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동맹파업
1985년 6월 당시 수도권지역 최대공단이었던 구로공단에서 큰 파업이 일어났다. 이 파업은 대우어패럴 봉제공장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대우어패럴은 당시 재계 순위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대우그룹의 계열사였다.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동자 300여명은 이틀 전 경찰에 연행되어 노동쟁의조정법 위반으로 구속된 김준용 위원장과 강명자 사무장의 석방과 노동조합 탄압중지를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공장 2층 작업장을 점거하고 출입문을 걸어 잠근 채 철야농성을 벌였다.
대우어패럴의 파업은 인근 공장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대우어패럴 노조와 교류하고 있었던 공단 내 신생노조들은 대우어패럴노조의 간부 구속을 신생노조들에 대한 탄압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대우어패럴에 뒤이어 24일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 노동조합이 동맹파업에 들어갔고, 25일 세진전자·남성전기·롬코리아 노조가 파업을 지지하며 준법 농성에 들어갔으며, 27일에는 삼성제약 노조가 중식거부를 결의하였고, 28일에는 부흥사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다. 멀리 경남 창원에 있는 (주)통일노조에서는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다가 노조간부 19명이 연행되어 문성현 위원장과 사무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 속에서 사회단체 뿐만 아니라 노조의 활동까지도 철저히 탄압받던 시기라 이런 대규모 연대파업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그 이전에는 파업이 있다고 해도 개별 공장의 소규모 쟁의였고, 요구조건도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 같은 경제적 요구에 그쳤던 것에 비해 이번 경우는 달랐다. 우선 파업참여공장과 노동자 수가 전례없이 대규모인데다가 요구조건도 구속자 석방, 노동운동 탄압중단 같은 정치적 요구를 내걸었던 것이다. 더구나 공단 내외의 여러 노조들이 신속하게 연대투쟁을 벌였던 것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에 호응하여 민통련·민청련 등 재야운동과 학생운동, 지방의 노동조합까지도 항의농성과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대우어패럴 공장 건너편 굴뚝에 올라가 ‘민주노조 탄압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문익환 민통련 의장 등 재야단체 회원들이 농성현장에 음식을 반입하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매일 저녁 퇴근시간이 되면 대우어패럴 인근 지역과 공단오거리에는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노동자, 학생, 시민들과 이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배치된 경찰들로 인해 인도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정부와 관련회사들은 공장 주변에 전투경찰을 대거 배치하여 농성노동자와 외부의 접촉을 차단하는 한편 가족까지 동원하여 파업해산을 집요하게 종용했다.
6월 24일부터 시작된 구로동맹파업은 6월 29일까지 6일에 걸쳐 5개 사업장 1,400명이 동맹파업에 들어갔고, 5개 사업장 1,100명이 지지 연대투쟁을 벌이는 등, 총 2,500명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참가했다. 구로공단 일대를 뜨겁게 달궜던 파업농성은 결국 일주일 만에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수백명의 농성 노동자가 연행되었고, 그중 44명이 구속되었다. 구속되지 않은 노동자들도 구사대(회사가 사무직과 노조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로 조직한 어용조직)에 의해 출근이 저지된 상태에서 전원 해고되었다. 파업 종료 후에 해고된 노동자가 1,300여 명에 이르렀다.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구로동맹파업은 그 투쟁성이나 연대성에서 획기적이었을 뿐만 아니라최초의 본격적인 동맹파업이자 정치투쟁 성격의 파업으로써 노동운동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인 투쟁으로 평가받고 있고 있다.
파업의 배후 ‘위장취업자’ 최한배
구로연대투쟁이 끝난 직후에 민주화운동권 내에서도 그 배후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 김준용을 비롯한 초기에 구속된 노동조합 간부들이 대부분 현장출신 노동자들이었는데 그러면 그들을 도와 노동조합을 만들고 동맹파업으로까지 이끈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것이었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수많은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갔고, ‘구로연대투쟁(구로연투)’ 당시에도 공단 내에 수백명의 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로연투가 진압된 직후인 7월 23일 상징적인 한 투쟁이 있었다. 해고된 노동자 23명이 정부당국의 노동운동 탄압을 규탄하며 구로공단 중심거리인 가리봉5거리에서 비폭력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 시위는 대우어패럴 3공장 보일러실 노동자 최한배와 가리봉전자의 서혜경 부위원장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였고, 다수가 대학생출신 노동자들이었다. 파업으로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한 달간 전태일기념관에서 항의농성을 벌였는데, 그 농성을 마무리하면서 그중 일부가 ‘구로연투’의 계승발전을 다짐하는 투쟁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시위는 구로동맹파업에서 구속된 노동조합 간부들이 현장출신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비공개적으로 노동조합활동을 지원하고 지도해온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장노동자들과 함께 한다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었다. 퇴근시간에 맞춰 진행된 이 시위는 공단 일대에 배치된 경찰들에 의해 전원 연행되었고, 최한배 등 3명이 구속되었다. 이 시위로 인해 구로연투의 배경에 최한배, 심상정, 김문수 등이 있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생산직 노동자로 ‘위장취업’한 노동운동가들이었다.
1960-70년대에도 노동현장에 노동자로 취업하여 활동하는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 중 상당수는 대학 이념서클 출신 학생운동가로서 졸업 후 자신의 이념에 따라 노동현장에 들어갔다. 그 중에 일부가 나중에 ‘남민전’이나 ‘과학적사회주의 그룹’ 등 조직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 조화순, 조지송 목사 등 선진적인 목회자들이 개척한 도시산업선교회 등 기독교 계통의 사회선교기관에서 양성한 민중운동가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수가 적었고 영향력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다 1980년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학생운동세력들이 대거 노동현장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80년 ‘서울의봄’ 좌절과 광주항쟁의 처절한 패배를 겪으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변혁을 위해서는 변혁의 주체역량으로서 노동계급의 조직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들은 1980-1985년 동안 수천 명 이상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선배들의 인맥을 통한 개별적 방식으로 노동현장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그 숫자가 늘어나면서 1984-5년경부터는 대학 서클과 현장 내에 형성되기 시작한 노동운동조직이 연결되면서, 조직적 관계 속에서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대개 대학 학력을 감추고 이력서에 고졸이나 중졸로 학력을 낮춰 생산직으로 공장에 취업하였다. 그래서 사업주나 경찰들은 이들을 ‘위장취업자’라 불렀다. 최한배는 이 위장취업자 중한 사람이었다.
김준용과 최한배
구로동맹파업 이후 김준용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위원장과 노동운동가 최한배가 민주화운동권의 새로운 인물로 떠올랐다. 이들의 인연은 파업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한배는 1975년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노동현장으로의 투신을 고민하였지만 가족의 생계를 외면하지 못하여 일단 코오롱에 입사한다. 당시 전태일의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강제 해산되고 노동교실이 폐쇄되었는데 최한배는 자신이 활동하던 경동교회의 대학생부와 당회를 설득하여 교회 교육관에 노동교실을 모방한 노동야학 과정을 개설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수료한 수강생들로 동화모임이라는 자치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해산된 청계피복노조의 조합원들을 이 노동야학으로 불러들여 동화모임 안의 소모임으로 재조직하였다. 이 소모임의 목적은 탄압으로 무너진 청계피복노조를 재건하는데 일조하는 것이었다.
동화모임 소그룹 회원 중에 김준용, 황만호, 강석호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나중에 청계피복노조를 재건하고, 노동운동의 재목으로 성장하게 된다. 최한배는 자신의 대학 동기이자 절친이었던 문성현, 정금채를 끌어들여 이 소모임에서 정치·경제·역사·노동운동사 등 좀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특별지도를 했다. 이 때 최한배와 김준용은 사제관계로 만났다. 7살 아래인 김준용은 최한배를 형처럼 믿고 따랐다. 전라도 시골에서 올라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회색빛’ 삶을 사는 김준용에게 최한배는 ‘늘 아랫목처럼 따뜻하고 새로운 세상의 창을 열어보여준 창’ 같은 존재였다.
‘대학생 형’이었던 최한배가 좋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건설현장에서 노동을 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엔가 현장에서 일하다가 머리를 크게 다쳐 붕대를 감고 김준용 앞에 나타났다. 이 사건은 김준용이 노동운동가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김준용이 군에 입대하여 말년휴가를 나와 최한배에게 연락하여 만났다. 최한배는 김준용을 구로공단에 데리고 가서 “너 제대하면 여기 와서 나랑 노동조합 만들자”고 했다. 김준용도 흔쾌히 동의했다.
최한배는 대학시절부터 꿈꿔오던 노동현장 투신을 위해 1978년에 코오롱에 사표를 내고 성수동 삼미전자라는 회사의 공원으로 취직한다. 그리고 얼마 후 삼미전자를 나와 건설현장 배관공으로 1년 정도 일하며 안정적인 공장 취업을 위해 위험물 취급과 열관리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81년 대우어패럴 3공장 보일러실에 기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제대를 앞둔 김준용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김준용은 제대 후 최한배와의 약속대로 대우어패럴 1공장 재단실에 경력기능직으로 입사하였다. 청계천에서 재단사로 일한 경력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노동자들의 신망을 얻었고, 최한배의 지원과 격려를 받아가며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조직작업에 착수했다. 그를 중심으로 단순 친목모임에서 시작하여 노동법 등을 학습하는 소모임이 만들어졌고, 소모임들은 점차 전 공장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싱사로 일하던 심상정(현 정의당 국회의원)과도 연결되었고,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 무르익어 갔다. 최한배는 드러나지 않게 김준용을 도와 노조설립작업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
구로공단에 새 바람을 불어넣다
김준용을 중심으로 노조설립을 준비해온 최한배, 심상정 등은 1984년 6월 회사의 방해공작을 뚫고 영등포 섬유노조연맹 사무실에서 105명의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노동조합 결성식을 여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노조결성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노조 가입원서를 받기 시작하여 결성 일주일 만에 2,000여 명을 노조에 가입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대우어패럴노조가 결성에 성공하자 구로공단과 영등포지역에 노동조합 결성의 바람이 일어났다. 현장에 들어가 있던 대학 출신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등이 잇달아 노조를 결성했다. 이 신생노조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몰려다녔고, 노조 사무실 현판식은 이들의 잔칫날이었다. 이때 맺은 유대관계는 이후 구로동맹파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얼마 안 있어 회사측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구사대가 조직되어 움직이고, 관리직이 총동원되어 노동자들에 대한 탈퇴 회유와 압력이 시작되었다. 회사에 의해 공공연하게 노조가입자들에 대한 불이익이 주어졌고, 구사대에 의한 폭력사태가 빈발하였다. 이런 탄압을 못이겨 탈퇴원서를 내는 조합원들이 늘어갔다.
노동조합에서는 비상수단으로 열성조합원 150명을 끌고 민한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여 사회여론에 호소했다. 결국 농성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결단으로 회사가 양보하여 노동자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민한당사 농성은 해산되었고, 회사의 집요한 탄압도 일시 중단되었다. 근로조건도 개선되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구로공단 신생노조들은 1985년 임금인상투쟁에 들어갔고, 여기에서도 임금인상투쟁시기를 통일하는 등 공동투쟁을 조직한 결과 노동조합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승리의 중심에는 김준용이 이끄는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이 있었고, 김준용은 구로공단 노동자의 리더로 떠올랐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이 그렇게 쉽게 물러설 리가 없었다. 이처럼 구로지역 신생노조들이 연대활동을 통해 역량이 강화되고 발전되어 나가기 시작하자, 자본과 권력은 민주노조들을 파괴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1980년 노동조합 정화조치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던 민주노조운동이 더욱 발전된 형태로 새롭게 부활하는 것에 대하여 초장에 그 싹부터 잘라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임금인상투쟁이 마무리된지 두 달이 지난 6월 22일 경찰은 갑자기 대우어패럴 김준용 위원장 등 간부 3명을 구속시켰다. 그러나 노조 지도부의 구속으로 민주노조의 싹을 자르겠다는 저들의 판단은 결국 오산이었음이 드러났다.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을 비롯한 신생노조들은 즉각적으로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하여 대응에 나섰고, 동맹파업을 결정했으며, 그를 위한 연대투쟁위원회(위원장; 효성물산 김영미 위원장)를 구성했다. ‘역사적인’ 구로동맹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어린 시절
최한배는 1951년 전북 군산시 월명동에서 경주 최씨 32대손으로 1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원 고향은 순창이었는데 할아버지 때 군산으로 이주했다. 학교는 근처에도 못 가봤지만 채석장 인부로, 부두노동자로, 곡식장사로 근면하게 생계를 꾸려온 아버지 덕에 최한배는 비교적 안정된 가정생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최한배는 지방의 명문으로 통하는 군산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공부도 곧잘 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다. 한때 통일교에 심취해 집안과 갈등을 빚기는 했지만 대체로 모범적인 장남이었다.
고2에 재학 중이던 1967년 아버지가 갑자기 뇌일혈로 돌아가시면서 집안에 환란이 왔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정신병에 시달리면서 장남인 최한배가 집안 살림을 떠맡아야 했다. 최한배는 학교를 휴학하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게 문을 열어 곡물장사에 나서기도 했지만 결국 어린 나이로 기울기 시작한 가세를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결국 고교 졸업과 함께 가산을 정리하고 서울 변두리로 이주하게 된다.
1970년 첫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1년 재수한 끝에 1971년 서울상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입학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음모가 구체화되어가는 가운데, 학교에서는 연일 3선개헌반대, 교련반대 등으로 연일 학생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상대 내에도 후진국사회연구회, 이론경제학회 등 이념서클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현장으로 가자’
신입생 시절의 최한배는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학 2학년이 되면서 누나의 권유로 진보적 교회로 알려진 경동교회 대학생부에 나가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쉽게 분위기에 익숙해졌고, 당시 담임목사였던 강원룡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강 목사의 영향으로 한때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될 생각을 할 정도로 교회활동에 몰두했다.
경동교회 대학생부에서는 성서연구 뿐만 아니라 해방신학, 사회과학 학습, 야학, 문화활동 등을 다양하게 했는데, 최한배는 이러한 다양하고 분방한 교회활동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생부의 중심멤버가 되었다.
대학생부 활동과정에서 문성현(전 민주노동당 대표)을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다. 최한배는 문성현과 함께 사회과학 공부와 실천활동을 하는 ‘돌샘’이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청계천 뚝방지역 빈민실태조사에 참여했고, 야학활동도 함께 했다. 청계천 뚝방촌이 철거가 시작되면서 최한배는 철거에 항의하는 철거민들과 함께 동대문구청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뚝방촌과의 인연은 수개월간으로 끝났지만 뚝방촌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 모습은 최한배에게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았다.
이 무렵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운영하는 노동교실을 알게 되었다. 노동교실은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을 상대로 한 교육기관으로 경동교회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 무렵 강 목사가 주관하는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실시하는 노동자 합숙교육에도 참가하여 방용석, 박순희, 최순영, 유동우 등 노동조합 지도자들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에 대한 최한배의 관심은 갈수록 깊어졌고, 점차 노동운동에 일생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다.
대학교 4학년 때인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잡혀가고, 학내시위가 원천봉쇄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의 학생활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합법공간으로서 교회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새문안교회, 향린교회, 제일교회, 경동교회 등 진보적인 교회의 대학생부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최한배는 경동교회 대학생부 대표로 논의에 참가하여 시국기도회를 조직하고 교회 밖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한배의 관심은 독재체제의 가장 큰 희생양인 소외계층, 그 중에서도 노동자들의 문제와 운동에 쏠렸다. 특히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 이소선 어머니와 청계노조의 활동, 그리고 전태일 열사의 육필일기가 그의 가슴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그의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심화되어 노동현장에 투신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자신의 심경을 최한배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현장으로 가자’ 이것이 당시 정치사회적 현실에 분노하면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 빈민 들의 삶 속에 다가서려는 젊은이들, 어찌 보면 낭만적인 휴머니스트들의 지극히 순수한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가족의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최한배에게 노동현장 투신은 곧바로 실행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학졸업과 함께 대기업에 취직을 하고 열심히 저축하여 잠실에 13평짜리 임대아파트도 마련하였다. 하지만 3년간의 회사생활 기간중에도 노동현장에 대한 꿈은 한시도 놓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건이 나아졌다. 누나가 결혼해서 독립하고, 아래 여동생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우체국에 근무하기 시작했다. 독자 특례로 방위 소집되어 1년간의 군복무도 무사히 마쳤다.
이 기간 중에 앞서 보았듯이 경동교회 내에 동화모임을 만들고, 김준용 등 청계노조 조합원들을 교육했는데 이 과정에서 또 한 명의 평생친구인 정금채(안양군포의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를 만난다. 정금채는 최한배의 상대 동기로 상대 재학 중에 학생회장을 하면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는 등 이미 학생운동 지도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개인적으로 노동운동으로의 투신을 모색하고 있다가 문성현의 소개로 최한배를 처음 만나 곧 친구가 되었다. 정금채는 그 후 최한배와 건설현장 노동을 함께 하면서 노동현장 투신을 모색했는데, 그때 최한배 집에 기숙하면서 최한배의 여동생과 인연을 맺어 최한배와는 처남 매부지간이 되었다.
반려자 김종민을 만나다
대우어패럴에서 김준용과 함께 노조설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최한배는 평생반려자이며 동지인 아내 김종민을 만났다. 당시 김종민은 야학교사로 인연을 맺은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하여 대우어패럴 2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공장취업 준비를 하면서 한번 만난 적 있는 최한배의 경동교회 여자후배 태혜숙을 우연히 가리봉동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김종민이 현장활동 과정을 함께 점검할 만한 선배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회 선배 최한배에게 연락하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 때 최한배는 몸이 편찮은 어머니를 위해서 빨리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배우자를 물색 중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소개 받은 김종민이 같은 공장에 다니고 있으며, 노동운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동지라는 걸 안 최한배는 7살이나 아래인 김종민이 결혼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얼마를 기다리든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그녀와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공을 들인다.
처음에는 선후배이자 현장 동지 관계로 지속되었지만 두 사람을 급속하게 묶어주는 계기가 왔다. 최한배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는 와중에 김종민은 현장에서 발목을 다쳐 기브스를 하고 기숙사를 나왔지만, ‘보안문제’ 때문에 직접 연락선이 없던 두 사람은 서로의 근황을 알 리 없어 애타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평생동지로서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82년 8월 최한배는 둘째 동생과 결혼하여 매제가 된 정금채 집에서 형제들과 친구 문성현 내외, 김종민의 현장 동료 둘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모두 ‘위장취업자’ 신분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신혼여행도 배낭을 매고 야간열차를 타고 덕유산 산행을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광명시 농가 단칸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첫 아들 출산 후 김종민은 아이가 이유할 때까지 현장활동을 쉬다가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다시 현장에 복귀했지만, 얼마되지 않아 구로동맹파업으로 최한배의 신분이 드러나자 김종민은 결국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외출’ 50일 – 서노련사건으로 구속되다
최한배는 1986년 3월 구속된지 8개월 만에 항소심에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으로 석방되었다. 최한배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전두환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은 강화되었고, 이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도 더욱 격렬해졌다.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노동자정치투쟁의 지평을 열었던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은 김문수, 심상정을 중심으로 탄압에 맞서기 위해 지하 전위조직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서노련의 기관지 <서노련신문>에서는 반독재 정치투쟁을 넘어 사회주의 정치사상을 공공연히 선전하였다.
석방되어 나온 최한배는 나오자마자 자연스럽게 서노련 조직활동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급격하게 변화한 조직환경은 최한배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노동현장에 뛰어들었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에만 몰두했던 최한배는 새로운 조직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아내가 구해다 준 유인물들을 열심히 읽으면서 본격적인 이론학습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오래가지 못했다. 86년 인천 5.3사태 직후 전두환정권은 시위주도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폈다. 결국 표적이 되었던 <서노련신문>팀이 인쇄소에서 꼬리를 밟혀 보안사 수사팀에 연행되었다. 이 소식을 맨 먼저 접한 최한배는 김문수와 함께 서노련 사무실로 쓰고 있던 잠실아파트로 가서 문건들을 정리하다가 보안사팀의 급습을 받고 송파 보안사부대에 연행되었다. 첫 징역에서 석방된지 불과 50일만이었다.
보안사 지하실에서 최한배는 10여일 동안 발가벗겨진 채 물고문 등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출소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자백할 것도 별로 없었지만 그들은 최한배가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최한배는 이때를 회고하며 ‘나는 정말로 항복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진술서에 쓰고 도장을 찍었다. 경찰서로 넘겨져 아내와 면회한 자리에서 앞으로 운동을 포기하고 조용히 살겠다고 말할 정도로 가혹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검찰로 송치되고 구치소에 수감되자 고문으로 피폐해졌던 심신은 서서히 회복되었고 구치소에서 만난 운동권 인사들과 옥중투쟁을 함께 하면서 운동에 대한 의지를 다시 굳게 다질 수 있었다.
두 번째 징역을 살면서 최한배는 마음을 다잡고 독서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생각들을 다듬어 나갔다. 건강관리를 위해 운동에도 힘썼다. 달리기, 벽치기 테니스, 평행봉을 매일 거르지 않았고, 요가와 체조를 열심히 했다. 밖에서는 김종민이 구속노동자가족협의회를 만들어 구속노동자들을 뒷바라지하는 한편 해고자 복직과 서노련 탄압의 실상을 폭로하는 활동에 매진했다. 최한배가 안양, 부산, 대전, 청주교도소을 전전하며 1년여 징역을 사는 동안 밖에서는 1987년 1월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하여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서서히 가열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6월항쟁이 전국을 민주화물결로 뒤덮고 전두환정권의 6.29 항복선언이 발표되었다. 최한배는 6.29선언 후 사흘째 되는 날 청주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최초로 전국노동자대회를 조직하다
최한배는 석방되자마자 연세대 교정에서 열리는 이한열 장례식에 참석했다. 수십만 군중과 함께 시청까지 행진하면서 국민의 힘을 실감하면서, 머지 않아 이 열린 공간 속에서 노동자대중들이 세력화할 것이며 이를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하게 된다.
예상대로 7월초부터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서막이 열렸다. 최한배는 전태일기념관 정인숙 사무국장의 요청으로 기념관 내에 노동문제상담소를 꾸리고 봇물 터지듯 터져나오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응했다. 이때 김준용을 통해 지하철 노동자 배일도를 소개받아 지하철노조 결성작업을 지원했다. 배일도의 집에서 20여 명의 핵심멤버를 교육시켰고, 그 결과 8월 지하철공사노동조합의 결성식을 성공적으로 치룰 수 있었다. 지하철노조 초대 위원장에 배일도가 취임했다.
노동자대투쟁은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을 정점으로 정부의 강경책에 부딪쳐 소강국면으로 접어든다.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이 절실해지자 노동계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의 부문별 위원회의 하나로 노동위원회를 결성하고, 최한배에게 사무국장으로 취임해 줄 것을 요청한다. 최한배는 심상정, 김준용과 의논한 끝에 시국에 걸맞는 노동운동의 공개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고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최한배는 정파와 지역에 따라 분화되어 있는 노동운동의 상황 속에서 노동자위원회를 통해 노동대중들을 민생, 민권을 위한 공동의 투쟁으로 결집시켰다. 또한 <노동자신문>을 발행하여 유가로 판매해서 재정에 충당했다. 수많은 집회 현장에서 <노동자신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가 판매대금으로 노동자위원회의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6.29선언 이후 대통령후보 문제를 둘러싸고 국민운동본부 내의 민주세력들은 서서히 분열되어 갔지만 노동자위원회는 후보문제에는 가급적 관여하지 않고 대통령선거라는 열린 공간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선전하고 노동자들의 대중투쟁을 고양시키는 일에 집중하며, 이러한 활동을 통해 노동운동의 전국적 연대를 강화해 나간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국민운동본부가 대통령후보 문제로 마비상태에 빠져있는 속에서도 노동자위원회는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고, 그 결과 이듬해인 1988년 3월 울산에서 노동단체 대표자연석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국연대기구를 기초로 1988년 6월에는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가 결성되었고, 최한배가 사무국장에 선출되었다.
최한배는 전국노운협의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노동운동 탄압을 저지할 노동자들의 연대투쟁과 노동법 개정투쟁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88년 11월 13일에는 여의도에서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최한배는 전날 연세대에서 열린 전야제에서 사회를 맡아 교정에 모인 수만 노동자들에게 연세대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평화행진을 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다음날 시위대열 맨 앞에 서서 시위를 이끌었다. 당시의 모습을 문성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그 날 연세대 정문, 경찰로 까맣게 봉쇄당한 그 한가운데 서서 “가자 여의도로!”하고 외치며 전선을 돌파하던 내 친구 노동운동가 최한배의 모습이…..
6.25 이후 최초로 서울 한복판에서 수만의 노동자들이 각 노동조합 깃발을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최한배는 전국적 연대를 성공적으로 조직해낸 감격에 젖어들었다.
전민련 사무처장
전국노동자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노동운동의 위상은 높아졌고, 이듬해 1989년 1월 결성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부문별 단체인 전국노운협의 위상도 따라서 강화되었다. 전국노운협의 사무실도 전민련이 있는 광화문 사무실 2층에 자리잡았다. 이해 5월 전교조가 결성되었는데 결성과 동시에 당국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위원장이 구속되고 1500여명의 조합원이 해고되었다. 최한배는 전국노운협의 사무국장으로 이 전교조 탄압에 노동운동 세력의 공동 대응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민주세력 간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1989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결성을 위한 대중적 결의를 모아내는 집회로 조직되었다. 전노협이 결성되면서 노동운동의 중심은 전국노운협에서 전노협으로 넘어갔고, <노동자신문>도 전노협 기관지로 바뀌었다. 최한배는 전노협 결성 이후에도 전노협을 뒷받침하는 일에 진력했다.
1990년 초 진보정당 건설문제가 제기되고 장기표, 이재오 등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는 인사들이 대거 탈퇴하여 전민련 지도부가 약화되자 전민련에서는 전국노운협에 사무처장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최한배는 조직의 요청으로 전민련 사무처장직을 수락하고 90년 초 취임했다. 당시 김근태 정책실장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후기 전민련 내에서 최한배는 전민련의 활동이 기층민중의 생존권투쟁을 지원하고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때 전민련은 정치단체로 오해도 받았지만 전민련이 스스로 주도성을 앞세우기보다는 자기를 낮추고 광범한 세력들을 모아세우는 역할을 하다 보니 전민련에 대한 대중조직들의 신뢰가 점차 회복되었다. 최한배는 91년초 전민련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사무처장직을 사임했다. 87년 감옥에서 석방된 후 폭풍처럼 터져나온 노동대중의 열기 속에서 정신없이 달려온 4년이었다.
새로운 인생 2막을 모색하다
전민련을 사직하고 오랜만에 휴식시간을 가지게 된 최한배는 담배도 끊고 등산을 다니면서 가족과 시간을 같이하는 한편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자신의 진로를 찾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양병원에 문상을 갔다가 노동자들의 항의집회를 진압하는 경찰들에 의해 갑자기 연행된 것이다. 경찰서에서 신분을 밝히고 단순한 문상객이라고 항변해 봤지만 경찰은 횡재나 만난듯 그대로 구속시켜버렸다. 어이없는 구속이었다. 게다가 전에 집행유예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2심판결로 확정된 1년 6개월의 징역을 꼬박 살아야했다. 이 세 번째 징역은 안양교도소와 순천교도소를 거쳐 1992년 10월 만기출소했다.
감옥 안에서 최한배는 동구와 소련의 붕괴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최한배는 구속 전 노동운동가 김수길과 함께 소련공산당의 페레스트로이카 문건을 공부했던 일을 상기하면서 근 백년에 걸친 사회주의 혁명의 실험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자신의 인생 진로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막상 감옥에서 나와서 보니 이제 노동운동 내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87년 이후 변화된 환경 속에서 노동운동은 노동조합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기존 공개운동 활동가들의 공간은 극히 협소했다. 그렇다고 정치로 나서는 것은 적성에도 맞지 않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한배는 새로운 인생을 모색하기로 결심했다. 사회주의권 실패라는 환경 속에서 기업이나 나라 일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그리고 그 속에서도 무능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이런 최한배의 의지를 이해한 김문수가 대주전자재료의 임무현 회장을 소개했다. 임무현 회장은 김문수가 70년대 지하조직인 ‘과학적사회주의그룹’에서 활동할 때 같은 조직의 멤버로 활동한 노동운동 1세대였다. 임무현은 조직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출소한 후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임무현은 최한배에게 자기 회사가 중국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중국에 가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최한배는 임무현의 제안에서 새로운 도전의 세계를 보았고 즉각 제안을 수락했다.
중국대륙에 펼친 꿈
1993년 8월 반월공단 대주정밀화학 사장실에서 형식적인 입사면접을 치르고, 최한배는 도전(導電)재료 사업담당 이사로 임명되었다. 임무현 회장과 함께 면접 자리에 나왔던 박중희 전무도 현장 노동운동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단번에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임무현 회장과 박중희 전무는 최한배가 대주에 근무하는 18년동안 최한배를 막내 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최한배 역시 두 선배에 대한 믿음으로 전혀 생소한 기업 경영에 쉽게 적응했고, 작은 중소기업이지만 의미있는 기업으로 발전시켜보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보람으로 생각했다.
최한배는 도전재료 담당 이사로 2년간 일하면서 노동운동과정에서 터득한 친화력으로 직원들과 긴밀히 소통했고, 그 결과 매출이 목표치를 넘어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1995년에는 능력을 인정받아 영업담당 총괄이사로 승진했다.
노동운동가에서 기업경영자로 입장이 바뀌었지만 최한배에게 정신적 갈등이나 혼란은 없었다. 오히려 노동현장과 공개노동운동 실무자의 경험, 심지어는 3년 반의 감옥생활 경험까지도 기업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최한배의 열린 자세 탓이기도 하겠으나 임무현 회장에 대한 인간적 신뢰, 그리고 무슨 일이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생활신조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 같다.
1996년 1월 최한배가 김중희 전무와 함께 영업팀의 일원으로 중국을 처음 방문한 이후 대주의 중국대륙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6년 3월 자본금 50만 달러로 대주의 중국법인이 설립되고, 최한배는 4월 1일자로 상해대주전자재료 총경리(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최한배는 매출도 전혀 없고, 공장도 짓기 전에 말 그대로 맨땅에서 시작하여 대주라는 회사를 중국대륙에 뿌리내리는 작업에 몰두했다. 중국어를 새로 배우면서 서투른 중국어 실력으로 중국 전역을 돌면서 영업활동을 다녔다. 1997년에는 중국에서 최한배가 혼자 사는 모습을 보고 아내 김종민이 아들과 함께 상해로 이사를 왔다.
1년여 영업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97년부터 현지생산을 추진했고, 때마침 불어닥친 IMF 한파 속에서도 1998년 3월 임대공장 출범식을 가지고 현지생산을 시작했다. 아내까지 공장에 매일 출근해서 출납 일을 도왔다. 김종민은 초기 어려운 환경에서 비용을 줄이느라 에어컨도 없는 사무실에서 선풍기에 의지해 사무실을 지켰다. 생수값을 아끼기 위해 수돗물을 끓여 마셨다.
최한배의 집요한 노력과 약간의 행운이 겹쳐 대주전자재료가 점차 중국업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매출도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공장건설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공했다. 중국에 진출한지 4년 만에 대주는 중국대륙에 외자기업으로서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후 2006년까지 10년간 최한배는 대주전자재료의 중국 현지법인 책임자로 중국사업을 이끌었다. 그리고 선봉에 서서 중국사업의 기초를 이룩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사업에 쏟아넣었다. 넓은 중국대륙을 동서남북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필요하면 즉시 행동했고, 상대를 설득할 일이 있으면 즉시 토론하고 설득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고생한 대가를 특별히 바라지 않았다. 소박하게 살면서도 환경이 바뀌면 주저없이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었다. 그런 그의 순수한 열정과 순수함은 주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북한사업의 꿈
중국진출 10년만인 2006년 3월 최한배는 김중희 전무와 교대하여 본사 대표이사 사장으로 발령이 났다.
최한배는 본사 근무 1년여만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사표를 내고 새로운 인생진로를 모색한다. 바뀐 기업환경 속에서 역량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2008년부터 회사를 다니는 틈틈이 북한대학원에 다니며 자신의 마지막 사업으로 북한사업 진출을 꿈꿔 왔었다. 그는 평소 아내에게 자신의 마지막 사업으로 북한에서 기업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북한에서 사업을 하면서 북한의 기업가와 관리자의 멘토가 되어 자신이 터득한 기업경영 노하우를 전하고 싶은 게 그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가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한나라당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대북문제를 담당하는 보좌관으로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해왔다. 최한배는 김문수와의 오랜 인연으로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김문수 지사를 돕기로 한다. 더욱이 대북문제 담당 보좌관의 직을 수행하며 자신이 그리고 있는 꿈의 실체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보려는 의지도 있었다. 그는 2003년까지 2년 반 동안 경기도지사 보좌관을 거쳐 경기도시공사 상임감사로 일했다.
도시공사 상임감사 임기를 채우기 전인 2010년 3월 대주의 임무현회장이 전화를 걸어 상해대주전자 총경리로 간 김중희가 갑자기 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 대신 상해회사를 다시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최한배는 평소 형처럼 따르던 선배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도시공사에 사표를 내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상해로 향했다. 자신의 젊음을 바쳐 일구었던 중국사업을 차마 주인 없이 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담담하게 흙으로 돌아가다
상해대주전자재료 총경리로 복귀하여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10년 말 최한배는 중국의 건강진단 전문기관인 징캉(景康)의원에서 전화를 받았다. 오전에 받은 혈액검사 결과 췌장암으로 의심되니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이틀 후 한국 출장이 잡혀있어 12월 7일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CT 검사를 한 결과 최한배는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도 불가하고 항암약물 치료로 생명 연장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6개월 시한부였다.
아내 김종민이 남양주시 수동면에 요양을 위해 집을 얻어 이사했다. 축령산 능선이 보이는 전원주택이었다. 이곳에서 최한배는 산에 산책을 다니며 호젓한 시간을 보내면서 마지막을 준비했다. 희망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아내에게 자신은 희망을 놔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2011년 초에 항암치료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약이 잘 들어 한가닥 희망을 갖게 하였으나 7개월쯤 지나자 약물치료에도 한계가 왔다. 이때부터 최한배는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글을 짬짬이 쓰기 시작했다. 훗날 출판을 해서 손자에게도 읽히고 자신을 아꼈던 사람들에게 정표로 나누어 주겠노라고 하면서.
투병하는 기간 중에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다녀갔다. 경동교회, 서울대학교 후배, 노동운동 시절 함께 했던 청계피복과 대우어패럴 노동자, 대학시절 친구들, 도시공사 직원들, 그리고 중국회사 사람들까지 병문안을 와서 눈물을 흘리고 갔다.
투병한 지 1년쯤 지난 2011년 말에는 아들 정환을 불러 할머니와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여 가족묘를 만들고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함께 묻으라는 유언도 남겼다.
항암제에 대한 내성으로 치료가 무력화되자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졌다. 턱뼈로 전이되어 음식을 씹지 못하게 되자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고 무서운 통증을 진통제로 버티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응급으로 스테로이드제를 써서 반짝 효과를 보는 듯 했으나 장에 천공이 생기고 상태가 더 악화되면서 결국 패혈증이 왔고, 2012년 2월 최한배는 평생의 반려 김종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놀랍도록 차분하게 준비했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가 남긴 글 『길』의 마지막은 그런 그의 차분하고 담담한 모습을 전하면서 긴 여운을 남긴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고 나가듯 역사는 흘러간다. 우리의 인생도 그 속에 묻혀 흘러가다가 생을 마감한다. 어떤 사람은 짧게 어떤 사람은 조금 더 길게 살겠지만 결국은 유한한 인생이다. 이젠 유한한 인생의 막이 내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두렵지 않다. 담담하게 인생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려 한다. …(중략)…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할 때도 있었지만 자기 신념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은 총체적으로 행복한 인생이다. 이제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중략)…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흙에서 왔으니 이젠 한 줌 흙으로 돌아가야겠다.
공동선, 2019년 3-4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민청련 부의장, 민통련 사무차장, 현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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