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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베넷의 예언

발 플럼우드가 지적했듯이, 인간이 다른 생물과 먹고 먹히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면, 인간 이외의 존재, 즉 〈사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즉 사물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고찰하는 것이다. 사실 〈인류세 철학〉의 핵심은 사물에 대한 철학적 탐구, 즉 〈사물철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물에는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에서부터 지구와 같은 거대 사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를 망라하고 있다. 심지어는 쓰레기와 같은 폐기물이나 기후와 같은 유동적 물질도 포함되고 있다.

사물은 영어로 matter나 object 또는 nonhuman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 중에서 matter에 관해 철학적 탐구를 시도한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제인 베넷(Jane Bennett, 1957~)을 들 수 있다. 베넷은 2010년에 쓴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 – 사물들의 정치생태학(A Political Ecology of Things)』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다.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가 의료보험 체계나 국제무역, 국외여행에 대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가? 

– 제인 베넷 지음, 문성재 옮김, 『생동하는 물질』, 현실문화, 2020, 264쪽. (이하 “『생동하는 물질』”로 약칭)

 

여기에서 ‘조류 인플루엔자’를 ‘코로나 바이러스’로 바꾸면 2020년에 시작된 팬데믹 상황에 대한 정확한 서술이 된다(흥미롭게도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이 출간된 해도 2020년이다). 10여년 전에 이미 이런 전망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베넷은 어떻게 해서 이런 예측을 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번역자 문성재의 말이 참고가 된다.

 

제인 베넷은 주류 철학에서 무력하고 수동적이며 힘이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던 ‘물질’을 새로운 관점에서 탐구하고자 한다. 그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 동질적이며 무력한 것으로 간주되어 온 물질이, 실은 행위성의 원천이고 언제나 우리의 안과 옆에서 흐르는 힘이며, 항상 인간의 몸과 얽혀 있는 역동적이고 활력 넘치는 사물이라고 주장한다. (『생동하는 물질』, 〈옮긴이의 말〉, 298쪽)

 

즉 그동안 ‘물질’은 철학사에서 무기력하고 몰개성적인 수동적 존재로 폄하되어 왔는데, 베넷은 그것을 활력있고 행위하는 능동적 존재로 재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존재의 분할

베넷은 이와 같은 이분법, 즉 〈무기력한 물질〉과 〈활기있는 생명〉이라는 구분을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이라는 말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철학적 기획은 근대적인 두뇌들을 통해 빠르게 번진 하나의 생각, 즉 물질(matter)을 수동적인 재료로, 다시 말하면 날 것이고 짐승같고 활기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찬찬히 숙고하는 것이다. 세계를 둔한 물질(그것, 사물)과 생동하는 생명(우리, 존재들)으로 분해하는 이러한 습관은,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사용하면, “감성적인 것의 분할(partition of the sensible)”이다. 

– 『생동하는 물질』, 7쪽. (번역은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이하도 마찬가지)

 

여기에서 베넷은 서구 근대인들이 존재를 비생명적인 것과 생명적인 것으로 분할하고, 후자에만 적극적인 가치를 부여해 온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존재의 분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사고방식은 서구 근대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학(儒學)에서는 ‘도덕’을 기준으로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를 ‘분할’하였다. 동식물은 인간과 달리 기(氣)가 치우쳐 있어서 사단(四端)이라는 도덕감정이 발현되지 못한다는 설명 방식이 그것이다. 유학에서 사물철학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학이 지향하는 바는 인간이 도덕적 존재가 되는 것인데, 사물(=인간 이외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예 ‘도덕’ 개념을 적용하기조차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추만 정지운과 퇴계 이황의 합작품인 「천명도」에서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은 나오지만 사물은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사물을 무기력한 존재로 보았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사물을 무도덕적인 존재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철학은 이와 같은 존재의 분할에서 〈존재의 통합〉으로 나아가는 철학이다. 즉 존재들간의 위계와 차등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통점에 주목하면서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인 베넷도 그러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관점을 베넷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우리 사이의 모든 차이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이 차이들(differences)을 가로지르는(across) 친연성들(affinities)을 고찰하고자 한다.

– 『생동하는 물질』, 256쪽. 

 

사물들의 힘(power of things)

베넷이 인간과 비인간(nonhuman) 존재가 모두 공유하고 있다고 본 요소는 〈힘(power)〉이다. 즉 사물도 인간과 같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물질과 생명의 격리는, 오메가-3 지방산이 인간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방식, 또는 쓰레기가 매립지에서 ‘사라지지’ 않고 화학물질의 활기 넘치는 흐름과 메탄의 휘발성 바람을 생성하는 방식과 같은, 물질의 활력과 물질적 구성체들의 살아있는 힘들을 무시하게 만든다.

-『생동하는 물질』, 7쪽. 

 

존재를 인간중심적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면 – 그것이 생명의 관점이든 도덕의 관점이든 – 사물의 힘은 간과되게 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과학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사물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인공 사물에 기대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쓰레기조차도 ‘사라지지’ 않고 인간세계에 힘을 발휘하고 있다. 꼭 과학적인 지식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플라스틱 미세먼지가 끼치는 영향을 우리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것이 두려워할만한 존재라는 뜻이다. 고대인들이 태양을 경배한 것은 그것이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제1의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물은 인간에게 외경할만한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기후나 강수와 같은 자연물은 물론이고, 과학기술과 같은 인공물도 현대문명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들은, 동일본대지진이나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볼 수 있듯이 – 때로는 인간에게 치명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말에는, 공자의 ‘후생가외’라는 표현을 빌리면, ‘사물가외(事物可畏)’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의 경물(敬物)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재조명될 수 있다. 즉 사물이 힘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외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윈의 지렁이 연구

베넷이 말하는 사물의 힘은 거대 사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동물과 같은 보통 생물에서도 힘을 발견하고 있다. 그것도 ‘지렁이’나 ‘벌레’와 같이 아주 작은 존재이다. 일찍이 지렁이의 영향력에 주목한 인물은 19세기의 과학자 찰스 다윈이었다. 다윈은 우리에게 진화론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지렁이 전문가이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렁이가 분변토를 만드는 방식을 40년 넘게 관찰하였다. ‘분변토(糞便土)’란 말 그대로 “지렁이의 분변(=배설물)과 그것을 통해 나온 흙”이란 뜻이다. 쉽게 말하면 “지렁이 똥으로 나온 흙”이다. 지렁이가 배출한 분변토는 비료로 인정받을 정도로 친환경적인 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문광운, 〈지렁이분, 30년 만에 비료로 인정 기뻐〉, 《한국농어민신문》, 2011.11.22.). 다윈은 지렁이의 활동을, 그 중에서도 분변토를 만드는 행위를 평생 관찰한 것이다.

다윈의 지렁이 연구는 1881년에 『지렁이의 활동을 통한 분변토의 형성(The Formation of Vegetable Mould Through the Action of Worms)』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우리말 번역은 찰스 다윈 지음, 최훈근 옮김,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베넷은 뜻밖의 주장을 하고 있다. 지렁이가 지구 환경은 물론이고 인류 역사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는 것이다.

 

지렁이들은 ‘지표의 물질’을 [먹어서] 소화시킨 이후에 그들의 은신처 입구에 배설물을 쌓아 올린다. (…) 하지만 다윈이『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1881)에서 마지막으로 내놓은 주장은 생물이나 농경이 아니라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지렁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세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 

그들은 분변토를 형성했고, 이는 “모든 종류의 묘목(seedlings)”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것이 인간에게 호의적인 지구 환경을 만들 수 있게 했고, 인간 역사에서 나타났던 문화적 인공물, 의례들, 계획들, 여러 노력들을 가능하게 했다. (…) 지렁이들은 “지면에 떨어진 모든 물건을 분변토 밑에 파묻음으로써 한없이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부패되지 않게” 보호해 주었고, 이는 “고고학자가 지렁이에게 감사를 표해야만 하는” 지렁이들의 서비스였다. (…) 인류 역사와 문화에 공헌한 지렁이들의 노력(exertions)은 지렁이들이 다른 행위자들(agents), 즉 생물학적 행위자, 박테리아적 행위자, 화학적 행위자, 인간 행위자들과 연합하거나 경쟁하는 행위(acting) 가운데 일어난 계획되지 않은 결과였다.

– 『생동하는 물질』, 239-240쪽. 

 

즉 분변토를 생성하는 지렁이의 활동 덕분에 고고학적 유물이 오랫동안 부패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런 점에서 지렁이의 행위는 역사학이나 고고학과 같은 인간의 문화를 가능하게 했으며, 그것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사와 인간사가 동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겹쳐있음을 볼 수 있다. 지렁이의 활동사가 인간의 문화사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렁이의 행위성

다윈의 주장을 인용하는 형태로, 베넷은 “지렁이들이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역사는 곧 자연이다(History or Nature)”라고 말하고 있다(『생동하는 물질』, 242-243쪽). 이러한 역사 인식은 차크라바르티의 표현을 빌리면, “자연사와 인간사의 구분의 붕괴(the collapse of the distinction between natural history and human history)”라고 말할 수 있다(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지음, 김용우 옮김, 「역사의 기후 : 네 가지 테제」, 『지구사의 도전』, 355쪽).

다만 차크라바르티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기후변화와 같은 지구환경이 변하고 있는 인류세 시대를 염두에 두고 이런 역사관을 피력했다면, 다윈과 베넷은 인류세라는 현상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사와 자연사는 상호 연결되어 있었다고 본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만 베넷이 다윈의 지렁이 연구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현상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인류세라는 시대 인식으로 인해 인간 이외의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문제 의식에서 지렁이에 대한 관심도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베넷은 분변토를 만드는 지렁이의 활동을, 브뤼노 라투르의 개념을 빌려서, ‘행위성(agency)’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성을 지닌 지렁이를 ‘행위자(agent)’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지렁이는 한낱 미물이 아니라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 격상되게 된다. 그것은 자연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렁이의 행위성은 다른 행위자들의 행위성과 연결되면서 연합을 이루고 있다. 가령 고고학자들의 유물 발굴 행위는 지렁이의 분변토 형성 행위의 토대 위에서 가능하였다. 즉 지렁이의 분변토 형성과 고고학자들의 발굴 행위 등이 연합되어서 오늘날 우리가 공룡의 화석이나 고대의 유적과 같은 고고학적 유물을 연구하고 관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넷은 지렁이와 같은 “비인간의 행위성을 인간 행위성의 가능 조건으로 상정해야 한다(we must posit a certain nonhuman agency as the condition on possibility of human agency)”고 말한다(『생동하는 물질』, 245쪽). 이것은 아렌트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조건’이라는 문제 의식을 존재의 ‘행위성’의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동학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공경하는 경인(敬人)이 아니라, 사물을 공경하는 경물(敬物)이야말로 도덕의 완성이자 극치이다”라고 최시형이 말한 이유도 설명가능하다. 사물이 사람의 가능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물을 공경하지 않으면 사람의 존재 근거도 붕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연이 불안정해지면 문명이 뒤흔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최한기의 활동운화

흥미롭게도 베넷과 유사한 생각은 찰스 다윈(1809~1882)과 동시대의 한국철학자 혜강 최한기(1803~1879)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한기는 1857년에 쓴 『기학(氣學)』에서 만물은 모두 ‘활동운화(活動運化)’라는 활동성을 공유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대저 기(氣)의 본성은 ‘활동운화’하는 것이다. 우주에서는 지구, 해, 달, 별이 운화하는 가운데 점차 이루어졌고, 지표면에서는 바다와 육지의 산물들이 운화하는 가운데 점차 이루어졌다. 사람의 몸에서는 오장육부와 혈맥이 대기의 운화를 이어받아서 신체 내의 기의 운화를 이루고 있고, 병과 항아리에서는 통하고 막힘, 들어오고 나감이 대기의 운화를 이어받아서 병과 항아리 안의 운화를 이루고 있다. 기계에서는 순환하는 기관이 대기운화의 힘을 빌려서 (인간의) 활동을 돕는 바탕으로 삼는다. 생물(生物)에는 영양분을 공급하는 운화가 있고, 후물(朽物=썩은 물건)에는 부패하는 운화가 있다. 

– 최한기 지음, 손병욱 역주, 『기학』, 통나무, 2004, 108-109쪽. (이하, “『기학』”으로 약칭)

 

여기에서 활동운화는 “살아있고(活) 움직이며(動) 운행하고(運) 변화한다(化)”는 뜻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활동성’을 가리킨다. 최한기는 멀리는 지구나 일월과 같은 천체에서부터 가깝게는 병이나 항아리와 같은 도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예외없이 ‘활동운화’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후물(朽物), 즉 시체나 고목나무와 같이 썩어가는 사물조차 ‘부패’라는 활동운화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인물기화(人物氣化)의 통합

최한기는 기의 활동운화를 줄여서 ‘기화(氣化)’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물의 기화를 미루어서 사람의 기화를 헤아리면 저절로 통합된 기화가 있게 된다.

推物氣化, 測人氣化, 自有統合之氣化.

-『기학』, 102-103쪽. 

 

여기에서 사물의 기화는, 다른 곳에서는 〈사물운화(事物運化)〉라고도 하는데(가령 『기학』, 208-209쪽), 지렁이나 쓰레기와 같은 인간 이외의 존재의 활동과 변화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의 기화를 바탕으로 사람의 기화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최한기는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베넷의 표현을 빌리면, 사물의 기화가 사람의 기화의 ‘조건(condition)’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의 기화가 “통합된 기화(統合之氣化)”란 자연 활동(物氣化) 위에 전개되는 인간 활동(人氣化)을 의미한다. 베넷이나 차크라바르티 식으로 말하면,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통합된 천인(天人)의 역사”이다(최한기의 개념을 빌리면 “천인기화天人氣化”라고 표현될 수 있다).

이처럼 최한기가 인간사와 자연사를 통합적으로 보는 ‘천인사(天人史)’와 같은 관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사람과 사물, 인간과 자연을 모두 ‘활동운화’라는 공통의 토대 위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존재를 ‘분할’하기 않고 ‘통합’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존재론은, 서양 현대철학의 개념을 빌리면, 〈평평한 존재론(flat ontology)〉이라고 할 수 있다(레비 브라이언트 지음, 김효진 옮김, 『객체들의 민주주의』 제6장 「평평한 존재론의 네 가지 논제」, 갈무리, 2021). ‘평평한 존재론’이란 종래와 같이 생명과 유기체를 우선시하는 존재론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동등성을 조망하는 존재론”을 말한다(박일준, 「생태와 생명으로부터 존재와 사물로의 전회」, 전현식・김은혜 외, 『생태 사물 신학 : 팬데믹 이후 급변하는 생태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22, 185쪽 참조. 이하, “박일준”으로 약칭.)

 

사물의 위협

최한기가 사람기화와 사물기화 그리고 자연기화를 통합적으로 보았다고는 하지만, 인류세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사람이 하늘을 따른다(承順)”고 하는 전통적인 천인관에서 기화를 생각하고 있다. 즉 사람의 기화가 자연의 기화를 바꾼다거나, 사물의 기화가 사람의 기화를 위협한다는 시점은 아직 없다. 반면에 제인 베넷은 사물이 인간을 위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접하는 것이, 잡동사니, 폐물, 쓰레기 또는 ‘재활용품’이 아니라, 퇴적된 한 더미의 활기 넘치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물질이라면 소비 양식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 『생동하는 물질』 9쪽.

 

사물은 단순히 활동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때로는 그 활동이 인간에게 위협적일 수도 있다. 특히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인 경우에는 더 하다. 제인 베넷이, 최한기와 달리 활동성보다는 행위성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위성은 ‘행위주체성’이라고도 번역되듯이(박일준, 183쪽), 다른 사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물을 주체로 인식할 때, 즉 하나의 ‘힘’을 지닌 행위자로 인정할 때, 우리는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베넷의 저서가 의도하는 바이다.

반면에 최한기의 경우에는, ‘기용운화(器用運化)’라고 해서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만(『기학』, 167-170쪽), 그것이 지니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 이유는 최한기 시대는 아직 지금만큼 사물(인공물)의 힘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최한기에서 베넷에 이르는 150여년 동안 사물의 힘이 급격하게 커진 것이다. 사물의 힘이 거대해진 이유는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했기 때문이다. 인류세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산업활동이 늘어남에 따라 사물의 힘도 그만큼 강해진 것이다.

다만 최한기는 동아시아사상가였던 만큼 인공물보다는 자연물의 활동성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모든 활동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활동을 ‘천지의 운화’라고 보았다(天地氣化. 『기학』 86쪽). 지금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기후’인 것을 보면, 그리고 기후가 하늘과 땅의 기의 활동임을 감안하면, 최한기의 기학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근대인들은 인공물의 사용이 천지의 기화에 영향을 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양자를 합쳐 보면, 최한기가 강조한 ‘자연의 기화’와 근대인의 발명인 ‘인공의 기화’는 상호 침투하고 서로 착종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기후변화의 인류세이다.

 

활동하는 사물에 대한 공경

비록 최한기는 자연물에, 베넷은 인공물에 강조점이 놓여 있지만, 양자 모두 그것의 활동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가령 최한기는 “보사기화(報謝氣化)”, 즉 “기화에 보답하고 감사한다”(『기학』, 50-52쪽)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이 기화 가운데에 태어나서 자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人生養於氣化之中. 『기학』, 79쪽).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전통적인 경천(敬天), 외천(畏天), 사천(事天), 순천(順天) 개념을 재해석한다.

 

경천은 기의 운화에 정성을 다하여 어김이 없다는 것이다.

외천은 기의 운화를 어길까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사천은 기의 운화를 계승하고 받는다는 것이다.

순천은 기의 운화에 감사하며 따른다는 것이다.

– 『기학』, 79쪽.

 

마찬가지로 제인 베넷도 “물질의 힘”에 대한 ‘존중’을 촉구하고 있다.

 

왜 물질의 활력을 옹호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죽어 있거나 철저히 도구화된 물질이라는 이미지가 인간의 오만(hubris)을 키우고 지구파괴적인 정복과 소비의 환상을 키우기 때문이다. (…) 물질의 힘들은 우리를 돕거나 파괴하고, 풍요롭게 하거나 손상시키고, 고귀하게 하거나 타락시킬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주의(attentiveness)를, 심지어 ‘존중(respect)’을 요청한다.

– 『생동하는 물질』, 11-12쪽.

 

여기에서 베넷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오만이 자연에 대한 정복과 소비를 키웠고, 그것이 지구 파괴를 낳았다고 지적하면서, 물질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오만(hubris)에서 존중(respect)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즉 최한기가 자연의 기화에 대한 인식과 공경을 강조했다면, 베넷은 물질의 힘에 대한 인식과 존중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신생철학』(1974)의 저자 윤노빈은 동학을 “人乃賤(인내천)”에서 “人乃天(인내천)으로 전환한 사상이라고 하였다. 사람을 천하게 대하던 세상에서 귀하게 대하는 세상으로의 전회를 제창하였다는 것이다. 이 표현을 빌리면, 베넷의 사물철학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物乃天(물내천)에서 物乃天(물내천)으로 전환하라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물질개벽의 양의성(兩意性)

이러한 맥락에서 번역자인 문성재는 베넷의 사물철학(new materialism)으로부터 “사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의 변화”라고 하는 실천적인 함축을 끌어내고 있다.

 

비-인간 물질의 힘에 주목하는 제인 베넷의 통찰은 작금 우리가 당면한 코로나 시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다. (…) 마치 베넷이 언급한 지렁이의 ‘작은 행위성’과 같이 바이러스는 우리의 안과 옆에서 인간과 함께 역사가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행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인간으로서는 제어할 수 없는 비-인간 물질인 바이러스의 힘에 주목할 수 있다면 (…) 자연을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실천적인 자세를 새로이 취할 수 있을까?

– 『생동하는 물질』, 〈옮긴이의 말〉304-305쪽.

 

여기에서는 비인간 물질(nonhuman matter)의 힘의 예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들고 있지만, 지금 다시 〈옮긴이의 말〉을 쓴다면 아마 ‘기후’도 추가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발명한 물질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연을 소비하는 행위는, 마치 부메랑처럼 인간에게 다시 돌아오고 있다.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인 제임스 러브록은 그것을 “가이아의 복수(The Revenge of Gaia)”라고 하였고(제임스 러브록 지음, 이한음 옮김, 『가이아의 복수』, 세종서적, 2008), 종교철학자 박일준은 “물(物)의 역습”이라고 하였다(박일준, 182쪽).

이렇게 보면 개벽사상에서 말하는 ‘물질개벽’은 이중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말 그대로 과학의 진보에 따른 ‘물질의 발달’이라는 의미에서의 물질개벽이고,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해 물질이 전례없는 힘을 갖게 됨에 따라 물질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의미에서의 물질개벽이다. 마치 신분해방으로 인해 노비의 지위가 개벽되었듯이, 과학기술로 인해 물질의 지위도 개벽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개벽에 대응되는 개념인 ‘정신개벽’은 그러한 물질을 대하는 응물(應物)의 태도의 변화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서양의 사물철학은 이런 의미에서의 정신개벽을 촉구하고 있다.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다시개벽'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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