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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철학 배우면 뭐해요?” 내가 강사로 근무하는 어느 청소년 문화교육 프로그램에서 내 소개를 하던 중 이런 질문이 나왔다. 살짝 당황한 나는 철학을 배우면 선바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내가 현재 재학 중인 대학을 나온나와는 일면식 없는 선배이자 국내에서 인지도 있는 유튜버이다. 그러자 그 청소년은 무척 부러워하면서 웃었다. 순수하다…! 철학과 사람들한테는 언제부터일까 이런 씁쓸한 농담이 전승되고 있는데 말이다. 이 학과를 졸업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반면 앤더스 인셋의 『양자경제』에서는 그 대우가 다르다. 그는 철학자 급구!를 외치고 글에서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호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문학적 관점을 동원하여 이상적인 사회 양자경제를 구상해낸다. 양자경제는, 1925년 과학자 하이젠베르크를 전후하여 지금까지도 하나의 해석으로 통합되지 않은 양자물리학의 관점을 취한다. 그 물리학이 내놓은 개념인 비국소성’, ‘불확정성, ‘얽힘[1] 등등의 시각에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거시세계를 돌아보며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자경제는 여전히 고전물리학에 매여 있는 이 세계의 앙시앙 레짐(구체제)’를 가뿐하게 넘어선다. 양자적 체제는 동시성, 무한성, 상호의존성에 기반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이상향을 실현할 수 있다. 이때 인간과 기술은 통합되고물질은 탈물질과 통합될 것이며정보사회는 알고리즘과 인간 의식이 통합되어 지성사회로 거듭난다. 이것은 이 책에 감명 받아 내놓는 찬사가 아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문장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야심찬 기획이다. 

 “양자경제는 총체적이고 통합적이고 무한한 접근 방식으로 (···) 안정과 평등을 상징하고 사회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운영시스템이다. 양자경제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연결을 장려한다.”(p.219-220.)

 

양자철학의 불확정성

 결국 양자경제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접목을 통해 이뤄진 발상이다. ‘0과 ‘1’이라는 이진법으로 세계를 표상하고 계산하는 디지털화가 위 두 학문의 분리를 상징한다면,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인 양자적 디지털화는 그동안 이분화 되었던 것들을 다시 합치는 통합의 패러다임인 셈이다. 하지만 중첩과 얽힘에서 통합성을 도출하고, 이를 불확정성으로 인한 불가지성(우리가 알 수 없는 게 많다!’)으로 뒷받침하는 논리가 양자사상의 전부라는 감상이 든다. 양자과학이 인문학의 영역에서 편의적으로 도용된 것이다. 

 이론의 세계에서 좋아보이는 것을 다 집어넣고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나쁜 철학이다. 이래서야 철학자가 급구되는 것은 커녕 무직 신세를 면할 수나 있겠나 싶다다른 독자에게 철송합니다(철학해서+죄송합니다)’를 속으로 외치면서 나는 거울 치료를 받듯 나 자신의 글쓰기를 되돌아보는 독서를 했다. 이 밖에도 이 책의 단점은 상당히 많아서 <슈피겔>에 의해 베스트셀러로 선정된 것이 의문일 정도이다. 오타, 오류, 무맥락, 클리셰 등등 텍스트 자체로도 아쉬운 점이 많다. 

 

통제 강박의 통제 불능

 다시 내용적인 측면으로 돌아오면, 이 책에서 내세우는 가치는 통합이다. 하지만 정작 양자과학을 포함하는 기술 그리고 인간의 관계는 위계적으로 분리되어 다루어지는 문제가 있다. 저자는 오히려 인간이 기술을 지배해야 하고 그러한 지위를 앞으로도 유지해야 한다는 (또한 클리셰적인) 당위를 취한다. 

인류역사상 기술 발달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사례는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내야 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와 달리 새로운 기술을 나중에 길들이거나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가 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p.34.) 

 이는 미래기술이 인간에게 수정 가능성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빨리 발전한다는 선에서만 옳게 들린다. 현재 기술을 통제하는 것이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방법을 듣는 것은 이 책에서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술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 특히 그 중에서 기술사상가 케빈 켈리의 『기술의 충격』[2]을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그에 의하면 기술은 인간으로부터 산출되었지만, 인간에게서 구분되어 독자적인 진로로 진화해 나가는 생명이자 체계이다. 인간과 기술 모두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특정한 흐름을 따르며 거의 동시적으로 생성되는 존재들이다.  

기술은 통제할 수 없다케빈 켈리는 그 이유를 시스템 과학에서 찾는다. 기술의 역사는 나름의 계보와 패턴을 갖추었고기술계는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물들 이상으로 복잡성을 갖는다. 따라서 부분의 합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 창발될 것인데, 인간 문명은 이들과 서로 간의 목적을 합치시켜 협동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잘 진행된다면, 기술계는 지구계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생물계의 대멸종을 방지하여, 뒷일을 도모하게 할 핵심적인 동반자가 될 것이라는 게 이 사상가의 기술관이다. 

 

인간의 의식, 깊은 자아의 주역

기술은 어느새 양자과학을 거시세계에서 실현하고 상용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양자컴퓨터가 디지털 컴퓨터보다 더 뛰어난 연산력을 발휘하는 양자 우월성은 이미 성취되었다. 이러한 시대를 직면한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과학을 한 스푼 곁들인 얄팍한 유토피아가 아닌 자기 존재에 대한 더욱 철저한 성찰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프로이트의 자기애 모욕’ 이론을 끌어온다.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는 인류의 편협한 자기애, 즉 인간을 세계의 중심이자 정점, 그리고 정상(定常)인 존재로 보는 인식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로 인한 네 번째 자기애 모욕은 인류에게 해롭다. 이렇게 단정해버림으로써 저자는 인간중심주의라는 구체제를 수호하는 인사가 되어버린다. 인간의 의식을 세계의 중심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21세기 모욕 치료의 첫번째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의식의 소중함이다. 의식은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므로 인간 자신에게 소중하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행복이 소중한 이유는 인간에게 행복이 행복하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 의식이 다른 의식보다 더 존엄하고 지고한 것은 아니다. 과학적으로 인간의 의식이 완전하게 해명되진 않았지만, 의식을 매개하는 물질 그리고 의식과 물리적 사건 간의 인과관계는 많은 부분들이 해명되고 있다. 그러한 연구들로 인해 비인간 동물에게도 마음을 있음을 밝히는 물질적 토대들이 알려지고 있다. 또한 기계에서도 인간 의식과 비슷한 의식 혹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의식을 가진 마음이 탄생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인간 의식은 아직까지는’ ‘부분적으로’ 소중하다. 그리고 그 소중한 의식을 인간 종 하나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공존하고 함께 번영하는 일에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간계를 넘어 생명계 그리고 기술계와 소통하고 공명할 줄 아는 자아, 그것이 곧 심화하는 자아일 것이다. ‘깊은 자아는 다른 존재를 지배하거나 비하하지 않고그들과 연결되기 위해 마음의 장벽을 내리고 주변에 접속한다철학의 과제는,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심화된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1] 여기서 예로 든 각각의 개념은 소립자는 서로 다른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지만(비국소성), 그것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는 없고(불확정성), 한 입자의 변화가 거리 있는 입자의 변화를 동시에 일으킬 수 있음(얽힘)을 의미한다. 

[2] 이 책의 리뷰는 다른백년’ 웹페이지 다른 저자의 서평을 참고하면 좋겠다: 유채운, 기술은 생명이다_케빈 켈리를 읽다, 다른백년, 2021.10.21.

마카야(배선우)

책읽기를 좋아해서 대학교에 진학한 신분. 전공책보다 소설과 미래학 책으로 다른 세상으로 떠나기를 즐겨하던 학생. 올해 졸업을 앞뒀지만 ‘좋아하는 철학자’는 없고 대학원은 안 갈 예정. 부모님의 주52시간 근무는 그저 존경스러울 뿐, 트렌드에 따라서 프리랜서로 생활하고 싶은 바람. 다행히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일감은 하나 둘 늘어나는 나날. 선한 영향력, 세상으로 뿜어대는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지만 SNS는 하지 않는 모순. 일상 속에서 심신을 가다듬고 내 일을 사랑하면, 큰 꿈은 없지만 지구살림에 보탬이 될까 싶어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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