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다. 한국의 넷플릭스 드라마인 <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 순위가 집계되는 83개국 모두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넷플릭스 콘텐츠 중에서 83개국 모두에서 1위에 등극한 것은 오징어게임이 처음이다.
오징어게임이 한국만이 아닌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실주의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징어게임은 <드라마 DP>처럼 극도로 사실주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오징어게임은 누구라도 이 드라마가 절대다수의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사실주의적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주인공 기훈이 쌍용자동차의 해고노동자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소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계인들에게 오징어게임은 먼 나라의 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이다.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적 범위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사실주의의 힘’을 배제한다면 이해할 수 없다.
채찍 대신 불안
과거에 지배자들은, 간혹 당근을 던져주기도 했지만, 백성들을 죽도록 일하게 만들기 위해서 채찍을 휘둘렀다. 노예제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들을 보면 노예 감독자들이 일을 굼뜨게 하는 노예들의 등에 사정없이 채찍을 내리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노예들은 제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노동의 결과물을 노예주들이 다 차지하므로 열심히 일할 의욕을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노예들이 미친 듯이 일하도록 강제하려면 지배자들은 채찍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소위 문명화되었다고 일컬어지는 오늘날, 지배자들은 과거처럼 백성들의 등에 채찍질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지배자들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열심히 일하도록 강제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불안이다. 사람들은 오징어게임 같은 말도 안 되는 게임에 왜 참가했을까? 생존 불안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절대다수 사람들을 생존 불안으로 떨게 만든다. 죽어라고 노력하지만 생존조차 버거운 사회를 한국인들은 헬조선이라고 야유한다. 오징어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첫 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나서는 다수결에 의해 게임 참가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다시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한다. 오징어게임이 지옥인 줄 알았는데 현실로 돌아가 보니 그곳이야말로 진짜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오징어게임의 승자에게는 456억 원이라는 거금이 상금으로 주어진다. 물론 그 상금을 받을 확률은 456분의 1로서 대단히 희박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실낱같은 희망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승자독식의 잔인한 오징어게임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생존 불안 때문이다.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생존게임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국제구호기구 옥스팜의 보고서(2019년 기준)에 의하면 전 세계 상위 1%의 부자가 가진 재산이 나머지 99%의 인류가 가진 재산의 2배가 넘는다. 세계 최상위 부자 2,000여 명이 가진 재산이 세계 인구의 60%인 46억 명의 재산보다도 많다. 만일 자본주의 세계의 부자들이 자기들의 막대한 부를 타인들에게 골고루 나눠준다면 생존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거의 없어질 것이다. 물론 지배자, 부자들은 그런 착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데도, 왜 부자들은 자기들의 부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는 것일까? 그 가장 큰 이유는 현대판 채찍이 필요해서다. 생존 불안에서 해방된 백성들은 지배자들의 배만 불려주는 노동을 거부할 것이고 지배자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배자들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조종할 수 없게 되고 떼돈도 벌 수 없게 된다. 한 마디로 백성들을 오징어게임에 참여하도록 강제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이 가능하려면 백성들은 빈곤해야 하고 생존 불안에 시달려야만 한다. 채찍 대신 불안을 이용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집단 간 경쟁에서 개인 간 경쟁으로
과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집단 간 경쟁이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면 엘지와 삼성이 집단 단위로 경쟁하는 식이었다. 이 경우 현대 직원들과 삼성 직원들은 서로 갈등하고 적대시할 수 있지만, 현대에 근무하는 직원끼리는 비교적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집단 간 경쟁 사회에서는, 대규모 공동체는 와해될지라도, 중소규모 공동체는 건재할 수 있다. 이것이 개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자신이 소속될 수 있는 공동체가 존재하며, 주변에 사랑을 주고받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집단 간 경쟁이라고 할 수 있는 팀별 줄다리기 시합을 할 때까지만 해도, 오징어게임의 참가자들은 적어도 팀원들과는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비교적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 간 경쟁이라고 할 수 있는 일 대 일의 구슬치기 게임을 하게 되자 참가자들은 어렵게 붙들고 있던 인간성의 끈을 마침내 놓아버리게 된다. 각각의 개인들이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게 됨으로써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사라져버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개인 간 경쟁이다. 경쟁의 단위가 집단으로부터 개인으로 바뀌면 거의 모든 공동체가 전멸할 수밖에 없다. 각종 소규모 공동체, 심지어 가정 공동체까지 붕괴되면 모든 사람들은 개인으로 파편화되고 그 결과 고독해진다. 이것이 개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자신이 소속될 그 어떤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갈 이웃, 동료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이 과연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구슬치기 게임에서 아내를 죽이게 된 남편이 죄책감에 못 이겨 자살을 하는 장면은 이런 끔찍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인간을 망쳐놓고는 인간 불신을 부추기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류 담론은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 본성에 가장 잘 맞는 사회이다’라고 말한다. 생존 불안에 짓눌리고 철저히 고립되어 타인들과 죽음의 게임을 하면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혹한 현실 체험을 통해 인간은 악하다는 지배자들의 선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오징어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원래부터 악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오징어게임이 그들을 악하게 만들었을까?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 상우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게임 밖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홀쭉한 자신의 지갑을 열어 차비가 없어 먼 길을 걸어가야 할 저치에 놓인 이주노동자 알리에게 차비를 줄 정도의 따뜻한 마음은 가지고 있었다. 그를 놀라울 정도로 악하게 만든 것은 단 한 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승자에게만 거액의 상금을 지급하는 지랄 같은 오징어게임의 규칙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되자 배틀 로얄, 헝거 게임 같은 영화들만이 아니라 슈터스타 K와 같은 오락프로들도 승자독식의 규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대중이 승자독식의 규칙에 익숙해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승자독식의 게임에서는 절대다수의 패자는 쪽박을 차고 극소수의 승자는 거부가 되기 마련이다. 경쟁에서의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두려움과 승자에게 차례지는 막대한 상금은 사람들을 생존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끔찍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 저열한 존재, 성공과 출세에 목을 매는 극단적인 개인이기주의자로 전락시킨다.
만일 오징어게임의 규칙이 ‘아무도 죽지 않는다, 456명의 참가자들 모두에게 1억 원을 준다, 그리고 1등에게는 천만 원, 2등에게는 500만 원, 3등에게는 100만 원의 보너스를 준다’는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대부분의 게임 참여자들은 인간성을 상실해가면서까지 서로를 죽이려고 하기는커녕 즐거운 마음으로 게임을 하고 우승자를 기꺼이 축하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오징어게임의 참여자들은 원래부터 악마가 아니었다. 오징어게임의 규칙이 그들을 악마가 되도록 강요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사람들을 악마가 되도록 강요하고는 이렇게 외친다.
“봐라! 인간이란 얼마나 악한 존재냐!”
게임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
오징어게임의 설계자인 노인 일남은 주인공인 기훈에게 오징어게임을 겪었는데도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서 인간 불신 게임을 제안한다. 지옥을 경험하면서 심신이 무척 피폐해졌지만, 기훈은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승리한다. 주인공은 왜 사람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악마라고 믿게 된다면 그는 살아갈 이유를 상실하게 되고 세상에는 그 어떤 희망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날이 악해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설득하면서 사람에 대한 믿음을 애처롭게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는 미쳐가고 있는 세상을 멈춰 세우거나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있는 오징어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 즉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다.
세계인들이 오징어게임에서 찾아야 할 교훈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김태형
심리학자.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자퇴했다. 주류 심리학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심리학계를 떠나 한동안 사회운동에 몰두하다가 중년의 나이가 되어 다시 심리학자의 길로 돌아왔다. 기존 심리학의 긍정적인 점을 계승하는 한편 오류와 한계를 과감히 비판하고 ‘올바른 심리학’을 정립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풍요중독사회』, 『월북하는 심리학』, 『싸우는 심리학』 등 다수의 심리학 저서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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