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중 한명인 쟈장커贾樟柯가 2020년에 중국의 현대사 그리고 향촌문화와 관련한 다큐멘터리 한편을 찍어서 베를린 영화제에서 공개가 됩니다.
영화의 제목은 一 ‘Swimming Out Till the Sea Turns Blue’直游到海水變藍
이 영화에는 세명의 작가가 등장해서, 내레이션을 담당하는데, 이중 한명이 지금 소개하는 량홍이고 그밖에 한국에도 잘 알려진 위화와 다른 한명의 작가가 더 있습니다.
량홍은 중국내에서도 쟈쟝커랑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 두사람 모두 70허우에 북방의 농촌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고요. 저도 서평에 커멘트를 하려다가 영화를 볼 수가 없어서 (어디서 찾아봐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영화는 상당수의 쟈쟝커 영화가 그러하듯이 중국에서 개봉되지 못했습니다.) 그냥 유야무야 넘어갔습니다.
梁鸿×贾樟柯:没有话语权的人,就是“边缘人”吗?두 사람의 북콘서트. 상대방의 작품을 논하면서 향촌, 대도시, 청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런데,
저도 이 영화를 못봤지만, 평이 갈리는 부분이 있어요.
과거 쟈장커의 치열한 비판정신이 사라지고, 너무 낭만적이고 모호하게 과거를 회상하는 것 아니냐? 이런 얘기입니다. 물론 호평을 하시는 분들은, 인간의 역사를 흑백논리로 구분하여,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비판하기보다는 (과거 상당수의 쟈장커 영화는 이런 비극적이고 끔찍하거나, 우울한 내용을 많이 다룹니다) 더 심층적으로 묘사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요.
‘Swimming Out Till the Sea Turns Blue’ Review: China Through Writers’ Eyes 호평에 해당하는 뉴욕타임즈의 영화평
人到中年,贾樟柯变了吗? 중국내 쟈장커 보수화에 대한 논란
량홍이 2021년에 출간한 작품인 ‘량좡10년’도 같은 비판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1. 량홍이나 쟈장커는 중국내에서 혹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주류 좌파중년지식인이나 예술가로서 (관방은 아니지만) 일신의 안락함에 안주하여 타락한 걸까요?
2. 시진핑의 중국에서 검열이 무서워서 적당히 몸을 사리게 된 것일까요?
3. 절대빈곤을 탈출하고 소강(小康)사회에 진입하는데 성공한 중국의 기층민중과 시민들이 평균적으로 사회에 대한 불만은 적고 국가에 감사하는 마음은 큰 것이 엄연한 현실이니, 그걸 있는 그대로 그린 것뿐일까요?
4. 최근 서구의 중국사회 비판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적 색안경 속에 네거티브로 치중되는 경향이 있다보니, 진실은 그런 것만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요?
답은 아마 모든 요소들이 영향을 끼치면서 흑백이 아닌 회색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
풍경 하나, 지난 5월22일 비 내리는 연도에 늘어선 수만명의 창샤(長沙)시 시민들이 한 노과학자의 운구차를 배웅했다. 그들은 “위안예예爺爺, 할아버지 一路走好 평안히 가세요!”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위안룽핑은 교잡벼의 아버지로 불리며 한마지기당 무려 1톤이 넘는 쌀을 생산하는 품종을 만들어내,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한 ‘공화국 영웅’이다. 지금 중국사회에서 그의 권위에 필적하는 인물은 사스와 코비드를 퇴치하는데 기여한 팬데믹 영웅 쭝난샨 원사, 그리고 시진핑 주석 정도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사는 마을 주위가 도시형 농업경관 및 연구단지로 개발중인데, 하필 그의 이름을 딴 ‘룽핑 공원’이라서 나도 일찌감치 그를 알게 됐다. 나는 권위주의 국가 중국의 과도한 정치적 영웅만들기에 대해서 뜨악한 마음도 있고 일찌감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우리 통일벼에 대한 기억도 있어 이 거대한 애도의 물결의 정체가 궁금했다. <량좡마을의 중국>을 읽기 시작하면서 의문이 좀 풀렸다. 책의 도입부에 작가의 아버지가 대기근이 닥친 1960년을 술회한다. “마을의 친족 이백여명중에 70명이 굶어죽었고, 원래 정정하시던 할아버지도 그중 하나였지.” 91세로 사망한 위안룽핑은 본인이 대기근을 경험한 후에, 자신의 필생의 과업을 정하게 된다.
인민대학 중문과 교수인 작가 량홍은, 2010년에 중국 논픽션문학의 선구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을 내놓아 마침 삼농과 농민공 문제에 민감한 중국 사회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된다. 그는 전형적인 중국 북방의 가난한 농촌마을인 자신의 고향 허난성 량좡을 찾아가 이년 넘게 취재를 한 끝에 이 작품을 내놓았다. 허난성은 쓰촨성, 쟝시성과 함께 가장 많은 농민공을 성바깥으로 내보내는 지역이다. 현대 중국의 산업진흥과 도시건설, 나아가 중국의 대국굴기는 이들 농민공의 피와 땀에 기반한 것이다.
농업생산소득은 변변치 않은 가운데, 별다른 산업이 없는 농촌의 난개발은 노인과 아이들만 남은 농촌마을의 비극을 더한다. 무분별한 건설용 모래와 골재 채취로 강바닥에 검은 지옥이 곳곳에 숨어 있는 강변에, 할머니가 밥을 짓는 동안 놀러 나온 아이들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다. 집에 혼자 남겨진, “조용한 모범생” 고3학생이 방과후 포르노를 보고, 역시 마을에 혼자 남은 82세 할머니를 살해후 강간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작가는 갓 만18세로 사형언도를 피할 수 없던 이 소년을 구치소로 찾아가 면담하면서 제대로 질문조차 던지지 못하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린다. 며칠전에 출간된 이 책의 영문판 제목은 보다 직설적으로 이 책의 의미를 전달한다. <china in one village>.
뒤를 이어 2013년에 출간된 <출량좡기>는 중국 전역에 흩어진 량좡마을 사람들을 현지로 찾아가 인터뷰하면서 각양각색의 분투를 기록했다. 성경의 출애굽기를 연상시키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들의 고난의 여정은 예정된 것이었지만, 곳곳에서 희망과 웃음도 발견할 수 있다. 삼륜차 화물운송같은 이들의 회색지대 노동을 선택적이고 불법적으로 단속하는 공권력에 대한 집단적 저항은 나름 통쾌하다. 자신들을 멸시하는 도시민들을 속임수나 폭리로 등쳐먹으면서 생필품에는 저렴한 가격만 고집하면서도 명품에 낀 거품가격은 마다하지 않는 소비자의 모순적 행태를 꼬집는 그들의 자기변호 논리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풍경 둘, 올해 2월 25일 베이징의 ‘국무원부빈扶貧개발영도소조領導小組‘사무소가 ‘국가향촌진흥국’으로 간판을 바꿔달며 중국정부는 30년 넘게 진행된 빈곤퇴치정책의 성공을 선언했다. 2017년말 국가중점정책으로 선포된 향촌진흥은 이제 절대빈곤의 탈피에서 도농격차와 같은 상대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환점이라고 간부가 그 의미를 설명한다. 7월의 중국공산당 창립백주년에 서둘러 맞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과장된 정치적 선전이 아니다. 자신을 맹목적이지 않은 ‘발전주의자’로 소개하는 중국농업대학의 구빈전문가 리샤오윈교수가 올해 4월에 출간한 <빈곤의 종결>을 보면 서구의 빈곤이론에 기반한 구체적인 정책과 사례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리샤오윈은 20여년간 경험한 중국과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사례와 윈난성의 오지 마을에 6년간 거주하면서 직접 벌인 다양한 실험과 현지 주민들의 반응을 소개한다. 2011년 중국 정부가 설정한 절대빈곤선인 일인당 연순수입 2300위안과 의식주 보장, 무상의무교육, 의료정책의 시행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았다. 중국정부는 빈곤가구를 모두 핀셋으로 집어내듯 시스템에 등록해서 관리하는 정준精準빈곤 정책을 벌이고 그 결과를 확인했다.
*이런 식의 개발과 빈곤구제 정책이 초래하는 다른 문제점들은 어떻게 봐야하나 ? 이를테면 문화적 다양성의 파괴. 변경지역이나 오지의 소수민족 주민들은 푸퉁화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서, 도시로 나가 제대로 된 수입을 얻을 기회를 박탈당한다. 고등교육을 통한 중산층진입 기회는 차치하고, 의사소통문제로 농민공으로 도시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지금은 건설일용직이나 라이더를 포함해서 도시 농민공의 수입도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푸퉁화 교육을 강조하다보면, 로컬언어와 생활문화를 상실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 전통문화속에 존재하는 전근대성을 (극단적 가부장제, 가정폭력문제가 특히 심각하다. ) 비판하는 과정에서도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전통문화와 가치관은 박제화된 관광자원으로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신장과 티벳의 사례이다.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과 변경에 대한 정책이 강제될때 이런 이유 때문에 반인권적인 성향이 드러나기도 하고, 서구사회의 비판에 직면한다. 하지만, 소수민족 문화안의 전근대성과 경제적 빈곤의 문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심각성이 있다.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잣대만으로 평가할 수 없고, 인권의 다양한 측면을 따지지 않으면 문제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중국 정부가 오로지 한족중심의 이기적인 개발주의정책을 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실은 한족이 주로 거주하는 향촌에서도 과거에 같은 일이 벌어졌었기 때문에, 한족 중국인들은 서구인들의 비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개발주의는 서구근대화의 직접적 산물이다. 리샤오윈 교수는 이런 문제들을 모두 직접 경험하고 인지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구절에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도 발전주의가 초래하는 이런 부작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 4월 량홍은 <량좡10년>을 출간해 그의 삼부작을 완성했다. 2008년부터 매년 고향을 방문해 10여년의 변화를 관찰한 그는 2020년 시점에 이제 외부 관찰자라기 보다는 반쯤은 마을주민으로 돌아온 심경으로 글을 써나간다. 그의 문체는 한결 평안해졌는데, 이는 객관적으로 개선된 량좡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도시에서 벌어온 돈으로 번듯한 새 집을 지어서 생활하고 있고, 개중에는 호화로운 별장을 지은 이들도 있다. 도시로 간 농민공 중 상당수는 대도시에 주택과 자동차를 자가소유한 중산층으로 변모해서 어려웠던 시절을 향수로 회고한다.
하지만, 작가가 새로운 량좡을 유토피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농촌출신 여성들이 겪어 온 이중삼중의 질곡을 자세한 사례로 들어, 심각한 중국 사회의 양성평등 문제를 꼬집고 있고,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이 직면한 경제적, 심리적 문제들을 기술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그는 특히, 애당초 10년전부터 제기한 향촌문화의 문제에 천착한다. 시대의 흐름 속에 유실됐지만, 또 여전히 뿌리깊게 존재하는 그것은 어떻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가? 농민의 정치적 주체성 문제도 그중 하나이다. 그것은 십년전의 첫 작품에서 그가 인터뷰한 농촌교사출신民办赤脚老师 (역자 주 – 정부의 최소한의 지원 혹은 지원없이 농촌마을의 엘리트들이 마을 사람들의 자조적 지원으로 학교를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흐름을 일컫는다. 의료를 담당하던 赤脚医生도 있다)의 현급 당서기가 (한국의 군수에 해당) 논리정연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중국농촌의 변화발전과정을 설명하면서도 당면과제로 지적한 바 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영민한 머리, 건강한 몸과 마음을 밑천으로 타향에서 농민공 기술자로 성공한 량홍의 열혈 애독자 장솬즈는 고민 끝에 돈벌이가 좋은 차량정비소를 반쯤 접고 고향마을로 돌아와 월급여가 2백위안도 되지 않는 (한화 3만5천원) 당지부서기가 됐다. 2008년 쓰촨대지진 당시에도 정비소를 휴업하고 현지로 찾아가 자원봉사를 하고 싶었던 그에게 공공은 더이상 한가한 남의 일 管人家的閒事이 아니다. 중국의 신세대 향촌민들이 이제 바라는 것은 육체적 포만감이 아니라 정신적 갈증해소와 사회적 인정이기 때문이다. 중국정부와 사회는 이제 어떻게 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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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Hessler 何伟라는 미국인 저널리스트/작가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회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웠고, 또 아버지의 지인인 한 중국인 학자덕분에 중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 있었다. 그가 20대 후반이던 90년대말에 평화봉사단으로 중국 농촌에 가서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를 얻었는데,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중국에 장기 체류하면서 중국 사회, 특히 중국의 보통사람들의 삶을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그의 대학 스승은 미국에서도 유명한 Creative non-fiction writing의 창시자, John MacPhee이다. 그는 이런 작법을 기반으로 2010년에< River Town 江城>이라는 역작을 남긴다. 평화봉사단으로 지금의 충칭, 당시의 쓰촨 푸링지역에서 보낸 2년간의 생활을 소재로 삼고 있다. 공교롭게도 량홍이 ‘량좡의 중국’을 출간한 것과 같은 해이다. 이 작품은 미국과 서구사회에서 큰 이목을 끌었고, 중문으로 번역이 되기도 하는데, 서구의 일방적인 관점으로 중국을 바라보던 미국사회에 중국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마침, 미중이 차이메리카 G2의 밀월시기를 보내던 시점이니, 미중 양측에서 모두 환영받을만 했다. 나는 아직 그의 책을 완독은 못했지만 책과 함께 그의 기사글과 그의 글에 대한 평을 읽어보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핵심은 empathy, 즉 공감의 능력이 아닌가 한다. 사실, 량홍은 중국의 논픽션문학이 서구사회와 다른 점을 참여자 시점으로 들었는데, 이것이 다른말로 하면 바로 공감의 능력이다.
피터는 작가로서뿐 아니라 저널리스트로서 New Yorker의 중국 통신원 역할을 하면서, 중국에 관한 많은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의 아내 Leslie CHANG도 중국계 미국인인데, WSJ의 중국 특파원을 역임하기도 했고, 역시 중국에 대한 저작을 남기고 있다. Leslie의 아버지, 즉 피터의 장인은 둥베이 출신의 유명한 중국계 물리학자이다. 그는 국민당 계열의 관료이자 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타이완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서 IBM연구소에서 오랜 기간 근무했다. 나중에 홍콩과기대학이 설립되고,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 돌아와 홍콩과기대가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홍콩이 영국식민지였다면, 결코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이 모든 배경이 피터가 중국을 바라보는 내재적 관점이 어떻게 공감능력에 기반할 수 있었는지를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2010년에 중국을 떠나 이집트로 갔다가 2019년에 자신의 제2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쓰촨성으로 돌아와서 청뚜의 쓰촨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곳에서 그의 장기인 creative non-fiction English writing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와 그의 가족은 코비드 상황에서 청뚜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렀는데, 이 경험을 New Yorker에 두편의 글로 남기기도 했다. 이 글들은 그의 특유의 장점이 잘 살아있고, 그가 쓰촨대학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이 어떻게 그와 교감을 나누며 성장하는지도 잘 드러나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 글 때문에 올해 쓰촨대학과의 재계약에 성공하지 못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수업시간에 이 글을 놓고 그와 논쟁을 벌인 학생이 불만을 품고 그를 학교 당국에 고발했다고 한다. 현대의 홍위병이라 불리는 소분홍 반동의 무시무시한 사례이다. 그게 아니라면 청뚜, 혹은 저멀리 베이징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심기를 거슬렸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왠지 후자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청뚜는 그 문제가 된 글에 기술된 것처럼,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덕분에 중국사회에서는 드문, 관용적인 문화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얘기하면 그의 글들이 중국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초래했으리라고 오해하기 십상인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글은 뉴요커 독자들에 의해서 ‘중국의 주구’, 즉 선전도구라는 다수의 악성 댓글에 노출됐다. 놀랍게도 공감에 기반한 그의 글은 10년전과 정반대로 미중 양측의 배척의 대상이 됐다. 과연 변화한 것은 그의 글과 관점일까 아니면 그의 글을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일까?
나는 량홍이 중국의 논픽션 문학을 서구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평할 때, 피터의 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새삼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너무나 궁금해서, 내 개인 페북에 영어로 혼잣말처럼 질문을 남겼다. 왜 피터의 영문 기사는 그가 쓰촨대학에서 쫓겨나는 계기로 작동했지만, 그보다도 중국사회에서 대해서 더 비판적이라고 할 수 있는 량홍의 10년전 작품이 영문으로 출판되거나, 올해 중국에서 새롭게 출간된 작품이 있는데도 그는 베이징의 중심인 런민대학에서 교편을 유지하는 데 별 지장이 없는 것일까? (우리가 원테쥔 선생을 아직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중국 주류사회에서 얼마나 인기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가 런민대학에서 은퇴(당?)하고 변방인 푸졘농임업대학이나 충칭시난대학에 ‘실제직’을 갖고 있고, 대부분의 시간을 베이징이 아닌 이 장소들에서 보낸다는 사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공감에 의존해서 글을 쓰는 두 사람의 차이는 국적밖에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얼마전에 홍콩중문대학의 팡커청 교수의 인터뷰를 읽고 중국의 대표적 언론들이 당국가에 의해 어떻게 ‘관리’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설사 체재를 비판하더라도 체재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중국 미디어의 역설에 대해서 설명했다. 당국가입장에서 설사 상대적으로 큰 잘못을 저질러도 체제 내의 매체의 성원, 즉 우리편에 대해서는 관용이 베풀어지는 반면,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도 체제 바깥의 비판자라면, 불관용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그는 설명한다. 그래서 코비드 초기에 우한의 상황을 취재했던 소위 ‘시민기자’들은 결국 ‘실종’되고 말았다.
결국 중국사회의 ‘관용과 불관용’은 ‘내용’자체 보다는 체재 안이냐 아니면 체제 바깥이냐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피터와 량홍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확인할 수 있다. 량홍은 체제 안의 우리편이고, 피터는 “관리가 불가능한” 체제 바깥의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역설이 발생하는데, 피터가 2019년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이전과 같은 뉴요커의 특파원 신분이 아니라 쓰촨대학의 교원직을 택한 것은 자신의 체제 내 ‘참여자’ 역할을 강화시키고 싶어서였다는 그의 작년 인터뷰를 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이러한 선택이나 희망은 그의 교원직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진 청뚜나 베이징의 관료(?)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이는 중요한 함의를 갖는데, 중국 혹은 새로운 시대의 중화문화가 중국이 원하는 것처럼(?) 문명으로 승격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여부도 결국 이 닫힘과 열림에 중국이 얼마나 포용성을 갖출 수 있는지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미국과 서구사회 혹은 우리 사회 일각의 논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흑백논리로 판단할 수는 없다. 피터의 글이 미국진보에 의해서도 배척됐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오히려 이 ‘회색’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1. ‘Swimming Out Till the Sea Turns Blue’直游到海水變藍 , official trailer
2. 팡커청의 중국언론에 대한 설명, 홍콩 명보의 인터뷰
3. 문제가 된 피터 헤슬러의 뉴요커 기사, <How China Controlled the Coronavirus>
4. 피터의 작업과 그가 중국을 떠나게 된 배경을 ‘완곡하게’ 설명하고 그 문제점을 ‘아쉬움’으로 돌려서 설명하는 칸리샹의 글, <何伟离开中国:时间就在这里,请你们记录一切>
*이 서평의 요약본은 경향신문에도 게재 됐습니다. 경향신문의 허락을 득하여, 다른백년에 연재합니다.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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