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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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prog-ocean.org/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태평양에 다시 전운이 감돈다. 나는 섬들을 떠돌며 망령을 목격했다. 시작은 일본이었다. 교토 산 속에서 만난 친구들은 평화를 간절히 노래했다. 망상으로 치부하기에는 후쿠시마 이후의 삶이 전쟁의 폐허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다음은 대만이었다. 긴장은 높아지고 있었다. 기어코 대만과 반송법(反送法)이 엮이며 홍콩 사태가 시작됐다. “오늘의 홍콩은 내일의 대만이다”라는 문구가 우리 사이를 휘젓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주 강정이었다. 그 곳에는 해군기지가 드높게 서있었다. 바다에는 핵이 드나들었다. 미국의 핵잠수함이 제주 앞바다까지 흘러왔다. 일본 친구들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던 핵발전이라는 것이, 결국 돌고 돌아 핵무기가 되어 이 제주 앞바다로 들어와, 다시 대만을 핑계삼아 중국으로 향한다면, 이른바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불리는 대만 남한 일본 중국이 터지기 시작하면, 태평양은 선물이 흐르는 바다가 아니라 미사일, 비행기, 방사능이 흐르는 바다가 될 노릇이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전쟁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하는가. 융 심리학자 제임스 힐먼은 전쟁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 전쟁은 정상적이다. 칸트가 남긴 말도 그러하다. “인류에게 평화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평화를 단지 일시적으로 경험할 뿐, 전쟁이 더욱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톨스토이는 전쟁은 “인류를 추동하는 초시간적인 힘”이라 말한다. 전쟁광들의 기록에서 우리는 전쟁에 대한 미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전쟁은 마치 자연 재해처럼 필연적으로 일어나 우리를 덮친다.

둘째, 전쟁은 비정상적이다. 전쟁에서 일어나는 광분한 형태는 생명의 구조를 영구적으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손상시킨다. 종군기자 크리스티나 램은 저서 ‘관통당한 몸’을 통해 전쟁의 비정상적인 면을 무참히 고발한다. 예컨대, 콩고에서는 내전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손에 쥔 스마트폰을 생산하기 위한 광물을 쟁탈하기 위해서다. 전쟁에서 미쳐버린 사람들은 두살배기 여아를 강간하는 기행을 자행한다. 가장 약한 자는 전쟁에서 무참히 스러진다. 더욱이 전쟁은 자연이 아닌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집단적인 힘이라는 것에 그 참담함을 쉽사리 떨쳐내기 어렵다.

셋째. 전쟁은 숭고하다. 전쟁은 인간의 원형적인 동력이며 끔찍한 사랑은 신화와 같은 알 수 없는 원형적 힘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지독한 신비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를 탐구하기 위해 2,000년전으로 시계를 돌려 지중해 바다로 건너간다.

지중해는 끊임없는 군비 경쟁이 최초로 시작된 곳이다. 4만년도 넘는 시간 동안 배는 물 위에 뜨는 기능만 있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은 뱃머리에 철을 박고, 떠다니는 암초마냥 적군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적군을 대량 수장시키는 무기가 된 것이다. 해전의 형태가 등장하고 전함의 개념이 생겨났다. 에게해에서 시작된 전쟁은 지중해 전역으로 확대되어 로마라고 하는 군사대국을 만들어낸다.

다만 지중해 전쟁은 현대전과 양상이 다르다. 국민 국가 또는 왕조국가의 개념이 아니다. 다양한 이민족들이 귀족, 가문의 이름아래 뒤엉킨 분투에 가까웠다. 교역, 침략, 거래, 무력투쟁이 묘하게 뒤섞인 공간이었다. 그 곳은 폴리스라고 불리는 장소이다. 서양사학자 주경철은 이같은 뒤섞임의 상태를 세포막으로 비유한다. 마치 내 몸 속의 세포가 혈관을 빨아들이는 듯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들이 강과 바다에서 올라와 각각의 폴리스에서 끊임없이 뒤섞인다. 즉, 전쟁은 양면적인 것이다. 이민을 추동하고 교류를 촉진했다.

사진1] 충각(衝角)이 개발되며 바다 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출처: history collection
사진2] 고대 그리스에 분포한 폴리스. 수많은 폴리스가 에게해를 둘러싼다. 출처 : wikipedia

지중해는 바다가 대륙에 둘러 싸인 독특한 공간이다. 유럽, 소아시아, 중동, 아프리카가 만나는 바다이다. 다른 지구 문명권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였다. 다양한 민족들은 땅이 아닌 물에서 뒤섞이고 있었다. 물은 생명의 나약함을 확인시켜주는 물질이다. 물 속에 풍덩 들어가보자. 알 수 없는 냉기가 우리의 몸을 휘감으며 숨을 틀어막는다. 이 곳에서 우리는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커다란 물 속에 빠져버린 작은 생명이다. 가차없이 비참한 존재일 뿐이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발버둥을 칠 뿐이다.

그 발버둥이 전쟁과 닮은 듯하다. 그 속에서 폴리스인은 시민이 아니라 오분대기조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언제든 전쟁이 발생하면 징집된다. 마구 흔들리는 배 위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온 몸으로 커다란 물살을 밀어내야 한다. 충각을 달고 있는 그것은, 배라기 보다는 미사일에 가깝다. 노를 저어서 자폭하는 공격형태를 보였다. 물살에 떠밀린 배는 상대편의 배에 그대로 처박혀버린다. 자살특공대의 시초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물은 공포인 동시에 근원의 상징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시초를 물에 비유했다. 물에서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폴리스인들은 전쟁의 참상에서 숭고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피부 아래 놓인 근육과 내장. 나는 더이상 말하지 못한다. 내 혀는 망가지고, 어린 불길이 내 살갖 아래를 흐른다.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내 귀에선 윙윙거리는 소리만 나고,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내 몸은 마구 떨린다. 저 풀보다 더 연약한 내 모습은 마치 숨이 끊어진 사람같다.

– 1세기 그리스어 논문 <숭고함에 관하여>

 

마치 종군기자의 기록과 같은 글의 제목은 뜬금없이 ‘숭고함’이다. 피 흘리는 전장에서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인은 그야말로 수신(修身)을 시작했다. 전쟁의 바다 지중해에서 최초로 탄생한 것은 허무주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끊임없이 쫓았다. 결국 지중해 문명은 철학과 민주주의를 낳았다.

그들의 삶은 이상과 현실이 공존했다. 인간의 비루함, 나약함, 끔찍함, 허무함은 진흙처럼 달라붙는 주제였다. 그러나 동시에 헤엄을 치고, 배를 타고 노를 젓고, 돛을 펼치고, 항해술을 익혀나갔다. 나약함 속에서 역설적으로 큰 힘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생명의 커다란 힘이다. 그 힘을 기반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사시, 서정시, 드라마로 이어지는 글쓰기는 기어이 철학을 낳은 것이다.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철학의 기반을 다져나간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 민주주의가 발전한다. 그야말로 전쟁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힘이 무엇인지, 나약함 속에서 우리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 시절 전쟁은 분명 인류세의 전쟁과 다른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특이점을 상기해보자. 청동기 문명이 철기 문명으로 전환되며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또 뻥 뚫려있는 바다는 다가올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인류세 시대의 기술의 특이점과 어딘가 닮아있지 않는가. 마치 뻥뚫려있는 하늘을 보며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모습이 겹치지 않는가. 그리고 커다란 바다에서 미사일을 걱정하는 태평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지중해 바다는 나약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힌트를 준다. 결국 마음으로 들어가 이데아라는 빛을 발견하고, 그 몸을 키워내고, 역설 속에 뛰어든 것이다. 결국 이것이 르네상스가 되어 우주의 신을 인간의 몸에 담고자 하는 열망을 낳았다.

오늘의 태평양은 다시 전쟁이 고조되고 있다. 작년부터 이어진 발언들이 심상치가 않다. “6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이 높다.”(2021.3 미 상원 인사청문회 인도태평양사령관의 답변), “중국을 괴롭히는 외세는 머리가 터져 피흘린다.” ( 2021. 7 공산당 창당 100주년 시진핑 발언). 고조되는 혼란 속에서 대만의 독립 열망은 높아만 간다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이다”. 다시 중국인은 답변한다. ” 더이상 하나의 중국을 위협하는 발언은 무시할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미국, 중국, 대만의 발언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도를 펴보면 여기에 얽혀있는 것이 더욱 선명해진다. 오키나와, 제주, 일본, 남한, 북한, 그리고 그 위의 러시아까지 이어진다. 결국 침공한 우크라이나를 생각하면. 우리는 전쟁 앞에서 더욱 무력해지고 우울한 마음을 지우기 어렵다.

나는 전쟁에 맞서 발버둥을 치고 있다. 강정마을에서 춤을 추고, 대만에서 농사를 짓고, 일본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끔찍한 세상은 내게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게 해주었다. 이것은 역설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이며 감각의 영역이다. 인류세, 기술, 자연 앞에서 인간이 가진 것은 무력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생명이 가져올 커다란 힘을 느낄 수 있다. 그 감각으로 매일같이 수신을 이어간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2,500년전의 철기 시대일 뿐이다. 축의 시대 속 성인들이 목격한 세상과 또 다른 기술이 여기 놓여있다. 지금의 무기는 들이받는 배가 아니라 우주를 날아다니는 포탄이다. 우리는 몸소 그것을 겪었고 핵의 참상을 알고 있다. 아포칼립소 콘텐츠를 통해 핵 이후의 세계를 학습하고 있다. 과연 전쟁은 억제되고 있는 것인가? 터져나갈 것인가? 전쟁의 광기는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버렸다. 좀 더 면밀히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 광기가 본격적으로 열린 대항해시대의 바다로 고민을 이어간다.

고석수

대만, 일본, 중국, 제주 강정 등, 동아시아의 섬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왔다. 동아시아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모시는사람들)을 출판했다. 전남 곡성에 산다. 몸, 마음, 지구를 아우르는 항해학교를 만들고 있다. 물의 길을 다시 꿈꾸는 프로젝트이다. 배를 타고 섬들을 잇는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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