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경제와 그 대안적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더 좋은 아이디어들을 필요로 한다. 스미스와 마르크스가 당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해 했던 것(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경제생활의 가장 심층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특징에 대한 통찰의 원천이자 동시에 오해된 예언으로 취급하는 것)을 지금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해 수행할 필요가 있다.
필요한 아이디어들의 중요한 특성은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우리에게 경제의 구조변화, 달리 표현하면 교환과 생산의 제도적 안배들의 변화에 관한 사고방식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경제는 교환의 체제이자 동시에 생산의 체제인 것이다.168 이와 같은 경제생활의 두 측면 중 하나를 배제하고 다른 하나에 초점을 맞추는 이해방식은 온전한 것이 되기를 바랄 수 없다.
교환체제이자 생산체제로서 경제는 특징적인 일련의 제도들과 관행들로 존재한다. 문제는 제도적 세부사항들이다. 수십 년 동안 이데올로기적 논쟁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연구의 주요한 전제는 경제조직에 관한 제도적 선택지들의 재고가 매우 제한적이고, 이러한 선택지들은 각기 예정된 법적 및 제도적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장경제 혹은 자본주의는 그러한선택지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테제의 완화된 입장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변형들”169에 관한 현대적 문헌에서 논의된 변형들과 같이 각 선택지나 유형에 관해서는 소수의 변형들이 존재한다.
제한적 전위주의와 고립적 전위주의에 관한 나의 논의의 작업가정은 강한 입장이든 완화된 입장이든 위와 같은 견해와 상충한다. 경제를 조직하는 방법들의 재고가 그와 같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방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역사에서 일정한 조건 아래서 등장하고 안정적인 법적 제도적 구조를 가지며 기초 물리학이 탐구하는 법칙들, 대칭성들, 자연 상수들과 같은 불변적인 규칙들의 지배를 받는 유형들 중 하나를 의미한다면,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도적 체제들은 사회생활의 일상을 형성하기 때문에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한다. 제도적 체제들은 도전과 변혁에 다소간 저항할지 모른다. 제도적 체제들은 변화에 맞서 공고하게 구축될 수도 있고, 자체적인 쇄신을 조직하고 자극하는 것을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구축되어 있는 경우에도 체제들은 체제의 유형과 연관된 규칙들에 따라 작동하는 불가분적인 체계들이 아니다. 우리는 추론을 통해 자본주의나 시장경제와 같은 추상적 관념에서 자본주의나 시장경제의 본질적인 안배들을 이끌어 낼 수도 없고 제도적 체제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도 없다.
고립적 전위주의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로 향하는 경로는 시장질서를 규정하고 생산의 안배들을 밑받침하는 제도들의 변화들을 거쳐 간다. 지금 이해되고 실천되고 있는 그대로의 경제학은 이 경로를 여행하려는 노력에서 적절한 지침인가?
이러한 경제학, 즉 미국 유수의 연구대학의 경제학부를 기지로 삼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학은 주로 경제에 관한 연구가 아니다. 이러한 경제학은 19세기 말에 주로 한계주의 이론가들(누구보다 발라, 제번스, 멩거)이 개척한 방법에 관한 연구다. 어떤 다른 방법에 의한 경제연구는 경제학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생산과 교환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주제들에 대한 방법의 적용은 종종 경제학에서의 하나의 실천으로 취급된다.
한계주의는 출범 시점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도 한계주의자들과 동시대 학자인 알프레드 마셜과 프란시스 에지워스는 경쟁적인 이론을 제안했다. 에지워스는그의 『수학적 물리학』(1881)과 여타 저술에서 벤담의 정신으로 경제학을 심리적이고 행태적인 과학으로서 발전시키려고 시도하였다. 마셜은 그의 『경제학 원리』(1890)에서 경제학을 자연사의 방식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경로의존적인 인과적 연쇄들에 관한 과학으로 개혁할 것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대안적 접근방식은 이후의 경제학 역사에서 덜 명확하지만 더 온건한 형태로 다시 나타났다. 이러한 대안적 접근방식들은 한계주의자들이 시작한 견해와 방법의 우월성에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이 한계주의 전통 안에서 작업하면서 행하는 연구의 많은 부분은 어떤 엄격한 이론에 대한 투신과 무관해 보이는 수고스러운 경험적 탐구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학자들은 다른 사회적 혹은 심리적 연구의 다른 분야에서 유입된 인과적 추측들을 포함하여 광범위하고 다양한 이론들과 양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형들을 정식화함으로써 그러한 경험적 탐구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지적으로 포용적이며 탄력적일 것이라는 인상은 환상일 뿐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주류경제학은 뚜렷한 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주류의 한계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연구가 이러한 방향을 명료하게 해줄 것이다. 주류경제학은 이러한 약점들로 인해 포용적 전위주의의 의제를 두루 사고하는 데에 필요한 지적 장비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없다.
한계주의에서 유래한 경제학은 경제와 그 쇄신에 대한 사유에서 유용하고 심지어 필수적인 도구이다. 이러한 경제학은 특히 이율배반(tradeoffs)과 제약요소들에 관한 논리적 명료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이러한 경제학은 몽상가에게 청구서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로마의 개선행진에서 개선장군의 곁에서 그의 귀에 ‘너도 언젠가 죽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속삭이는 노예와 닮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학은 근본적인 재구성과 방향전환이 없다면 독자적으로 현대사회의 경제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들, 즉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에 대한 해법과 고립적 전위주의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로의 이행요건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는 데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없다.
이용할 만한 더 나은 대안도 없고 경제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방식과 엄격하게 전개될 수 있는 분석적 관행을 결합하는 대안은 전혀 없다고 항의함으로써 경제이론의 기성관행을 옹호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지난 100년 동안 가장 성공적인 경제적 이단인 케인스 경제학조차도 그 신봉자들에 의해 경제현상에 대한 대안적이고 동시에 종합적인 설명으로 발전되지 못했다. 대신에 케인스 경제학은 (특히 미국의 추종자들에 의해) 전통적인 이론에 대한 단순한 보조자의 배역에 채용되었다. 경기순환에 대응하는 경제운용을 위한 이론적 근거로 대표된 케인스주의는 “미시경제학”으로 개칭된 한계주의 사고의 전통적인 체계에 별 고민 없이 덧붙여진 “거시경제학”으로 위축되었다. 케인스류 경제학은 이미 이렇게 위축된 역할에서 처음에는 경제정책의 믿을 만한 지침인지에 대해 공격받았고, 마지막에는 타당하더라도 한계주의 견해로 호환할 수 없는 통찰을 가졌다고 공격받았다. 한계주의자들에 의해 수립된 경제학에 대한 성공적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적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류 경제이론의 결함들이 무엇인지 이해해야만 한다. 기성 경제학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들은 이러한 통찰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러한 비판들은 기껏해야 반쪽짜리 진실이다. 마치 선별성의 형태를 띠는 단순화가 이론적 작업의 조건이 아닌 것처럼 이러한 비판들은 실물경제를 단순화시켰다는 구실로 이러한 경제학을 공격한다. 이러한 비판들은 마치 기성의 분석관행의 목표들 중 하나가 실물경제 모형들의 의도적인 단순화와 실물경제의 작동방식 간의 차이들의 내용과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 것처럼 시장질서를 이상화하는 설명모형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이러한 경제학을 공격한다. 그러한 비판은 마치 [이익]극대화 관념이 논리적으로 명료한 도구도 아니고 경제적 행동이 극대화하려는 자동기계의 대본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수십 년 동안 경제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처럼 경제주체를 계산하는 자동기계로 표상한다고 이러한 경제학을 비난한다. 경제학에서 또 다른 기획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한계주의자들과 그 후계자들로부터 물려받은 경제학에 대한 또 다른 비평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이제 한계주의 경제관념의 핵심을 서술하겠다. 이어서 나는 한계주의 전향에서 비롯된 경제학의 네 가지 중심적 결함들을 논의해보겠다. 이러한 결함들을 바로잡는 것이 지식경제의 제한적 형태를 이해하고 지식경제의 포용적 형태를 상상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경제학의 개혁과 전환을 위한 프로그램의 개요다. 그 다음 나는 이 기획에서 두 가지 영감의 원천의 용도와 한계점들을 다루어 보겠다. 두 가지 영감의 원천은 케인스의 통제된 이단과 경제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두 사상가인 스미스와 마르크스에 의해 특별히 대표된 전(前)한계주의 경제학을 말한다.
경제학에 대한 나의 주장은 내가 이 장에서 명시적으로 제안하고 이 책의 논의에서는 암묵적으로 기대해온 지적인 의제를 추진할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하는 데에서 끝을 맺는다. 첫 번째 경로는 전문적인 문화와 방법들을 출발점으로 취하면서 내부로부터 착수한 경제학의 발전과 재구성이다. 두 번째 경로는 기성 분과 그 절차들 바깥에서 온다. 후자의 접근은 접근도구들을 찾을 수 있는 곳이면 어떤 분야에서도 그 도구를 수집한다. 이러한 접근은 경제학을 생산과 교환의 현상에 적용되는 사회이론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이 두 경로들 중 어느 것이 우월한지를 확인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 두 경로를 모두 시험하고 그 경로들이 앞으로 더 나아가 수렴할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우리가 얼마나 멀리 전진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이 책은 두 번째 경로, 즉 외부로부터의 경로를 여행한다. 이 책은 두 번째 경로를 경제적 문제에 대해 사유할 방법의 명시적인 제안과 결합된 경제학의 일반적인 연구방식으로 여행하지 않는다. 이 책은 경제와 사회의 미래에 대해 지대한 결과를 갖고 우리의 경제적 아이디어들을 재고할 자극으로서 특별한 가치를 갖는 주제, 즉 지식경제의 성격과 미래와 같은 특수한 주제를 다루면서 두 번째 경로를 여행한다.
나는 지금 이 책의 아이디어를 경제에 관한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요구사항들을 명료화하겠다. 그리고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이 현재의 제한적이고 피상적인 지식경제에서 시작하듯이, 사유방식에 관한 이러한 진술은 우리가 물려받은 경제학(사회과학의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영향력 있는 분과)을 해석하고 비판하는 데에서 시작할 수 있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 역자 : 이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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