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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중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8년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그 이후 그의 생각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분단체제를 벗어나는 길을 그에게 물을 수 있을까. 분단체제를 누구보다 아파했고 분단체제로 인해 누구보다 큰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기에 답을 구할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자격이 있을 것이다. 특히 궁금한 것은 1993년의 충격적인 ‘간첩사건’ 이후의 김낙중의 생각이다. 과연 그는 이 일을 겪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었을까. 1998년 가석방 이후 그가 출간한 책 한 권과 인터뷰를 찾을 수 있었다. 2014년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나더러 ‘통일운동가’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통일운동가 이전에 평화주의자다. 통일보다 우선 평화가 중요하다. 자기가 싫어하는 원수를 전부 없애고 먼저 통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한 것이다.

사실이다. 김낙중은 1954년 탐루 시위 때 통일운동가 이전에 평화주의자로서 그의 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1955년 자신의 통일안을 가지고 임진강을 넘었을 때부터 그가 확고한 통일운동가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에게 평화와 통일은 구분되지 않는 하나였다. 그러나 노년의 그는 이제 “통일보다 평화가 우선”이라고 강조하고, ‘하나 되기(통일)’가 아니라 ‘더불어 살기(공존)’가 중요하다고 했다. 결국 ‘평화와 공존이 통일에 우선한다.’

필자는 이 발언을 그가 분단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큰 원칙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해본다. 그러나 원칙만이라면 아직 추상적이다. 그의 과거의 주장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도 아직 뚜렷하지 않다. 그러한 원칙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시키는 방법으로 그가 새롭게 제시했던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단서를 그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직후에 그가 쓴 글 「8·15 55주년과 ‘남북공동선언’」(이하 「55주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은 아마도 글 쓴 당시에 발표되지 않았던 듯하다. ‘간첩’으로 낙인찍힌 그의 글을 실어줄 지면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 글은 2013년에서야 그가 가석방된 이후 홀로 써왔던 다른 글들과 함께 묶여 『인류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진 책이었다.

이 책 머리말에서 김낙중은 이 책에 실린 글들이 “세상에 남기는 저의 ‘유서’”라고 쓰고 있다. 과연 2000년에 김낙중은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남겼을까? 아래는 필자가 이 글에서 주목한 부분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매우 놀랍고 날카롭다. 인용할 부분이 다소 길지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이번 ‘남북공동선언’은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 이번 ‘남북공동선언’은 남과 북이 서로를 국가적 실체로 인정하는 문제에 관해서 아직도 충분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습니다. …… 그동안 남북 쌍방은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여 왔습니다. …… 남측 평화통일 방안인 ‘연합제 안’이나, 북측의 평화통일 방안인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라는 것은 모두 남과 북이 상대방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전제로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남북공동선언’은 남북 쌍방이 서로의 평화통일 방안에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자”고 선언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남북공동선언’은 서로를 국가적 실체로 인정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1992년 성립한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남과 북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표해서 쌍방의 총리들이 서명하고, 쌍방 국가 원수가 비준한 비준서를 상호 교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방은 상호 간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남북관계를 “쌍방 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표현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나라’를 ‘민족국가’로 이해했고, Corea반도에 두 개의 ‘민족국가’를 인정하는 것은 분단 현실을 영구히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근대 nation-state라는 ‘국가’는 ‘민족국가’가 아닌, 단순한 ‘국민국가’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습니다. …… 탈냉전의 오늘날,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남북 쌍방과 동시 수교의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남북 쌍방이 함께 ‘국가만이 회원 자격을 가지는’, ‘국제연합’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하게 되었다는 현실에서 볼 때, 재고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비록 전체 Corean의 ‘민족국가’는 아니지만, 각기 하나의 독립된 ‘국민국가’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비현실적 명분론 또는 교조주의적 관념론에 매인 결과일 뿐입니다.

김낙중은 이 글에서 6·15 공동선언이 큰 성과를 이룬 것이긴 하지만, 중요한 점에서 아직 “비현실적 명분론 또는 교조주의적 관념론”에 붙잡혀 과거와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과거란 앞 절에서 정리해본 분단체제의 시대가 될 것이고, “비현실적 명분론 또는 교조주의적 관념론”이란 분단체제적 사고방식과 심리가 되겠다. 이제 김낙중은 그러한 분단체제의 타성을 돌파하는 핵심이 남북이 ‘국가’로서 서로 인정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북이 합의한 평화통일방안(‘국가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도 “서로를 국가적 실체로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실제적인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이 대목을 2018년 가을에야 읽게 되었다. 그동안 필자가 피력해온 양국체제론과 너무나 흡사한 생각이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보다 15~16년 전에 이미 김낙중 선생은 양국체제론의 핵심적 발상을 내놓고 있었다. 이 글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생각의 방황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인가! 인용한 위 글에서 김낙중의 언급들은 분단체제 작동논리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실로 “남북 쌍방이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분단체제 작동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했고, 전쟁을 통해 서로 상대방을 이기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 전쟁을 종전(終戰)과 평화로 끝마치지 못했고, 오늘날까지도 전쟁도 평화도 아닌 정전(停戰)과 휴전 상태에서 대립과 적대를 계속해왔다. 그것이 분단체제였다.

김낙중은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면 분단 현실을 영구히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생각’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데서 오는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단호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 민족이 두 개의 국민국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이고, 남북의 현재의 실재가 그러하다고 말한다. 매우 중요하고 용기 있는 발언이다. 오랫동안 ‘분단 영구화’ 또는 ‘분단 고착화’라는 말은 일종의 금기어, 터부였다. 주홍글씨보다 결코 덜하지 않는 무서운 낙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 딱지가 자기에게 붙여질까 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터부 의식이 남북의 두 국가가 실재하고 있는 현실을 두 눈을 뜨고도 보지 않는, 보지 않으려 하는 일종의 의식의 공백 지대를 만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분단체제의 심리구조, 억눌린 무의식이 만들어낸 맹점지대 아닌가. 김낙중은 그렇게 묻는 것 같다. 바로 ‘코리안 블라인드(Korean blind)’다.

이러한 심리는 분단체제의 기득권 진영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앞 절에서 말했듯 분단체제 비판론·극복론 진영에서 오히려 더욱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민족인데 어떻게 두 나라가 될 수 있는가’, ‘민족분단의 비원을 반드시 통일로 풀어야 한다’는 식의 정서적 접근이 기득권 측보다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김낙중은 거꾸로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까 분단 현실이 오히려 영구화되고 있지 않는가를 묻는다. 평생을 통일운동에 헌신하였던 김낙중의 주장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과감한 주장은 그동안 소망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던 그의 ‘자유’가 이제 현실의 영토에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과거 그의 자유는 남북의 경계라는 현실의 벽을 자유로이 넘어서는 자신만의 초월적 자유였다 할 수 있다. 그러한 초월적 자유의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고, 북에서 보낸 비밀 공작원을 만날 수 있었다. 두 나라를 가르는 현실의 경계나 법이 그의 높은 자유의 세계에서는 구속 요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 6·15 선언 직후에 쓴 이 글에서의 김낙중은 이제 분명히 과거와 다르다. 나만의 비상한 초월적 자유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엄연한 현실을 말한다. 남북이 각자 독립된 국가적 실체임을 상호 인정하는 것이 먼저라고 오히려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구별과 상호 인정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현실에 근거한 실제적 자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두 국가의 상호 불인정 때문에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어온 그였기 때문에 그 고통만큼의 큰 무게를 가지고 감연히 지적할 수 있었던 요점이었을 것이다. 그가 노년의 여윈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이 한 점의 지적에 그의 신산했던 온 삶의 무게가 걸려 있는 듯하다.

과거 25세의 청년으로 그가 구상했던 ‘통일독립청년 고려공동체 수립안’에 비해 보아도 강조점의 이동이 분명히 느껴진다. 과거 ‘수립안’에서 초점은 단연코 ‘청년고려공동체’ 수립에 있었다. 분단의 현실을 당장 넘어서는 ‘초국가통일기구’의 수립이 우선이고 중심이었다. 그동안 그의 ‘초월적 자유’란 바로 이 상상의 통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유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6·15 선언에서 남북이 합의한 (그리고 청년 시절 그가 강조했던 ‘고려공동체’ 구상과 친화성이 있는) ‘국가연합’이나 ‘낮은 단계의 연방제’보다 그 전제가 되어야 할 남북의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전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연합이든 연방이든 양측 사이의 어떤 통일 또는 준통일 기구에 대한 논의도 실효를 갖지 못하다는 것이다.

김낙중의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 주장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변화에 발맞춘 발언이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다. 위 글에서 그는 6·15 선언의 문제가 1991년에 합의되고 1992년 성립된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었다고 지적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유엔 동시가입 직후에 합의·성립된 것으로 이 둘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한 짝이라 할 수 있다. 남(ROK)과 북(DPRK)은 1991년 9월 유엔 동시가입으로 각각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이로써 국제법상 두 개의 국가가 된 것이다. 양국체제의 현실적 가능성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렸던, 실로 역사적 순간이었다. 미소 냉전 종식 이후의 세계상황의 반영이었다. 미소 냉전이 강고했을 때는 ‘국제법상 두 개의 국가’를 말하기 어려웠다. 미국 편은 한국(ROK)과만 수교하고, 소련 편은 조선(DPRK)과만 수교하던 상황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두 개의 국가이기는 하되, 세계의 공인을 받았다고 할 수 없었다. 전 세계가 미·소로 나뉘어 세계내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엔 동시가입 이후 이러한 냉전의 벽이 무너지고, 세계내전의 불길이 꺼져 코리아 양국과 동시 수교하는 나라들이 급속히 증가했다. 2018년 현재 남북 코리아와 동시 수교하고 있는 국가는 157개국이다. 세계가 두 개의 코리아를 각각 독립된 정상국가로 인정하고 동시에 수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막상 당사자인 남북 두 나라는 아직도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코리안 블라인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김낙중은 날카롭게 꿰뚫어 보았다. 겉으로는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면 분단 현실을 영구히 인정하는 것이 된다’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남북 대화의 당사자들부터 여전히 분단체제의 논리와 심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분단과 전쟁 이후 남북의 정상이 최초로 만났던 역사적인 6·15 회담으로부터 불과 두 달 후에 쓴 글이다. 코리아 남북만 아니라 세계여론도 흥분하고 찬양했던 이벤트였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김낙중은 높게 평가하고 온 마음으로 축하하면서도 동시에 정상회담의 두 당사자, 남북의 두 지도자들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두 지도자만이 아니라 남북의 통일문제, 남북문제의 핵심 정책입안자들, 전략가들을 향한 쓴소리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이 역사적 정상회담이 기뻤을 그였다. 그의 삶 자체가 누구보다 기뻐할 자격과 이유였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러한 김낙중이었기에, 그 역사적 정상회담의 성과와 함께 결정적 한계를 기탄없이 지적하고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 독재 시절, 김낙중은 분단체제의 벽에 온몸을 던지고, 부딪쳐 쓰러지고 실패함으로써만, 그의 자유혼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자유혼은 평생의 신산(辛酸)을 겪은 노년에 이르러 과거와는 또 다른 날카로운 직관을 보여주었다. 분단체제의 철옹성과 같았던 논리와 심리의 빈 지점, 공백 지대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간파했다. 그의 이 날카로움은 이제 그의 자유가 새로운 현실 속에서 단단한 근거를 확보해가고 있었음을, 현실 속에서 현실과 함께 자유의 영역을 넓혀가려는 새로운 인식지평을 열어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일종의 구두선(口頭禪)으로서, 통일을 내세운 막연한 당위나 일반론으로서, 남과 북 쌍방이 서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북에서나 남에서나 아주 많았다. 김낙중이 청년 시절 구상했던 ‘수립안’ 역시 그러한 예의 하나였다.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여러 차례 이루어진 남북 간의 공동성명들도 모두 이러한 취지의 일반론을 반복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쪽으로는 서로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하는 것을 회피해온 괴리’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명시적으로 비판한 것은, 필자가 알기로, 김낙중의 위 글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에는 이러한 괴리가 전문과 제1조의 불일치로 나타났다. 전문에는 남북 쌍방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 하였고, 제1조는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하였다.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하면서, 나라 대 나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쌍방이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데 두었다. 겉으로는 “통일 지향”이라는 아름다운 명분을 내세우지만 뒷면에는 서로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곤혹스러운 불신과 적대의 실재가 있다. 이 실재를 ‘통일을 지향한다’는 멋진 포장으로 덮어두려 할수록 덮어진 실재의 곤혹스러움은 더해질 뿐이다.

6·15 선언은 2항에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했지만, 이후 연합제든 낮은 단계 연방제든 이를 구현하는 실제적 조치는 취해진 바 없었다. 남북 모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도 못하면서 ‘연합이냐 연방이냐’를 논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어 노무현 정부에서 또 한 번의 정상회담이 있었지만 그때도 ‘국가로서 상호 인정하는 문제’는 역시 풀지 못했다.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민주정부’ 시기에 이루었던 남북 화해의 성과가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 오히려 노태우 정부 이전의 강경한 적대관계로 회귀·퇴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곤혹스러운 사태 진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김낙중의 지적은 매우 뼈아픈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문제, 즉 ‘남북이 국가로 상호 인정하는 문제’를 풀지 못한 채 그 위에 아무리 화려한 건축물을 쌓아봐야 그것은 바닷가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밀물이 들어오면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깨끗이 쓸어가 버린다. 이명박·박근혜 두 정부의 경험이 그것을 너무나도 분명히 보여주었다.

누구보다 통일을 염원했던 김낙중이 통일로 가는 경로를 남북의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에서 찾았다는 것은 일견 역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남북 두 국가가 서로를 부정하고 위협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과 신뢰 없이는 어떠한 통일도, 아니 진심에서 우러난 통일논의 자체부터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한 확실한 상호 보장과 신뢰는 그로 인해 남북 동포가 되찾게 될 자유의 전제이며 동시에 누리게 될 자유를 위해 떠안아야 할 책임이기도 하다. 평생을 통일에 헌신했고 그로 인해 누구보다 큰 고초를 겪었던 이가 삶의 노년기에 ‘국가로서 상호 인정’을 통일로 가는 길의 제1보로 강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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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 인류 역사를 보편적으로 관통하는 민주적 뿌리와 그것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 「맹자의 땀, 성왕의 피」(2016), 「미지의 민주주의」(2011) 등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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