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열린 하늘길을 비집고 정초부터 대만을 찾았다. 코로나 이후 2년 만에 다시 만난 감정이 애틋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만은 내게 고향 같은 느낌을 준다. 비록 내가 대만에서 나고 자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이 내 유년 시절처럼 느껴진다. 나는 난좡이라는 마을을 방문했다. 내가 5년간 생활한 곳이다. 이곳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어린 아이를 많이 만났고, 자연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느 장소보다 내게 큰 안정감을 주며 나의 깊은 뿌리가 여기에 박혀있음을 느낀다.
나는 긴 시간 집을 떠나 세계를 여행했다. 사실은 늘 집을 잃고 방랑하는 느낌이었다. 언제부터 상실감을 느꼈는지 생각해본다. 그 시작은 10살 남짓한 어린 나날부터였다. 정든 친구들과 공간을 떠나 이사를 가던 날이었다. 그것은 내게 대단한 절망감을 심어 주었다. 낯선 곳으로 던져진 느낌은 마치 닻이 뽑힌 채 표류하는 배가 된 것 같았다.
돌이켜보니 그 상실감은 일종의 사회적 조건이었다. 부모 세대부터 시작된 이촌향도 현상이 있었다. 도시화로 인해 기존의 공간 또한 재편되고 있었다. 교통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며 공간이 끊임없이 왜곡되었다. 특히 수도권에서 자란 세대에게는 뿌리 없는 감각이 일종의 보편적 정서가 되었다. 나의 유년 시절을 다시 기억하자면, 공간과 관계 맺을 틈도 없이 모든게 뒤틀리는 느낌이 있었다. 내가 어제 놀던 공터는 오늘의 공사장이 되는 하루의 반복이었다.
고향이 없는 상실감은 마치 난민이 된 느낌이다. 어쩌면 기후 변화 시대에 상실감은 더욱 커질지 모른다. 우리는 여러 재해를 맞이하며 집을 잃고 있다. 내가 일본에서 만난 수많은 평화운동가들 또한 실은 후쿠시마 ‘난민’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도시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새로운 고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뿌리와 단절된 느낌 속에서 사람들은 소속감과 연결을 갈망했다.
대만 사회 또한 그런 커다란 갈망이 있었다. 내가 대만에 살던 시기에는 양안 관계와 후쿠시마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공동체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중화민족이 아닌 새로운 정체성, 그리고 생태적 삶에 대한 희망. 그런 것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젊은 힘을 곳곳에서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난좡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마법낙원촌’을 만났다.
작은 시골 마을에 모인 친구들은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낙원촌이라는 이름에는 우리의 인연이 ‘마법’같다는 의미와, 야마기시 운동에서 따온 ‘낙원촌’의 의미가 담겼다. 야마기시 운동은 ‘돈이 필요없는 사이좋은 마을’을 모토로 세웠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지속되는 공동체 운동이다. 우리는 함께 영감을 받고 생태 공동체를 꿈꿨다. 그것은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사회였다. 나는 마법처럼 대만에서 야마기시 운동을 다시 만났다.
이쯤되면 우연이 아니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막 한국과 일본에서 야마기시 마을 생활을 하고 온 참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무소유, 공용(共用), 공활(共活)이 중심이 된 생활이 있었다. 소유하지 않고 서로가 나누는 방식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오래된 미래의 작동 방식 속에서 나는 충만한 소속감을 느꼈다.
난좡에서 우리는 함께 아이를 돌보며, 밥을 나눠먹으며, 농사를 지었다. 내가 큰 소속감을 느낀 것은 어느 날의 점심 때였다. 나는 식사 중인 친구를 대신해서 생후 20개월 아이를 업어주고 있었다. 그리고는 손이 미끄러져 아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2미터 남짓 높이에서 떨어져 시멘트에 머리를 처박은 아이를 보며, 나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러나 아이의 부모는 물론이고 모든 친구들이 그 즉시 나를 감싸주었다. 기적처럼 아이 또한 크게 다치지 않았다. 아이는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라며 나의 실수를 감싸주었다. 그 때부터 관계의 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때 성장한 것은 아기가 아니라 오히려 나인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고향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측은 꽤나 절망적이다. 기후 위기는 물론이고, 자연 재해, 도시화는 모두 실존하는 심각한 변화다. 더불어 자본주의 시스템과 시장으로 약탈 당한 가치들도 너무나도 많다. 끊임없이 사라지고, 왜곡되고 변화하는 공간 속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소속감과 고향을 만들고 있다. 내가 말한 고향은 실제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감각에 가깝다. 고향을 엄밀히 정의한다면 내가 태어난 곳 혹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러나 대만에서 내가 만난 감각은 꿈을 함께 꾸며 서로를 보듬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또 그 속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 감각은 사라진 뿌리를 회복하고 고향을 느끼게 해준다.
한 번 생겨난 감각은 늘 내 가슴 깊은 곳에 박혀있다. 그래서인지 2년만의 방문에도 어색하지 않고 다시 안정감을 느꼈다. 나는 물의 길로 그곳까지 건너가는 꿈을 꾼다. 혹은 그곳까지 길이 이어지는 꿈을 꾼다. 마치 “물의 길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상상 해본다. 내게 한 번 생긴 집의 감각은 마치 늘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듯 하다. 나의 물의 길에는 이미 도착했다는 느낌이 있다. 깊은 안정감이 여기에서 항상 함께 한다.
대만, 일본, 중국, 제주 강정 등, 동아시아의 섬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왔다. 동아시아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모시는사람들)을 출판했다. 전남 곡성에 산다. 몸, 마음, 지구를 아우르는 항해학교를 만들고 있다. 물의 길을 다시 꿈꾸는 프로젝트이다. 배를 타고 섬들을 잇는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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