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자동차부품사의 노동조합 교육에 강사로 초청되어 다녀온 적이 있다. 이 회사는 한번 들으면 모두들 귀에 익숙할 만큼 한국에선 보기 드문 세계적인 자동차부품 전문회사이다. 연구개발비만 해도 매년 매출액 대비 5%이상을 투자할 만큼 열심이다. 그 때문인지 브레이크, 스티어링(방향유지 장치), 서스펜션(충격완화 장치)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지니고 있으며 국제시장 점유율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러한 기술력의 뒷받침이 있기에 다른 부품사와는 달리 이 회사는 요즘의 심각한 자동차산업의 위기 가운데서도 나름의 정상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회사에도 한 가지 ‘우환’이 있다. 그것은 재벌경영 문제인데, 이 때문에 원래 회사로 귀속되어야 할 과실들이 자꾸만 외부로 새어 나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예컨대 2014년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이 부품회사가 보유하던 현금 중 많은 부분이 지주회사로 옮겨졌다. 이리하여 부채비율이 갑자기 높아졌으며,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같은 그룹 내 다른 계열사가 비자금조성, 탈세, 회계부정 등으로 검찰과 세무서의 조사를 받으면서 수백억 원의 ‘과징금’을 맞았다. 총수가 관여된 것으로 보이는 이 사건의 불똥이 자사에도 튀지 않을까 노조원들은 내심 걱정인데, 여기서도 한국 재벌경영의 고질적인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이상의 현황을 대충 파악한 후, 조합원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어야 할지 고민하였다. 비록 강연 요청을 받은 강사라면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하게 마련이지만, 어쨌거나 청중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교육이 되려면 그들이 이 시점에서 관심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아직 이 회사 노조와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던 필자로서는 인터넷을 뒤져가면서 조합원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입수한 정보에 기초해서 필자의 추론과 ‘상상력’을 더했지만, 여전히 막연하다는 느낌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필자가 하루 전날 현지에 내려가서 그곳 교육담당자와 환담을 나누는 가운데 이 같은 고민은 조금 덜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대충 현장 분위기와 조합원들의 고민지점이 어디에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은 예상대로 현재 한국 자동차산업의 위기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장에서 작업물량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이 보이고, 비교적 괜찮다는 동종 회사들이 하나 둘씩 적자를 보면서 넘어지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요즘은 인터넷과 SNS가 발달해서 자기 직장과 관련된 정보는 웬만해서는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있는 이들의 눈을 피해가지 못한다. 때문에 조합원들은 노조간부나 외부 강사보다도 자기 회사에 관해서 훨씬 구체적인 사항까지 파악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그들이 진짜 궁금해 하는 것은 “한국 자동차산업이 어렵다”, “당신네 회사도 위험할 수 있다.” 와 같은 어둡고 힘 빠지는 얘기를 복잡한 통계나 논리를 통해 다시 듣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얘기, 특히 ‘전망’을 찾고 싶어 한다.
이 부분과 관련해선 중국 경험이 제법 있는 필자이기에 나름대로 할 얘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자신이 붙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 자동차산업의 위기는 한편에선 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례없는 기술혁명에 의해 야기되고 있는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과거 한국에 거대한 시장이자 기회로만 여겨졌던 중국이 이제는 무서운 ‘경쟁상대’로 급변한 때문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합원이 기대하는 ‘전망’ 문제를 필자의 중국생활 체험과 관련하여 얘기한다면 자연 관심도가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회사 노조는 수년전에 기업노조로 전환하였는데, 그 이후 전 집행부 때까지는 ‘인생 이모작’, ‘재테크 성공법’ 등과 같은 교육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이는 근속년수가 평균 20년 이상으로 정년퇴직을 앞둔 조합원들이 많은 상황을 고려한 때문이었는데, 당연히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퇴직 후 어떤 생활을 해야 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필자 역시도 그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만 방향에 있어선 기존의 교육내용과는 달리하였다. 필자는 현재 한국 자동차산업의 위기의 핵심에는 ‘재벌경영’ 문제가 있으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는 ‘공기업화’ 밖에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중국 국유기업의 사례를 여러 가지 들었는데, 그 중 한 가지를 아래에서 소개하도록 하자.
중국은 국가차원에서 우수한 국유기업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사회보장제도가 의외로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국민연금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양로보험’의 가입자 수는 무려 8억 명을 넘는다. 이 같은 가입률은 양로보험이 취업가능연령 15세 이상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볼 때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의 경우엔 13억 인구 대부분이 이미 포괄되었다고 중국정부가 2009년 말 공식 발표한 적이 있다. 또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 임금상승률 등을 고려하여 중국정부는 위의 양로보험에 대해 매년 일정 비율의 수령액에 대한 인상을 실시한다. 금년에도 지난 3월20일에 5% 인상률을 발표하였는데, 이 수치는 지난 해 중국의 경제성장률 6.5%와 비교할 때 비록 다소 낮긴 하지만, 이 같은 인상 조치가 2005년 이래 15년째 해마다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직장인의 경우 중국은 여성 55세, 남성 60세가 되면 정년퇴직을 한다. 중국 가정은 대부분 부부가 모두 직장을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두 사람의 퇴직금을 합치게 되면 적지 않은 금액이 된다. 또 대부분 자기 주택을 보유하고 있어서, 두 사람의 생활비는 물론이고 명절이나 평소에 자식과 손주들이 예고 없이 방문해도 용돈 주는 일에 별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밖에도 옛 직장 동료들과의 회합, 혹은 문화대혁명 때에 함께 농촌으로 하방 되어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들과의 정기적 만남 등에도 어려움이 없다. 그렇게 지출하고도 여유가 있어 이들은 국내 여행이나 해외여행에도 자주 나선다. 우리가 요즘 보는 세계 각지를 휩쓸고 있는 ‘유커’ 열풍은 바로 이들 퇴직자들이 주력군이 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이제 겨우 1인당 GDP 1만 달러를 목전에 둔 중국 인민들이 지난해 이미 3만 달러에 도달한 한국 사람들보다도 얼핏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더 잘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국에는 유수한 국유기업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리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예컨대 2016년 한 해만 하더라도 공상은행과 같은 국유은행은 혼자서 순이익 50조 원 가까운 돈을 벌어들였다. 이 밖에 중국이동통신이 18.5조원, 상해자동차가 5.4조원…… 이처럼 전국의 수많은 국유은행과 다른 업종의 국유기업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이 대부분 그 대주주인 국가로 귀속된다. 결국 그 돈들은 전국에 고속철도를 깔거나 인민의 복지향상에 쓰여 짐으로써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 국유기업의 사례는 한국의 재벌기업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근래 들어 세계 최대의 반도체 호황 때문에 한국의 간판기업 삼성전자는 천문학적인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그 절반은 외국인(54%)이 가져가고, 남은 것 절반(25%)은 다시 재벌 총수일가에게 돌아감으로써 정작 서민들은 별반 반도체 경기호황의 혜택을 실감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례야 말로 GDP 총량 기준으로 이미 세계11위 ‘경제대국’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선진국은 물론이요 중국에 비해서 조차 형편없는 사회보장제도를 갖고 있는 한국사회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좋은 열쇠라고 보여 진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이 회사 전 노조집행부의 ‘인생 이모작’과 같은 교육의 문제점인데, 요즘처럼 한국 자동차산업 전반이 위기인 상황에서 그 같은 교육은 자칫 잘못하면 패배주의나, 혹은 나만 무사하면 된다는 식으로 조합원들을 이끌 위험성이 있다. 자기 회사와 한국 자동차산업의 운명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워주기 보다는, 어찌 보면 ‘각자도생’을 유도하는 식의 이 같은 교육은 잠시 조합원들을 혹하게는 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이런 식의 교육은 우선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교육생들에게 제대로 일깨워주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어느 정도 잘 갖추어져 있는 서구의 경우 퇴직자들은 정년이후 여행이나 취미생활로 노후를 보내지, 다시 ‘창업’ (대개의 경우 자영업자로 변신하는 것을 의미)을 위해 고심하지는 않는다. 한국은 이에 비해 세계에서 자영업자 비중이 매우 높은 나라에 속하는데, 이는 결코 ‘제2의 창업’ 운운하며 자랑스러워 할 만 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경제의 외형적 성장에 걸맞지 않는 한국사회의 치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창업’은 또한 조합원 개개인의 노후 해결책과도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한국의 직장인들이 정년 후 너도 나도 먹고살기 위해 자영업자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이 분야에 있어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날고뛰는 재주가 있다 해도 이처럼 좁은 바닥에선 누구라도 성공하기가 힘들다. 실제로 자영업자 중 2~3년 사이에 10명 중 8~9명은 실패하고, 그럭저럭 생존하는 경우가 겨우 1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니 ‘인생 이모작’은 자칫 알량한 퇴직금 까먹는 길을 가르쳐주는 교육이라 하겠다.
‘이모작 교육’의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은 어찌어찌하여 정년을 채우고 노후를 보낼 수 있다 손 치더라도, 과연 자식들 세대에 대한 배려까지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 자동차산업 전반이 무너져 내리고, 현대차나 기아차 같은 간판급 회사들까지도 국제 메이저의 종속회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면, 아마도 한국은 ‘비정규직’ 천지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도 이미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는 비정규직 때문에 한국사회는 곳곳에서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오면서 홍역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고속 회전하는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참혹한 죽음을 당한 김용균씨는 그 사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군대에서 제대한지 불과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사회 초년생이었다. 혹독한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했건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결국 찾아간 곳이 그 같은 위험한 직장이었다. 이는 결코 김용균 청년 한 사람만의 얘기가 아니며, 점점 더 많은 우리 젊은이들과 자식들이 앞으로 마주해야 할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우리 세대가 자식들에게 비정규직의 서글픈 인생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못난 세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내용의 강연이 이날 일정한 공감을 일으킨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면서, 필자는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그간의 유학생활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자위를 할 수 있었다.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 사회를 연구할 목적으로 16년간 중국 유학생활을 보냈다. 중국인민대학과 상해재경대학에서 각각 금융(학사)과 재정(석사)을 전공했고 최종적으로 북경대에서 레닌의 정치신문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7년 8월 귀국하여 울산에 정착해 현재 울산 평등사회노동교육원에서 교육강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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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사이트가 있는 글입니다. 중국하면 막연히 ‘후진국’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 있었는데 국가주의의 장점이 분명히 있군요. 그동안 타임스퀘엉에 걸려있는 삼성로고에 너무 취해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은 어찌보면 북유럽보다 더 복지국가가 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중국의 의료보험 운영상태가 궁금해서 기사 검색을 했더니
위에 말씀하신것과는 반대로 참혹한 상황이더군요.
이런 글을 쓰신의도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중국 의료실태 기사입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063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