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동체 속에 산다. 이른바 히피 공동체, 농사 공동체, 마을 공동체, 대안 공동체, 생활 공동체 등등으로 불리는 곳에 어언 10년째 기웃거리고 있다. 수많은 실패와 작은 성공이 있다. 허울 좋은 이상은 항상 어이없게 무너지고, 하루하루 펼쳐지는 일상 속 웃음은 단단한 위로가 된다. 그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다.
이 같은 공동체 속에서 크게 드러나는 것은 소속감과 관계감이다. 기존의 시스템 아래 돈, 상품, 서비스로 치환된 관계가 다채로운 색깔로 펼쳐진다. 먹다만 물컵을 치우기 위해, 수채 구멍에 막힌 머리카락을 빼기 위해, 오늘의 점심을 다같이 먹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역 대행 서비스가 아니라 관계를 다룰 마음이다. 나의 호의를 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너의 호의를 받을 수 있는 마음. 이 주고 받음의 핑퐁게임 속에서 너와 나의 관계성이 눈덩이처럼 커져간다. 그리고 우리라는 단단한 소속감을 형성한다. 이같은 주고 받음의 문화가 펼쳐진 곳이 태평양이다.
인류는 어쩌면 지구의 공동체, 지구의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마 아프리카 초원에 계속 남아있기에는, 저너머 땅과 바다가 궁금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네 발에서 기어다니기를 중단했다.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두 팔로 물살을 저어갔는지 모른다. 그것이 10만년 전의 일이다. 6만 5천년 전에 호주 대륙에 도착했고, 1만년 전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렀다. 이 지구 상의 모든 대륙에 정착한 듯 보였다. 그러나 다시 6천년 전에 이르러 특이점이 시작된다.
지금은 타이완이라 불리는 땅, 남한의 전라도 크기만한 작은 섬이다. 그러나 작은 섬 속의 해발 3000m이상의 깊은 산들이 증명한다. 이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마지막 장벽 같은 곳이다. 최후 간빙기까지 황해, 동해, 남해, 그리고 대만해협에 이르는 바다는 모두 땅이었다. 마치 최정예 요원이 곡예 비행을 부리듯이 인류는 이 가파른 장벽을 뛰어넘어, 바다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후 3천년간 무서운 속도로 성큼성큼 다시 나아간 것이다. 그들이 남도어족(南島語族)이다.
마다가스카르 섬부터 이스터 섬까지. 타이완에서 뉴질랜드까지. 동서의 거리는 지구 절반에 육박한다. 면적은 캐나다의 5배 면적으로 1,000여개의 섬이 펼쳐진다. 이 곳에 남도어족, 흔히 폴리네시아인이라 불리는 문명이 피어났다. 첫 발견은 굉장히 극적인 것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야 서쪽 끝에서 온 영국인 쿡 선장은 기이한 모양의 배를 발견했다. 세계 탐험 중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돛이 달린 배였다.
그들은 미개한 원시인이 아니라 새로운 외계인과 같은 존재였다. 실체를 마주하며 더 놀라운 것은, 나침반도 없이 그 커다란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해류와 조류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줄 알았다. 200개 이상의 별자리, 20개 이상의 바람 방향의 분류, 갑판에 엉덩이를 깔고 파도를 느끼고, 또 제 몸을 직접 물에 담궈 섬의 조류를 느꼈다. (『바다인류』, 주경철)
더욱더 기이한 것은 그들이 남긴 시스템이다. 태평양 트로브리얀드 군도에는 쿨라 시스템(Kula ring)이 남아 있다. 쿨라는 순환을 뜻헌다. 이는 일종의 네트워크 그물망이다. 1년에 한 번씩 섬의 사람들은 서로 사물을 주고 받는다. 예컨대 1시 방향의 섬은 2시로, 2시는 3시로, 3시는 4시로.. 이렇게 시계 방향으로 바다를 건너간다. 또 반시계 방향에서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고 받는 선물의 내용이 독특하다. 생필품도 아니고 사치품도 아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개껍데기다. 그것을 팔찌와 목걸이로 만든 장식품이다. 장식품을 건네기 위해 목숨을 건 항해를 하는 것이다.
태평양에서 주고받는 마음은 어떻게 된 것일까. 선물의 감각으로 그 마음을 추론해본다. 우리는 모두 선물 주고 받은 경험이 있다. 그리고 선물이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합리적인 거래의 영역을 뛰어넘는 감각이다. 무언가를 조건없이 줘보고, 또 조건없이 받아본 경험은 특별한 것이다. 부모의 사랑, 친구의 우정, 여행자의 환대 등등. 그것은 마음을 건드리는 커다란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각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주고 받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줄 수 있는 용기이자 받을 수 있는 용기이다. 합리적인 거래의 감각을 뛰어넘은, 날 것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돈이라는 것은 아주 훌륭한 방어막이다. 우리는 돈을 통해 많은 것을 주고 받는 시대를 가능케 했다. 터치 한 번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보내는 일은 어찌나 쉬운지 모른다. 터치 한 번으로 누군가에게 밥을 얻어먹는 일도 너무나 쉽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길을 걷다 만난 누구에게 “밥을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길을 걷다 만난 누군가에게 내가 귀중하게 보낼 “선물을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관계는 마치 야생의 감각과 같다. 언제든 예상치 못한 반응이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추론한다. 마치 폴리네시아인들이 미지의 바다를 나아가며, 그 바다 속의 물살과 자연의 압도적인 것을 제 몸으로 느끼고 제 마음으로 받았을 때, 지구의 극적인 것을 용기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은 이내 기쁘게 줄 수 있는 마음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그들이 준 마음은 하나의 증표같은 것이다. 자신이 떠나온 험난한 여정을 증명해주는 자랑스러운 소속감이기도 했다. 그 커다란 리츄얼을 마친 그들은, 이웃섬에 선물을 건네고, 하나의 문명 세계 속에 안착한 것이다.
우리의 관계를 섬으로 상상해보자. 바다가 서로의 사이에 있고, 그것을 건너가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가닿은 당신의 마음에게 어떤 축복의 선물을 보내는 상상을 해본다. 마찬가지로 언젠가 내 마음에 다가올 당신을 큰 환영을 하며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이같은 선물의 감각은 우리가 ‘회복할’ 감각이다. 분명 존재했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희미해진 감각이다. 인류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에 존재했던 사물의 순환 방식은 교환의 방식보다도 더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태평양에 펼쳐진 물의 길은 일종의 순환 감각을 키우는 훈련이었다. 지구의 험난한 환경을 받아내며, 바다보다 큰, 지구보다 큰, 태양보다 큰, 우주보다 큰 용기를 나눠줄 문명이 태평양 바다에 넓게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누가 용기있게 선물을 주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받을 생각에 급급하다. 주기도 전에 받을 생각을 하거나, 혹은 받는 경험도 쉽지 않다. 무엇을 뜯어가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는 시대이다.
전쟁의 뉴스도 끊이지 않는다. 러시아가 침공하며, 유럽은 공동체에서 멀어지고 다시 안보 중심체제로 서로를 경계한다. 저 먼곳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가까운 곳의 소식도 그리 반가운 것은 아니다. 오늘날 태평양에는 선물이 아니라 미사일과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남한, 일본, 대만와 같이 동중국해에 떠있는 섬들에게 남쪽 나라 이야기는 동화같기만 하다.
지금까지 약 10만년 전부터 펼쳐진 물의 길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가 익숙한 2천년 문명사에서 물의 길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균형있게 회복할 길을 모색하고 싶다. 다음 무대는 지중해다. 지금은 요트, 유람선 등 각 종 레저활동이 활발한 아름다운 휴양지다. 그러나 더 오랜 기간 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였다. 전쟁과 군비 경쟁의 각축이 벌어진 곳이다.
대만, 일본, 중국, 제주 강정 등, 동아시아의 섬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왔다. 동아시아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 언어, 동아시아 도덕경"(모시는사람들)을 출판했다. 전남 곡성에 산다. 몸, 마음, 지구를 아우르는 항해학교를 만들고 있다. 물의 길을 다시 꿈꾸는 프로젝트이다. 배를 타고 섬들을 잇는게 꿈이다.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