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따라 낮에는 노를 젓고 밤에는 캠핑을 한다. 강변에 주섬주섬 셸터를 꾸리기 시작한다. 첫날 밤부터 비가 내린다. 얇은 타포린 천막에 비가 부딪히는 소리에 기분이 좋다. 땔감은 벌써 젖어 오늘 밤 불피우기는 틀렸다. 오늘 밥은 굶어야 겠지만 모처럼 단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워진만큼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숲과 산을 찾는 기분으로 강과 바다를 찾는다. 지난 10년간 꾸준히 캠핑을 배워오고 있다. 월든 호수를 찾던 소로우의 마음만큼은 아니다. 생태주의, 자급자족, 오프그리드 등 되는 만큼 실험을 해본다. 이른바 문명의 삶, 도시를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리, 기치, 구호 같은 것들은 되려 억압이 되어 삶을 눌러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캠핑이라는 이름 아래 일상과 비일상을 오가는 실험을 시작했다.
철학자 시노하라 마사타케는 붕괴의 감각을 말한다. 후쿠시마 사태를 겪으며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쉽게 자연에 무너지는지를 충격적으로 느꼈다. 근대 이후, 인간은 자신의 기술 세계를 방벽 삼아 자연을 철저히 통제해왔다고 믿었다. 심지어 자연을 압살하고 오염시켰다고 느꼈다. 하지만 인류세, 기후변화, 코로나 등의 최근의 흐름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인간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 자연이, 더 거대한 규모로, 더 알 수 없는 형태로 인간의 조건을 붕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캠프는 붕괴를 맑게 느끼는 최적의 방식이다. 종말론적 상황도 명랑하게 맞이한다. 집도 없고, 물도 없고, 춥거나 덥다. 문명을 벗어났기에 불편한 것들 투성이다. 그러나 자발적인 선택이기에 즐겁다. 어디까지나 일상에서 벗어난 비일상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취약한 상황 안에서 관계는 더욱 열리기 시작한다. 나약한 내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부탁하고 요구한다. 사람을 너머 사물에게 의존한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라는 것은 모든 것이 새롭다라는 전환의 시작이기도 하다.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니다. 다만 되는 만큼 천천히 또는 즐겁게 한다는 감각이 중요하다. 여기에 개선(改善)이라는 프로세스가 적용된다.
Kaizen(かいぜん, 개선)은 도요타 등 일본의 기업 경영에서도 널리 활용된 방식이다. 캠프에 적용하자면 이렇다. 추위가 느껴지는 밤이 문제의 시작점이다. 완벽한 단열을 위해 가성비 좋은 자재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신문지를 깐다. 그 다음에는 골판지를 깐다. 그 다음에는 버려진 헌 옷을 구해 온다 등등. 단계적으로 하는 것이다. 문제를 쪼개서 볼 수 있는 분석적 사고, 그리고 각 단계에 집중하는 사고를 도입한다.
그 순간 폐허와 같은 환경은 창조적 놀이터가 된다. 텐트가 없다면 배를 끌어당겨 셸터로 삼는다. 로프가 없다면 칡넝쿨로 단단히 묶어 지붕을 만든다. 가스가 없다면 성냥으로 모닥불을 만든다.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기에 모든 것이 새로운 놀이가 되는 감각이 여기에 있다.
물가에는 기묘한 공간성이 있다. 눈 앞에는 다리와 도로의 불빛이 반짝이고 자동차가 달려간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세계가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들은 가마우지, 왜가리, 파랑새와 가끔 물가를 튀어오르는 쏘가리다. 인간과 자연의 완벽한 경계에 서있는 느낌이다.
이 공간에서 캠프를 개최한다. 어린이 캠프를 통해 아이들과 함께 활을 쏘고 배를 탄다. 어른들과는 몸과 마음의 돌봄을 갖는 캠프를 꾸린다. 1명, 5명, 10명, 20명. 점점 많은 인원들과 함께한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같이 한다. 앞으로 100명, 100일까지 캠프를 꾸준히 연습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물경제와 수신의 과정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서바이벌 캠프 기획자 요시다 켄고는 20년째 캠프를 기획하고 있다. 주제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딱 4주. 한 달의 시간은 한 사람의 마음을 놀라울 정도로 전환시킨다. 첫 주에는 붕괴의 조건에서 사람들이 즐겁게 의욕을 낸다. 둘째 주에는 자신의 마음과 조건 사이의 갭을 느낀다. 셋째 주에는 문제 속에서 자신의 많은 것이 무너진다. 넷째 주에는 전환을 감각하고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바꿔낸다는 것이다.
감각의 영역을 언어로 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캠프도 어디까지나 느끼는 것이지 말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내가 처음 느낀 것은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구성된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이야기가 하늘길 넘어 그 섬에 있었다. 다음 글은 바다 건너 만난 감각을 다루고 싶다.
대만, 일본, 중국, 제주 강정 등, 동아시아의 섬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왔다. 동아시아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모시는사람들)을 출판했다. 전남 곡성에 산다. 몸, 마음, 지구를 아우르는 항해학교를 만들고 있다. 물의 길을 다시 꿈꾸는 프로젝트이다. 배를 타고 섬들을 잇는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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