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따라 노를 저을 때면 꽤나 기쁜 마음이 든다. 이 정도의 노젓기는, 이 정도의 캠핑 생활이 꽤나 거뜬하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살을 느끼며 술술 풀리는 기분이 든다. 지난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몸이 회복되었음이 느껴진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통역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새벽에는 부지런히 밭에 나가 뜨거운 열대 태양을 내리 쬐고, 밤에는 틈틈히 언어 공부를 했다. 생태주의를 현장에서 느끼는 충만감이 있었다. 동아시아 문화에 흠뻑 젖어드는 흥분감이 있었다. 그리고 내 몸은 불면증, 과민성 대장증후군, 만성피로로 무너지고 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두렵고 조급한 마음에 적응한 부산스러움 움직임 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태주의는 병든 오이 마냥 빈약했다. 마음만 앞서니 농사는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통역을 하며 지나치게 흥분했다. 내로라하는 사상가의 말을 내 입으로 뱉었다. 내 꿈이 이미 실현된 것 같았지만 머리와 몸과 마음은 따로 놀고 있었다.
소마틱스의 선구자 토마스 한나는 이같은 몸의 현상을 신호등에 비유해 명쾌하게 설명한다. 첫번째는 빨간등 반응이다. 빨간등에 급정거하는 차와 같다. 동물이 위협에 맞서 바닥으로 죽은 척 엎드리는 것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머리와 목과 어깨가 움츠러든다. 진로, 생계, 노후. 이런 것들을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여 자세가 응축하는 것이다.
다음은 초록등 반응이다. 초록등에 엑셀을 세게 밟은 모양이다. 씨앗에서 새싹이 발아하듯 힘차게 신전하는 반응이다. 기지개를 펴고 당당히 나서는 군인의 자세와 같다. 가슴을 드러내며 어깨, 허리, 골반이 전방으로 드러난다. 책임, 몰입, 성취. 삶을 쫓기 위해 생명을 드러내며 자세가 신전한다.
삶은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다. 문제는 이러한 반응 속에서 자세가 고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감각 기억 상실증이라고 표현하는데, 마치 기억을 잃은 환자와 같이 자신의 몸의 감각을 잃는 것이다.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엉덩이 기억상실증이 있다. 오랜 시간 앉아 있고, 걷거나 뛰지 않는 현대인은 골반 근육의 사용법을 통째로 까먹는 것이다. 대신 허리 근육과 허벅지 근육의 과사용으로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나 또한 신체 곳곳의 기억을 잃은 것이다. 변방, 시골, 대안 사회 등 포장지 속에서 알맹이는 그것이 아니었다.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는 20대 청년의 모습이나, 낯선 문화가 힘든 외국인, 농사가 생소한 도시인 등의 정체성이 섞여있었다. 빨간등, 초록등 반응이 온 몸에 붙었다. 팽팽해진 척주 근육이 두통을 부르고, 압박된 복부 내장이 설사를 쏟아냈던 것이다.
명상을 배우며 숨쉬는 움직임부터 다시 배웠다. 인중을 느끼며 구석구석 내 몸을 악착같이 느꼈다. 잠도 안오니 누워서 밤새 명상했다. 곳곳의 긴장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아기처럼 다시 걷는 법을 배웠다. 목의 긴장을 느끼고 목과 허리의 기능을 통합했다. 어깨와 골반을 돌리며 척추의 기능을 찾았다. 그렇게 목들기, 뒤집기, 기어가기, 앉기, 서기, 걷기를 다시 배웠다.
다시 배운 움직임은 나를 원초적인 시공간으로 데려다 준다. 노를 저을 때 몸도 기쁘고 마음도 기쁜 것은 그런 느낌 때문이다. 섬진강 위에서 다양한 움직임을 시도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된 것처럼 한 쪽으로 노를 젓는다. 왼팔 오른팔에서 당기고 미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누이트가 된 것처럼 양 쪽으로 노를 젓는다. 어깨와 허리를 따라 움직이는 골반을 느낀다. 아프리카 카누처럼 일어나서 노를 젓는다. 목부터 등, 허리, 엉덩이, 허벅지 지나 발끝까지. 출렁이는 균형감이 기분이 좋다.
수상훈련과 더불어 육상훈련도 함께 한다. 택견을 하며 맨몸으로 오금질의 감각을 느낀다. 클럽벨과 메이스벨을 던지면서 골반과 어깨를 느낀다. 케틀벨을 돌리면서 전신으로 고루 퍼지는 자극을 느낀다. 중력에 대한 감각이 민감해진다. 다시 물 위의 부력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
강 위에는 다양한 길이 존재한다. 하류로 내려가는 길, 상류로 내려가는 길. 그리고 굽이치는 여울목, 자갈밭. 몰아치는 급류 구간 등등. 다양한 변화 속에서 물의 감각은 매순간 몸의 존재를 새롭게 만들어 준다.
생명은 물 위에서 시작되었다. 중력에 저항하지 않아도 부력이라는 힘이 존재한다. 마치 우주를 유영하듯 놀 수 있었다. 그러다 뭍으로 나왔다. 부력을 대체한 새로운 신경계와 근골격 구조를 만들었다. 중력과 작용하는 감각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내 공중으로 날아갔다. 두 팔은 날개가 되어 훨씬 더 복잡한 형태로 부력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 땅, 하늘 모두 중력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감각이라는 것에서 같다.
– 토마스 한나, <부드러운 움직임을 찾아서>
물길, 땅길, 하늘길을 꿰뚫는 몸의 평화로운 감각이 여기 있다. 이 감각에 기대어 서서 움직임을 상상한다. 그 움직임은 운동(exercise)이며 운동(movement)이다. 내 몸과 마음을 돌보는 감각이 이렇게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미지의 내 몸을 발견하는 쾌감, 그리고 성장을 통해 생긴 여유. 다시 순환하는 돌봄까지 이어진다. 여기에서 나도, 너도, 우리도 함께 평화 움직임이 될 수 있다. 몸, 마음, 지구가 함께 만나는 순간이 여기에 있다.
나의 질문과 상상은 가설과 실험을 자극한다. 실험의 형식은 캠프라는 형태를 통해 드러난다. 곡성에 함께 사는 친구들과 꾸준히 캠프를 기획한다. 다음 글은 캠프를 소개하고 싶다.
대만, 일본, 중국, 제주 강정 등, 동아시아의 섬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왔다. 동아시아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모시는사람들)을 출판했다. 전남 곡성에 산다. 몸, 마음, 지구를 아우르는 항해학교를 만들고 있다. 물의 길을 다시 꿈꾸는 프로젝트이다. 배를 타고 섬들을 잇는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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