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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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European University Institute

 

슬레진저 경(Arthur M. Schlesinger, Jr). 저명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케네디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을 지냈다

 

출처: 포린-어페어즈, September/October 1997

 

소개의 변) 미국의 권위있는 담론매체인 ‘포린-어페어즈’가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 현안들과 관련하여, 과거에 제기되었던 주요 칼럼들과 저술들을 되찾아 반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하, 서구식 민주주의가 포퓰리즘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아래 칼럼은 “민주주의의 미래’라는 주제로 1997년 런던대학의 미국연구소에서 행한 강연의 내용에 기초하여 작성된 것으로, 25년이 지난 현재에도 유효한 생생한 비판과 지혜로운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필자의 이름에도 반영되어 있듯이, 서구사회의 귀족 출신으로 자신이 서구의 우월감에 갇혀 있어, 중국 등 아시아의 체제에 대하여 의도적인 비판(전체적 권위주의?)을 가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예로써 서구의 대표적 우익 인사인 소로스와 팰튼(홍콩의 마지막 영국총통) 등을 오히려 합리적인 인사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원형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한국과 인도 그리고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역사에서도 앞선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위기에 봉착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탈출구는 오랜 기간 축적된 동양의 역사적 경험과 지혜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서구식 체제와 융합하는데 있다 할 것입니다. 아시아의 천지인합일 사상 및 공동체적 愛民주의와 서구식 자유존중 및 개인주의의 상호보완과 圓融적 결합, 이것이 가버넌스 위기에 처한 인류의 미래적 과제가 아닌가 합니다.

 

 

이사야 베를린이 말했듯이 20세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서구 역사상 (역자: 동아시아 역시) 가장 끔찍한 세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끔찍한 세기 끝에는 해피 엔딩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흘러간 멜로 드라마처럼 악당들에 의해 철로에 묶인 처녀 격인 민주주의는 달려오는 기차에서 극적으로 구출됩니다. 세기가 끝나감에 따라 주요 악당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 파시즘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공산주의는 흐느적거리며 붕괴되었습니다.

승리의 계절이 뒤따랐습니다. 200년 전 칸트는 그의 『보편사 사상』에서 공화정 정부형태가 다른 모든 정부형태를 대체할 운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예언은 성취되듯이 일부 학자들은 “역사의 종말”을 환영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독재보다 민주주의 아래 사는 사람이 많다”고 선언했으며, New York Times 는 신중한 확인을 통해 클린턴의 주장을 추인했습니다. 예언자가 설명한 역사의 종말 교리에 따르면, “인간 정부의 최종 형태로서 서구 자유 민주주의의 보편화”를 기대할 수 있는 듯 했습니다.

역사가들에게 이러한 행복감은 과거에 대한 기억의 종처럼 들립니다.  19세기는 빛나는 희망을 품고 20세기로 전환을 예고하지 않았던가요? 기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100년(20세기)은 낙관주의라는 높은 기대의 분위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세기의 진보적인 인사들은 민주주의의 필연성, 진보의 불패, 인간 본성의 예의, 그리고 다가오는 이성과 평화의 통치를 믿었습니다. 당시 스탠포드 대학의 총장인 David Starr Jordan은 ‘세기전환의 책 – The Call of the Twentieth Century ‘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표현했습니다. Jordan은 “20세기의 인류는 희망에 가득 찬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세상을 사랑할 것이고 세상은 그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예측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사랑보다는 증오, 비합리성, 잔학 행위가 유행했던 한 세기를 회상합니다. 20세기라는 길고 어두운 여정은 동시에 인류 생존에 대한 가장 심각하고 불길한 예감이라는 영감을 주었습니다. 1900년대에 자신있게 나아가던 민주주의는 한 순간에 수렁에 빠졌습니다. 민주주의가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는 가식을 폭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안전과 질서의 오래된 구조를 부수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이 아니라 이에 저항하는 혁명의 분노한 에너지를 촉발했습니다. 러시아의 볼셰비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는 모두 개인의 권리와 민주적 과정을 경멸하고 비난했으며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또 다른 시기의 10년 동안 대공황은 민주주의가 번영을 보장할 것이라는 가식을 여지없이 폭로했습니다. 20세기의 3분의 1이 지난 당시, 민주주의는 무력하며 기력도 없고 마비되어 파멸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은 엘리트와 대중 모두 사이에 퍼졌습니다. 의회의 소란, 뻔지르르한 대화, 표현과 반대의 자유, 부르주아 시민의식과 비겁함, 실용주의적 혼란에 대한 경멸 등.

또 다른 10년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은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자유주의 사회는 궁지에 몰려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이미 서구 사회에는 상당한 패배주의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Anne Morrow Lindbergh의 1940년 베스트셀러 제목은 전체주의를 주창하는 미래의 물결을 반영합니다. 그녀는 전체주의에 대하여 “인간이 새롭게 만들어 내려는 어쩌면 궁극적으로 좋은 개념”이라고 썼습니다. 히틀러주의와 스탈린주의는 단지 “미래의 물결에 휩쓸려온 일단의 쓰레기”일 뿐이었고, 1941년 지구 상에는 겨우 12개의 민주주의 국가만 남았습니다.

20세기 민주주의는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실패로 인하여 주도권을 전체주의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미래에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지난 세기에 그랬듯이 21세기에도 인본적이며 번영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자유 민주주의는 과거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처럼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권위주의에 굴복을 내용으로 하는 대안적 신조의 부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실, 대의제적 정부, 정당 간의 경쟁, 비밀 투표, 개인의 권리와 자유 보장에 기반을 둔 현대판 민주주의의 역사는 기껏해야 200년이 넘었습니다. 1997년 현재 세계인민의 다수가 민주주의 아래 살고 있을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헤게모니는 기록된 인류 역사의 긴 궤적에서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전체주의의 도전이 붕괴한 이후,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가 과거의 비민주적인 국가들에게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 궁금합니다. 이제 민주주의적 행보는 궤도를 벗어나 심지어 바위까지 날려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엄청난 역풍의 에너지와 맞서야 합니다.

 

가속도의 법칙

역풍의 에너지 대부분은 민주주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숙명적인 주제는 인종입니다. WEB Du Bois는 1900년에 “20세기의 현안은 피부색의 문제”라고 관찰했습니다. 그의 예측은 21세기에 만개할 것입니다. 소수 민족들은 거대한 미국 사회에서 정식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만 기회의 문이 닫혀 있어 이에 저항을 합니다.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은 집단적인 힘을 모으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백인들이 비백인에 대해 오랫동안 자행된 잔인함을 뒤늦게 깨닫는 동안, 일단 시작된 저항의 힘을 격화시킵니다. 토크빌은 오래 전에 설명했듯이, (유색 인종의) 아픔은 견디기 어려운 정도로 참다가 치료의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내지 못하면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변합니다. 어떤 학대가 시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사람들은 주의를 끌게 되면서, 그간의 학대 행위는 더욱 끔찍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비백인들은 고통을 과거보다 덜 받겠지만 그들의 (저항)감정은 매우 악화될 것입니다.

또 다르게 억눌린 에너지가 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자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불안정하게 만드는 두 가지 힘 즉 ‘기술’과 ‘자본주의’의 산물입니다. 둘 모두 사회적 통제와 정치적 주권의 결속을 와해시키면서, 스스로 생성된 추진력에 의해 계속 앞으로 내달립니다..

기술은 시계, 인쇄기, 나침반, 증기기관, 기계식 직기 등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합리주의, 개인주의 및 민주주의를 낳은 여러 혁신 기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처음에는 기술의 발전이 우연적이고 간헐적이었습니다만, 곧바로 시스템으로 제도화되었습니다. Alfred North Whitehead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명은 발명하는 방법의 발명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세기에는 과학기술의 혁신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역사학자인 헨리 애덤스는 ‘역사의 가속’에 대해 성찰했습니다. Adams는 “세계는 1800년에서 1900년 사이의 변화는 단순히 산술적으로 두 배로 늘리거나 세 배로 늘지 않았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측정하더라도… 긴장과 진동, 규모, 이른바 사회의 진보는 한세기 동안 천 배나 더 컸습니다. 1900년에는 1800년보다 동력원은 10배가 되었고, 속도는 전신과 같은 전기 표준으로 측정했을 때 무한에 가까워지면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모두 소멸시켰습니다.” Adams는 “가속의 법칙은 … 인간의 편의에 맞게 에너지를 이완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발전의 과정을 늦출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속의 법칙은 이제 우리를 새로운 시대로 몰아넣습니다. 공장기반 경제에서 컴퓨터기반 경제로의 전환은 우리 증조부모가 농장기반에서 공장기반 경제로 전환한 것보다 더 충격적입니다. 과거의 산업혁명은 세대에 걸쳐 확장되었고 인간과 제도적 조정을 위한 시간을 허용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컴퓨터 혁명은 영향력이 훨씬 더 빠르고 집중적이며 더 과감합니다”.

 

초고속 상호반응의 시대

컴퓨터화된 세계는 기존의 민주주의에 문제를 야기합니다. 산업혁명이 파괴한 것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곳에서, 컴퓨터 혁명은 스스로 창출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파괴할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또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과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사이에 새롭고 명백한 계급장벽의 위협이 발생합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이미 심화되어서 전통적인 유럽의 계급사회보다 기회의 평등지역이었던 미국에서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투자 은행가이자 파산한 뉴욕시를 구제한 Felix Rohatyn은 “저숙련 중산층 노동자에서 자본과 자산 소유자 및 신흥 기술귀족으로 부의 막대한 이전”에 대해 언급합니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그룹들은 쳇바퀴가 돌듯이 스스로 갇혀 으르렁거리고 분노하며 폭력적인 하층계급으로 전락합니다.

컴퓨터는 민주 정치의 절차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건국 당시 The Federalist Papers에서 James Madison은 시민이 정부의 형태를 직접 결정하고 관리하는 체제를 의미하는 “순수 민주주의”와 다수가 “집회”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체제로서 “공화국”을 구별했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역사에서 “순수 민주주의”는 현실적으로 작은 마을의 모임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제 컴퓨터 혁명에 의해 도입된 상호작용은 “순수 민주주의”를 국가적 규모에서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만듭니다.

Brian Beedham은 1996년 12월 21일 Economist에 실린 기사에서 대의적 민주주의를 “절반만 완성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렇듯 컴퓨터에 의한 정치참여의 발전에 박수를 보냅니다. 모든 시민은 공무 수행에 있어 동등한 발언권이 있다고 Beedham은 주장합니다. 

여론 조사, 관심 집단, 국민 투표의 증가는 완성된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 대중의 요구를 시사합니다. 정보 및 통신 네트워크에 연결된 컴퓨터 국가와 함께 “완전한 민주주의”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문제는 ‘완전한 민주주의’, ‘순수 민주주의’, ‘국민투표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 ‘사이버 민주주의’, ‘전자 정부’ . 어떤 이름으로든, 이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전망만은 아닐 것 입니다.

일반 시민들의 상호 작용은 즉각적인(충동적인) 반응을 촉발하고, 심려깊은 생각을 억제하며, 선동, 자기 망상, 모욕 및 증오에 대한 발판을 제공합니다. 라디오 토크쇼를 들어 보십시요! 지나친 상호작용적 정치에는 매디슨이 생각한 것처럼 ‘공통의 열정’이 사람들을 휩쓸고 감정적이고 잘못된 판단을 내릴 위험이 있습니다. 1951년 트루먼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해고했을 때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을 기억하면, 당시에 ‘전자 정부’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인터넷은 매디슨의 말에 따르면 “일반 시민의 견해를 정화하고 확대하는 합리적인 교류를 촉진하는 데 현재까지 거의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역자 – 1997년 당시의 필자는 시민주권의 핵심인 시민입법권, 그리고 숙의민주제의 절정인 시민의회에 대한 개념이 없어, 다만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만을 지적하고 있는 듯 하다).

 

고삐풀린 자본주의

기술발전의 가속도가 새로운 실질적인 문제를 만들고 우리가 이에 대응하는 정치 시스템을 개혁하겠다고 준비하는 동안, 자본주의의 방종은 훨씬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이해하자면, 우선 민주주의는 ‘사적소유’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유재산(국가의 자의적 영향 범위를 벗어난 자산)은 정치적 반대와 판단적 자유를 위한 유일하게 안전한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말할 것도 없고 덩샤오핑, 리콴유, 피노체트, 프랑코가 충분히 증명했듯이 자본주의 시장이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필요로 하지만, 자본주의는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혁신, 생산, 유통의 최고의 엔진임을 스스로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방법으로서 자신은 이익 외에는 거의 고려하지 않기에, 조셉 슘페터는 이를 “창조적 파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경제이론의 수준에서 자본주의는 ‘균형의 개념’에 기초합니다만, 실제로는 그것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심각한 불균형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이 현대 보수주의의 딜레마입니다. 구속되지 않는 시장에 대한 보수주의자의 숭배는 보수주의자들이 공언하는 가치 등(안정, 도덕, 가족, 공동체, 직장, 규율, 만족 유보)를 훼손합니다. 시장의 탐욕, 단기주의, 욕망에 의한 착취, 사기의 용이함, 배후에 숨어있는 악마근성(the devil-take-the-hindmost ethos), 이 모든 것이 보수적인 이상과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슘페터는 이를 ‘정체된 자본주의가 지닌 모순적 성격(Stationary capitalism is a contradiction in terms)’이라고 칭합니다.

최고의 부자들조차 지나친 방종의 자본주의에 의해 일어나는 일에 경악합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성과가 돈을 버는 성공으로 측정될 수 있다면, 금융가이자 자선가인 조지 소로스보다 현대 자본주의를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로스는 “내 자신이 금융시장에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이제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확장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시장가치의 지배가 우리의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까 두렵다”고 적고 있습니다. 자기 이익의 억제되지 않은 탐욕의 추구는 견딜 수 없는 불평등과 불안정”을 초래합니다.

컴퓨터 혁명은 창조적 파괴를 위해 엄청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자본주의적 창의성의 한 가지 목표는 세계화된 경제권입니다. 무자비한 자본주의 파괴의 후보 중 하나는 민주주의의 전통적 장소인 민족국가입니다. 컴퓨터는 속박되지 않은 시장의 탐욕을 따라 국경을 넘어 이해가 충돌하는 세계적인 거대기업군을 만들고, 조세 및 규제의 국가권력을 약화시키고, 금리 및 환율에 대한 국가관리를 약화하고, 국가 내부 및 국가 간의 부의 격차를 확대하고, 노동의 기준을 낮추고, 환경을 악화시킵니다. 개별 국가들이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형성하는 것을 무력화시키고,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고, 세계적 거버넌스가 없는 상태에서 세계경제를 창조합니다. 사이버 공간은 국가통제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국제적 통제를 제공하는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요? (역자: 1997년 당시는 신자유주의가 전일적으로 극성을 피는 전성의 시대인데, 필자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심각한 폐해를 예언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아시아의 부상

유럽중심적 시대가 끝나가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자치, 개인의 권리, 법 앞의 평등은 유럽의 발명품입니다만, 이제 태평양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지난 세기말 일본의 극적인 등장은 다가오는 세기에 중국과 인도의 부상을 예고합니다. 아시아의 경제적 자력은 이미 세계 경제의 윤곽을 바꾸고 있으며 행성 지구의 세력균형에 역사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부 사려깊은 분석가들이 걱정하듯이 “문명의 충돌”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문명은 거의 단일화(단세포화)되지 않습니다. 동일한 문명 내의 국가들은 다른 문명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에 합류하기보다 서로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아시아의 부상이 민주주의의 미래에 미치는 영향은 여러 가지 고려할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아의 전통은 개인보다 집단을, 논쟁보다 질서를, 자유보다 권위를, 자유보다 연대를 중시한다고 들었습니다. 싱가포르의 Lee Kuan Yew와 말레이시아의 Mahathir bin Mohamad 등 일부 아시아 지도자들은 아시아의 질서와 안정을 개인주의적인 서구의 무질서와 퇴폐와 대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와 일본은 이제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인권이 보편적이라는 주장이 서구의 오만함의 증거라고 인정하더라도, 인권이 유럽과 미주 지역으로 제한된다고 주장하면서 비서구인들을 개인의 자유와 자치를 누릴 수 없는 열등한 종족으로 낙인을 찍는다면, 이는 확실히 서구의 오만함일 것입니다. 

사실, 많은 아시아인들이 인권을 위해, 그리고 자유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천안문사태 당시의 광장 벽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서구 부르주아지의 슬로건일 뿐이고 동방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재만 필요하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아시아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한두 명의 아시아 지도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내가 이해할 때,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나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홍콩의 마지막 총통인 패튼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세계 무대에서 아시아의 새로운 부상,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부재, 민주주의를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보는 통치자의 이기심 등은 서구식 민주주의 사상의 확산에 대한 아시아의 저항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문화라는 배경

그러한 저항은 무자비한 세계화에 대한 지구 주변부의 방어적 반응, 즉 근대성으로부터의 철수라는 형태를 취하는 반응에 의해 강화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정반대의 두 방향으로 찢어져 있습니다. 세계화는 정점에 있고 흐름을 타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통제와 이해를 초월한 강력한 세력(신자유주의)에서 도피하여 피난처를 찾아가려 합니다. 그들은 친숙하고 서로 이해가능한 보호의 피신처로 이동해 갑니다. 그들은 정체성의 정치를 갈망합니다. 세계가 더 빨리 통합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민족적, 인종적 거주지로 모여들 것입니다. 통합과 붕괴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킵니다. 새뮤얼 헌팅턴이 문화적 충돌이라 부르는 것의 호전적인 표현은 바로 종교적 근본주의의 급증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표현의 자유와 여성의 권리에 대하여 제한을 가하고 역사적 가르침과는 달리 다른 종교에 특히 적대적입니다. 근본주의적 부상은 제3세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침묵 속에 절망의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초월적인 의미에 굶주려 있고 위안과 지원을 위해 무모한 믿음으로 향합니다.

1995년 Gallup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성인의 3분의 1 이상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주장합니다. 누군가는 선의 반대편에 서서 진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면 근본주의는 민주주의에 불길한 함의를 갖습니다. 전능자의 뜻을 실행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특히 상대편의 불신자들에게 가혹합니다. 광신은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 민주주의에 미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최소한 제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순간이 예정된 영광스러운 미래는 결코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20세기에 치아의 껍질처럼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또한 그것은 앞으로 100년 동안 무임승차를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도전의 도전을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Du Bois가 지적한 인종차별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특히 대도시 일자리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고용이 계속 유지된다면 정치적 행동은 인종적 긴장을 완화할 것입니다. 특히 장기적인 인종적 게리맨더링이 소수자들의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소시킬 것임을 이해하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긴장과 갈등은 국제결혼을 통해 완화될 것입니다. 다른 신념과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섹스와 사랑은 아마도 미국의 분열을 저지하는 믿을만한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신규 이민자를 흡수하고 동화시키는 국가적 역량은 여전히 ​​강력할 것입니다. 주류 사회의 의무감은 언어적 또는 인종적으로 분류된 빈민계층보다 젊은이들에게 보다 어필할 것입니다. 영어는 지배적인 언어로 계속 남아있을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미국이라는 국가적 성격은 지난 몇 세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인식하는 만큼 형성되어 갈 것입니다. 미국의 신비에 대한 단서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토크빌을 읽고 인용할 것입니다.

기술은 Adams가 지적한 것처럼 가속의 법칙에 따라 돌진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호 작용의 모든 유혹의 문제점과 선출된 공무원의 인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단지 국민투표 시스템으로 퇴보하는 것을 승인할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자본주의 역시 상승과 하락을 통해 비틀거리며 지속되겠지만, 자유방임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본가들조차 제약없는 시장이 해결할 수 없거나 더 악화시키는 문제의 범위를 발견함에 따라 아마도 점차 약해질 것입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착취된 노동자를 양산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는 사회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계급 전쟁을 되살리며, 마르크스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지닌 단기계획의 속성과 이익추구라는 탐욕으로, 스스로 미래를 위하여 교육, 연구 및 개발, 환경 보호, 의료의 확장, 기반 시설의 재건, 도시의 회복 등을 자본가들은 자진해서 앞장설 가능성이 없습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공공 리더십과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합니다.

세계라는 전체의 관점에서 자본주의가 일단 개별국가의 정박에서 풀려나면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국제 기구들이 글로벌 감시통제의 권한을 획득할 수 있습니까? 당장 다음 주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계속되는 자본의 권력남용으로, 개혁을 위한 지지층을 구축하게 할 것입니다. 전쟁은 여전히 ​​삶의 방향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지만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국경을 초월한 침략에서 발생했지만 21세기의 전쟁은 같은 국가 내에서 민족, 종교, 이념 또는 부족 분파 사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한 전쟁은 정의하고 통제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민족 국가는 효과적인 권력 단위로서 점차 쇠퇴하여 갈 것입니다. 사회학자 다니엘 벨이 말한 것처럼 큰 문제에는 너무 작고 작은 문제에는 너무 큽니다. 이러한 쇠퇴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감정의 영역으로 남을 것입니다. 서구의 창조물인 민주주의가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진 세계 여러 지역에 이식될 수 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민주주의 제도와 이상이 점진적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합니다. 정치적, 지적 자유에 대한 지향 본능이 북대서양 연안의 행복한 소수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습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인종, 기술, 자본주의의 압력을 관리해야 하며, 글로벌 사회의 광대한 익명성에서 발생하는 영적 좌절과 갈망에 대처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교정 능력입니다만, 역시 지적인 진단과 지도가 필수적입니다. 역사가이자 외교관인 브라이스 경은 “정부의 형태는 아마도 민주주의만큼 위대한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 지도자들조차도 폭력적이고 퇴행적이며 다루기 힘든 인류를 유토피아로 끌어들이는 재능이 부족합니다. 20세기 민주주의의 실패를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가운데, 다가올 21세기의 지도자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세상을 안전하게 만드는 일을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 이사장, 국민주권연구원 상임이사. 철든 이후 시대와 사건 속에서 정신줄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으며, ‘너와 내가 우주이고 역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서로 만나야 연대가 있고, 진보의 방향으로 다른백년이 시작된다는 믿음으로 활동 중이다. [제3섹타 경제론], [격동세계] 등의 기고를 통하여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논리를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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