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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영성spirituality, 언뜻 보면 둘은 참 나란히 두기 곤란한 개념처럼 보인다. 종교는 여성을 억압하는 일련의 사회적 기제로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도화/집단화된 종교에서 분포된 신앙만이 영성을 뜻하진 않는다. 영성은 인간 삶의 가장 높고 본질적인 부분이며, 순수하고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실천을 의미한다. 궁극적인 해방이자 진정한 자아 초월로 향하는 여정이다. 인간의 내적 수행으로서 영성을 새롭게 바라볼 때, 페미니즘과 영성은 양립할 수 있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왜곡된 담론에 빠져 페미니즘을 경계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대남 정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함께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었다. 불법 촬영물의 피해자였던 나는 자연스레 페미니즘 물결에 휩쓸렸다. 감각이 여러 겹으로 확장된 것처럼, 비가시적인 희생과 아픔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한동안 분노를 넘어 억울함과 증오감에 지배되어, 이 모든 걸 초래한 남성이 원망스레 느껴졌었다. 그렇기에 현재 한국 페미니즘에서 여성 대 남성 대립 구조가 생성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배경이 이해된다. 하지만 각 젠더가 서로를 배척하고 타자화한다면, 분노라는 원동력에서 승화하지 못한 채 증오로 변질되어 버린다.

페미니즘은 근본적인 성차별과 불평등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삶의 실천이자 철학이다. 이는 단순히 여성의 생존과 자주권 확립에서 나아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부여되는 젠더를 자주적으로 수행하자는 의미다. 주디스 버틀러가 제안한 ‘젠더 수행’이라는 개념은, 각자에게 주어진 젠더 규범을 따르는 일이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은 ‘남자는 씩씩해야 한다’라는 젠더 규범을 수행함으로써 남성으로 존재하게 된다. 젠더를 수행하는 일이 오히려 젠더 규범의 힘을 입증하고 젠더 규범의 존속에 공모하게 된다. ‘사회적 성’인 젠더, 즉 젠더 규범은 ‘사회적 성별에 따라 주어지는 규범’이다. 여성에게는 ‘여성성’을 부여하는 행동양식을 요구하고, 남성에게는 ‘남성성’을 부여하는 행동을 요구한다. 버틀러는 한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특정한 젠더 규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특정한 젠더 규범을 따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읽히는 젠더라고 이해된다. 거기에서 젠더 규범이 지닌 억압적 기능이 발휘된다. 이 현상을 수행성 gender performativity라고 지칭한다. 젠더는 수행이다. 즉 젠더란 필연적으로 타고난, 절대 불변의 것이 아닌, 개인의 수행에 의존하는 장치인 것이다. 좋든 싫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젠더를 수행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존재자’가 된다. 버틀러는 자신의 유대적 배경에서 체화된, 영성에 기반한 페미니즘 관계 이론을 폭력과 억압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작년에 별세한 흑인 페미니즘 이론가 벨 훅스는 ‘페미니즘은 운동이 아닌 사랑이다’라고 주장했다.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을 가진 훅스는 영성과 해방 담론을 동일한 운동으로 보았다. 사적인 영성과 정치적인 페미니즘 담론의 오해를 명쾌하게 해석한다. 특히 여성에게는 신체 긍정하기, 자매들women/sisters과 연대하기,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로 시작하기를 권고한다. 여성 스스로 주체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주변 환경까지 확장시키자는 것이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spiritual growth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정한 사랑은 돌봄과 헌신, 상대에 대한 신뢰와 인정, 상대에 대한 책임감과 존중이 모두 결합된 것이다 (…) 어떠한 역경에 처하더라도, 사랑을 구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벨 훅스의 페미니즘은 사랑 철학과 다름 없다. 그리고 나는 그의 페미니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 진리를 매일같이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페미니즘이다. 훅스의 페미니즘은 다분히 종교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영성으로 실천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강조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페미니즘의 본질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 없이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나누고 구분하는 일을 거부한다. 여성 vs 남성 대립 구조는 허망하고 무용하기 짝이 없다.

내가 임의로 만든 척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타인을 재단하고 검열한다면 그 화살은 나에게 돌아오게 된다. 비판과 비난은 명백히 다르다. 불편하고 냉철한 시선으로 비판하는 태도는 중요하되, 비난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증오와 분노는 좋은 원동력이 되어주지만, 혐오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실전은 결코 쉽지 않다. 사회에는 매일같이 수많은 폭력이 난무한다. 그러한 환경에 처해있을 땐 자칫하면 원망의 늪으로 빠지기 쉽다. 희망과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위해 변화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신에게 상기해야 한다. ‘분노’라는 감정은 타자와 연결되는 대망의 첫걸음과도 같다.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분노할 때, 연대라는 위대한 결속이 이루어진다. 성차별은 역사적 사실이자 실수, 즉 문화적인 산물일 뿐, 인류가 진보한다면 능동적으로 극복 가능하리라 믿는다.

편지지

카메라를 들고 지구를 유랑하는 낭만적 유목민. 네트워크 안팎에서 이미지와 신체로 연결되는 작업하는 사람. 기술을 경유해 생명의 공통 언어를 모색하는 미학적 수행자. 종의 경계가 허물어진 생태적 관계망을 상상하며, 더럽고 아름다운 것들을 채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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