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쉬지린(許紀霖)이라는 학자를 알게 된 것은 올해 들어서이다. 중국연구자들의 동아시아 역사관에 대해 검색을 하다가 중화문명과 천하주의에 대한 그의 강연을 우연히 ‘삐리삐리’에서 보게된 것이 계기였다. 그후 <맥동중국>의 출간을 전후해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족보’를 알지 못했다. 다른 수많은 중국학자들처럼 원래 중국의 전통문화와 사상에 천착하는 역사학자일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그의 서평을 준비하면서, 한국의 중국학 연구자 한분이 내게 뜻밖의 커멘트를 남겼다. “자유주의자인 쉬지린을 좋아하다니 의외네요.” 여러 의미에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일단 그가 자유주의자라는 사실을 몰랐고, 둘째로 내가 자유주의자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는 것도 뜻밖이었다. 아니 두번째 상황은 납득할만한 이유도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나의 좌표’는 과연 무엇일까 조금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좌파성향의 리버럴” 정도로 스스로를 이해했는데, 2019년 한국사회의 격렬한 논쟁을 겪고 난 후에는 내가 어느 편인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한 진영에 속하게 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깊은 회의를 품게 됐다.
이와 같은 외인뿐 아니라 내인도 작용했다. 나는 소위 ‘개벽파’와 어울리며 자신을 “동학을 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좌우나 진보–보수와 같은 프레임뿐 아니라, 서구와 동방, 전통과 진보와 같은 훨씬 다양한 차원으로 세상을 파악하려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내가 관심을 가지고 계속 들여다보는 중국 사회와 정치는 이런 시각이 아니라면 ‘전근대’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일단 이런 시좌에서 동아시아와 다른 비서구권 사회들을 들여다 보니, 예전에는 단순히 부조리한 현실로만 받아들이던 사실들을 조금 더 중립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어떤 사회와 국가도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는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봐야할 나름의 맥락과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특히 중국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내 파트너를 포함한 중국친구들과 부대끼며 살다보니,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의 관점과 행동들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중국 공산당정부나 이와 깊은 연관이 있는 중국인들의 어떤 성향에 대해 한국인들이 최대한 편견을 배제하고 바라보길 원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내 관찰결과를 공유했다. 이런 설명이 이어지면서, 중국을 이념적으로 비판하는 한국인들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리버럴이나 진보성향의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는 일이 잦아져서, 자연스럽게 ‘페친’들에게 ‘반자유주의자?’로 낙인이 찍혀버렸던 것이다. 그런 지적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답했다. “리버럴은 좌우파에 비해서 이념측면은 유연한 중도에 가까워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그렇고요. 그래서 최근 한국의 리버럴이 민족주의에서 비롯한 중국에 대한 감정을 자유민주주의 이념으로 포장하여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더 염려되는 것은, 중국에 미국의 이념을 대리하는 것으로 여겨져, 필요 이상의 반감을 사게 되는 상황이고요.”
개벽파의 다른 지인과도 쉬지린의 자유주의적 성향에 대해서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가 서구적 관점을 포함한 바깥의 생각에 열려 있는 동시에, 문명에 해당하는 보편가치에 부합하는 중국의 전통을 재구성하려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고금합작을 이루는 좋은 사례가 아니겠냐고 내 감상을 나눴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 나는 현대중국 지식인들의 유형과 변화의 역사를 살펴보고 나서야, 쉬지린이 원래 반전통을 추구하다가 2000년을 전후해서 중국의 전통사상에 관심을 갖게됐고, 그뿐 아니라 많은 중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변모를 자유주의의 중국화로 부른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지인이 쉬지린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서구적인 자유와 평등과 같은 가치관에 목을 매던 그의 과거의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점차 ‘중국화’하지만 보편성을 놓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은 역시 다양한 차원의 시각으로 들여다 볼 때만 편견없이 전모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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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은 <만들어진 전통>에서 전통문화라는 것이 당대 지배층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되거나 심지어 창조됐다는 사실을 스코틀랜드 킬트와 영국왕실의례의 예를 들어 실증적으로 설명한다. 프라센지트 두아라는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에서 중국의 근대계몽사상가들이 어떻게 상황에 따라 역사의 조각 이야기들을 취사선택해가며, 근대적 국민국가 서사만들기에 동원했는지 논증한다.
쉬지린이 <맥동중국>을 통해 중국의 전통문화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이와 결을 달리해 볼 수도 있다. 그는 공산당정부와는 각을 세울 수 밖에 없는 대표적인 자유주의 지식인이고, 그가 설명하는 전통문화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지식인과 사상연구에 속하므로, 기원이 불분명한 생활전통이 아니라 근거가 명확한 기록과 문헌에 기반한다. 하지만, “바람직한 정치경제체제와 그 이념”을 정의하려는 목적이나 공공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을 놓고 생각한다면 그 의도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닐지 모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주류한족과 변강지역 소수민족간의 불화, 일국양제의 형해화, 중국특색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진화과정에서 살필 수 있듯이 아직도 ‘중화민족의 정체성’을 형성중인 ‘미완성 네이션스테이트’이기 때문이다.
쉬지린은 80년대 ‘문화열’의 신계몽시대를 겪고 격렬하게 반전통을 추구했으나 2000년을 전후해 유교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전통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는 많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정체성 고민속에 취한 노선인지라, 외부에서는 자유주의의 중국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통문화50강’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원래 학부교양과목에서 출발해 올해 일반인을 위한 대중서로 출간됐다. 그가 중국지식인을 중화문화정수의 수호자 역할을 의탁받은 유가사대부의 계승자로 호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류사상은 유학이다. 춘추전국시대 공자와 그 후예인 맹자, 순자를 거쳐 서한西漢의 동중서가 이를 국가이념화하고, 송명리학에 이르러 주희의 이학과 왕양명의 심학으로 근대직전의 유학이 완성되고 다시 허물어진다. 그런데, 서구문명의 충격에 앞서 이미 양명학은 천리天理로부터 인간정신의 해방을 추구했으니, 이미 내재적 극한에 이른 것이다. 얼마전 100주년을 맞은 중국 공산당의 창립자 천두슈나 루쉰과 같은 지식인은 거기서 딱 한발자국 더 나갔을 뿐이다. 마오쩌뚱, 량치차오, 리따자오, 량슈밍을 포함한 수많은 혁명가와 계몽지식인들이 바로 양지良知로 판단하고 지행합일을 실천한 양명학의 후예이다.
유학은 이 과정에서 묵가, 양주와 변론하며 발전했고, 법가를 낳거나 음양가를 흡수하고, 불교의 도전을 받아 완성된다. 그래서 유가의 주선율속에 이에 영향을 받은 불가, 도교 그리고 법가 등이 보조를 맞춘 중국 전통문화가 어떻게 종교, 정치, 사회구조속에 녹아들어 있는지 이 책은 시원스럽게 묘사한다.
그렇다면, 전통의 창조적 전환이라고 부르거나 고목에 새싹이 돋는 것이라 비유한, 중국전통의 현대적 재구성은 어떤 것인가? 이 책은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몇가지 힌트만을 남긴다. 예를 들면 유가가 추구한 최상급 도덕경지인 맹자의 호연지기나 천민天民이란 표현으로 드러나는 천인합일이 ‘우주적 시민의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강연록다운 호기로운 표현같은 것이다. 딱 그 반대쯤에 놓일 도덕의 최저선이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는 己所不欲,勿施於人”인데 중국 외교의 트레이드 마크인 대외불간섭정책이 떠오른다.
보다 구체적인 그의 생각은 <가국천하家國天下, 2017>와 같은 다른 저작에서 보다 엄밀한 논증과 함께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민국초기 (1912~1927) 근대 중국지식인과 정치인들의 국민국가만들기 과정에서 각 파벌이 어떻게 현실의 전통과 이상하는 백가쟁명식 서구문명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사상과 실천을 전개해 나갔는지 설명한다. 그가 끝내 아쉬워하는 것은 중화문명과 그 육신인 왕조를 중화민국으로 대체하면서 모든 세력이 권력의 확대에만 몰두한 나머지 ‘헌정’과 법치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점이다. 그리고, 그 후과는 현재까지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춘추시대에 이미 관중은 ‘법의 지배 法治’의 전통을 세웠으나 그가 중화문명 최악의 사상적 유산이라 생각하는 법가가 이를 ‘법에 의한 지배 法制’로 변질시켜 군주의 독재 수단으로 악용해왔다.
군주와 사대부가 권력을 분점하는 共治天下의식이 퇴행하거나 중앙과 지방의 권력이 균형을 맞추지 못하게 된 것은 사연이 훨씬 복잡하다. 제국의 통치철학인 유학은 송명리학으로 진화해오며 도덕정신과 개인의 위치를 키워 점차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고 문치를 강조하는 송나라의 ‘개명開明’군주들을 낳았다. 한지만 원에 의해 뒷걸음질치며 다시 등장한 전제정치는 명청으로 끝까지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황제에 맞설 권력을 가진 중앙의 명문세가귀족과 지역향신鄉紳의 두얼굴을 가진 사대부 세력이 과거제등을 통해, 지역의 평민 아니면 직업관료로 권한이 점차 축소되면서, 황제의 권위와 권력이 강화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핵심적인 구조적 한계는 여전히 영국과 같이 명문화된 대헌장을 쟁취하지 못하고 성군의 우연적 출현에만 기댈 수 밖에 없었던 제도 탓이다. 중국이 통일제국으로서 지방자치를 실시한 것은, 공자가 예찬하던 문자그대로 혈연에 기반한 종법봉건제도를 유지한 서주西周시대가 유일했고, 진한秦漢이후의 군현제가 무너진 것은, 민국초기 국민당 지지세력이었던 군벌과 지역향신의 연합체가 연방제를 추진했던 짧은 시기뿐이다. 봉건시대로의 회귀와 중국의 사분오열을 두려워했을뿐 아니라 인민민주를 추구했던 국민당은 결국 소련볼셰비키의 영향하에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당-국가체제를 선택한다. 공산당이 아니라 1차 국공합작시기의 국민당이 만들어 놓은 원죄이다.
크고 오래되고 복잡한 중국이라는 역사공동체가 겪은 패러독스는 이뿐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과거제와 그 전에 시행되던 찰거察舉제이다. 이는 시험이 아니라 지역귀족들이 천거한 인재를 정부에서 관료로 등용한 방법을 말하다. 우리의 음서제와 비슷한 것 같다. 당연히 계급제의 유산이고 귀족들의 권력을 세습하는 통로가 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재를 시험이라는 이벤트가 아니라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즉, 수능과 학생부종합전형의 차이같은 것이다. 과거제, 그리고 귀족계급의 몰락은 당연히 신분제 타파를 통해, 평등한 사회를 이룬다는 혁명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중국의 경우 이미 거의 천년전에 일어났다. 그런데, 유럽의 대표적 신분제 사회인 영국과 비교하자면 현재 중국이 고민하고 있는 여러가지 역사적 근대화의 문제들을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황제와 중앙권력의 지나친 강화로 헌정이 바로서지 못한 부분은 이미 언급됐다. 또 하나는 영국의 경우 계급사회가 유지되는 가운데, 근대적 의미의 자유와 평등이 확보되면서, 직업의 귀천의식이 약화된 점이다. 반대로 중국에서는 모두가 ‘시험제도’를 통해 계급의 사다리위로 올라서고 싶어하면서, 지나치게 경쟁이 강화되고, 동시에 능력주의와 우승열패의 신화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갑질문화’가 횡행하게 된 것이다. 억울하면 노력해서 시험을 잘봐야 하고, 그렇게 승리한 자에게 패배한 자를 짓밟아도 되는 황금채찍이 주어졌다. 이 문제는 과거제의 문화적 전통이 계승된 한국에서 똑같이 관찰된다. 동아시아 지식인 집단의 원형인 사대부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평민과 귀족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상적으로는 자유를 갈망하는 정신적 귀족주의와 평등을 추구하는 물질적 사회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겠으나, 인간은 세속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반대의 조합도 많고, 흑백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애매한 문제들이 ‘지식인의 위선’으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물론 피케티의 지적과 같은 브라만좌파의 등장은 지식경제 사회에서 중국이나 동아시아뿐아니라 글로벌한 현상이기도 하지만 유독 동아시아 사회에서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변화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주류사회바깥의 전통은 어떤 것이 있을까? 혼세에 변화와 혁명의 원동력이 되는 체제바깥 강호江湖세계의 지식인遊士, 무인遊夾, 백성遊民들이 있다. 이때 일시적으로 묵가의 이상주의와 카리스마적 전통이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책에는 명시적 언급이 없지만, 마오이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쉬지린은 정치의식이 결여된 중국의 상인계급을 경제동물로 비하한다. 그러나, 중국 전통문화의 주류인 농경문명, 그리고 이를 보완하는 북방 유목문명에 비해 남방해양문명과 결합된 상인문화를 간과하는 것은 정치적 민감성 때문인지 사상적 입장의 차이때문인지 조금 불분명하다. 화교상인과 민족자본가들이 신해혁명과 근대화실천을 지지하거나 이에 참여한 역사적 사실이나, 폐간된 반중언론이자 황색신문인 홍콩빈과일보의 사주인 지미라이같은 기업가가 투옥과 재산몰수를 마다하지 않고 있는 현실은 명백한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적은 분량이나마 사대부가 상업에 뛰어든 유상儒商의 전통과 명나라 이후 상인들이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외형적 문화자본의 획득에 힘쓴 사실도 함께 다뤄진다.
쉬지린이 한국의 학계와 오랜 기간 깊은 교류를 나누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신천하주의때문이다. 그는 문화와 문명의 차이를 보편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그것을 달리 말하면 ‘우리 것’과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좋은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문명은 현대서구문명의 뿌리와 함께 축의 시대에서 비롯한 고대문명중 하나이지만, 아직 충분히 근대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일정한 물질적 풍요를 달성한 중국의 다음 행보는 더 많은 부와 권력이 아니라 새로운 중화문명의 건설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즉, 패도가 아닌 왕도의 길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이것을 신천하주의라고 칭하는데, 출신민족이 아니라 문명의 수용여부로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했던 것 같은 옛천하주의의 장점은 살리되, 탈중심성, 탈등급성을 확보하여 문화적 다원주의와 롤즈의 개념을 확장하고 재해석한 ‘중첩적 합의’를 통해 이를 실현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독일낭만주의자인 헤르더와 이샤야 벌린이 계승한 문화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윤리의 최저선에 기반한 얇은 세계주의적 보편성과 두터운 민족국가의 내부적 공공이성을 중첩할 것을 제안한다. 백영서가 일찌기 신천하주의에 대해 제기한 두가지 질문, 즉 신천하주의에 걸맞는 중국내의 정치경제제도와, 신천하주의의 동아시아적 혹은 세계적 확장에 대해서, 나름대로 성실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중국내 학문과 표현의 자유의 한계는 감안하고 읽을 수 밖에 없는 점이 조금 아쉽다.
맥동중국은 중국의 전통문화와 사상이 그야말로 화수분인지라, 얼마든지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교양서로써의 깊이의 한계는 매 강의마다 달아 놓은 추천서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극복된다. 그의 주장은 근대국가나 문명제국 중국의 완성을 위해서도 유용하겠지만, 중화문명에 빚지고 있는, 이웃 나라들이 함께 근대를 넘어설 새로운 동아시아 문명을 상상하는 길잡이 역할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나가며
‘한국문명’은 가능할까? 나는 얼마전 여러 지인들과 페이스북에서 한국문명의 가능성에 대해서 논쟁한 적이 있다. 나는 쉬지린의 정의를 따라, 문화는 특수하지만, 문명은 남이 익히고 배우고 싶어하는 보편성을 갖출 때만 자격을 획득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특정 민족국가의 문화가 아니라 주변 지역으로 발산되는 제국의 문화만이 문명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한국문명이라는 표현은 내게 형용모순같은 것이다. 한국은 독자적 문명을 만들 수 없고, 이를테면 중화문명에서 기원한 동아시아 문명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은 쉬지린의 오래된 강의 동영상에 “조선문명, 베트남문명, 일본문명 같은 것은 없다, 중화문명만이 존재했다”라는 설명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국인들이 한때는 소중화를 자처할 정도로 숭앙하던 중화문명에 대해서, 서구의 선진국이나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국격을 지니게 된 2021년 시점에, 몸에 맞지 않는 오래된 옷처럼 거추장스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더구나 이 옷의 오리지널 디자이너인 중국이 큼지막한 중화브랜드 라벨을 절대로 떼어서는 안된다고 앙앙불락하는 상황이다. 나름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 내봤자, 여전히 자기 것이 원조라고 우길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창조한 문화가 보편적인 세계문명의 건설에 기여하게 돼도, 정명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서평으로 다룬 쉬지린의 최근 저작들을 읽으며 나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됐다. 그는 이제 분명히 탈중심성과 탈등급성을 선언했으니 최소한 촌스러운 ‘중화라벨’을 여기저기 붙이려는 맹목적 애국주의자들을 젊쟎게 꾸짖어줄 중국의 원로지성들이 아직 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던 셈이다. 동시에 K-라는 또다른 촌스런 라벨을 우리가 고집한다면, 한국문명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형용모순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바꿔말하면 K-의 문화가 충분히 성숙해 더이상 “K-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질 때쯤 되면, 우리는 한국문명 아니면 동아시아나 세계문명에 기여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글의 축약본이 경향신문에 실려있습니다. 경향신문의 동의를 얻어 다른백년에도 연재합니다.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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