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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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용, 희연과 함께하는 번(범)개벽파가「[다시 개벽 포덕문] 개벽, 살림, 풍류의 한국학」의 제목으로 한국문화인류학회에서 발표한 내용의 제 부분을 정리한 글임을 일러둡니다.

 

1. 다시: 살림을 말하다

살려야 한다. 죽어가는 우리의 지구와 사회를 살려야 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뿌리뽑히고, 왜곡되고, 추출적인 자본주의 경제는 지구와 사회 생태계의 붕괴를 초래했다. 기후·생태위기의 시간표에서 사회가 현재의 경로를 유지한다면 이 문명은 여섯 번째 멸종을 10년 이내 확약받는다. 이러한 비극의 상징성을 가지고 생태학살(Ecocide)이라는 낱말이 등장했다. 먼 미래의 위기가 아니다. 근시일 우리가 겪은 코로나 펜데믹과 기후위기의 상관관계가 이미 입증되었듯이, ‘지금, 여기’의 위기다. 우리는 파국과 붕괴가 엿보이는 죽임의 시대와 문명에서 살고 있다. 다시 살림을 말할 때이다.

 

“해월은 모심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라도 양천주(養天主)의 기름, 살림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의 모든 실천은 한마디로 말하면 ‘살림’이라고 할 수 있다. 살림은 죽임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살림이며, “인간이 자기와 이웃과 자연 안에 내재해 있는 우주 생명을 키움으로써 ‘자아’와 ‘공동체’와 ‘생태계’의 공진화를 도모하는” 살림이다. 이 살림은 때로는 죽임의 폭력, 기존 봉건 세력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의 원리가 되기도 한다. 동학농민혁명도 그러한 살림운동의 차원에서 평가할 수 있다(김용휘, 2017).”

 

살림은 무엇일까. 동학의 사상가 해월의 말처럼 살림은 살림은 나(자아), 너(이웃-관계), 우리(공동체)등 여러 각도에서 살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살림은 세계관이자 세계감이다. 살림의 세계관은 근대의 독성이 극에 다른 죽음의 문명에서 생명이 살아나는 생태 문명으로 전환을 내다보는 세계관이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문명이 피부의 감각으로 먼저 와닿는다는 점에서 살림은 세계감이라 할 수 있다. 살림의 세계감은 죽어가는 것들을 느끼고 감각하며 그 연결됨 속에서 상호작용, 물질대사, 피드백한다. 이렇게 살림은 죽음과의 연결 속에서 생명력을 발굴하며 비극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살림은 뒤틀린 현재를 바로잡기 위한 지향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시대는 경제가 생태를 잡아먹은 꼴로, 사람이 물과 공기 없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경제가 생태 속에 묻어들어가(Embeded) 있다는 간명한 사실을 잊은 대가를 참혹히 치르고 있다. “근대과학과 자본주의는 한없는 ‘확대·성장’의 추구라는 공통분모를 지니는 수레의 양 바퀴 같은 관계(히노이 요시노리, 2017)”로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사회와 자연을 모두 악마의 맷돌에 갈아 넣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는데, 지금까지 정반대의 이론과 현실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현실과 정합성이 떨어지는 이론은 결국 기후·생태위기의 실체와 위험성을 놓치게 된다. 이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몇 시간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지만, 몇 년 만에 지구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학문이 원초에 가지고 있던 목적성을 다시 말해야 한다. 죽임을 방관하거나 일조하는 학문이 아니라 살리는 학문이 필요하다.

살림은 마음이기도 하다. 기후·생태위기와 인류세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는 시구처럼 기후우울의 허무한 물음을 낳곤 한다. 하지만 오염된 땅도, 멸망하는 세계도 우리의 터전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윤동주의 시구처럼 우리는 모든 생명을 ‘포월(包越)’하여 품어 안아 넘어야 한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남긴 역설적인 말처럼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살림을 말한다.

 

2. 개벽: 죽임과 살림의 한국사

우리는 죽임의 역사를 견뎌왔다. 한국의 역사는 사회와 자연을 ‘투입’해 강한 독성의 경제를 성장시켜온 죽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한강의 기적’으로 자평되는 경제성장의 역사 이면에는, 드높은 자살률로 상징되는 해체 직전의 사회와, 최소한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조차 비가역적으로 잃어버리고 만 자연이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속담은, 실로 정권마다 산이고 강이고 헤집었던 토건 개발의 역사 안에서 실현되었다. 이 경로의존성은 지금까지 이어져, 2022년 현재에도 17개의 광역지자체와 226개의 기초지자체는 기후위기 대응 정책은 고사하고 지역마다 신공항 등 각종 토건 개발 사업에 덮여 침몰할 지경이다(녹색전환연구소, 2022). 기후·생태위기로 지역에 찾아오는 위험들의 양상이 날로 심각해져 대응이 긴요한데, 한국의 현재를 좌우하는 정책은 미래를 팔아 현재를 사는 근시안적 정책이거나, 자연 혹은 생태를 팔아 (회색)경제를 살리는 이분법적 정책이거나, 그마저도 노동과 생명을 팔아 체제를 지탱하는 소외적 정책이다. 미래, 자연, 생명을 팔아제낀 사회와 경제가 지속 가능할 리가 없다.

우리는 동시에 살림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살림의 역사는 이 죽임의 역사에 대항하는 생명 운동에서 시작된 면이 있다. 무위당 장일순과 김지하 시인을 주축으로 1989년 한살림 선언이 작성되었다. 선언은 시대를 정확히 보고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을 낳았다. 2000년 초에는 지리산에 댐을 건설하려는 시도에 맞서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이 만들어졌고, 이어서 귀농운동본부가 결성되었다. 원주와 남원의 이 두 시도는 생명평화 운동의 주된 뿌리가 된다. 대기업과 토건 경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자연을 살려야 한다는 이 흐름은 한국의 녹색사 전반의 큰 줄기를 이룬다. 죽임의 역사 속에서 이뤄진 새만금 공사,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제주의 강정해군기지 건설, 밀양의 송전탑 건설, 성주의 사드 배치 등 어느 하나 이루 말할 것 없이 지역의 생태와 사람들을 상처입힌 비극이었다. 대부분 강행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생명평화를 비롯한 녹색운동은 이를 계기로 커지고, 깊어졌으며, 넓어졌다. 살림이라는 말은 이 운동 과정에서 나타났다.

죽임과 살림의 한국사가 남긴 과제는 명료하다. 생태와 경제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생태(Ecology)와 경제(Economy)를 살림으로 다시-번역해야 한다. 생태학과 경제학을 살림학으로 재수립할 필요가 있다. 이미 생태와 경제는 공동의 집과 관리를 뜻하는 라틴어 오이코노모스(οiκονόμος)에 언어적 기원을 두고 있다. 생태와 경제의 관계는 죽고 죽여야 하는 상충관계가 아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처럼, 생태 속에 경제가 묻어들어가 있다.

먼저 생태를 살펴보자. 생태는 무위당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처럼 작고 큰 것이 따로 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상시 변하는 것들의 관계를 다루는 생태학(Ecology)은 연결의 학문이다. 동시에 생태주의(Ecology)로서 생태계의 질서이자 이 질서를 회복하는 운동성을 뜻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경제는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일반적인 경제학 교과서는 “사회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연구하는 학문”으로 경제학을 정의하지만, 생태를 살리는 경제를 구상하려면 이 정의를 재설정, 재사유(Rethinkings)하는 것이 먼저다.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제이슨 힉켈(Jason Hickel)의 “적을수록 풍요롭다(Less is More)”는 살리는 경제의 메시지이자 구호라 할 수 있겠다. 기후위기를 해결할 세계적 해법으로 떠오르는 생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은 이러한 맥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은 기후위기에 맞서 경제와 사회를 살리는 모델을 만들어가며, 경제학 전반의 패러다임을 오래전부터 바꾸어가고 있다. 살림을 바탕으로 한 경제는 이미 출현하고 있다. 이처럼 생태와 경제를 살림의 렌즈로 다시 살펴볼 때 우리는 실제로 세계를 살리는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

 

3. 포덕: 살림은 전환의 동학이다 

살림의 발견은 사회의 발견과 닮아 있다. 실제 사회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사회(Society, 社會)라는 개념은 역사가 길지 않다.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공기처럼 인지되지 못한 채 함께 있던 사회가 악마의 맷돌이 굴러가는 근대 자본주의 질서의 폭력적 제도화로 해체되고 나서야 비로소 발견되었다고 본다. 사회라는 말을 살려내면서 사회가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다. 이는 생명으로서의 사회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조직과 사회 시스템에는 고유의 생명력이 있다.” 사회는 살아있다.

살림 또한 마찬가지로 죽임으로 인해 발견되는 역설적인 면모가 있다. 이는 살림의 역사적 동학을 설명한다. 우리가 근 몇 년간 본 것처럼, 공기처럼 존재하던 생태와 경제의 붕괴가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기후위기의 심화는 녹색전환 담론을 요청한다. 생태학살(Ecocide)과 같은 비극적 사태는 급격한 전환의 바탕이 된다. 그렇기에 살림은 전환의 동학(動學)이다. 전환은 생(生)과 떨어뜨려 놓을 수 없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너와 살기 위해서, 우리가 살기/살아남기 위해서 전환을 말하게 된다. 모든 죽어가는 것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전쟁터에서도 태어나고 걸어 나오는 아이’들이 있고, 폭격으로 불탄 들판에도 봄은 온다. 함석헌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했다. 앎음을 통해 생겨나는 앎은, 비극이 낳는 고통과 슬픔을 애도와 분노로 전환해 역사의 다음 페이지를 열어간다. 그렇기에 비극 속에서 전환을 피워내는 생명과 사회의 놀라운 흐름(流)의 이름이 살림이겠다.

동시에 살림은 전환의 동학(東學)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터져 나올 때 전환은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한 때 인구의 삼 할을 차지했던 동학도들의 혁명과 같은 역사적 선례가 있다. 전환을 위해서는 만나야 한다. 철학자 김상봉은 “나는 너를 통해 내가 된다”고 나아가 만남을 통해 우리가 된다고 했다. 살린다는 공통의 지점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이 전환을 쥐도 새도 모르게 도래하게 할지도 모른다. 전환의 ‘환(渙)’자는 주역의 59괘 풍수환(風水渙)괘에 그 바탕이 있다. 그러니 살림의 전환은 풍류처럼 바람과 물처럼 흘러오고 이처럼 살아나겠다.

 

 

참고문헌

이병한·조성환, 『개벽파선언: 다른백년 다시개벽』, 서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9.

김상일, 『동학과 신서학』, 서울: 지식산업사, 2000.

케이트 레이워스, 『도넛 경제학』, 홍기빈 역, 서울: 학고재, 2017.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허택 옮김, 서울: 느린걸음, 2014.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박범순 옮김, 서울: 이음, 2021

장윤석, 「[코로나, 기후위기, 그린뉴딜] 」3부작, 생태적지혜연구소 미디어, 2020.

김용휘, 「해월 최시형의 공경과 살림의 평화사상」, [통일과 평화] vol.9, no.2 ,2017

주요섭, 「몸-생/명의 세계관, 저항과 꿈꾸기의 생명운동」, 모심과살림연구소, 2020.

김종철,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서울: 녹색평론사, 2019.

히노이 요시노리. 『포스트 자본주의』, 박제이 옮김, 서울: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7.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서울: 갈무리, 2009.

녹색전환연구소, 「민선 8기 17개 광역지자체 인수위원회 보고서 분석」, 2022.

한살림 모임, 「한살림 선언」, 1989.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서울: 도서출판 길, 1944.

데이비드 피터 스트로, 『사회 변화를 위한 시스템 사고』, 신동숙 옮김, 서울: 힐데와 소피, 2022.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수록 「해는 우리를 향하여」,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5.

함석헌, 『인간혁명』, 파주: 한길사, 1961.

김상봉, 『서로주체성의 이념』, 파주: 한길사, 2007.

장윤석, 「너도나라」, 씨알의 소리, 2019.

김재형, 『시로 읽는 주역』, 인천: 내일을여는책, 2016.

 

 

덧붙임

2022년 10월 29일 서울 이태원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말을 잇기 어려운 비극이 다시 일어나 참 황망하고 참담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그 다음날 생일을 맞았습니다. 축하 보다 먼저 걸려온 안부 전화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축하받는 게 왜 그렇게 미안한지 모르겠습니다. 살아있다는 죄스러움의 기분과 맞서며 하루를 잘 보내려 애썼습니다. 간혹 웃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며 잘 쉬었습니다. 밤에는 어려운 세상 어렵지만 잘 살아가자고 아끼는 방 몇 곳에 보냈습니다. 오늘을 오래토록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비극을 마주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애도의 윤리를 모르는 마음이 쉽게 원망과 무력과 분노로 갈까봐 경계하게 됩니다. 잘 기리고 애도하고 추모하지 못한 마음은 한이 되어 깊게 박히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아왔습니다. 잘 슬퍼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참사 자체의 해석과 원인과 대응에 대해 말하기는 이릅니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이 글에서 한국 사회가 죽음/임의 문명에 있다고 썼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가 자주 생각이 납니다. 6.25, 4.19, 5.18, 6.10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과 히로시마 원폭피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가습기살균제참사, 얼마전의 코로나 펜데믹과 폭염과 폭우 등 기후재난으로 인한 참사까지 각양각색의 비극을 겪어오고 있습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생태위기와 그로 인한 각종 사회·경제 붕괴는 우리를 더 잦은 비극 앞에 놓이게 하겠지요.

함께 기후행동을 해온 이들과 같이 분향소를 다녀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가슴이 찢어지는 비극들 앞에서 살아가는 이 세대에게 다음 세상을 열어갈 슬픈 동기와 동력, 그리고 동료가 있을 것 같다고. 죽음은 항상 역설적이게도 삶을 낳는 것 같습니다. 다시, 생명의 명복을 빌며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그리고 가깝고 먼 것에 관계없이 이 어려운 세상 비극의 곁에 있는 우리가 잘 살아내기를,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장윤석

학자 꿈나무, 였는데 기후위기를 알고 나서 연구자와 활동가 사이 어딘가에서 살았다. 실은 한국철학과 녹색을 생의 화두이자 과제로 여기고 있다. 녹색당과 녹색전환연구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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