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바라던 시대가 왔다. 풍요의 시대이다. 입을 것, 먹을 것, 누울 곳, 쉴 곳. 물자와 공간이 도처에 넘쳐난다. 편리의 시대이다. 제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도 너무나도 많은 것에 접근할 수 있다. 선택의 시대이다. 수많은 자유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너무나도 많은 선택 앞에서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 걱정하고 있다.
지금, 현대의 시간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제 얼굴을 보기가 어려운 법이다. 거울을 비춰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근대라는 정의가 필요하다. 근대는 가까운 시간이라는 modern의 번역어이다. 고대와 중세의 시간을 지나, 현대에 있는 우리를 데려다 준 특이점을 찾는 기준이 된다. 근대의 대표적인 정의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합리성이다. 인류는 결국 이성과 합리성의 빛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늘도 매우 크다. 분리, 소외, 착취, 파괴 등등. 현대의 빛과 명암을 논하자면 끝이 없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지금의 길을 찾기 위해 근대라는 개념을 찾았지만, 수많은 사유 앞에서 오히려 길을 잃는 심정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잠시 닫아둔다.
그렇다면 과연 바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바란 것이 전쟁인가 기후변화였던가. 무엇을 바라기에 풍요의 시대 속에서 이토록 처절하게 모순된 삶을 살고 있는걸까. 인간의 자유를 넘어서, 환경 파괴를 넘어서, 지구 위기를 고민하는 시기에 이르렀는가.
고민을 확인하기 위해 렌즈에 초점을 맞춰 본다. 근대가 열린 순간을 포착해본다. 그것은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대서양 바다이다.
중세를 닫고 근대라는 시대가 열린 것은, 마치 지중해라는 작은 바다에서 대서양으로 나아가 대륙을 발견한 것과 같다. 근대 철학의 개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장면을 강조한다. 대서양 항해가 그의 대표작 ‘대혁신’의 표지 그림이다. 이것을 아직 제국주의의 야심이라 말하기 어렵다. 시대는 아직 대항해시대 이전이다. 오히려 유럽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인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보기 위해 많은 편견들을 지워내야 한다.
당시 중세는 위기의 시대이다. 우선 이슬람의 충격이다. 이슬람은 남쪽에서 올라오는 선진 문명이었다. 고대 이집트 제국을 정복하고 중동 세력을 뒤엎으며 이베리아 반도를 식민 지배한다. 800년간 이어진 지배의 흔적은 아직도 스페인에 남아있다. 고대 그리스의 영광은 잊혀졌다. 기독교 문명은 이슬람 문명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북쪽에서는 바이킹이 내려오고 있었다. 바이킹은 해적이 아닌 막강한 해양 세력이었다. 그들은 바다에서 탄 배를 강으로 끌고 왔다. 강의 끝에서는 배를 들고 대륙을 종횡무진했다.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중동까지 진출했다. 그곳에서 실크로드의 끝에 다다른 중국인을 만났다. 다시 서쪽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콜럼버스 보다 몇 세기 전의 일이다. 가히 해양과 대륙 세력을 뒤흔드는 거대한 힘이었다.
이처럼 북쪽에서 내려오는 바이킹의 힘, 남쪽에서 올라오는 이슬람 문명 앞에 유럽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했다. 궁지에 몰린 그들의 선택이 대서양이다. 그곳은 오랜 시간 암흑의 바다로 불렸다. 괴수가 헤험치는 공포의 공간이었다. 세상의 끝이었다. 그 끝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프라마우로의 지도에는 변방 유럽인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지도는 근대 유럽인의 마음을 밝혀주는 지도가 된다. 여기 광기의 마음이 있다. 벼랑 끝에 몰려 오히려 낭떠러지를 뛰는 심정으로 대서양을 향했다. 그런데 그 광기의 선택이 합리성으로 이어진다. 대서양 바다는 세계와 이어져 흐른다는 추론을 성공한 것이다. 유럽인은 천년 전 된 고대 그리스의 지식, 프톨레이오스의 지리학을 펼친다. 그들은 이미 라틴어도 잊었다. 번역된 아랍어를 다시 번역한다. 이슬람 문명의 최신 자료를 종합하여 지도를 재구성한다.
그리고 처절한 마음이 있다. 위기의 시대에서 먹고 살기 위해 길을 찾았다. 지도를 그린 프라 마우로는 베네치아 출신이다. 베네치아는 파종도 경작도 불가능한 이탈리아의 조그마한 섬이다. 섬과 강에서 시작된 교역 네트워크는 이내 대륙과 바다를 꿈꾸기 시작한다. 훗날 자본주의의 맹아가 될 부르주아 세력이 성장한다. 그 처절한 마음은 폭력과 착취의 굴레가 된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이 있다. 지도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고 대서양은 세계의 변방일 뿐이다. 중심은 예루살렘이다. 막힌 중동길을 갈 수 없어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고 싶었다. 저 바다를 건너 이 커다란 대륙을 건너면, 동방의 기독교 세력과 합류하여, 이슬람과 바이킹 세력을 무찌르고, 힘을 길러, 다시 중심으로 돌아가고 싶던 것인가. 순수한 마음은 다시 광기로 이어진다.
변방의 유럽인의 마음에 비추어 현대의 마음을 보자. 여전히 남겨진 광기가 있다. 기술 평론가 케빈 켈리는 ‘테크늄’으로 기술 문명을 재정의한다. 테크늄은 기술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다. 증기 기관, 석유 엔진, 스마트 폰과 같은 기술을 추동한 문화, 사회, 철학 등의 구조 또한 기술과 다름 아닌 것이다. 테크늄은 기술의 포괄적 정의를 시도한다. 유형(有形)의 하드웨어와 이를 뒷받침하는 무형(無形)의 소프트웨어가 인류사에 존재해 온 테크늄이다.
특히 그는 테크늄의 큰 특징으로 자기확장성을 강조한다. ‘테크늄은 항상 최신의 것을 추구하도록 하고’, 사람의 ‘마음을 불만의 상태로 만든다.’ 이를 통해 테크늄은 ‘끊임없는 창조와 성장’을 추동한다. 마치 생물과도 같은 비유다. 전설의 동물 불가사리가 떠오른다. 끊임없이 먹고 먹어치우며 커진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먹이 삼아 소프트웨어로 재현한다. 법, 제도, 모든 것을 흡수하여 무형을 담을 유형의 그릇을 찾아낸다. 그 범위는 세계, 지구를 넘어 우주까지 커지고 있다. 그 순환은 끝이 없는 무한 게임이다.
그렇기에 지구를 얼마나 착취하고 있는가. 그러나 동시에 다시 커다란 마음이 남는다. 오히려 폭력과 착취에 끝에 다다른 처절한 마음이 여기에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몸과 마음과 지구의 연결을 꿈꾸는 것이다. 이제 폭력과 착취가 아닌 교류와 네트워크의 시대에서 지구에 가닿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여기 있다. 고대의 성찰, 중세의 신앙, 근대의 이성이라는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난다. 다시 한 번 순수하게 지구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과연 인간의 마음은 어디까지 담아낼 것인가. ‘고삐풀린 문명의 힘’과 ‘구멍난 현대인의 마음’의 간극 속에서 우리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변방이라는 감각이 우리를 더욱 불안케 한다. 마치 근대의 유럽인처럼 변방에 몰린 듯한 위기 의식을 느낀다. 불안정한 변방은 안정된 중심을 향해야하는가. 그 답은 중심을 끊임없이 쫓는 것이 아니라 변방 그 자체에 머무르는 것이다. 스스로 변방과 변방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머무를 힘이 필요하다. 힘을 찾기 위해 우리는 현대를 살아간다.
빠른 속도로 시공간을 큼직하게 다루었다. 남태평양의 선물경제, 지중해에서 수신이라는 키워드를 찾았다. 그리고 현대의 마음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서양에 비추어 지금의 바람이 무엇인지 고찰했다. 이제는 멀고 먼 과거의 바다가 아니라, 눈 앞의 가까운 물의 길에서 펼치는 실험을 고찰하고 싶다. 태평양이 스며든 섬진강으로 향한다.
참고문헌
이정우(2022), 세계철학사3, 도서출판 길
우치다 타츠루, 오카다 도시오(2014),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메멘토
주경철(2022), 바다 인류, 휴머니스트
케빈 켈리(2010), 기술의 충격, 민음사
대만, 일본, 중국, 제주 강정 등, 동아시아의 섬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왔다. 동아시아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모시는사람들)을 출판했다. 전남 곡성에 산다. 몸, 마음, 지구를 아우르는 항해학교를 만들고 있다. 물의 길을 다시 꿈꾸는 프로젝트이다. 배를 타고 섬들을 잇는게 꿈이다.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