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제기
곧 다가올 미래의 도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오늘날의 도시생활은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대두된 지는 이미 오래다. 이는 물리적 환경의 친자연화와 도시기능의 배분이 전제돼야 가능하다. 최근 도시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그 중 국제적 이슈가 된 것은 프랑스 파리의 ‘15분 도시(la ville du quart d’heure)다. 이 제안은 파리 1대학의 카를로스 모레노(Carlos Moreno) 교수가 기획했고, 2020년 재선에 성공한 안 이달고(Anne Hidalgo) 파리시장이 이 제안을 핵심공약으로 삼으면서 실현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 제안은 어떤 배경에서 무슨 내용들로 채워져 있을까? 그리고 어떤 특이점들이 있을까?
2. 도시에서의 근접성(proximité)과 생태생활권의 재발견
‘‘15분 도시’는 근거리 서비스를 기반으로 동네 주민들이 함께 친자연적 생활환경을 만들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도시를 지향한다. 그리고 이 개념은 모든 도시 거주자가 집에서 도보로 15분이 걸리는 내에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서비스들을 충족할 수 있는 다핵화된 도시를 그려낸다.
사실 주거지를 중심으로 한 근접거리의 도시반경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특히 신도시나 전원도시를 만들 때 도시계획의 핵심적인 기준으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도시화가 심해지고 인구와 건물의 밀도가 높아진 도시는 근접성의 실현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러다가 최근 근접성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도시재생의 맥락에서 중요한 목표로 등장해 추진되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주요 대도시들이 참여하는 국제모임인 C40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자연친화적인 도시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근접성을 강조하고 있다. 호주의 맬버른은 ‘20-Minute Neighbourhoods’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1], 유럽의 주요 도시들도 이와 유사한 프로젝트를 진행 또는 준비 중이다.[2] 파리의 ‘15분 도시’는 그러한 시도들 중의 하나이며, 특히 생태와 건강에 기반하며 보다 파격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근접성에 대한 고려가 늘고 있다. 중앙정부는 2018년에 처음으로 ‘지역밀착형 생활SOC’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듬해에 「생활SOC 3개년 계획」을 시작했다.[3] 서울시도 이미 노후 저층주거지 내 지역밀착형 생활SOC의 확충을 통해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목표를 가진 ‘10분동네 생활SOC 확충사업’를 추진 중이며,[4] 2021년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가 ‘21분 콤팩트 시티’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사업들은 주민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출 뿐 생태가 갖는 근본적인 가치나 자연친화적 환경이 주는 건강에의 이로움을 별달리 고려하지 않고 있다.
3. 15분 도시 파리 (La ville du quart d’heure)의 세부 내용
1) 도시의 새로운 조직화: Une nouvelle organisation de la Ville
15분 도시 파리의 정책제안은 도시의 대표적 공공공간인 도로에 먼저 적용되었다. 자동차가 점령하던 도로는 보행자와 자전거가 중심이 되고, 가로변 주차공간은 테라스와 정원으로 바뀌게 된다. 집 앞에는 작은 정원이 만들어지고 아이들은 보도에서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된다. 다양한 공공편의시설 및 상업시설들로 시민들은 근접거리의 더 많은 서비스를 접하게 된다.
2) 새로운 근린 서비스(De nouveaux services de proximité)
다용도의 공간(un lieu, plusieurs usages)
단일 용도로 지어진 지역의 각종 시설물들은 더 복합된 다용도의 공간으로 활용되도록 한다. 모든 공공건축물은 저녁과 주말, 공휴일 등 건물이 닫혀있던 시간대를 활용하여 필요에 따라 지역사회를 위해 다른 용도로 활용될 수 있도록 제안하였다. 가령 학교의 운동장은 지역의 녹색공간으로 재정비하고, 주말이나 방학 때에는 주민의 쉼터로 개방하는 방안이다. 학교의 유휴 외부공간을 활용하여 텃밭을 만들고 급식에 필요한 농작물을 생산하는 유기농 도시농업과 건강에 대해 배우는 장을 마련한다. 아이들이 등하교하는 시간에 학교 밖 인근 도로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걸어 다니거나 놀 수 있는 보행전용 길이 되고, 학교는 이론교육만이 아닌 문화, 환경, 제작 등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지구 중심지로 변화된 교차로(des carrefours fransformés en place de quartier)
차량으로 혼잡하던 교차로는 차로를 막아 지역의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중심성을 갖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공용 텃밭이 마련되고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벤치가 놓이게 될 것이며, 쾌적하고 신재생 에너지가 생산되는 친환경 공간이 될 것이다.
자전거 보관소로 변화된 골목 주차장(des places de parking fransformés en garages à vélos)
골목길의 자동차 노상주차장은 이동하는 사람들이나 인근 상인들의 보관장소가 아닌 안전하고 편리한 자전거 보관소로 변화될 것이다. 현대의 필수 이동수단으로 여겨지던 자동차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대부분의 일상생활이 자동차 없이도 삶이 가능한 도시를 지향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2024년까지 모든 차로에 자전거 전용 차선을 늘려 자전거 네트워크를 만들고, 자동차와 충돌 사고를 줄이기 위해 자동차 운행속도를 제한하도록 하고 있다. 2007년도부터 파리는 공영자전거 ‘벨리브(Velib)’를 시행하여,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애용하고 있다. 세계 공공자전거 서비스제도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있다. 저렴하고 편리한 공영자전거의 대여소도 늘려 자전거 이용률을 높일 예정이다.
3) 상부상조를 위한 새로운 시민권력(De nouveaux pouvoirs citoyens pour plus d’entraide)
근거리에서 시민의 권리를 지기키 위한 방법으로 마을 가까이에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민의 창구(des kiosques citoyens)’를 마련 한다. 시민의 창구는 각 지구의 중심에 설치되어 시청직원, 민간협회 및 주민들이 참여하여 운영될 것이다. 특히 이곳은 공무원이 상주하여 시민들이 걱정하는 일상생활의 문제와 질문에 상담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쓰레기 재활용, 열쇠 맡기기, 고용/구직 및 부동산 공고, 도시농업, 퇴비 만들기 관련 교육도 진행이 되고 각종 지역 모임 등록도 가능한 지역 정보교류 공간이 된다. 이를 통해 지역민들은 서로 쉽게 만나 생활환경을 만들고 서로를 돌보며 공동체 가치를 회복하는 동시에 시민 간 연대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특히 코로나로 이동통제 시기에 시민들끼리의 자발적인 상부상조 행동과 모임을 정례화하고, 어려움 속에서 낙오되는 시민이 없도록 협력의 틀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4. ‘15분 도시’ 제안의 특이점과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파리의 ‘15분 도시’는 우리나라의 여러 사업들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우리나라의 사업들은 주로 단편적인 공간복지, 즉 시민의 일상이 불편하지 않도록 생활상의 편의를 높인다는 목표를 갖는다. 하지만 파리의 ‘15분 도시’는 ‘생태’와 ‘건강’을 중심으로 평등, 연대, 근거리 서비스에 기반을 둔 도시를 만들겠다고 제안한다. 즉 경제와 기능에 입각한 도시환경의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기후변화, 건강위협, 공동체 붕괴, 노동자의 위기 등 근본적 도시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근접도시(la ville des proximités)가 제안되었다.
안 이달고의 제안은 철학적 토대가 탄탄해 변화가 포괄적이며 세부사업들 사이에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 그녀에게 불평등과 기후문제는 하나로 연결된 문제이다. 기후 위기의 저변에는 경제적 개발의 우선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의 결과는 경제적 불평등이다. 따라서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개발에 대한 개입이 필요하며 그 결과 불평등이 줄어든다. 대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자본의) 권력과 시장 논리에 순응하지 않고 경제적 개발을 최소화하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공간 구성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정당성이 필요하다. 이 정당성은 바로 시민의 참여와 연대에 있다. 생태도시로의 변화와 근접성의 실현은 시민이 이해가 있어야 하며 이해에 기반해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장의 불편함을 함께 부담하고 전환의 노력을 함께 다해야 하는 연대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반 위에 비로서 모든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고 모두에게 평등한 파리를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달고의 ‘15분 도시’ 제안은 경제적 이득이나 경제적 효율성이 주민의 생태나 건강을 만나 갈등을 일으킬 때 생태나 건강에 우선권이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즉 생태나 건강의 실현을 위해 경제적 이득과 경제적 효율성을 부분적으로 또는 전면적으로 포기함을 담고 있다. 이전부터 녹색시장으로 각인되어 있던 이달고는 사람과 환경중심의 도시환경을 위해 자동차와의 전쟁을 선포한 바가 있다. 노상주차장이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게 되고 차로를 보행과 자전거 도로로 할애되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많은 시민의 반발도 있었다. 그리고 ‘15분 도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이달고는 파리 11, 12, 18구에 계획되어 있었던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백지화 하고 재검토를 하고 있다. 콘크리트 단지를 만드는 개발의 방법을 벗어나 녹색공간을 확보하고 숲을 조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도시 발전이 보여준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그 함의하는 바가 훨씬 크다.
도시에서의 계층간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파리시는 과감하게 경제 발전을 위한 개발이나 공급 중심의 도시가 아닌 모든 시민이 참여해 생태에 기초하는 발전으로 큰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파리시민들은 생태에 토대를 두는 것이 도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답임을 점차 인정하게 되었고, 대전환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함께 부담하고 함께 누리는 연대의 가치를 실현시키고 있다. 새로운 도시 구성의 이정표가 세워질 수 있을 지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1] . Victoria State Government, 「20-Minute Neighbourhoods: Creating a more liveable Melbourne」, 2019.
[2] . C40 Cities, 「How to build back better with a 15‑minute city」, C40 Cities Climate Leadership Group, 2020.
[3] . 국무조정실 생활SOC추진단, 「국민 누구나 어디에서나 … 10분 안에 만나는 품격있는 우리동네: 생활SOC 3개년계획 발표」, 보도자료, 2019/04/15.
[4] . 서울특별시 서울균형발전포털 홈페이지. https://uri.seoul.go.kr/surc/seoulInfo/socBusinessPlan.do
김현숙((주)이엔건축사사무소 대표)
프랑스 파리-말라께건축학교에서 건축학 석사와 프랑스건축사를 취득. 현재 이엔건축사사무소를 운영 중. 건축물의 설계만이 아니라 도시 차원에서의 계획과 설계에서의 인간성과 민주적 과정의 실천을 고민 중. 현재 서울공공건축가와 제주공공건축가로서 도시와 건축에 대한 공공성을 고민하고 있음. 이를 바탕으로 건축가가 어떻게 마을만들기, 지역공동체 만들기 등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탐색 중
한국사회의 구성원들 간 삶의 질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고 사회경제적 변화들이 한국사회의 전면적인 탈바꿈을 요구하는 지금, 정치공동체의 조직, 구성, 운영에 대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함. 상대적 자율성과 적응의 원리를 내재하여 내외적 환경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온 복지국가는 여전히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음. 이에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안착되지 않은 복지국가를 최신의 버전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심층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을 동시에 고려해, 제안하고자 함. 특히 다양한 분야의 현장에서 활동중인 분들의 살아 있는 방안들을 제안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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