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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1일은 세계 비건의 날. 1994년에 비건 소사이어티의 루이즈 월리스가 제정했다. 11월 11일이 빼빼로데이인 건 숫자 11이 빼빼로를 닮아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비건의 날은 도저히 모르겠다. 아마 월리스 씨가 비거니즘을 지향하기 시작한 날이려나. 

왕손이

‘비건의 날’을 기념하는 건 아니지만, 근래에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새 식구가 생겼다! 이름은 왕손, 12세, 잉글리시 코카 스파니엘, 남성이다. 11년 전 범선이 무지하던 시절 펫샵에서 구매한 강아지다. 범선의 어머니께서 왕손이를 데리고 살다 2021년 11월  일 해방촌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헤테로 커플의 집에 귀여운 강아지까지 생기니 정상가족같은 형태가 되어서 기분이 이상하다. 괜히 죄짓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정상중심주의를 지양하는 비혼, 비출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성을 가부장적으로 억압하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다. 이 제도로 인해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고민할 의향은 있다. 자식과 반려동물 사이엔 거대한 간극이 있지만, 출산 다음으로 ‘절대 하지 말아야지!’는 바로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것이었다. 

평생 비인간 동물과 살아본 경험은 딱 한 번이다. 초등학생 때 학교 후문에서 팔던 병아리를 500원에 샀는데, 이틀 만에 내 손 위에서 죽었다. 처음으로 죽음을 목도하는 경험이어서 어린 나이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삶과 생명이 무엇인지 아직 인지하지 못한 초등학생이 병아리를 고작 500원에 구매할 수 있다는 건 비상식적인 행위다. 집 안에 들이는 순간 그들의 삶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 되는데, 나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데 누군가의 생명에 책임을 진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불필요한 노동과 책임감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알아본 바로는 강아지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눈치가 빠른 동물이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무기력할 때엔 나의 몸도 가누기 힘든데 왕손이 산책은 어떻게 시키나, 얘까지 스트레스를 짊어진다면, 바빠서 산책을 잘 못 시켜줄 텐데, 혹여나 아프면 병원비가 백만 원은 기본이라던데, 넓고 좋은 집에서 살다 달동네 좁은 집에 와서 불행하면 어쩌지… 오만가지 근심 걱정이 앞선다. 너무도 미숙한 나기에 반려동물을 충분히 사랑해 주거나, 행복하게 해주는 보호자가 될 자신이 없다. 

게다가 왕손이가 오면 가사노동의 강도가 높아질 터라 청소 분담이 일이다. 나는 집이 깨끗하고 정돈되어야 업무를 시작할 수 있는 성향이라, 왕손이가 오면 하루 종일 청소에만 매달리게 될 것만 같다. 물론 범선은 본인이 책임지고 열심히 배변을 치우고 관리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이미 우리는 가사노동 문제로 종종 다투기에 안심할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둘 다 대체로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다.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인이었다면 반려동물과의 동거는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범선의 첫 자취방에서도 살고, 범선의 전 애인과도 살고, 범선의 모부님과도 살며, 12년간 이리저리 이사 다니며 살던 왕손이는 결국 범선과 나의 피양육자가 되었다. 우리의 집이 최후의 정착지가 되길 바란다. 다행히 왕손이와 나는 초면은 아니다. 이전에 두어 번 만났다. 이상한 아저씨에게 학대를 당한 트라우마가 있어 겁이 많은 왕손이에게 혹여나 물릴까 봐 대범하게 만지진 못했지만, 간식도 주고 함께 산책도 하며 친해지려 노력했다. 왕손이의 풀네임은 원래 전왕손이었는데, 내 성을 따서 이제부터 편왕손, 혹은 전편왕손이라 부를까 고민했다. 굳이 성을 붙여서까지 의인화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그냥 왕손이라 부르기로 했다.

우리 집에 온 첫 날, 왕손이는 집안 곳곳 냄새를 맡으며 신고식을 하느라 온 집안에 암모니아 냄새가 진동했다. 옷방, 작업실, 베란다 등 이곳 저곳에 마킹을 갈겼다. 왕손이의 침대를 비치해서인지, 자신의 영역이라고 인식했는지, 다행히 안방에는 아직 안 쌌다. 아직은..

왕손이와 함께 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집에 들인 순간, 그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온갖 걱정과 염려들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온 집안을 오줌 범벅으로 만들어도, 사랑스러운 미소에 심장이 녹아내린다. 맙소사! 뭐든 용서해줄게. 

간식을 주고 서서히 유대감을 쌓아가며, 인간에겐 느껴본 적 없는 맹목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이게 트루 러브라는 걸까? 그의 존재 하나로 집 안에 활기가 돌고, 삶이 충만해졌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이제는 왕손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 힘들다. 내가 동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비건이냐는 질문을 들으면 아니라고, 윤리와 환경과 건강을 위한 행위일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는데, 이젠 마냥 절대 부인할 수는 없게 돼버렸다.

나의 가장 큰 고뇌는 왕손이의 식사다. 알다시피 범선과 나는 비건이고 우리의 집은 비건 하우스다. 왕손이를 위해 동물 사체를 손질할 수는 없다. 왕손이가 먹던 논비건 사료도 잔뜩 있는데 버릴 수도 없다. 다행히 강아지는 인간처럼 생태학적으로 잡식 동물이기 때문에 식물성 식단으로도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지만, 그는 12년 평생을 논비건 사료 위주로 먹으며 살았다. 비건 사료나 채소를 잘 먹을지는 미지수였다.

천만 다행스레 걱정과 달리 왕손이는 채소와 과일을 아주 잘 먹는다. 기존에 먹던 사료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주는 대로 냠냠 먹는 모습이 너무 예뻐 과식을 시키게 된다. 철이 지나서 내년에야 먹을 수 있는, 마르쉐 농부 시장에서 구매한, 귀한 유기농 땅콩 호박과 고구마를 전부 내어줬다. 범선은 그런 나를 나무란다. 방부제와 첨가물이 잔뜩 들어간 논비건 간식보다 채소나 유기농 과일 스무디가 훨씬 건강할 텐데? 흥. 하지만 노견이라 살찌면 합병증이 올 수 있어 앞으로 주의해야 한다. 

이 강아지의 식탐은 너무 강하다. 이렇게 잘 먹고 잘 자는 강아지는 처음 본다. 식사할 때마다 옆에서 낑낑대느라 편하게 먹지 못한다. 너 방금 밥 잔뜩 먹지 않았니? 간이 안 된 자연식이라면 하나쯤은 줘도 되지만, 감자튀김 따위를 먹고 있으면 애교 부리는 왕손이를 지켜보기가 괴롭다. 문득 왕손이가 먹지 못하는 음식을 우리가 먹고 있다는 게 이상하다. 왕손이도 감자 좋아하는데. 앞으로 감자튀김이 아니라 구운 감자를 먹자. 우리가 건강하게 먹으면 다 같이 편하게 식사할 수 있지 않을까. 왕손이 덕에 우리도 건강한 식습관으로 나아간다.

강아지 영양학을 공부하는 중인데, 생각보다 식성이 인간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카페인이 함유된 음식이나 양파, 포도 등 특정 음식을 제외하고는 곡류, 구황작물, 과일, 채소, 해조류, 버섯, 견과류까지 개 건강에 아주 좋다. 물론 사람처럼 모든 개의 체질이 다르다. 어떤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지는 천천히 먹여보며 관찰해야 한다.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나 즐겁고 기쁘다.

태생이 비견()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채소를 좋아하는 강아지다.(여담이지만 범선과 나 모두 사주에 비견(比肩)이 있다.)  그런 왕손이에게 너무 고맙다. 자연식은 사료에 비해 섬유질이 많아 대변을 많이 보게 돼서 산책을 자주 시켜줘야 한다.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필수 아미노산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건강한 식단을 잘 짜야 한다. 손이 많이 가지만 평생 가공식품만 먹은 왕손이를 나의 자식처럼 귀하게 대하고 싶다. 왕손이 전용 식탁에 예쁜 꽃도 놓았다.(나중에는 꽃을 먹어버렸다)

다시 돌아와 첫날, 왕손이의 식사 시간. 장을 보지 않아서 마땅히 대접할 게 없다. 냉장고엔 전 날 만들어둔 귀리 바나나 팬케이크가 있다. 원재료는 귀리, 바나나, 두유, 계피가루, 약간의 소금이 전부다. 설탕도, 밀가루도, 기름도 쓰지 않고 구운 건강한 음식이라 강아지가 먹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한 조각 손에 덜어 내미니 킁킁 냄새를 맡는다. 먹음직스러웠는지 왕손이는 금세 다 먹어치우곤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더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강아지도 내 요리를 좋아해주다니! 더할 나위 없이 짜릿하다. 다음 날 아침 식사로 왕손이가 먹기 좋은 크기로 강아지용 팬케이크를 만들어줬다. 강아지에게 좋다는 크렌베리도 얹었다.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 한다. 해방촌에서 가장 잘 먹고 잘 싸는 비견으로 만들어줄게.

 

<귀리 바나나 팬케이크>

밀가루, 기름, 설탕이들어가지 않아 개와 인간 모두가 잘 먹는 건강 팬케이크.

ᄋ 재료 : 유기농 압착 귀리, 바나나, 무첨가 식물성 밀크, 계피 가루, 소금, 제철 과일 

1.   1인분 기준. 믹서기에 오트 반 컵을 먼저 간 후, 식물성 밀크 반 컵과 바나나 한 개, 소금 한 꼬집, 시나몬 파우더 두 꼬집을 넣고 간다.

2.   팬을 중약불에 잘 달군 후, 반죽을 일정한 크기로 덜어낸다. 기포가 생기고 밑면이 구워지면 뒤집어서 굽는다.

3.   접시에 구워진 팬케이크-슬라이스 바나나-팬케이크 순으로 예쁘게 쌓는다. 

4.   강아지를 위한 접시엔 생과일이나 건과일, 견과류를 약간 올린다.

5.   인간을 위한 접시엔 아가베 시럽, 비건 버터, 과일잼, 코코넛 플레이크, 견과류 등으로 기호에 맞게 플레이팅한다. 

왕손이와 함께하며 루틴이 생겼다.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며 동네를 탐색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나태한 생활 습관이 기적처럼 고쳐졌다. 왕손이를 산책시킬 생각에 아침 8시면 눈이 번쩍 떠진다. 새벽의 습기 찬 공기를 마시며 공원이나 남산 소월길을 걷는다. 왕손이의 존재는 바쁘다는 핑계로 걷기조차 미루던 나를 움직이게 한다. 사실 왕손이가 나를 산책시킨다.

도시에서 살며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라 목적을 가지고 줄곧 직진만 해왔다. 왕손이와 함께 산책할 때엔 같은 길을 걸어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여기에서 저기로 비정형적으로 이동하며 냄새를 맡고 주변을 관찰하게 된다. 같은 시간 속 현재의 공간을 꽉 채워서 음미하게 된다. 풀과 나무가 있는 곳을 찾게 되고, 무심했던 동네의 풍경에 새로운 에너지가 느껴진다. 함께 등산도 하고 여름에는 서핑도 시도해 보고 싶다. 노견이라 주의해야 하지만 왕손이는 아직은 꽤 건강한 것 같다. 함께 건강한 섭생과 생활을 수행하며 오래오래 살고 싶다. 강아지의 모습을 한 나의 천사.

새삼 환기되는 비건으로서의 장점이 있다. 웬만한 비건 식당엔 반려동물 출입이 가능하다. 우리가 사는 해방촌의 거의 모든 식당이나 카페에선 왕손이도 함께할 수 있다. 그와 가까워지려 들인 공을 생각해 보면 이렇다. 사람 대하듯 배려하고 존중하면 그도 나를 동등하게 대우한다. 지금도 왕손이 외에 비인간동물엔 큰 관심이 없지만, 왕손이와 산책하며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다. 낯선 사람들이 다가와 왕손이가 귀엽다며 만져봐도 되냐며 묻거나, 혹은 말도 없이 만지려 한다. 왕손이는 무는 개라고 말하면 다들 놀라서 뒷걸음질 친다. 혹은 자신은 안 물 거라며 만지려 하는 이들도 있다. 남의 집 인간 자식을 허락 없이 만지면 아주 무례한 행동으로 치부되지만, 반려동물은 그렇지 않다. 인간도 비인간도 모두 느끼는 동물이다. 비인간을 인간 대하듯, 인간을 비인간 대하듯 살면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편지지

카메라를 들고 지구를 유랑하는 낭만적 유목민. 네트워크 안팎에서 이미지와 신체로 연결되는 작업하는 사람. 기술을 경유해 생명의 공통 언어를 모색하는 미학적 수행자. 종의 경계가 허물어진 생태적 관계망을 상상하며, 더럽고 아름다운 것들을 채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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