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의 변화가 시급하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인식의 틀이다. 지난 3월 25일, 춘천에서 열린 ‘생명을 재생하다’ 포럼에서 김누리 교수는 “자본주의에서 생명주의로”의 이행을 요구하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를 역설했다. 포럼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패러다임은 주로 녹색, 생태, 생명, 살림의 열쇳말로 정의됐다. K-생명사상을 논하면서 가장 자주 호명되는 것은 동학과 장일순이었다. 오늘날 한국 생명사상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장일순과 그의 제자들(박재일, 최혜성, 김지하)이 작성한 <한살림선언(1989)>은 산업문명의 위기를 적시하면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모델을 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을 소외하는 근대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데카르트의 철학과 뉴턴의 물리학에서 찾았다.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당구공처럼 각각의 원자적 존재로 상정하고,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연구한 것이 근대의 패러다임이다. 인간을 사회로부터, 나아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무한한 개발과 착취가 정당화되었다. 한살림은 데카르트-뉴턴의 고전적인 기계 모형 대신 전일적인 우주관을 제창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결국 하나라고 가르쳤다. 생명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대한 모순을 저지른다. 생명을 기계와 대립하여 정의하면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존재론을 답습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생명을 기계로 치환한 것이 아니다. 우주를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으로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정신을 부여하면서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것이다. 참으로 전일적인 사상은 이러한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일원론적이고 초인간적인 패러다임이어야 한다. 한살림은 전일적인 우주관을 표방하면서 생명과 기계를 나누었다. ‘자라는’ 생명은 유기적이고 유연하며, 자율적이고 개방된 체계로서 순환하여 활동하는 반면, ‘만들어지는’ 기계는 획일적이고 경직되었으며 타율적이고 폐쇄된 체계로서 직선으로 작동한다고 대조했다. 그리고 인간은 절대 기계가 아닌 생명임을 강조했다. 이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생명-기계 이원론으로 되살린 것에 불과하다. <한살림선언> 제3장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진화’는 마지막에 “생명은 ‘정신’이다”라고 못박는다. 정신을 형이상학적으로 숭배하고 육체를 형이하학적으로 치부하는 서양 철학의 고질병을 왠지 모르게 수용한다. 생명과 정신은 고귀하고 기계와 육체는 하등하다는 편견을 강화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생명과 기계로 나누고 생명만 살리자고 한다. ‘한살림’이라고 해놓고 사실은 반쪽 살림인 꼴이다. 기계 살림 없는 생명 살림이다.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상 치고는 의아한 전개다. 최시형은 우주가 한 기운 울타리, 한울임을 깨닫고 만물을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울님은 인간과 생물 뿐만 아니라 무기물에도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섬기고, 인간을 섬기고, 물건마저 섬겨야 우주 합일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동학은 다분히 전일적인 사상이다. 한울님이 만물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보다는 스피노자의 일원론에 가깝다. 자연이야말로 한울님 그 자체라는 신앙이다. 동학은 물론 기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진 않았다. 19세기 조선은 17세기 유럽과 달리 오토마톤이 흔하지 않았다. 20세기 말, 동학을 계승한 한살림은 기계 살림을 고민했어야 한다. 자연과 문화, 생명과 기계가 인간을 매개로 한 하나의 연속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인류의 피조물인 기계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소외다. <한살림선언>은 기계 죽임 선언처럼 읽힌다. 아니, 기계는 애초에 살아 있지도 않기에 죽일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기술 공포증적인 생명사상은 인간을 기계로부터 나누고 가두고 옮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죽인다. 또한 인간이 만드는 기계를 함부로 대하게 만든다. 기계 죽임은 인간 죽임이기에, 절대 한살림일 수 없다. […]
READ MORE도덕문명론과 도덕진화론 이제서야 <개벽파선언>을 제안하신 깊은 뜻을 알았습니다. 멀게는 1919년의 <기미독립선언>을, 가깝게는 1989년의 <한살림선언>을 잇는 세 번째 개벽파선언을 기획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나니 우리가 하는 작업의 의미도 한층 분명하게 이해되었습니다. 지난번 편지도 마치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처럼 익숙하게 다가왔고요. 먼저 “개벽파를 척사파와 개화파의 동렬로 간주하기 힘들다”는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척사파와 개화파는 문명과 야만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쪽은 중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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