛 귀족들이 분개했다. 내륙에서 연안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공문서를 이해하기 쉽도록, 문서 양식을 통일했다. 지식인들도 당연히 분노했다. 그래서 진시황이 지식인들을 탄압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물자가 쉽게 유통되도록, 도량을 통일했다. 이번엔 상인들이 반감을 품는다. 거기다 장성을 쌓겠다고 민중을 노역에 동원했으니, 끝으로 백성들을 성나게 한다. 사회 각계각층의 불만을 산 결과, 진황조는 2대만에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천년간 욕을 먹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진이 멸망했어도 한이 진의 시스템을 계승했다. 그리고 한왕조가 거대한 호떡 모양의 제국을 완성한 것이다. 이 제국은 이제 종심을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이렇게 역사상 한번 대통일을 이루고 나니, 북방의 유목민족이 남침했을 때 효율적으로 방어 할 수 있게 된다. 기후가 따뜻해졌을 때는 오히려 농경사회가 북에 반격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한무제는 흉노를 몰아내고, 밀려난 흉노가 유럽을 제압하게 된다. 그리고 당제국에 이르러서는 양대 돌궐을 차례로 멸하게 된다. 남흉노와 북흉노는 한대에 멸망했고, 동서돌궐은 당대에 소멸했다. 돌궐은 어떻게 됐나 ? 서역으로 이동하여 터키회랑을 완성하게 된다. 이중 일부는 계속 남서방향으로 이동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동로마를 계승한 비잔틴을 멸망시킨다. 동로마 제국과 비잔틴은 역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당이 중앙아시아를 공격하고, 다시 서아시아로 진격하자 밀려난 돌궐의 일족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중국은 국가형태를 유지하면서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속해왔다. 진시황이 만든 큰 호떡 모양의 지형으로 종심을 갖기 때문에, 북방에서 기마병이 남침해도 거대한 국토를 방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리모양의 국가인 로마가 멸망한 반면, 한과 당이래의 중국 통치 계급은 늘 대통일을 이뤄서 종심의 거대한 국가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을 중시했다. 만일 대국을 이루지 못하면, 바로 난세를 경험한다. 어느 정도 난세인가 ? 서한이 가장 강성했을 때, 인구가 9천만이었다고 한다. 동한이 말년에 삼국과 양진의 전란에 휩싸인 후, 그 인구가 삼백만으로 줄게 된다.
역사를 돌아 보건대, 거대한 종심국가가 없으면, 역사문화의 계승도 불가능하다. 농경민족은 인구가 많지만, 분산된 소농촌 공동체는 자기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 아시아 대륙의 기후, 지리의 다양성이 중국의 국가형태를 결정했고, 국가는 사회문화의 다양성을 전승하는 그릇으로 작동해왔다.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은, 기후와 지리를 통해 결정되는 생존문화에 내재한 차이성이고, 이는 중국의 경제, 정치, 문화에서 여전히 정신과 신앙의 모든 면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중화문명 수천년의 전승이 설명하는 하나의 신시대 전환개념이다. 즉, 생태문명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 5천년 역사의 진화가 가져온 객관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선택이 아니라, 중화민족이 수천년간 지켜 온 생존방식이다. 사회방식, 경제방식, 문화방식 모두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면, 전국 시대의 장성은 주로 강수량 400밀리미터 선을 따라서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이 선의 남쪽과 동쪽만이 전형적인 농경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북으로 서로 더 가게 되면, 반농반목축 지역이 된다. 거기서 더 북으로 가면, 건조한 유목지대가 된다. 그래서, 기후대가 두개의 선을 만들고, 중국의 초기 대통일 국가를 형성하게 한 것이다.
국가(state)란 무엇인가 ? 우선 사회자원의 권력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기구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대외적으로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다. 전국시대에 6국은 모두 북방유목민족의 남침에 맞서야 했다. 주나라의 봉건사회에서는 모든 제후가 사병을 갖고 있을 뿐, 주나라의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방의 6국이 장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고, 강대국은 스스로 패주가 되었다. 그래서, 봉건제후들이 쟁패하는 가운데, 국가형태를 만들고 결국, 스스로 봉건제에 고별을 고하게 된다.
봉건제란 무엇인가 ? 분봉제가 핵심이다. 제왕이 자기의 가족과 친구들을 봉하여 제후로 삼는다. 중국은 진한시대 이래 군현제를 실현하고 일찌감치 봉건제를 마무리한다. 물론 특정 왕조에서 분봉을 실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매번 분봉을 할 때마다,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진한조이래 군현제는 천년에 걸쳐 개선이 되다가, 송대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삼권분립 형태를 갖추게 된다. 과거로 벼슬을 얻고, 군현이 기본 정권 프레임이 되는 중앙집권제 형태의 국가체제이다.
그래서, 내가 이해하기로, 중국은 오랜 기간에 걸친 봉건사회를 유지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하상주夏商周 약 이천년은 부족연맹의 과도적 봉건제였고, 주왕조의 말기에 이르러, 진한이 대통일 국가를 이룬 후에, 일찌감치 봉건제를 졸업하고, 통일된 중앙군현제 권력 국가를 완성한 것이다.
4. 중국농촌의 저비용 마을 공동체자치가 국가정치 안정의 기초
하층사회의 향촌거버넌스治理는, 중앙의 왕권집중관리의 상층제도와 실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상층사회는 군현제를 통해 국가 사회의 통제와 조정을 행하지만, 군현이하의 향촌은 장기적으로 저비용의 자급자족 사회를 꾸려 왔다.
상층사회는 관치, 하층사회는 자치, 이런 구조를 갖는 저비용 안정국가의 이원체제였다.
향촌은 자치사회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폐쇄된 자주적 존재였다. 많은 고금의 사례를 보면, 향토사회의 자치실현이 국가의 최저비용 통치방식이다.
만일 향촌기층까지 국가 관리가 통제해야 한다면,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도시의 모델을 따라야 하고 제도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지게 된다. 선진국조차도 이러한 성공 사례는 없다. 이런 시도를 행한 많은 국가가 과도한 관리비용 때문에 사회동란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별 생각 없이, 농촌에 현대의 법치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이게 가능할까 ? 관건은 누가 제도비용을 지불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현급재정의 3분의 2는 심한 적자를 경험하고 있다. 많은 지역에서 토지 사용세로 거둬들인 현금의 70%를 예전 대출과 이를 막기 위해 새로 얻은 대출의 이자 차액에 지불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도 아니면 무엇으로 어마어마한 제도비용을 지불할 것인가?
중국공산당 ‘19대 대회’의 보고에서 더이상 촌민 직선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자치와 법치, 덕치가 결합한 거버넌스의 유효성에 대해서 강조했다.
거버넌스, 즉 치리와 관리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 관리는 탑다운 집행시스템이고, 치리는 다양한 그룹이 다원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안정된 구조이다. 정보를 충분히 공유할 수 있을 때, 좋은 거버넌스를 달성할 수 있다. 지금, 많은 이들이 향촌 거버넌스를 연구하고 있지만, 실은 관리개념을 핵심으로 해서, 최종 결론은 예외없이, 규범법제의 강화를 주문한다. 강제성의 법제가 정말 거버넌스인가 ? 그렇지 않다. 거버넌스는 지리, 기후 등 다양성을 통해 사회구조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다양성을 통해서 형성된 다원화그룹의 기초위에 건설된, 경제문화활동으로써 구조화된 좋은 상호작용 관계를 만들어 낸다.
19대 대회 보고에서 제안된 향촌진흥 20자 방침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하층사회는 향신鄉紳계급의 자치사회를 장기간 유지해왔다. 그중에서 문文과 치治는 특히 일체가 되어, 문명의 양치良治를 보장한다. 사회의 폭넓은 참여를 통한 양치없이 문명을 형성할 수 있을까 ? 19대 대회에서 제시된 20자 방침은 생산, 생태, 생활의 ‘삼생’에 문명과 치리를 더한 ‘문치’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것과 우리가 전개해나가는 생태문명의 실험과 향촌건설실천의 함의는 모두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생태문명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통해 우리가 ‘삼생+문치’를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인가 하는 주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특히, ‘삼농’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이다.
자고로, 우리가 국가를 형성했을 때, 진한조 시대에 봉건제로부터 하나의 군현제 국가로 이행했을 때, 향촌은 안정된 사회의 기초를 형성했다. 그리고 농업사회의 이원통치를 만들었다. 상층사회는 관본위관리, 하층사회는 향촌자치이다.
5.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투자와 삼대차별의 재평형
생태문명을 신세기전략으로 삼아 전환방향을 확립한이후, 발전의 불평형, 불충분이 주요한 갈등요인이 되었다. 소위, 불평형, 불충분은 중국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삼대 불평등, 즉 연해와 내륙, 도시와 농촌, 그리고 빈부의 불평등을 일컫는다.
1985년에 필자는 황하를 따라 가며, 4개월 넘게 필드연구를 수행했다. 1985년에 중국의 정책연구자들 일부는 단계적 발전이론을 강조했다. 이는 즉 인위적인 ‘불평등’을 의미한다. 그전의, 중국내륙의 발전도 사실은 특수한 조건에 의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충칭, 꾸이저우, 쓰촨, 샨시 등, 모두 그 당시, 국가의 삼선三线건설 (역자 주 – 64년 이래 국방, 과학기술 등을 중심으로 내륙지역에 투자했던 중국 정부의 정책 )투자의 중점지역이었고, 대량의 국가자본이 중서부로 흘러 갔다. 하지만, 1985년에는 또다른 극단으로 투자와 개발이 진행되었다. 인위적으로 단계적 발전 이론에 따라 불공평한 개발 정책을 펼쳤다. 즉, 우선 연해를 발전시켰다.
당시에 나는 이런 정책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나라인 중국에서 어떻게 연해 지역만 발전시킨다는 것인가 ? 당시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 π(파이)형태’ 발전 전략이었다. 연근해 이외에도, 장강 유역, 황하유역을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장강과 황하 유역을 모두 살펴보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에 모터사이클 팀을 조직했다. 칭장青藏고원에서 출발해서 황하를 따라서, 8개성 2만리 (일만 킬로미터)를 달렸다. 이렇게 해서 사실은 사람들에게 중국은 나라가 크고 물산이 풍부하므로 단선적으로 불평등한 발전을 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
당연히 내 노력은 별무소용이었다. 중국은 불평등한 발전 모델로 단기적으로 빠른 성장을 추구했다. 그래서 결과는 지금과 같다. 비판할 수도 없는 일이고, 옳고 그르고 이야기 할 일도 아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지역간의 평형과 도시와 농촌의 재평형은 어느 정도 달성한 것 같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중국은 ‘4대 자신감’을 얻고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내가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의 농촌정책연구실에서 정책연구를 하고 있을 때, 특히 농민이 농촌 경제에 대한 자주발전권을 갖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말로, 당시, 중앙정책은 농민에게 그러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래서, 농민의 수입이 도시의 수입보다 더 빠르게 증가했다. 이유는 농촌공업화와 읍면의 현대화城镇化가 도시보다 더 빠르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 짧은 10년간 농촌은 공업화를 완성하고 자본의 시초축적을 이뤘다.
우리 교과서는 자본의 시초축적이 항상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동반하다고 가르친다. 20세기 80년대의 농촌공업화시기에 어디 그런 일이 있었나 ? 농민들이 베이징에 몰려가서 항의하는 일이 있었나 ? 없다. 항의성 투서조차 거의 없었다. 왜 이렇게 자본의 축적이 순탄하게 이루어졌을까 ? 왜냐면 농민들이 자주적인 발전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비농업 부문의 취업 문제를 해결했다. 10년간, 농촌의 자주적 공업화는 일억 농민의 일자리를 마련해줬고, 농민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의 내수가 늘어나 도시의 경제도 성장했다. 그때, 도농격차 문제는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80년대말부터 90년대초를 거치면서 정책이 조정되었고, 실은 농민은 스스로 발전할 권리를 잃어 버리는 계기가 됐다.
오늘날 모두가 이야기하는 토지제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해왔다. 그런데, 80년대 토지제도가 왜 농촌공업화와 농촌읍면 현대화의 고속성장에 유리했는지 연구해 본 이가 있나 ? 이 두 방면의 고속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98년도의 중앙문건에서 20년 농촌개혁경험을 결론지으면서 농촌개혁이 당의 영도하에 이룩한 농민의 3대 창조라고 이야기 했다; 그 첫째가, 농가별 토지 책임 경영제, 둘째가 향진기업, 그리고 마지막이 읍면현대화이다. 오늘날 개혁을 연구하는 이들 중 1998년의 삼중전회문건이 개혁경험을 귀납적으로 정리한 것을 눈치챈 이가 있나 ? 별로 없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오로지 서방제도의 도입뿐이다. 사유화, 시장화, 자유화, 세계화, 그런데 세계적으로 이 네가지 흐름을 타고 공업화의 발전도상국 궤도에 진입한 국가가 있기나 한가 ? 당시의 정책 제안자라면, 사실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아주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우리는 확실히 내수진작을 통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평형도 취했다.
도시와 농촌의 극심한 불평등은 90년대 정책이 발생시킨 문제이다. 그래서 하릴 없이 강조한다. 이것은 농업의 문제가 아니라 ‘삼농’의 문제인 것이다. 핵심은 농민문제이고 농민문제의 핵심은 농민의 권리이다. 나의 이러한 건의와 90년대의 주류 사상은 일치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업무에 임하면서 학위 연구를 했고, 학술연구와 국제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논문을 발표했고, 스스로를 위한 학술업적을 쌓기에 바빴다.
80년대에 제안하여 90년대에 실현한 지역간의 불평등 발전, 80년대 전에도 지역간 평형 발전은 있었지만, 객관적일 뿐 아니라, 주관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조정이 무척 힘들다. 19대 대회에서 불평형과 불충분 발전이 주요 모순이고,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목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정책의 발전은 사물에 대한 객관적 모순성격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조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유물주의 역사관에 부합한다. 19대 보고의 최신사상은 중국이 21세기 발전방향을 향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세계에서 책임있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전략의 조정과 구조의 정돈은 신시대의 필연적 선택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 중국의 문제는 늘 이야기하는 과도한 부채, 환경오염 이외에도 실제로는 제2차 생산과잉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일차 생산과잉은 이미 과거에 지나갔다. 그때, 베이징 대학의 린이푸林毅夫교수가 정책제안을 했다. 19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일어났을 때, 명확하게 지적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이중의 과잉 (생산과 노동력)조건하의 악순환’이다라고. 그래서 40만 국유기업이 도산했고, 4천만명의 직원들이 해고됐다. 당시 생산과잉의 대가였다. 이 대가를 치룬 것은 누구인가 ? 도시의 노동자와 농촌의 농민이었다.
당시 일차위기에 대응할 때 린이푸와 마홍馬洪, 루바이푸陸百浦 등 원로 경제학자들의 정책건의를 수용했다. 중국의 경제정책 부문 관리들도 문제의 엄중함을 인식했다. 그래서 98년부터 통제를 시작해서, 중앙정부가 직접 국채를 발행하고, 재정을 사용해서, 투자를 일으켰다. 투자로 중국경제의 성장을 안정되게 견인했다.
일차 생산과잉에 대한 대응책은 효과도 있었고, 동시에 지역 발전의 불평등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1999년에 개시된 서부대개발 총투자액은 3만6천억 위안에 이르렀고, 2001년부터 동북진흥에 들어간 총투자액은 2만4천억 위안에 이른다. 전 총리 원쟈바오는 2003년에 계속해서 중부굴기정책을 취해서, 정부투자는 모두 지역발전 불평등의 대조정에 투입되게 된다.
하지만, 98년 중국은 금융기구의 시장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이때, 중국은행, 농업은행, 공상은행, 건설은행 등 사대은행 자산의 1/3이상이 불량자산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은행에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 그때 중앙정부가 직접 국채를 발행해서 기본투자를 지원하게 된다.
많은 서구인들이 중국 체제에 불만을 표시한다. 국내의 많은 인사들도 여기에 동의한다. 하지만, 집중된 권력이 없었다면, 중국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말하길,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직접 중국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어떻게 운좋게 위기를 모면했는가 ? 사실은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20세기 90년대에 중국은 주로 외부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외부의 수요가 성장을 견인했다. 그런데 돌연 외국의 수요가 감소했다. 즉시, 위기에 직면했다. 소위 중국의 경험은 예외없이 정부가 직접 개입해서 시장 원칙에 반하는 방향으로 많은 문제를 처리한 것이다. 이런 위기 대처법은 20세기 30년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용한 후에, 그 효과가 매우 현저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세계 대공황에 직면하여, 자유시장 정책을 고집하던 유럽의 모든 국가는 파산을 면치 못했다. 미국은 루스벨트의 거시적 조정으로 직접 국채를 발행하고 내륙의 인프라 건설 투자에 사용함으로써, 개인의 자본은 부정되었고, 사기업 은행도 문을 닫았다. 모두 정부가 직접 손을 대서 처리한 것이다. 당시 루즈벨트가 이런 식으로 미국을 구원한 후에, 스스로 이름짓기를 ‘신국가주의’라고 했다.
제1차 생산과잉위기에서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대규모 정부 투자를 단행했고, 결과적으로 중국은 지역발전 재균형을 달성했다. 예를 들어 충칭이 다시 일어섰다. 만일 국가의 대규모 투자를 통해, 산간지역의 인프라를 건설하지 않았다면, 충칭의 경제는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충칭은 서부뿐 아니라 전국에서 GDP성장속도가 가장 빠른 곳이다. 이는 대부분 국가의 서부대개발 투자에 힘입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2003년부터 중앙정부가 3농문제를 전국경제사업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표명한 이후, 국가는 2005년부터 신농촌 건설을 시작했고, 현재 이미 십수만억원을 투입했다. 도농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었다. 충칭과 같은 거대한 저수지역, 산간지역 등지의 빈곤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곳을 제외하고, 전국 농촌의 98%~99%의 지방행정촌은 5통을 (길, 전기, 상수도, 가스, 인터넷) 실현했다. 중소기업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다. 많은 지역에서 대량의 도시인구가 농촌으로 돌아가서 농민신분을 회복하고, 농촌 호구를 확보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90년대 말기에 직면한 첫번째 생산과잉 시기에, 국채를 발행해서 성장을 견인하고, 지역간 재균형전략을 실현했다. 다시 말해서, 생산과잉위기에 직면해서, 중국은 시장에 맡겨 두지 않고, 직접 정부가 문제를 처리했다. 중국판 ‘뉴딜’ 정책을 취한 것이다.
국가기본건설의 대규모 투자가 가져온 결과를 보면, 모든 실물자산의 가격이 오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대량으로 농촌에 투자해서 5통 정책을 실현시키니, 과거 값이 나가지 않던 자원형 자산의 가격이 모두 올라갔다. 물이 들어오자 배가 뜨는 형국이다. 예를 들어, 과거 산속의 나무 한그루, 밭에 자라 난 유채꽃 한송이는 배낭 매고 산으로 강으로 놀러 온 등산객에게 금전적으로 값나가는 것이었을까 ? 현재 농촌이 5통을 이루고 나니, 도시의 소비자들이 차를 몰고 경관을 보러 와서 소비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메니티 농업이 금전적 값어치를 획득했다. 과거의 향촌은 막대한 잠재적 가치를 지닌 자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 자원은 가격으로 표시된 자산이 아니었다. 도시민들이 농촌에 와서 맑은 물을 마시니, 산천수가 값이 나가게 된다. 산중의 맑은 공기를 호흡하니, 공기도 값어치를 갖게 된다. 농가에 와서 숙식을 제공 받으니, 농가주택도 값어치를 갖게 된다. 정부가 농촌에 투자해서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니, 대규모의 실물성 자산이 생겨 났다. 20세기 90년대말에 시작한 대규모 투자이전에, 농민의 토지 자산 가치는 겨우 10만억 위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은 100만억도 넘는다. 자산의 대규모 가치 상승으로 하층사회의 농민을 포함해서 자산을 가진 이들 수중의 자산이 모두 값어치를 갖게될 여유가 생겨났다.
실물자산의 가치 증가는 새로운 기회를 낳는다. 즉 중앙정부가 대규모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국제무역과 국외 투자의 증가에 따라서, 다시 발행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자산 증식과 증식 과정중에 발생하는 대규모 거래가 있다. 이 거래를 뒷받침하기 위한 화폐발행이 있고, 화폐발행에 따른 시뇨리지 수익이 중앙정부에 귀속된다. 중국은 금융시장을 대외에 개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외화는 생산투자에만 들어간다. 직접 중국 화폐시장과 자본시장에 진입해서 조작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바로 화폐시장을 대외에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것이고, 중국은 자신의 금융자본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중국의 금융총량은 이미 세계 제일의 규모이다. 세계의 대은행 순위에서 중, 농, 공, 건 사대은행이 5위안에 들어간다.
중국인이라면 누가 4대은행이 파산하리라고 생각하겠는가 ? 중국의 4대은행은 자본금의 80%이상을 국가가 소유하고 있고, 국가의 신용이 이들 은행의 신용을 담보하고 있다. 그렇게 이들 은행의 장기부채를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금융자본 소유구조문제는 비판할 지점이 많다. 하지만, 한가지, 안정이라는 장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만일 이들 은행이 파산한다면, 국가가 파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98년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닥쳐 왔을 때, 이들 4대은행 모두 보유한 자산의 1/3이상이 불량자산이었고, 바젤II가 요구하는 자기자본비율 8%를 엄청나게 초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어떠한 서방국가에서도 파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파산하지 않았고, 주식시장에 상장해서, 자본금을 다시 확보했다. 이것이, 중국이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이 세계화에 참여하면서, 어떻게 개발도상국가로서 불패의 위치에 서게 되었는가를 따져 보자. 관건은 중앙정부가 시장에 역행하면서 종합적으로 통제하는 능력, 그리고 기층정부의 농촌 인프라 건설을 통한 연착륙 능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재평형을 이뤄야 한다. 공업공급측의 개혁에서 시작하여, 농업공급측의 개혁, 더 나아가서 전면적으로 생태문명과 향촌진흥의 국가 중대전략을 관철해야 한다. 이것이 중국 공산당 19대 정신의 요체이다.
溫鐵軍 원톄쥔 중국삼농三農문제 전문가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
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