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이 시간도 우리사회에는 북한에 대한 두 개의 대립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북한에 긍정적이고 북한과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 북한을 적대시하고 대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평행선을 달린다. 전자를 가리켜 후자들은 종북 혹은 종북좌파라고 부른다. 이러한 표현은 분단시대에 상대방을 공격하고 타격과 멸절시키기 위한 의도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동안 우리는 종북이라고 불리우게 되면 국가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다들 그런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살아왔다. 분단체제에서 가장 강력하게 행해진 폭력은 그간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 혹은 위험분자로 간주하여 감시 차별하고,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직업 기회를 박탈하여 이들을 경제적 빈궁, 질병, 자살로 몰아가는 국가폭력이었으며, 오늘날도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기에 이런 오해를 받는 개인은 치명적인 피해를 당했고 심지어 살해되기도 하였다. 우리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아직도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김정은위원장과 대화와 협력의 정치를 했다는 이유로 빨갱이라고 호명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사회이니 일반사람들의 몸조심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어떻게 북한을 이해하고 통일을 이룰 것인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보라는 안경과 보수라는 안경을 용기있게 벗고 북한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일이다. 정파라는 보호막을 나와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판단해야 한다. 유튜브상에 넘쳐나는 의도있는 가짜뉴스로부터 벗어나 판단해야 한다.
나 역시 탈북자를 연구한다는 이유로 박근혜지지자나 극우적 시각을 가진 연구자로 의심받는 시선을 경험했다. 또한,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단체들은 탈북자단체나 탈북자들을 북한을 의식해서 기피하거나 백안시함은 물론 탈북민을 포함하는 진보여성단체들조차 연대에서 제외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이같은 편가르기야 식 사고야말로 지금 북한의 실제를 볼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차안대 (Blinker, 遮眼帶)역할을 한다. 모든 탈북자가 북한당국과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아니며, 그들이 전하는 모든 정보가 북한에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거짓말 하는 탈북인도 적지 아니 눈에 띈다. 보수는 물론 진보를 자처하는 탈북인의 경우에도 이해관계로 인해 사실 왜곡이 행해지곤 한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탈북인들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순박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절대다수의 일반 시민들도 북한과의 적대적 대결이나 전쟁까지 원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국면은 북한을 실제 그대로 알아야 하고 노력하면 알 수 있는 분단이래 가장 귀한 시간이다. 의도를 가지고 왜곡하고자 하는 언론도 있지만 그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언론이나 개인도 많은 평화이행이전 국면에 이른 것이다.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북한의 실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시각이야말로 지금 가장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북한을 실제보다 나쁘게도 좋게도 볼 필요가 없다. 자신의 이념적 지향이 진보라는 이유로 북한에 대한 나쁜 점까지 좋게 볼 필요는 없으며, 또한 이념적으로 우파이거나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북한당국을 원천적인 악이나 적으로 상정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민들의 열린 시각이나 자세가 지금 매우 중요한 이유는 지금 이 시점에서 자신의 인식의 프레임 속에서 갇혀 북한의 상을 왜곡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평화적 교류시대에 상대를 바로 보지 못할 것이고 그 결과는 많은 시행착오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탈북자 연구를 시작할 때 나에게 북한사람들은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출발하였으마 16년이 지난 지금, 북한사람들은 강인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존력이 강한 사람들이며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과거에 왔던 식량난민 북한사람들과 지금 오는 북한사람들은 질적으로 다르다. 또, 북한사람들은 잘 짜여진 이중적 사회구조 속에서 사회화되면서 남에게 보이는 측면과 보이지 않게 가리는 면을 가지고 있어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에 북한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또 한 가지는 북한의 빠른 변화속도이다. 양문수는 “북한은 양당제 국가이다. 노동당과 장마당, 이렇게 당이 두 개 있다.” “노동당보다 무서운 장마당!” “노동당 위에 장마당” 과 같은 구호는 과거의 것이 되었으며 이러한 북한의 변화를 따라잡지 않고 북한을 상대할 수 없다고 설파한다(매일 경제. 2019. 3.13. 기사 바로가기). 한때 장마당은 아직까지도 북한변화의 증거이자 북한체제의 붕괴의 거점으로 여겨져왔지만, 소련의 해체와 체제이행을 설명했던 비공식화가설(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구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체제는 무너지고 시장경제체제로의 체제이행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공식적인 경제활동이 아닌 암시장과 같은 비공식경제활동이 계획경제를 침식하여 체제가 붕괴되었다는 주장이 ‘비공식화 가설’의 중요한 내용이다.)이 무색해질 정도로 현재 북한사회에서 체제이행의 경로는 궤를 달리하여 진행하고 있다. 김정은 시대에 와서 시장화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비공식부문의 장마당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는 공식부문의 무역회사이다.
공장과 장마당이라는 두 개의 공간은 각각 사회주의의 계획경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상징해왔지만 갈수록 이와같은 이원적 접근이나 분리는 의미를 점차 상실해오고 있다. 이 두 개의 공간은 이제 뒤섞이고 서로 얽혀지면서 하나의 혼종사회로 형성되는 단계에 와있다. 공장사회는 ‘사회주의 지키기를 명분삼아’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지만, 자신보다 하층에 있는 노동자를 딛고 서는 각자 도생의 ‘생존의 정치’의 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장사회는 ‘정치사회적 생명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공간이다기에 그 생명이 길다. 장마당은 인간의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생존을 연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소득을 창출하여 일상의 공간이지만 장마당의 상인의 직위에 대한 정치사회적 인정은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장은 남성의 공간이자 계획경제의 상징으로 장마당은 여성의 공간이자 시장경제의 상징으로 구분지어 자리잡아왔지만, 이제 이같은 이원화된 접근은 북한사회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뚜렷하다. 최근에 국가가 주도하는 무역회사들의 국내 유통망으로의 진출과 선전은 이러한 전환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북한에서 시장의 발달은 유통, 즉 대외무역의 발달에 기인한 바가 크다. 특히 중국에 대한 수출 및 중국 상품의 국내 판매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북한의 시장화는 최상부에 무역회사가 존재하고 그 밑에 `돈주(錢主)`, 그리고 최말단에 장마당 소매상인이 있는 위계적 구조가 이루어졌다. 이제 장마당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보다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거나 변형되거나 아니면 혼합된 잡종행위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분화와 혼종사회로의 변화는 북한사회가 하나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최근 북한에서 온 공장노동자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아직도 북한에 석기(石器)라고 불리우는 충성노동자들이 없지 않다고 한다. 북한사회가 오랫동안 공들인 오랜 구충성노동자들이 일거에 모두 없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북한 사회주의 영화나 사회주의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그런가하면 새로운 공장사회에서 적응하면서 등장한 신충성노동자들도 존재하고 아니면 자본주의 하 임노동자의 전단계로 보이는 일공이라는 불리우는 개인노동자들도 존재한다. 북한은 이제 다양한 개인들이 도열하는 사회가 되었다.
우리의 안경을 벗고 북한 들여다보기
지금 북한사회는 계획경제와 집단주의, 시장경제적인 질서가 혼합된 어지러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공장기업소의 생산조직 역시 이미 공식과 비공식이라는 이원화된 틀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혼합 상태에 돌입한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공장 내에서도 개인노동과 집단노동이라는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 운영되거나 한 사람이 계획/시장영역에서 두 가지 직업(two job)활동을 하기도 한다. ‘사회주의를 위해 자본주의를 한다’는 명분은 국가와 노동행위자들이 담합하는 생존의 지점이 된다. 이러한 명분과 실제 간의 괴리 사이에서 혼란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노동행위자들은 생존을 위한 적응을 해나가고 있다.
북한의 공장사회는 사회주의 규범에 의해 일원적으로 운영되는 체제가 아니라 개인의 국가에 대한 무력화와 종속성을 강요하는 ‘구조화된 종속’(Andrew Walder)과 개인의 생존주의의 결합에 기반한 독특한 윤리를 형성하는 거점이 되었다. 지방산업과 중앙산업공장들 간에는 차별적인 배급제도와 시장정책이 작동하면서 격차가 벌어진다. 기존 공장관리체계는 변화되며 경계선을 넘어 변화하는 시장주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공장사회로 확장되고 있다. 과거 공장관리제도의 뼈대나 외관을 유지하지만 실상 내적으로는 질적 변화를 맞이하여 경계를 넘어 확장하면서 변화하고 있다. 형식과 내용의 분리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개인적 삶에서도 드러난다.
그런가하면 시장, 장마당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많은 여성들이 장마당을 무대로 핸드폰을 손에 들고 날라다니는 현상은 오늘의 북한을 상징한다. 이 두 개의 현상은 서로 대립하는가? 아니다. 병존하는 두 개의 북한 였다가 이제는 더욱 겹쳐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오늘날의 북한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다양한 종류의 행위자와 다양한 노동자들이 병행하면서 우리 앞에 여러 개의 모습으로 겹쳐져서 존재한다. 노동사회만 해도 공장의 충성노동자, 신충성노동자들, 자신의 몫을 ‘조절’하는 노동자들, ‘일공(日工)’으로 일하는 개인노동자들, 불법노동을 하는 주변부 노동자들로 복작거린다. 사실은 오늘의 충성노동자가 내일의 일공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장마당 돈주가 내일은 기업소의 지배인이 될 수도 있다. 쉴새없이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다시 재구성되며 해체되는 게 오늘날 북한의 현실이다.
오늘날 하나의 북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개의 북한이 실재하며 심지어 이들은 겹쳐지고 포개지며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중이다. 북한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우리도 특정한 안경을 고집하면서 북한을 단일한 존재로 규정하고 긍정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다중적 실재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열린 자세로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안경을 빨리 벗어놓고 새로운 사회를 인식하자.
김화순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인력경영학 박사, 한신대학교에서 북한 공장체제와 노동자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분단체제를 넘어 평화체제 이행기에 사람의 통일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지에 관해 고민 중이다. 주요저서로는 『분단체제의 노동: 북한출신주민이 경험한 남북한의 직업세계(단독저서, 도서출판 선인 2018』, 『북한이탈주민의 직업변동과 취업지원정책의 평가(공저, 한국노동연구원, 2013)』 등이 있으며, 주요논문으로는 “생존의 정치: 북한의 ‘공장사회’와 노동자(2018)”, “탈북인의 신민적 정치참여(2018)”, “직행이주 탈북자의 탈북결정요인(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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