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0년
나는 80년대에 초중고를 다녔고 9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초중고 때 주로 배웠던 것은 ‘국가’에 관한 것으로 기억된다. 국어, 국사, 국민윤리, 국민의 의무, 국민교육헌장, 애국가 등등.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 시절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였다.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도 푸코나 데리다를 한번쯤 언급해야 ‘멋져’ 보이는 시대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알게 된 사실은 그때 서양에서는 지구학이 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1986년에 쓴 『위험 사회』에서 “위험이 지구화되었다”고 하였고(홍성태 옮김, 『위험사회』, 43쪽), 1997년에 쓴 『지구화란 무엇인가?(What is Globalization)』에서는 지구성과 ‘지구화의 정치학’ 개념을 제시하였다(조만영 옮김, 『지구화의 길』, 16쪽, 29쪽). 이 지구(인문)학이 지금의 인류세 인문학으로 발전되고 있다. 그래서 울리히 벡은 선구적인 지구인문학자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푸코나 데리다를 인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울리히 벡의 지구성(globality)은 내가 어렸을 때 배웠던 국민성(nationality)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 의미는 “우리는 하나의 (국민국가가 아닌) 지구사회 속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은 위험이 국경을 넘어 지구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민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지구성이라는 보다 큰 정체성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정치의 범위도 국가 단위에서 지구 단위로 확장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울리히 벡은 ‘지구화의 정치학’이라고 하였다. 지구화의 정치학은 간단히 말하면 ‘지구정치학’으로 개념화 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학문 분야에도 적용하면, 지구사회학, 지구경제학, 지구역사학 등이 가능해진다. 이것들을 통틀어 지구학 또는 지구인문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구학적 문제 의식을 명료하게 전달해 주는 책이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018년)이다.
개별 국가는 지금 시대의 가장 중요한 도전을 해결하는 데 올바른 틀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구적 정체성이 필요하다. 국가 단위의 제도는 전례 없는 일련의 지구적 곤경을 다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 유일한 현실적 해법은 정치를 지구화하는 것이다. (…) ‘정치를 지구화한다’는 말은 한 나라나 심지어 도시 단위의 정치가 작동하는 과정에서도 지구적 차원의 문제와 이익에 좀 더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뜻이다.
–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여기에서 유발 하라리는, 20년 전의 울리히 벡이 설파했던 것처럼, ‘지구적 정체성’이나 ‘정치의 지구화’와 같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지구학적 문제 의식이 지속되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나는 부끄럽게도 이러한 사실을 2020년에야 알았다. 그것은 서양에서 지구학이라는 흐름이 시작된 지 30년도 더 지난 후이다. 그러나 만약 젊었을 때에 지구학을 알았더라면 서양철학을 정말 재미있게 공부했을 것이다.
지구학과 인류세의 만남
최근의 인류세 인문학은 이와 같은 지구학적 담론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2000년에 인류세 개념이 나온 뒤에 인류세 인문학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지구학 담론 안에 인류세적 문제 의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에 자연과학 쪽에서 인류세 개념을 제시하자, 그것이 종래의 지구학 담론과 만나서 ‘인류세 인문학’이라는 흐름이 생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세 인문학은 ‘지구학 2.0’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차크라바르티의 행성론과 라투르의 가이아론이다. 차크라바르티의 행성론은 글로브(Globe)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 제기되었는데, 글로브 개념은 1990년대의 지구학에서 제기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이아는 1970년대에 제임스 러브록이 제기한 가설인데, 1990년대부터 토마스 베리와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고, 라투르의 가이아론은 그와 같은 생태신학 진영의 가이아론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차크라바르티의 행성론과 라투르의 가이아론은 ‘인류세의 지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라투르는 ‘인류세의 지구’ 개념을 사용한 적이 있다.
갈릴레오의 지구는 회전할 수 있지만 (…) ‘임계영역’은 없다. 그것은 운동은 있지만 행위는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아직 인류세의 지구가 아니다.
Galileo’s Earth could revolve, but it had (…) no “critical zones.” It had a movement, but not a behavior. In other words, it was not yet the Earth of Anthropocene.
– Bruno Latour, Facing Gaia, p.60.
20세기의 지구인문학자들 중에서 지구의 ‘행위’ 개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라투르는 “지구도 행위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인류세 시대의 인간은 지질학적 행위자라고 차크라바르티가 설파했듯이, 지구도 하나의 행위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0세기의 지구학과 21세기의 라투르 사이에는 ‘인류세’라는 시대 인식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이 지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지구 담론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생명학의 태동
서양에서 지구학이 싹트고 있을 무렵 한국에서는 생명 담론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중심 인물은 김지하이다. 최열과 김지하의 〈환경-생명〉 논쟁은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76년, 김지하와 최열은 서울구치소에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81년 춘천에서였다. 최열은 환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김지하는 생명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최열은 ‘공해’라는 현실문제의 심각성을 고민했고, 김지하는 생명에 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양자의 문제 의식은 〈한국공해문제연구소〉(최열)의 설립과 〈생명에 관한 원주보고서〉(김지하)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였다. 김지하는 환경운동, 공해운동, 유기농운동 등을 모두 생명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였고, 최열은 ‘환경’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운동의 외연을 넓히고자 하였다. 결국 1993년에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환경운동연합〉 창립식에서 두 사람은 공동으로 “환경은 생명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었다. (이상, 최열과 김지하에 관한 내용은 《뉴스메이커》 712호, 2007년 2월 13일자에 실린 신동호의 〈김지하의 생명 최열의 환경, 통하다〉를 정리한 것이다.)
김지하의 생명철학은 1986년의 한살림운동과 1989년의 〈한살림선언〉으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2003년에는 자신의 생명 담론을 『생명학』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망라하였다. 1986년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가 나온 해이고, 1989년은 라투르가 ‘기적의 해’라고 명명한 해이다(「기후변화 시대 기학의 귀환」 참조). 흥미로운 점은 김지하가 참여한 〈한살림선언〉에서 천도교의 ‘한울’ 개념과 지구학의 ‘가이아’ 개념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살림선언〉의 한울철학
〈한살림선언〉에서는 〈한〉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우주의 근원적 생명을〈한〉이란 말로 표현해 왔다. (…)〈한〉은 전체로서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개체로서의 하나이다. (…) 〈한〉은 많은 개체를 하나의 전체에 통합하면서 확산과 수렴의 순환적 활동을 수행하는〈한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사상은 서세가 동점하는 근세에 와서 우리 민족이 봉건적 질곡과 외세의 억압에 신음하고 있을 때 인내천사상으로 그 위대한 모습을 다시 나타냈다. (…) 동학사상은 하늘과 사람과 물건이 다같이〈한생명〉이라는 우주적인 자각에서 시작해서 우주의 생명을 모시고 (侍天) 키워 살림으로써(養天)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체천(體天)의 도를 설파하였다.
〈한살림선언〉은 최혜성이 대표로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이 부분은 김지하의 생각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한〉은 우주의 근원적 생명을 나타내는 오래된 우리말로, 여기에 〈울〉이 붙으면 전체와 개체가 순환적으로 수렴과 확산을 반복하는 생명 활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민족의 한울철학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동학이었다. 동학은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자각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생명을 모시고 살리고 키우는 실천을 설파하였다.
이상의 해석에 의하면, 동학은 생명사상이자 한울철학으로 요약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정작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자신은 〈한울〉이나 〈한울님〉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용담유사』에서 일관적으로 〈ᄒᆞᄂᆞᆯ님〉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학사상을 한울철학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한울〉 개념의 탄생
1905년, 최시형의 제자였던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전통적인 〈학〉의 자리에 서구적인 〈종교〉가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학〉에는 서구의 철학이나 과학 논의가 들어오고, 〈교〉에는 종교학의 색채가 입혀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11년 12월이 되면, 천도교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에 새로운 하늘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것이 〈한울〉이다.
이종일이 처음 사용한 이 새로운 명칭은 이후에 천도교의 공식적인 천명(天名)이 되었다. 그러다가 1920년 4월, 동학 창도 60주년이 되는 때에 오지영이 〈한울님〉 개념을 사용하자, 그 이후부터는 모두 〈한울님〉으로 통일되었다. 〈ᄒᆞᄂᆞᆯ님〉에서 〈한울님〉으로 새로운 〈님〉의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이상, 조성환・이우진, 「ᄒᆞᄂᆞᆯ님에서 한울님으로-동학・천도교에서의 천명(天名)의 변화」, 『대동철학』100, 2022 참조).
그렇다면 천도교에서는 왜 갑자기 하늘의 이름을 〈ᄒᆞᄂᆞᆯ〉에서 〈한울〉로 바꾼 것일까? 『천도교회월보』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짐작이 가는 것은 이 무렵에 〈한글〉 개념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한글〉이라는 말은 1910년에 최남선이 사용하고 주시경이 찬동하여 널리 유포되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외에도 1913년에 주시경이 창립한 ‘한글모’라는 연구회 명칭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이종일이 처음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허철구, 〈’한글’이라는 이름〉, 《한국일보》, 2016.10.06.).
어찌되었든지 간에 〈한글〉이라는 말의 탄생이 1911년 전후이고, 이종일도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글〉 개념의 탄생에 자극을 받아서 〈한울〉 개념을 생각해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1910년에 창시된 대종교의 천명(天名)도 〈한얼〉로 알려져 있다. 대종교에서 〈한얼〉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나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1910년대에 〈한〉이라는 접두사가 붙은 새로운 개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주적 생명력으로서의 한울
1920년대에 이르면, 천도교에서 〈한울〉 개념을 철학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당시 천도교 사상계를 대표했던 야뢰 이돈화는 1924년에 쓴 『수운심법강의(水雲心法講義)』에서 〈한울〉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한〉은 一大라는 뜻이오, 〈울〉은 울타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한울〉이라 하는 말 속에는 천지만유를 전적으로 포용하여 부르는 말이다.
-『수운심법강의』, 천도교중앙총부, 1968, 86쪽.
여기에서 一大는 멀게는 여말 선초의 성리학자 양촌 권근이 天을 파자(破字)해서 一大라고 설명했던 대목을 연상시킨다(“天爲一大.” 『입학도설』「천인심성분석지도(天人心性分釋之圖)」). 가깝게는 〈한살림선언〉에서 〈한〉을 ‘전체로서의 하나’로 설명한 것과 상통한다. 이돈화는 한울을 설명하면서, 한국어의 ‘하나’, 그리고 한자어의 ‘天’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해석의 전통이 〈한살림선언〉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돈화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한울의 철학적 의미를 ‘생명’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먼저 우주에는 일대 생명적 활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활력을 수운주의에서는 ‘지기(至氣)’라 하고, 지기(至氣)의 힘을 ‘한울’이라 한다. 그러므로 대우주의 진화에는 한울의 본체적 활력, 즉 생생무궁의 생명적 활동의 진화로 만유의 시장을 전개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체적 한울은 만물의 원인이 된다.
– 이돈화, 『신인철학(新人哲學)』, 천도교중앙총부, 1968(초판은 1931), 17~18쪽.
여기에서 ‘지기(至氣)’는 최제우가 하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21자 주문에 나오는 말로(至氣今至願爲大降), 인간에게 강령하는 ‘신령한 기운’을 말한다. 그런데 이돈화는 그것을 ‘우주의 생명력’이라고 하면서 생명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아가서 지기를 ‘한울’의 다른 말이라고 하면서, 지기와 한울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제 한울은 만물을 낳는 원인이자 진화의 추동력으로 해석된다. 이돈화의 『신인철학』에 이르러 한울이 마침내 ‘우주 본체’로 자리매김 되게 된다. 이는 마치 종래의 ‘은혜’ 개념이 원불교에 이르면 처음으로 ‘우주 본체’로 격상된 것과 유사하다(원불교의 사은四恩 사상).
이상의 고찰에 의하면, 〈한살림선언〉에 나오는 〈한〉에 대한 설명 방식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20년대의 천도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20~30년대의 이돈화에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울학과 지구학
다시 김지하로 돌아오면, 〈한살림선언〉에는 러브록의 ‘가이아’ 개념도 등장한다.
생태계는 자율적으로 자기를 조직하는 체계이며 동시에 자기 안에 인간, 생물, 무기물들을 하나의 생명으로 포괄하고 있는 인간보다 큰 생명이다. 생태계로서 지구는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이며 가이아(Gaia)로서의 지구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만일 지구가 단순한 무생물체의 고체덩어리라면 어떻게 인체가 체온을 조절하듯이 지표(地表)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고 모든 지질학적, 기상학적인 요동을 겪어내면서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었겠는가. 물건 안에도 성스러운 한울이 계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해월은 땅 울리는 소리가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고백하였다.
여기에서는 가이아, 한울, 생명이 동일한 층위에서 논의되고 있다. 한울이건 가이아건 모두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한울은 동학의 가이아이고, 가이아는 서양의 한울인 셈이다. 이처럼 〈한살림선언〉에서는 한울이 지구학적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결국 〈한살림선언〉에는 생명학과 지구학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한살림선언〉은 동학을 생명학으로 현대화하고, 그것을 다시 서구의 지구학과 대화하는 일종의 ‘지구지역학’의 텍스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참고로 러브록의 『가이아: 지구상의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출판된 것이 1979년인데, 그것이 인문학이나 시민단체에 수용된 시점은 1980년대 중반 무렵이다. 1984년에 ‘가이아 재단’이 설립되었고, 노먼 마이어즈가 편집한 『가이아: 행경 경영 도감』이 출판되었다. 1988년에는 토마스 베리가 『지구의 꿈』에서 러브록과 가이아 이론을 소개하였다. 〈한살림선언〉이 쓰여진 시점이 1989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빠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이상 조성환, 「생태 위기에 대한 지구학적 대응: 성스러운 지구와 세속화된 가이아」, 『종교문화비평』 42, 2022, 110~111쪽 참조).
한편 이돈화의 『신인철학』을 자세히 보면, 거기에도 이미 지구학적인 관점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지구는 한편으로 공기와 수소가 고도의 열도(熱度)로 인하여 기체 형태를 이룬 각종 다른 요소와 합쳐져 조직된 환기(環氣)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또 지구는 방사(放射) 작용에 의하여 점차 냉각이 되면서 장대한 시간을 경과한 후에는 가장 뜨거운 부분에 의하여 분리되는 부분이 피차 분화된 결과를 낳게 한다. 이것이 지각(地殼)이다. 그리하여 지구는 더욱 냉각한 결과, ‘환기(環氣)’ 중에 포함되었던 모든 고체화 할만한 요소는 침강 상태를 일으키면서, 하강하는 것은 물이 되고, 가벼워서 남은 것은 공기가 되었다. 이리하여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시기에서 동식물을 화생(化生)케 하였다.
– 이돈화,『신인철학(新人哲學)』, 13~14쪽.
여기에서 ‘환기’는 오늘날로 말하면 ‘대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무거운 것은 위로 올라가고 가벼운 것은 아래로 내려온다”는 설명은 고대 중국의 『장자』나 『회남자』 등에 나오는 우주생성론을 연상시킨다(가령 “가벼운 기는 올라가서 하늘이 되고, 무거운 기는 내려와서 땅이 되었다”). 이돈화는 서양의 지구과학이나 동아시아의 우주론 등의 지식을 바탕으로 지구에 대기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생명체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의 지구시스템과학적으로 말하면, 지구에서의 생명의 거주 조건, 즉 거주가능성(habitability)의 형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이미 1920년대부터 보이고 있다. 이돈화가 1924년에 쓴 『인내천 요의(要義)』에 나오는 “지구에는 본래부터 생명의 소질이 복재(伏在)하였다”(65쪽)와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지구학적 시야에서 생명의 조건을 탐구하는 문제 의식은, 가이아 이론을 구축한 제임스 러브록과 린 마굴리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러브록은 화성이나 금성과 달리 지구에만 생명이 살 수 있는 대기 조건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 원인을 탐구하였다. 그 결과 생명체가 자신들의 거주 조건을 만들어 왔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상의 고찰에 의하면, 이돈화와 〈한살림선언〉 사이에는 모종의 사상적 연속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그것이 서양의 지구학과 공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류세의 K-철학
그런데 생명학 체계에서는 인류세 시대의 ‘지질학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설명하기 쉽지 않다. 생명의 일원성이나 창조성은 말할 수 있어도, 그것이 어떻게 지구의 대기 조건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 방식은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개념이 동학의 ‘기화(氣化)’이다. 최제우는 수련을 통해서 신령과 접하는 경험을 하면 내 몸에 기화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반면에 최시형은 최제우의 기화 개념을 지구학적 차원으로 확장시켰다. 구체적으로는 자연계에서 먹고 먹히는 현상을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고 하면서, 최제우의 ‘기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이돈화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주, 즉 한울을 “일대 기화적 생명체”라고 해석하였다(『신인철학』, 37쪽).
최시형과 이돈화의 지구학적 기화 개념에 의하면, 생명이란 기를 변화시키는 활동을 한다. 그런 점에서 최한기의 기학과 상통한다. 그리고 이돈화나 김지하의 생명철학에 따르면, 생명은 끊임없이 창조 활동을 한다. 그 창조 활동 중에는 도구를 만드는 활동도 포함된다. 그런데 최한기의 기학 체계에 의하면, 인간이 만든 도구도 기를 변화시킨다(器用氣化).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창조 활동을 하고, 그 창조 활동에 의해서 도구를 만들며, 그 인공적인 도구에 의해서 대기의 조건을 변화시킨다. 이렇게 설명하면 생명학적 체계 내에서도 인류세적 인간관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다만 거기에는 기학적 해석이 가미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총 12회에 걸쳐,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 인식이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차크라바르티와 라투르의 논의를 빌려서 소개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철학, 특히 기학이나 동학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탐색해 보았다. 기학이나 동학은 당시에 자연과학과 물질개벽이라는 서양의 충격을 바탕으로 형성된 한국사상이다. 그런데 지금은 인류세와 기후변화라는 새로운 시대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그에 맞는 새로운 한국철학을 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번 칼럼은 그것을 시도해 보는 실험적 작업이었다. 대학 안에서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는 귀한 기회를 주신 《다른백년》의 이병한 대표님에게 감사드린다.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다시개벽'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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