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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7일 법무부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낙태법 개정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2019년 4월 “형법의 낙태죄 조항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판결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후속 조처였다. 그런데 정부의 개정안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충실히 따르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판결 이전으로 역행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여성들의 반응이다.

이 정부의 근간이 되었던 촛불집회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2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낙태죄 반대 ‘검은 시위’가 시작되었고, 얼마 전까지도 현 정부의 주요 지지층이 20-30대 여성이었기 때문에, 현 정부의 이러한 역행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디지털 성폭력 문제를 제기한 혜화역 시위 등과 관련하여 여론에서 소위 ‘20대 성 대결’ 담론을 확산시켰을 때에도, 현 정부는 주요 지지층이던 젊은 여성들을 나무라며 청년 남성층의 표를 지키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의 집요하고 헌신적인 노력으로 현재 n번방 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형성되는 등, 청년 대중 페미니즘이 한국 정치에 미친 효과가 가시화되기도 했다.

한국의 젊은 남성들이 정치적 침묵을 지키는 경향이라면, 젊은 여성들은 정치적 주체화의 모습을 명료하게 보여왔다. 민주주의는 목소리의 정치이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닥친 집합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시민으로, 정치적 주체로 인식되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온갖 다양한 불평등이 겹쳐지고 누적되어 생겨나는 복잡한 불평등의 양상 속에서 유독 ‘성 대결’의 논리를 부각하는 언론의 관점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세력은 여성의 목소리를 먼저 탓하는 관성을 보여왔다. 마치 정치세력에 대한 청년 여성의 지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남성 표의 이탈만이 핵심적인 문제인 양 야단법석을 떨어왔다.

어쩌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발표된 낙태법 개정안 역시, 최근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정부 여당이 생각해낸 묘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시 여성을 도덕적으로 문제시함으로써 남성 표를 조금이라도 유지하겠다는, 구태의연할 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의심스러운 관성적 태도에 불과하다.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데 정치는 왜 계속 이런 관성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성 표는 셈을 할 필요도 없는 휴짓조각이라고 보는 것인가, 아니면 낙태 합법화에 대한 여성의 요구가 소수 페미니스트의 허위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국 인구의 18% 정도를 이루는 천주교 교리로 한국 인구 전체를 설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천주교의 논리: 태아 생명 보호 대 여성의 권리

미국이나 한국은 천주교 신도가 다수를 이루는 사회가 아님에도, 낙태 문제로 가면 천주교 논리가 전면에 등장하는 기현상이 일어난다. 천주교 논리를 방패막이로 삼는 것인지, 아니면 이 문제에서는 천주교 논리가 보편적 가치를 갖는 것인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태아와 그 태아를 임신한 여성의 관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설정한다. 낙태는 태아를 죽이는 것이고, 생명은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제 몸 안에 있다고 해서 여성이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은 하나님이 인간 생명을 만들기 위해 잠시 빌린 그릇에 불과하므로, 여성에게는 주체적 결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의 ‘주체적’ 교리해석을 정당화한 개신교의 논리를 급진화한다면, 여성의 주체적 성경해석이 완전히 부정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낙태 문제와 관련해서는 인구의 소수만을 차지하는 천주교의 논리가 늘 전면에 나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발맞춘 근대 정치사상 역시 여성을 합리적 결정능력을 갖는 주체로 설정하지 않았다. 근대적 주체는 가족 속에서 여성을 ‘보호’한다는 남성이고, 여성은 남성의 가부장적 ‘보호’―라고 표현되는 ‘지배’―를 받으며, 사랑으로 가족에 헌신하는 사생활 속에 숨겨진 존재로서 규정되었다. 즉 여성은 사생활 속에서 신분제적으로 얽매인 존재였다. 따라서 여성의 ‘주체적’ 해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여성은 애초부터 주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주체는 사생활의 주인이자 공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 즉 가장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적 공동체주의에 기반해서 근대 개인주의를 죄악시해온 한국 사회에서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생명체를 낳고 낳는 우주의 중심 섭리로 재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여성의 몸은 ‘밭’이고 생명의 본질인 ‘씨’는 남성의 핏줄이므로, 여성의 몸은 역시 남성의 혈통집단이 잠시 빌린 그릇에 불과하다. 여성은 자기 몸속의 생명에 대해 어떤 결정권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 중세 종교였던 천주교든, 서양의 근대적 정치사상이든, 한국의 유교적 공동체주의든 상관없이, 다소 일반적으로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해서조차 주체적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숙명적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교의 논리가 매우 심각하게 약화하면서, 한국에서도 낙태 문제와 관련해서는 천주교 교리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여성이 이제는 사생활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공적 행위도 하는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이러한 논리가 유지되어야 하는가? 언뜻 보아도 이것은 모순적이다. 물론 여전히 여성이 가족이나 공적 영역 속에서 신분제적이라고 할 가부장적 규정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의 주체적 결정능력이 과도하게 요구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여성이 성폭력을 당하면 주체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는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한다. 여성이 자녀 돌봄 부담으로 직업 세계에서 남성과 똑같은 방식으로 조직에 몰입하지 못하면, 여성의 개인주의적 태도나 선택이 문제로 지적된다. 여성은 신분제적으로 가부장제에 종속된 상태에서 완전히 풀려나지 못한 비자유인의 처지면서도 동시에 수퍼히어로와 같은 주체성 발휘를 요구받고 있다. 아마도 이처럼 여성에 대한 요구가 모순적이라서, 논리적 정당화가 아닌 ‘종교적’ 가치의 문제로 낙태 문제가 환원되는 경향이 계속될 것이다. 말하자면 천주교의 논리가 ‘세속적’ 생명권의 문제로 번역되면서, 낙태가 태아의 생명 보호 대 여성의 권리 간의 이분법적인 적대관계의 구도 속에서 다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과 태아가 이렇게 적대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면, 여성에게 태아의 성장을 맡기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은 없을 것이다. 생명체의 적에게 생명체를 위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를 여성의 폭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기술발전에 기대어 태아가 여성의 몸에서 성장하는 것을 최대한 단축해야 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출산과 함께 태아를 어머니로부터 격리하여 그때부터 ‘사랑방 교육’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자녀 양육과 돌봄은 여성의 일로 규정되어 있다. 이 모든 모순을 볼 때, 태아와 여성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신념 또는 종교의 영역에 속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가치는 그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 내에서만 유효하다. 대표적으로 다문화주의는 타 문화에 기이하게 보이는 문화도 문화상대주의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런 가치의 인정은 해당 공동체 내부로 한정된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과연 우리 사회가 그런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인가?’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 가치 공동체는 신분제적 귀속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선택의 문제, 즉 입장과 탈퇴의 문제이다. 출생과 함께 한국 사회에 귀속되었다고 해서, 한국 사회의 특정 공동체 질서로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가 더 이상 균질한 공동체가 아니라 가치 다원화 및 다양성 속에서 분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법이 어떤 가치와 신념을 공동체적으로 강요한다면 그것은 헌법 질서에 어긋날 뿐이다. 이것이 낙태문제를 가치와 신념의 문제로 규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물론 기능분화한 현대 사회에서도 지켜져야 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헌법적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헌범재판소는 낙태 문제에서 가치를 여성인권의 가치로 규정했고, 그것이 태아 생명과 적대적 관계에 있지 않다고 판결했다. 그런데 정부는 다시 근거가 불명확한 유사공동체적 가치―생명권 대 여성 인권의 이분법에서 생명권을 우선시하는―로 회귀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여성 인권과 태아의 생명권은 상호 적대적인가?

근대적 주체 개념에서는 개인과 의존관계가 상호 명확히 분리되고 또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우리는 구미 사회의 코로나19 대응을 보며, 근대적 주체 개념의 한계를 목도하고 있다.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근대적인 자율적 주체 개념은 코로나19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인 상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바이러스의 영향력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초반부터 지금까지 개인의 자유 제한을 정당화할 논리가 없어서, 구미에서는 사회적 봉쇄와 봉쇄를 푸는 단순하고 극단적인 정책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감염병에 대한 공포심으로 인해서 개인정보보호 문제가 충분히 공론화되지 못한 채 행정적 조치들이 서둘러 수행되는 등 인권 차원에서 미흡한 부분이 존재한다. 이것은 단순히 공동체주의적 미덕이라고 얼버무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인권 보호의 문제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하듯이, 서구의 근대적 주체 개념에 대한 근본적 재고 역시 필요하다. 근대적 주체 개념, 특히 인간의 의존성을 완전히 삭제하고 완전한 자율성을 강조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세 방향에서 문제 제기가 존재했다. 하나는 공동체주의이다. 여기서는 기능분화한 현대 사회를 일정한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따라서 자칫하면 과거의 위계적 공동체로 회귀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현대의 기능분화한 사회 원리와 공동체적 가치 공유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페미니즘이다. 여기서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공동체주의 역시 비판한다. 공동체주의에서 주장하는 ‘가치의 공유’를 가부장적 가치의 지배와 동일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제3의 관계주의를 주장하지만, 그것의 내용에 대한 청사진을 속 시원하게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태적 관점에 서 있는 신유물론에서는 근대적 주체가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지구 위에서 다른 물질 및 생명체와 의존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데, 근대적 주체 개념은 인간을 물질과 무관한 정신적 존재로만 규정한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와 비교해서 페미니즘과 신유물론이 갖는 강점은, 관계적 존재론을 기존의 ‘공동체’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아직 그 내용이 결정되지 않은 수행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공동체주의는 경험적인 공동체 개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위계관계와 권위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공동체는 늘 지배와 피지배의 위계관계를 공동체의 가치로 정당화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가부장적이지 않은 공동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페미니즘에서는 관계성 강조를 공동체주의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생태적 신유물론에서는 가부장적 지배보다는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강조한다.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관계는 명백히 근대적 개인주의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일단 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근대적 주체 개념은 임신한 몸을 포괄할 수 없다. 임신이란 여성과 태아가 일정한 물질적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의 주체적 결정은 태아라는 생명체에 영향을 주고, 태아에 대한 담론적 규정은 여성의 주체적 결정에 영향을 준다. 여성과 태아는 상호관계 속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인간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공동체의 개념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우선, 이들이 한 몸속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공동체 관계가 아니다. 공동체 관계는 물리적으로 분리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태아는 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관계는 공동체보다 생태적 신유물론에서 주장하는 관계성 개념에 훨씬 가깝다. 태아는 생명체이기는 하나 법적 인격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낙태 문제는 상호 적대관계 속에 있는 생명체와 인간 간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 의존관계 속에 있는 생명체와 인간의 문제가 된다. 특히 하나의 몸으로 연결된 상호의존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적 결정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자율적인 주체의 결정과 다른 점은, 결정이 단순히 ‘자유’나 ‘권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책임’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해러웨이는 낙태는 서로가 죽여야 하는 생물체들의 세계 속에서 등장하는 죽이기의 문제와 같다고 보았다. 생물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컨대 먹이 등을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의 결정과 낙태의 결정이 유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와 불가피하게 연결된 타 생명체에게 응답하는 행위로서의 선택이다. 또 생명체 역시 주체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낙태는 이런 상호 응답의 관계 속에서 책임 있는 응답을 하는 것이다. 즉 낙태는 여성이 자신의 요구와 태아의 요구 모두에 응답하는 결정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여성과 태아의 구체적 관계로부터 결정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떤 일반적인 해답을 외부로부터 제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생명체가 장차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특수성을 가졌다는 사실 역시 구체적으로 그 몸적인 관계를 체현하는 당사자가 응답할 문제이지, 외부로부터 특정 응답을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성에게 낙태의 자유는 단순히 자율적인 개인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의존 관계 속에서 수행되는 주체적 결정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여성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가치나 제도적 지원 등은 여성의 결정에서 고려되는 조건으로 작용할 뿐, 법적으로 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홍찬숙

홍 찬숙

현재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 / 이론사회학회 부회장, 독일 뮌헨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공영역: 위험사회 및 개인화 이론, 연구주제: 현대사회의 불평등, 사회변동,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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