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푸틴의 위기
푸틴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13년 만에 최저치로 급락했다. 현지 여론조사전문기관인 전(全)러시아여론연구센터(브치옴)가 5월 13일~19일 전국의 성인 남녀 1600명을 대상으로 ‘정치인 개인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했는데, 푸틴은 여전히 1위를 달렸지만 신뢰도는 31.7%로 하락했다. 신뢰도 조사는 “중요한 국가적 문제 결정을 누구에게 믿고 맡길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뤄졌는데 조사를 실시한 2006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신뢰도 2위는 14.8%를 보인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이, 3위는 13%인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올랐다. 메드베데프 총리는 7.6%에 그쳤다. 2018년 5월 같은 조사에서는 47.4%의 신뢰도를 보였는데 1년 만에 15% 포인트 이상 급락한 배경에는 연금법 개혁안에 대한 반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정년 연령을 남성은 60세->65세, 여성은 55세->60세로 단계적으로 늘리는 내용을 담은 연금법 개정안에 최종 서명한 바 있다.
대통령의 국정지지도 역시 65.8%에 머물고 있는데, 지난해 5월 80%를 넘던 국정지지도는 연금법 개정 과정에서 60%대로 떨어져서 그 상태로 머물고 있다.
전(全)러시아여론연구센터(브치옴)의 발레리 표도로프 소장은 신뢰도가 추락한 것은 국민소득과 생활수준 향상에 대한 국민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표도로프 소장은 “언제 잘살게 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소득은 증가하지 않고 있다. 심각한 경제위기는 2016년에 끝났지만 최근 3년 동안 생활수준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내일이 오늘보다 살기 좋아질 것이란 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라면서 연금법 개혁과 관련해 “앞으로 우리가 같은 돈을 받으면서 더 많이 일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당연히 비관주의를 크게 더 심화시켰다”고 꼬집었다.
러시아 국민의 실질가처분소득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서방 제재와 국제 저유가로 러시아 경제가 심각한 어려움에 빠진 지난 2014년 이후 거의 매년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4년에 0.7%, 2015년 3.2%, 2016년 5.8%, 2017년 1.2%씩 감소해 왔다. 지난해 0.1% 성장세로 돌아서기도 했으나 올해 들어서는 다시 감소세가 되살아났다. 올해 1분기 러시아 국민의 실질가처분소득은 전년 동기 대비 2.3% 하락했다.
현지 통계청에 따르면 1월 러시아 국민의 1인당 명목소득은 2만4천496루블(현재 환율 기준 약 45만2천 원), 평균 월급은 4만1천220루블(약 77만 원)로 조사됐다. 실질가처분소득은 명목소득에서 세금과 이자 비용 등을 공제한 가처분소득을 소비자물가지수를 반영해 조정한 것으로 개인 소득의 실질적 구매력을 표시한다.
푸틴의 지지율은 총리로 부임한 뒤인 1999년 10월 이후 60%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으니 최근 급락한 지지율이 위기감을 불러일으킬만 하겠지만 사실 필자는 공고한 푸틴의 지지기반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징조를 2년 전부터 목격하고 있었다.
1) 잇달은 반정부 시위
“사기꾼, 훔치지 마라!”
“푸틴 없는 러시아!”
“푸틴을 탄핵하라!”
2017년 3월 26일 일요일. 러시아 전역에서 울려 퍼진 구호이다.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예카테린부르크, 노보시비르스크, 옴스크 등을 거쳐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공직자 부패 척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스크바에서만 만여 명,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5천여 명, 다른 도시에서도 수백여 명씩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평화적인 거리 행진을 시도했으나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해 가로막은 경찰과 곳곳에서 크고 작은 몸싸움을 벌였다.
모스크바에서만 5백 명 넘게 경찰에 연행됐고, 다른 도시들에서도 수십 명, 수백 명씩 체포됐다. 이번 시위를 주동한 대표적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도 체포됐고, 그가 이끄는 ‘반부패 펀드’ 사무실도 경찰이 급습해 직원 17명을 연행했다. 3월 27일 열린 재판에서 나발니는 체포 당시 경찰에 불응하고 저항했다는 이유로 15일의 구류를 선고받았다.
이번 시위는 지난 2012년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 이후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일부 언론은 이번 시위에서 연행된 참가자 숫자가 지난 2012년 시위 때의 연행자 숫자와 비슷한 규모라고 평가했다.
이번 시위를 촉발한 단초는, 2018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나발니가 발표한 메드베데프 총리의 부정 축재 보고서, 이른바 ‘나발니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라는 것은 유튜브에 공개된 49분 분량의 동영상을 말한다.
“그를 디몬이라 부르지 마라.(Он вам не димон)“.
이것이 동영상의 제목이다. 러시아 원문을 직역하자면, “당신들에게 그는 디몬이 아니다”라고 해석된다. 영어판에선 Don’t call him <Dimon> (그를 디몬이라 부르지 마라)으로 돼 있다. 디몬이란 드미트리라는 이름의 줄임말이다. 총리의 이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서 드미트리의 약칭이란 말이다. 러시아 이름도 영어처럼 약칭.애칭이 많다. 알렉산드르-> 사샤, 예카테리나->까챠, 나탈리야-> 나타샤, 소피야-> 쏘냐, 예브게니야-> 제냐 등으로 생활 속에서는 애칭.약칭으로 흔히 부르곤 한다. 제목에 대해 굳이 이렇게 길게 해설을 붙인 이유는 제목이 갖는 함의가 크기 때문이다. 제목만으로 본다면, 메드베데프 총리는 함부로 디몬이라고 반말로 불러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우습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보다 돈도 많고 뇌물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메드베데프 총리가 다소 바보 같아 보이는 측면이 있는데, 이 동영상의 메시지는 ”메드베데프 총리가 바보처럼 보이지만 바보가 아니고 나라 돈으로 엄청 잘 산다“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메드베데프 총리가 국내외에 대규모 땅, 고급 저택, 포도원, 요트 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폭로했다. 메드베데프의 대학동창인 엘리세예프(당시 가스프롬방크 이사회 부의장)를 중심으로 그의 부인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창 인맥들이 동원돼, 러시아 신흥재벌인 올리가르키들, 특히 석유재벌인 우스만노프의 뇌물을 받아 재산을 축적했다고 비판했다.
나발니 보고서에 따르면, 메드베데프는 지난 대통령 시절(2008~2012년)과 현 총리직을 이용해, 자신의 최측근을 통해 공기업의 자금과 러시아 재벌들의 뇌물을 받아 각종 회사와 펀드를 설립, 조성했다. 엘리세예프가 설립한 회사 이름으로, 모스크바와 소치, 그리고 메드베데프 총리의 할아버지 고향에까지 대저택들을 구입하고, 와인생산을 위한 포도농장들을 국내와 해외에 구입했으며, 최고급 요트도 2대나 사들였다. 모든 구입은 회사 명의로 돼 있으나, 이 회사들의 실질적인 소유주는 메드베데프 총리라고, 보고서는 비판했다.
나발니는 공직자 월급으로서는 도저히 구매할 수 없는 이 같은 고가의 자산들을 축적한 배경을 조사할 것을 당국에 촉구했다. 또 메드베데프를 고발하면서 푸틴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며 2018년 대선에서 이같은 부정부패를 척결하자고 촉구했다.
‘나발니 보고서’는 유튜브에서 1200만 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으나 당사자인 메드베데프 총리는 이에 대해 적절한 해명을 하지 않았고, 당국도 조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나발니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부패 조사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을 촉구했고 그를 따르는 지지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푸틴을 탄핵하라며 반정부 시위로까지 확산된 것이었다.
이번 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참석자의 상당수가 10대, 20대 젊은층이라는 점이다. 대학생도 많았지만, 오히려 고등학생들이 더 많았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푸틴 이외의 권력자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로 경제 후퇴와 부패 문제에 민감하다. 또 친푸틴 인사들이 장악한 방송이나 신문보다는 SNS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있다는 점도 푸틴에겐 위협이 될 수 있다. 러시아 의 비정부 연구 기관이자 여론조사 기관인 ‘레바다 센터(Levada Center)’의 레프 구드코프 소장은 “이번 집회는 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했고 강제연행 등 강력한 법집행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나이든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SNS가 효력을 발휘했다. 이른바 나발니 보고서는 인터넷을 통해 확산됐는데, 알다시피 SNS user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다. 그래서 시위 참가자들의 분포가 달라진 것이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18년 동안 푸틴만 보고 자란 젊은세대는 처음엔 푸틴 지지층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지고 있다. 크렘린이 장악한 미디어가 아닌 SNS를 통해, 생활수준이나 평균소득이 줄고 있다는 정보를 정부가 밝힌 수치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만이 증폭되고 있다.”고 말했다.
2) “한국 촛불집회처럼 하자”
지난 6월 ‘범죄인 중국 송환법‘ 반대로 시작된 홍콩 시위가 석달째 이어지고 있다. 홍콩과 한국은 역사나 정치 체계 등이 다르지만, 홍콩 시민들은 몇 년 전 거리의 한국인들처럼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들이 공공연히 ’한국의 촛불집회‘를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말 시위 현장에서 KBS 특파원과 인터뷰한 22살의 조슈아 웡은 “2년여 전 한국에서는 촛불집회가 주말마다 이어졌다.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끝내 원하는 결과를 이뤄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촛불집회에서 영감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6월 14일 저녁 7시 홍콩섬 센트럴의 차터 가든에서는 홍콩 정부의 폭력 진압에 항의하는 홍콩 어머니 6000여 명이 반중(反中) 시위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검은 옷을 입은 어머니들은 휴대폰 플래시로 촛불을 재현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광둥어로 번안해 합창했다. 시위 현장의 단골메뉴인‘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초 한국과 홍콩의 운동권 학생들이 교류하면서 전해졌고, 홍콩에 이어 대만, 중국,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서 불리면서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시위 문화가 주변 나라들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은 러시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는 7월 20일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공정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9월 8일 실시되는 모스크바 시의회 선거를 앞두고 러시아 당국이 야권 운동가 나발니 지지자 등 야권 인사의 후보 등록을 대거 거부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보통 무소속 후보들은 5천명 이상의 지지 서명을 받아야 후보 등록이 가능한데, 야권 후보들이 제출한 유권자 서명이 가짜이거나 사망자의 서명으로 드러났다면서 후보 등록을 거부한 것이었다. 7월 20일에는 2만 여 명, 8월 10일에는 6만 명이 시위에 참석해 2011년 이후 최대 규모였다고 주최측은 밝혔다. 그런데 시위 양상이 갈수록 진화하는 중이다. 우리들에게 낯익은 모습, 유명 가수들이 무대에 올라가 사전 분위기를 띄우는 ‘시위 콘서트’도 등장했다.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래퍼 중 한명인 ‘옥시미론’은 당국에 체포된 대학생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집회에 참석했다. 또 다른 래퍼 ‘페이스’는 무대에 올라 “선택의 자유를 위해 여기서 공연하겠다”라고 말했다.
이 와중에 한 장의 사진이 전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중무장한 진압 경찰에 둘러싸여 도로 한복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소녀.
그녀의 이름은 올가 미시크. 올해 17살, 평범한 쉬꼴라(초중고 11학년제) 학생. 우리로 치면 고등학교 졸업반인 그녀가 읽은 책은 1993년 개정된 러시아 헌법책이다. 그녀는 평화적 시위에 관한 조항,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조항 등 4개 조문을 읽었다고 말했다. 이 사진은 SNS를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다. 과거 중국 천안문 사태 당시 혼자 탱크를 막았던 ‘탱크맨’에 빗대 그녀를 ‘헌법 소녀’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시위 현장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오는 부부도 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시위가 불법집회로 규정돼 경찰이 강제 해산, 연행에 나서기 때문에 어린이들과 함께 있으면 경찰의 추적에서 빠져 나가기가 비교적 쉽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나타나는 진화된 시위 양상들은 사실 2017년 3월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2016년말부터 들불처럼 번진 한국의 촛불집회가 러시아에서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러시아 야권이 한국의 촛불집회에서 깊은 영향을 받지 않았겠느냐 라고 유추할 만한 대목이다. 실제로 집회 과정에서 한국의 촛불집회를 언급한 발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집회 주최 측은 2017년 3월 26일 시위 과정에서 ‘디몬’이라고 불리는 팟캐스트 방송을 생중계로 진행했다. 방송 진행자인 레오니드 볼코프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모스크바 중심가 집회가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데 한국의 촛불집회처럼 평화적이고 자유롭게 진행하자. 한군데 모여 있지 말고 산책하듯이 인도를 따라 계속 네모를 그리며 돌라. 한국에서도 유모차 끌고 아이들 손잡고 피크닉처럼 했다.”
볼코프는 집회 직후 경찰에 연행돼서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 같은 발언을 했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다만, 주최 측이 집회 신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당국이 허가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시위를 강행했을 경우 발생할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최대한 평화적인 시위를 종용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의 촛불집회를 예로 들어 설명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결국, 이번 시위의 주최 측이 한국의 평화적인 시위 방법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대다수 시위 참가자들이 “그동안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부패 척결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이 자리에 나왔다”라고 말한 점이나, 심지어는 “한국에서는 부패한 대통령을 탄핵했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있나”라고 말한 참가자도 있다고 전해지는 점으로 미뤄볼 때 한국의 촛불집회에 러시아 사람들이 고무돼 있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이같은 시위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은 여전히 80% 이상의 높은 지지도를 누렸다. 러시아 당국은 이번 시위를 2018년 대선을 앞두고 지지자들을 결집하려는 야권의 도발이라고 규정했다. 러시아 주요 언론들도 이번 시위가 불법집회였다는 점만 전달할 뿐,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러시아 야권의 반정부시위는 이듬해 대선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석달 뒤인 2017년 6월에는 부패 연루 공직자 처벌을 요구하며 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벌였고, 대선을 두달 앞둔 2018년 1월에는 ‘선거 보이콧’을 촉구하는 시위가 벌였다. 대통령 선거에 10명 이상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푸틴 대통령의 유일한 대항마로 꼽혔던 야권 운동가 나발니가 후보 등록이 좌절되자 전국 80개 이상의 도시에서 대선을 보이콧하자는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앞서 나발니는 집을 나서다 괴한에게 화학물질 테러를 당해 한쪽 눈이 실명위기까지 간 적도 있었다. 또 대선이 끝나고 푸틴의 공식 취임을 앞둔 2018년 5월에도 전국 90개 도시에서 반정부.반푸틴 시위가 벌어지는 등 나발니를 중심으로 한 야권의 반정부 시위는 집요하게 계속됐다.
이같은 시위가 벌어질 즈음에 장소나 시간 등 정보가 SNS를 통해 나발니 지지자들에게 전달이 되는데 필자 같은 해외 특파원들에게까지 알려져서 때맞춰 취재를 할 수 있었다. 필자가 야권의 반정부 시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장차 러시아 사회에 미칠 파장이 엄청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전문가들도 비슷한 분석과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의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 연구원은 “내가 보기에 러시아 사람들에게 두 푸틴이 존재하는 것 같다. 첫째 푸틴은 러시아의 상징, 크림반도를 병합한 행위자이다. 이는 국가 브랜드로서 80% 이상의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상징이다. 두 번째는 개인 푸틴인데, 사람들은 그에게 나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정부패 소식이 들려도 사람들은 푸틴을 제외한 그 밑에 관료들일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옛말 즉, ‘Good tsar(짜르), bad boyar(10~17세기 러시아 봉건귀족 최상층)’황제는 훌륭한데 그 밑에 귀족.관료들이 나쁘다‘라는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그렇지만 부식.침식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침식은 젊은층에서 발생하고 있다. 민주화를 향한 점진적인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 체제의 미래를 생각해보면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그런데 이같은 변화가 러시아 사회에서만 그렇고 정부 당국은 전혀 개혁할 준비가 안돼 있고, 민주화로 가기엔 너무 요원하다“라고 평가했다.
레바다 센터의 레프 구드코프 소장도 “당장은 별 영향을 주지 않을지라도 반정부 시위는 결국 체제 악화를 유발한다. 한계점을 넘어서면 체제는 붕괴된다. 그게 언제일지 모르지만 역사적 경험으로 비춰보면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마치 낙타 등에 지푸라기가 하나둘 쌓이다가 마지막 짚이 떨어지면 등을 부수듯이.“라고 말했다.
3) 대러 제재 파급효과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크림반도의 러시아 병합과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의 무력 충돌의 책임을 물어 서방측이 러시아에 가한 경제 제재가 올해로 5년째를 맞았지만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2019년 6월 20일 유럽연합(EU) 이사회는 대러 제재를 2020년 6월 23일까지 1년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대러 제재에 따라 EU에 거점을 둔 기업들은 크림과 세바스토플(Sevastopol)로부터의 제품 수입 및 투자, 그리고 관광 크루즈의 운행이 일체 금지된다. 또 크림 기업이나 크림에서 사용하기 위한 일부 제품 및 기술에 대한 수출도 금지된다.
물론 러시아도 대응 차원에서 서방에 맞제재를 가했다. 2014년 미국과 EU, 노르웨이, 호주, 캐나다산 농축수산품의 수입을 금지했고 2015년에는 우크라이나와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등으로 농축수산품 수입 금지 조치를 확대했다. 2018년 6월에는 러시아에 비우호적 조치들을 취하는 국가들의 제품이나 서비스 수입을 제한하거나, 국가간 산업경제협력을 중단할 수 있는 법령이 발효됐고,11월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금융제재도 가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서방의 대러 경제제재와 국제유가 폭락이라는 대형 악재를 맞물려 만난 러시아 경제는 달러화 대비 루블화 환율 가치 폭락에 러시아의 각종 경제지표들이 마이너스 성장으로 바뀌며, 1998년 러시아의 국가 지불유예 사태(모라토리움)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여파의 소용돌이 이후, 제3의 러시아 경제위기 사태 대한 우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2012년 3.4%의 실질 GDP 성장률을 기록한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와 이에 따른 서방 제재, 그리고 국제유가 폭락이 시작된 2014년은 근근이 플러스 성장(0.7%)을 유지했다. 하지만, 2015년은 모든 러시아의 경제 지표들을 마이너스로 바꿔 놓았으며, 러시아의 실질 GDP 성장률(-2.8%)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산업, 경제지표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대러 제재로 러시아 GDP가 20~21%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 제재는 러시아 금융권과 석유.가스 부문에 미치는 악영향이 가장 크다고 한다.
이러한 절망적인 러시아의 경제상황 속에서도 푸틴 정부와 러시아 당국은 나아지는 미래를 언급해 왔었고, 이어 2016년 실질 GDP 성장률 -0.2%를 기록한 이후, 2017년부터 플러스 성장(1.6%)으로 돌아서, 러시아의 각종 산업, 경제 지표들도 일부 분야를 제외하곤 어쨌든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선 상태다. 지난 3년간의 경제 침체는 최근부터 회복세를 보였으나 제재가 지속된다면 2019년 경제성장률은 거의 0%에 가까울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경제 지표 중, 소비자 물가의 경우, 2015년 두자리 수(12.9%) 상승을 겪은 이후, 다시 한자리 수 물가 상승률을 보이고 있고, 실질 임금상승률은 2015년 -9.0%를 보인 이후, 꾸준한 플러스 상승세를 보인다. 하지만, 러시아 국민들의 경제적 여유나 실제 경제 현실로 대변되는 실질 가처분 소득 지표는, 2014년까지 4%대 이상의 증가율을 보였으나, 2015년부터 마이너스 증가율(2015년: -3.2% / 2016년: -5.8%)을 보이고 있으며 회복될 것이라는 러시아 당국의 전망과는 달리 2019년 현재(2019년 1/4분기: -2.3%)까지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지표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실질적인 삶! 즉 서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특히 2019년 들어 러시아 현지언론들이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당초 러시아 당국의 예상이나 전망과는 달리, 실질 가처분 소득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2019년 3월말 러시아 통계청의 러시아 국민들 중 1/3은 신발 조차 여유롭게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언급을 현지언론들이 전하면서, 서민 경제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 유력 일간지인 코메르산트 신문은 2019년 3월말 보도를 통해, 2018년말부터 러시아 국민들은 불필요한 소비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라고 분석 보도하면서, 당장 불필요한 제과류, 음료수 등의 식료품 구입이나 유흥비, 외식비 등을 줄이고 있고, 식료품 구입 시에도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유통의 고급화를 시행하고 있는 상점(아주부카 브쿠사)은 나름 부유층으로 분류되는 핵심 소비층에 큰 변동은 없는 것으로 전했다. 또 지난 4월에는 러시아 국민의 1/3에 달하는 65%가 저축할 여유가 없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으며, 5월에는 먹거리 소비마저 줄이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의 경제상황에 대해서도 GfK연구소의 언급을 인용한 러시아 현지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작년 2018년 2.3%의 경제성장과 러시아 정부의 향후 6년 내 획기적 성과 달성 약속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경제위기 상황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53%의 러시아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이 앞으로도 최소 4년은 더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이러한 비관적 전망은 2017년 당시 44%, 2015년 29%에 비해 더 늘어났으며, 24%의 러시아인들은 향후 5년간 경제상황은 더 악화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러한 악화일로의 러시아 서민 경제상황은 나름에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러시아 국가경제상황과는 다르게, 러시아 경제의 내부는 또 다른 악재를 키우고 있는 것이며, 이는 우리나라가 IMF 시기를 거쳐 경제적 불평등이 고착화 되었다는 평가처럼, 제재 속 러시아 경제는 러시아 당국의 선방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라는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 시키고 있는 상황으로, 이는 지역별 불평등 고착화로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급기야 러시아의 빈곤문제가 조만간 사회적 폭발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지적이 고위 관료의 입에서도 나왔다. 지난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러시아 재무장관을 지낸 뒤 비판적 경제전문가로 ‘쓴소리’를 내다가 2018년 5월 회계감사원(Счётная палат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원장으로 임명된 알렉세이 쿠드린이 6월 17일 이같은 발언을 했다.
쿠드린 원장은 러시아 TV ‘제1채널’ 프로그램에 나와 러시아 국민의 생활 수준 하락을 우려하면서 “이대로 가면 조만간 ‘사회적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국민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내려갔다”며 “현재 약 1250만 명이 빈곤선 이하에 처해 있으며 그 가운데 70%가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고 어린이들이 상당수”라고 지적했다. 1250만명이라면 러시아 전체 인구 1억 4600만 명의 8.5%에 해당한다.
쿠드린 원장은 “빈곤층의 확대는 (어린이의) 발달 장애와 영양 부족, 삶의 질 저하, 건강 악화 등을 초래하고, 궁극적으로 인적 자원의 문제로 이어진다”고 지적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각종 정부 보조금 지급을 서두르는 등 비상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는 재정에 크게 부담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빈곤 문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과장된 발언’이라고 반박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이 최저 생계 이하 소득자들에 대한 보호를 (국정운영) 제1순위에 두고 있으며, 문제 해결을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제성장이 담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앞으로도 국민의 실질소득 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운 데 정책 결정권자의 고민이 있다. 쿠드린 원장의 주장처럼 언제까지 재정으로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 14일 기준금리 인하 조치를 단행하면서 올해 GDP 성장률 전망을 기존 1.2~1.7%에서 1.0~1.5%로 하향 조정했다. 빈곤문제 해결 방안이 결코 단순하지 않게 보이는 근본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쿠드린 원장의 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최저생계비 이하 소득을 가진 ’절대빈곤인구‘ 수가 작년보다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기 때문이다. 러시아국가통계청(로스스타트)이 7월 29일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9년 1분기 러시아의 절대빈곤인구는 전 국민의 14.3%에 달하는 2090만 명으로 집계됐다. 2018년에는 전 국민의 13.9%인 2040만 명이 절대빈곤인구로 파악됐었다. 절대빈곤인구 산정의 기준이 되는 러시아의 현재 기준 한 달 최저생계비는 10,753 루블, 우리 돈으로 대략 20,500원이다. 현재 러시아의 1인당 월 평균 국민소득은 30,068 루블(56만 7천원), 월 평균 명목임금은 43,944 루블(약 81만9천원)로 파악된다. 전문가들은 빈곤인구 증가가 어려운 경제 여건에 따른 ’국민 실질소득(명목소득에서 물가변동분을 제외한 소득)‘ 감소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2019년 1분기 러시아 국민의 실질소득은 2.5% 감소했고 2분기에도 0.2% 줄었다. 상반기 전체 실질소득은 지난해 동기 대비 1.3%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전체적으로도 실질소득이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같은 추세로 볼 때 집권 4기 임기 내에 빈곤인구 수를 크게 줄이겠다는 푸틴 대통령의 공약은 ‘공허한 약속’으로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집권 4기(2018~2024) 임기를 시작하면서 주요국정과제 가운데 하나로 2024년까지 빈곤 수준을 절반(6.6%까지)으로 낮춘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관들은 러시아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1.2~1.4% 정도로 예상한다. IMF는 최근 발표한 올해 세계경제전망에서 러시아의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이전 1.6%에서 1.2%로 하향 조정했다.
이같은 악재들이 겹쳐서 그런 것일까?
푸틴의 4기 임기가 끝나는 2024년 이후에도 대통령으로 남아있길 원치 않는 러시아 국민 비율이 최근 1년여 사이 많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레바다-첸트르’가 7월 30일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2024년 이후에도 푸틴이 대통령직에 남아있길 원하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38%가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 작년 5월 조사 때의 27%보다 11% 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2024년 이후에도 푸틴이 계속 대통령으로 남아있길 원한다고 답한 응답자도 54%로 작년 5월 조사 때(51%)보다 역시 늘었지만, 그 비율은 훨씬 낮았다. 이번 여론조사는 7월 18~24일 러시아 전국 137개 거주 지역 성인 남녀 1,605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레바다-첸트르 소장 레프 구드코프는 “최근 들어 푸틴 대통령이 악화하는 경제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작아지고 있고 지난해 연금개혁 이후에는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증가하고 있다. 푸틴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그룹은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교육받은 25~30세 국민들인데,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망>
서방의 대러 경제제재에 대해 러시아가 정치적으로는 일단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다는 점에는 상당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하지만 러시아 국민, 특히 서민 경제의 어려움은 현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더욱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며, 이는 현 푸틴 정권에 정치적 부담을 가중시키며, 러시아 국민들의 경제적 불만이 정치적 불만으로까지 확대될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또 현재 상황이 지속되면 앞으로 러시아 사회를 회복할 수 없는 사회-경제적 불균형 상태로 만들 수 있으며, 중산층 형성이라는 사회경제적 다분화를 불가능하게 하고 극단적으로 이분화시킬 가능성도 충분하며, 바로 현 시점이 그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제재에 대한 러시아의 성공적 방어라는 것도, 서방의 대러 추가제재와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향방, 세계 경제성장의 둔화와 감산합의 실패에 따른 국제유가의 하락 그리고 이에 따른 루블화 환율의 불안정성 등 아직도 많은 위협 요소들에 의해 영향받고 있다.
KBS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국제부. 외교안보팀. 탐사보도부 등을 두루 거쳤다. 15년 넘게 외교안보 분야 특히 한반도 문제를 집중 취재했고, 2015년 7월 1일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부임하여 2018년 6월 30일까지 근무했다. 귀국 후 현재는 KBS 보도본부 시사제작2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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