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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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문명사의 관점을 차용한 이 논문에 대해서 현장활동가인 역자는 해설을 하거나 주를 달만한 식견이나 경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문명사학자와 역사인류학자 세분에게 의견을 물어 보았었다. 별다른 신통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이유는 텍스트 자체의 문제이다. 원톄쥔 교수는 ‘막시스트 경제학자’로서 중국의 근현대 경제사에 대해서 세계적 대가로 인정받는 학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제적 성격이 강하고, 심지어 학문과 실천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의 성향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그의 비교문명사적 주장이 어느 정도 권위를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논문에 있는 그의 주장은 ‘업계’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원교수는 수많은 국가의 현장을 방문하는 필드 연구를 오랜 기간 수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늘 방문국의 박물관과 주요 유적지를 주의 깊게 들여다 봤다고 자랑스럽게 밝혀왔다. 여기에 “조사없이 발언권 없다”는 마오쩌뚱의 격언이 함께 따라 붙곤한다. 그러나, 역사학 연구의 기초가 되는 1차사료 해석 혹은 고고학적 탐구에 참여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비전공 분야에 대한 그의 발언은, 학계의 본격적인 논증 없이는, 다소 무리하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또, 서구문명을 유목민 문화, 상업/ 해적문화, 유일신 종교, 약탈적 노예제 사회/봉건제 등으로 규정하고, 중국이 대표하는 동방문명을 농경민족, 생태문명, 다종교, 중앙집권적 군현제 국가 등의 속성으로 표현하여, 다양한 문명을 과도하게 이분법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다분히 한족 중심적인 가치관에 경도된 것으로 오해 받을 소지가 있다. 

여기에다, 북방 유목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만리장성 축조와 도량형, 교통 및 통신의 표준화, 분서갱유 등 진시황이 시행한 강권정치를 합리화하면서 당시의 각계 기득권 세력이나 평민과 대립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해석은, 현대의 ‘외적’인 미국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그리고 쟝저민(江澤民)의 상하이방이 대표하는 부패한 내부의 구세력을 척결하기 위해서 벌이고 있다는, 작금의 시진핑 정권의 사회 통제 강화정책을 연상시키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로부터 출발하여, 농경방식이 문화의 양태를 결정한다는, 그의 독창적인 역사 해석과, 중국 혹은 동아시아의 향촌문화가 담지한 본원적 생태문명에 대한 강조는 향후 동아시아와 세계가 지향해야할 발전 방향의 좋은 길잡이가 된다할 수 있겠다. 다만, 농경문화결정론으로조차 들리는 그의 이론이, 유목민족이 가진 ‘자유, 공유, 환대’와 같은 긍정적 가치를 함께 수용할 수 있다면, 생태주의가 비판받는 지점인 반문명사고에 기반한 역사적 퇴행이나 한족 중심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21)초원 사람이 되고 말이 되어, 우리를 가둔 울타리를 벗어나보자).  

세분의 학자들은 이 글이 매개로 작용한 인연이 발전하여, 그후에도 여러 좋은 조언과 도움을 받고 있다.

그중 한분인 김기협 선생의 글 일부(‘김기협의 퇴각일기’, 프레시안)를 인용하며, 커멘트를 마무리 짓는다. 

“로벨의 또 하나 중요한 지적은 오랑캐가 못 들어오게 막는 기능만이 아니라 중국인이 못 나가게 막는 기능도 장성에 있었다는 것이다. 백성은 국가의 중요한 자원이므로 국가가 마음에 안 든다고 백성이 마음대로 떠나서는 국가에 손실이 된다.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전에 유목지역이던 지역도 농지 개간이 가능해지면서 농업지역이 북쪽으로 확장되는데, 그 확장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면 인적 자원이 유출될 뿐 아니라 국가 외부 인접지역에 큰 경제권이 자라나 국가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중화제국의 역사를 통해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이 거듭거듭 심각하게 제기된 중요한 까닭이 농업지역의 확장에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화제국에 대한 북방의 위협을 전혀 이질적인 세력들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중화문명의 발전-확장의 어느 단계에서 문명의 서로 다른 구성 요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의 변화로 보는 동태적(dynamic) 관점을 나는 취한다. 북방 유목민족도 중화문명에 나름대로 포섭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일반 중국사 연구자들처럼 특정 시대를 집중해서 공부하지 않았지만, 석사논문의 배경인 진-한(秦-漢)시대와 박사논문의 배경인 명-청(明-淸) 교체기를 비교적 넓게 파악했다. 두 시기 모두 이 동태적 관점의 타당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림: 아름다운 중국 농촌마을과 호수의 풍광 (원문)

개요:

전지구적 기후변화는 인류사회역사의 발전과 변천에 중차대한 영향을 끼친다. 기후변화가 초래한 농업기반 정착사회와 유목민족간의 오랜 교류와 상호영향을 살펴보고, 아시아대륙의 기후와 지리의 다양성등을 고려하여, 중국의 국가정치형태, 문화연속성, 향토중국의 저비용 자치 등의 내재적 논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생태문명과 향촌진흥전략의 역사적 의의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지금의 중국은, 부족한 곳은 보태주어, 재평형을 이루고, 전면적으로 생태문명과 향촌진흥 등 국가의 중대전략을 관철하고하고 있다. 중앙정부의 주도로 때로는 글로벌 시장의 방향에 역행할 수도 있는 종합조절 능력을 배양하고, 지방 기층정부 주도로 향촌의 인프라 건설을 통해서, 연착륙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세계 최대의 개발도상국으로서, 중국은, 세계화의 흐름속에서도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 19대 당대회 이후, 국내외에서 생태문명과 향촌진흥의 새로운 독법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다. 이 글은 주로 이 양대 전략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상호 관계에 대해서 논술하고자 한다.

 

1. 전세계 기후변화가 인류농업문명의 진화에 끼친 영향 

최신의 과학연구결과를 통해, 인류사회의 변천이 주로 기후 냉온 변화의 제약과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됐다.

쥬커전 竺可桢 (CHU Kochen)은 민국시기의 저명한 과학자이고, 공산당혁명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과학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반세기전 중국인들이 보편적으로 믿기 시작한 人定勝天 즉, 인간의 능력이 자연을 초극할 수 있다는 사상이 만연할 무렵, 인간의 역사가 기후변화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당시 제시한 왕조주기이론은 당시에는 충분히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 전세계적으로 기후변화가 주목을 받는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해 증명됐고, 기후변화의 장기주기 연구 결과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후변화주기와 인류발전의 변화주기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밝혀낸다면  오늘날의 수많은 기존 이론들이 거의 모두 “뜬소문”에 가깝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상(商)왕조의 몰락은 상나라 주왕이 미인 달기에 홀려 주지육림에 빠진 탓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짜 역사적 진실일까?

그림: 쥬커전. 기상학자, 지리학자 (원문)

인류의 유구한 농업문명역사를 살펴보면, 기후가 따뜻해질 때는, 농경문명이 북쪽으로 확장되었고; 반대로, 기후가 추워지면, 유목민족이 전면적으로 남하했다.

인류는 다른 생존방식에 따라서, 남으로, 북으로 이동했고, 이 이동이 인류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아시아의 농경문명은 관개농업이 핵심이다. 사람들이 부락을 형성해서 함께 거주하고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므로 함께 노동한다. 그래서 자손이 많을 수록 좋은 것이고, 한곳에 정착해서 사는 안정된 생활을 희구한다. 이는 원래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생태, 생활, 생산’이 삼위일체가 되는 농경문화의 존재방식이다. 하지만, 북방의 유목민족은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면서 반드시 이동해야 하고, 물과 풀이 자라는 곳을 따라서 이주한다. 한곳에 정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북방기후가 추워지면, 눈이 내려서 지면을 덮을 때, 북방유목민족은 남하해서, 농경민족이 저장해 둔 식량을 약탈할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사람을 몰아내고, 그 땅에서 목축을 행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온 유목문화가 산간지역에 이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다. 중화민족의 농경사회가 왜 이렇게 오래 지속할 수 있었나 ?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농경사회를 제압함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고 산지로 들어갔다. 중원의 일족들이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다. 산이나 계곡으로 들어가서 살육과 재난을 피했다. 그래서 남쪽의 많은 성씨들 중, 예를 들면 광둥의 진陈씨는 진현陈县에서 유래했고, 푸지엔성의 임林씨는 林县에서 나왔다. 모두 중원에 그 뿌리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건데, 농경사회와 유목민족은 장기적으로 상호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겪어왔다. 기후가 변화할 때마다, 농경사회가 유목민족을 몰아 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무대제가 흉노족을 사막의 북쪽으로 몰아내자, 흉노족이 사실상 유라시아대륙의 서쪽으로 이동하고, 유럽의 북쪽 부족민들을 계속 서남쪽으로 밀어냈다. 서유럽 북쪽의 게르만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밀려나면서, 이미 쇠퇴하고 기력을 상실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는 ‘최후의 잽’이 된 것이다. 즉, 동서양대문명 초기의 상호관계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기후변화가 초래한 남북양대문명의 상호영향은 전세계의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 기후변화가 인류 역사의 변천에 영향을 끼쳤다는 새로운 가설은 물론 더 많은 연구를 통해서 증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기후의 변화와 인류사회의 변천연구가 생태문명과 연관이 있는가 ? 왜냐하면, 본래, 기후변화가 초래한 인류사회 구조변화가 생태의 변천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중국 동부의 농업이 어떻게 본원농업을 발전시켜서, 결국 동북아와 동남아의 파생농업형태로 진화되었는가 ? 이것은 생태적 조건에 의한 것이다:

인류는 최초에 아시아대륙의 양끝에서 초기 농업생산방식을 만들어 냈다.

아시아 서쪽끝의 양대강 유역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에서 약 일만년전 형성된 원시농업은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유럽으로 전파되어 이 지역의 파생농업형태가 되었다.  서아시아의 양대강 유역은 면적이 좁아서 단일 작물인 밀이 주가 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서구 식민화를 거쳐서, 북미, 남미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역이 밀가루를 주식으로 삼고 있는데, 그 근원은 바로 서아시아의 양대강 유역에서 출발한 밀농사의 본원농업인 것이다.

그림: 양대강 유역 (위키피디아)

동아시아의 4대강유역, 즉 장강, 황하, 회하淮河, 한수汉水, 다시말해서 ‘4대강 문명’은 쌀, 기장, 콩, 뽕나무 등 4대작물을 대표선수로 삼아 인류농업문명 발전에 기여했다.  동아시아 4대강 유역은 워낙 광대하기 때문에, 서고동저의 삼단계 해발고도지형, 오대 기후대를 모두 포함하며, 그래서 이곳의 농업은 12,000년전에 시작될 때부터 다양성을 갖출 수 있었다. 중국 본원농업 생산물의 품종이 당시 전세계 품종의 20-25%를 점할 정도였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농업이 전파되면서 모두 쌀이 주식이 되었다.

아시아 대륙은 장기역사적 관점으로 살펴 볼 때, 다신을 숭배하고, 복수의 종교가 융합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아마도 기후의 복잡한 변화속에서 농업 자원이 풍부하기도 하고, 가족을 이루어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짜고, 채소와 가축을 키우는 겸업을 하고, 마을 공동체는 수공업을 발전시키면서, 다양한 직종을 통해, 다원화된 생존방식을 키워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예를들어, 충칭重庆시 베이베이구北碚区에 가면 “빠위巴渝(역자주: 충칭지역의 옛이름)농경문화 전시관”이 있다. 이 전시관을 만든 이의 집에 가면 작은 암자가 있는데, 암자안에는 각종 신이 모셔져 있다. 중국 서남부의 이런 모습은 십수년전에는 허난河南성에서도 볼 수 있던 광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본래부터, 다양성을 갖는 농경사회의 민간 신앙이 서방의 일원론적 종교가 흔히 갖게 되는 극단적 배타성을 갖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장강 상류 충칭의 산간지역이 바로 그러하다. 장강 하류의 ‘천하제일 마을’이라는 쟝쑤성江苏 화시춘华西村도 그러하다. 마을내의 공원에 가보면 없는 신이 없다. 예수와 무하마드가 농민들 눈에는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 귀엽게 보일뿐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계의 다양성이 농경문화안에서 다원적 종교를 탄생시킨 예이다. 아시아 동부의 유교문화권에서는, 지금까지도, 유불선이 딴살림을 차리지 않고, 함께 평화공존하고 있다.

농업사회의 다원성이 사람들의 정신과 신앙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들었다. 근대서방의 식민주의가 확장되면서, 단일신 종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민간의 다원적 신앙을 배척하고, 계속 ‘가르침’을 제시한다. 동서문화의 차이가 보이는 것 같다. 일만년의 역사를 갖는 농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류문명은 크게 두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듯하다. 서방의 일원론, 즉 하나의 절대 진리를 따르는 사상과, 동방의 다원론.

우리가 이야기하는 생태문명은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고, 인류가 일찍부터 무지몽매에서 벗어나 농업의 생존방식을 만들어 나갈 때, 동아시아의 다원화된 기후지리환경에서 파생한 것이 농업사회의 다양성이다. 이것과 서방문명은 근본이 다르다.

 

2. 세계 농업의 이질성은 서방식민지의 확장기간에 발생한 돌연변이

유럽이 문명사회로 들어서게 된 곳은 서아시아의 본원농업 지역이 아니라 파생농업지역이다. 그러므로 서방문명도 파생문명이다. 원래 서아시아의 양대강 유역 주위에서 생겨난 밀 위주의 농업방식이, 전세계의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유럽의 빙하가 녹아 내리고, 자연스럽게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이곳에 점차로 파생농업문명도 형성되었다.

이후에, 로마의 해적문화가 오랜 기간 형성한 약탈노예제하의 정치국가가 멸망하고 유럽은 천년의 중세 암흑기를 보내게 된다. 이 기간에 진정한 의미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세력간의 충돌이 여기 저기에서 발생한다.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가거나 북방의 바이킹이 남하할 때마다, 매번 멸망에 가까운 재앙을 겪는다. 유럽 역사상 가장 자주, 그리고 대규모로 인구가 감소한 것은 이러한 봉건주의 역사 단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19세기에 서방열강의 침탈을 겪으면서 얼떨떨한 상황에서, 유럽의 봉건주의 개념을 빌어와서, 자신의 휘황한 수천년 문명 국가의 역사를 ‘중세시기’라고 부르곤 했다. 하지만, 유럽은 중세이래 형성된 무역역조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유럽내부의 전쟁에 지친 연후에 서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침탈하고, 미주대륙을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바로 로마의 노예제도를 식민지 대륙에 이식하였다.

다시 말하면, 유럽은 장기적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의 쌍둥이 적자에 의해 빈곤을 겪고, 그래서 유럽 바깥으로 나가 약탈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렇게 해서 대양과 대륙을 넘나드는 모험을 감행하고, 노예삼각무역을 성립시킨다. 이때 귀금속과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게 된다.

그림: 노예제 삼각무역 (원문)

18세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 무역대국, 은보유량 대국이었다. 전세계 은의 60% 이상을 중국이 소유하고 있었다. 식민지가 만든 거대한 구조적 변화중의 하나는 유럽인들이 미주대륙과 오세아니아로 이주한 것이다. 이곳에 유럽에서 만들어진 농업 생산방식을 가지고 갔다. 유럽은 기후가 농업에 적합하고, 비가 많다. 기본적으로 관개농업이 필요 없기 때문에, 이런 유적도 찾아 볼 수 없다. 대부분이 완만한 경사면에서 작물을 재배한다. 이러한 방식을 ‘신대륙’에 도입했기 때문에, 초기 식민지배자들이 만든 농장에서도 수로를 이용한 관개 시설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아시아의 관개농업생산과 취락주거형태의 마을 공동체 제도는, 유럽인들이 자기 제도를 이식한 미주대륙과 오세아니아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인들이 북미대륙과 남미대륙, 그리고 아프리카를 점령할 때, 이곳은 모두 식민지 종주국인 유럽의 생산 모델을 차용했고, 간단히 생산력 확장을 개시했다. 즉, 토지규모화를 통한 경영이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경험과 이론을 우리가 다시 복사해와서 대학 교재로 활용한다. 이게 중국에서 과연 통할까 ? 나는 세계 수십개국을 방문하고 현지 조사를 해봤다. 미국의 대농장에서 출발해서, 캐나다, 멕시코, 오스트레일리아, 그 어느 곳에서도 원주민이 농장주인인 곳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무슨 이유일까 ? 왜 모든 농장주는 외부에서 온 식민지배자들의 후손일까 ? 식민정부는 원주민들에게 토지증서를 발행한 적이 없다. 오로지 외부에서 온 식민지배자들에게 토지 강탈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합법적인 토지등기부를 쥐어줬다. 식민지의 백인정권은 원주민들에게 어떠한 재산증명서도 발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주대륙은 서방식민지배자들의 대농장 농업만이 살아 남았다. 원주민 인구가 대규모로 감소했고 그래서 대규모 농업이 성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대규모 농업을 나는 ‘농업1.0’이라고 부른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 ? 내가 거꾸로 물어 보고 싶은 것이 한가지 있다. 식민지 형성 이전에 농업이 산업으로 간주될 수 있었나 ? 1차 산업이란게 무슨 뜻인가 ? 식민지 없이, 농업이 1차산업이라고 불린 역사가 있었던가 ?

유럽 농업의 이질성은 실은 서구인들의 비서구 세계 식민지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식민지의 확장에 따라서, 유럽 인구가 대규모로 외부로 이주하고, 유럽 자신의 토지자원이 상대적으로 넉넉해졌다. 그래서 과거의 소위 전원시가 묘사하는 작은 농촌 마을 공동체가, 소농장 경제로 이행하게 됐다. 이렇게 유럽은 전형적인 식민지 종주국의 소농장경제를 만들게 된다. 이 농장들이 자기에게서 파생된 식민지의 대농장과 경쟁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종주국의 소농장경제는 우리가 지금 잘 알고 있는, 녹색농업, 시민농업, 레저형 관광농업이 된다. 농업의 ‘6차산업화’는 유럽이 이끌어 나갔고, 나중에는 일종의 국제적 흐름이 된다. 이 농업은 시민이 농장주가 되는 농업형태이므로, 농장은 더이상 농민이 경영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이 경영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비율이 무려 60%이상이다. 그래서, 농산물의 소비자도 수입농산물에 대해서 배타적이 된다. 이는 사회문화의 보호이지, 기술장벽이나 무역장벽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중국의 농업생산물이 아무리 과잉이 되어 유럽으로 수출하려고 해도, 늘 거절 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시각에서 중국의 전체 발전 모델은 비인도적이고, 중국의 농업도 기본 도의를 지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생산한 농산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닭은 원래 자유롭게 날아다녀야 하는데, 손바닥만한 케이지안에서 사육하는 것은, 닭에 대한 도의가 아니다. 돼지는 원래 영리한 동물인데, 옴쭉달싹 못할 작은 공간에서 재우고 살만 찌우는 것은 돼지에 대한 도의가 아니다. 이것이 유럽에서는 일종의 사회문화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 라인(강) 모델’은 상당한 사회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녹색농업, 녹색당 등이 유럽에서는 일종의 사회적 경향이 된 것이다.

서방에서 출발한 식민화 과정이 실제적으로 이미 세계의 농업을 크게 세가지 종류로 분할 했다: 그 첫째가 식민지 농업, 둘째가 종주국 농업, 그리고 세번째가 원주민 농업이다. 세가지 농업형태는 생성과정이 다르고, 정책과 이념, 운영 경험도 모두 다르며, 모델간의 전환도 불가능하다. 중국농업의 발전과정중 정책제안자들이 이러한 농업모델발전의 문화적 함의와 역사적 의의를 이해하지 못해서, 미국에 견학 갔다 오고 나서는, 우리는 언제나 미국과 같은 농업현대화를 실현할 수 있냐고 이야기 한다. 그러자면, 백인 이주자들이 미대륙의 원주민을 멸절시킨 것처럼 우선 중국의 인구를 대규모로 줄여야 하지 않나 ?

동아시아 농업의 기초는 무엇인가 ? 바로 소규모 농촌 공동체이다. 이러한 제도를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이 일본과 한국이다. 중앙정부가 막 신농촌 건설을 제안했을 때, 많은 관리들이 한국에 가서 새마을운동을 공부하고 왔다. 사실 거기에 가서 보고 온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농촌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결국 중국 자신의 역사문화 전통으로 회귀하게 된다.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좀 더 가지게 된다. 그게 원래 우리가 여기서 전해 준 것 아니었나. 중국의 본원농업은 4대강유역에서 기원한 것이고 , 동북아시아는 파생농업지역으로 볼 수 있다. 그곳의 모든 농업의 진화가 장강유역의 쌀재배농업보다 나중에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생농업이 그들의 정치, 문화, 사회교육 등에 모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중화문명 수천년의 업적에 대해서 이해하고 나서야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의 논의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계속)

 

溫鐵軍 원톄쥔  중국삼농三農문제 전문가 

 

중문원문 링크

https://mp.weixin.qq.com/s/JPyiqVGSu1uH00xX3WTGbQ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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