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MZ세대 시청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드라마 장르중 하나는 역사판타지와 타임슬립물이다. 그래서 시간여행으로 어느 시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보면 송나라宋朝라는 답변이 돌아온다고 한다. 공산당의 ‘위대한 중국’ 프로파간다에 열광하는 애국주의 청년들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이웃나라 시민들 입장에서는 뜻밖의 발견이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漢무제나 고구려를 동북아 지도에서 지운 당唐태종의 시대가 아니라고? 중국의 역사학자들에게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송을 전통시대 최고의 왕조로 꼽는다. 베이징대학의 송대역사연구자 자오둥메이趙冬梅교수는 올해 중국 제도사를 다룬 <법도와 인심法度與人心>과 생활사를 다룬 <인간연화人間煙火>를 각각 출간했는데, 핵심은 역시 송이다. 그는 북송을 진시황 통일후 2천년간 유지된 제정帝制시기 유가정치가 달성한 최고의 정치체제로 본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황제가 중심이 되고 관료가 보위하는 왕조국가와 백성들을 아우르는 전체 사회 이익의 균형을 취하려 했다. 둘째, 중앙정부가 각 지방의 분열을 막고, 정부의 각 분야가 서로 균형과 견제를 할 수 있는 정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왕조국가의 안정을 꾀했다. 셋째, 출신에 무관하게 평민사대부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권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특히 재상의 권한으로 황제의 독주를 능히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사대부가 천하를 함께 다스리는 체제였다. 넷째, 전통시대의 언론역할을 하는 간관제도가 발달해 황제와 관료들의 오류와 전횡을 방지하거나 교정할 수 있었다. 시민의 권리를 중시하는 근대가 도래하기전 “가장 근대에 가까운 민주적 체제”의 모습이다. 창업주인 태조 조광윤이 “대신과 간관을 절대로 죽이지 말라”한 왕조의 원칙과 규범祖宗之法이 세워지고 4대 인종仁宗에 이르기까지, 범중엄范仲淹, 구양수歐陽修, 사마광司馬光, 포증包拯(포청천), 소동파蘇東坡를 비롯한 중국역사의 기라성같은 문인 정치가들이 등장하여 자유롭게 황제와 국정을 논하며 태평성세를 구가했다. 북쪽 변경의 요遼와 서하西夏가 군사적 위협이었나 형제의 예를 갖춘 동등하고 실리적인 외교관계를 맺어 전란을 피했다. 조선의 군왕이 유교적 덕을 쌓고 학식을 기르기 위해 늘 참석해야했던 왕실클라스인 경연經筵제도가 바로 이때 확립된 것이고, 그 교재로 사용된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사마광이 저술한 것이다. 이 균형이 깨진 것은 인종仁宗의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 종실의 수많은 핏줄중에 운좋게 선택된 영종英宗과 그의 아들 신종神宗이 대를 잇는 가운데, 정통성과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다. 송의 고질적 문제는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발달한 제도로 인한 것이었다. 유능하고 방대한 관료집단과 직업군인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재정지출이 요구됐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싶었던 신종神宗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두 파트너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제도와 절차를 무력화시켰을 뿐아니라 반대의견을 가진 이들을 붕당朋黨이라는 진영논리로 낙마시켰다. 생각이 다른 신진기예를 과거에서조차 낙방시키며 북송이 자랑하던 관용의 정치문화를 훼손했다. 자오둥메이는 2020년에 출간한 <대송지변大宋之變>에서 이러한 변화가 벌어지는 20여년간의 사건들을 소설적 긴장감이 넘치는 문체로 묘사하기도 한다. 눈을 감고 이 모습을 드라마 영상처럼 상상하면 뜻밖에 조선시대 사극의 장면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조선이 소중화 건국모델로 삼았던 중국의 왕조가 어느 시기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잠재적 후계자로 지정되는 순간부터 즉위과정에 이르기까지 수십년간 오랜 정신적 위기감에 시달렸던 영종英宗은 즉위 직후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친부에 대한 호칭문제로 대신들과 실갱이를 벌이며 짧았던 제위기간조차 낭비한 채 단명한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이해하기 힘든 왕조시대의 이러한 예송논쟁은 실은 후계자 계승의 적통성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선거제도논쟁만큼 첨예할 수 있다. 예법의 핵심은 공자의 표현을 빌자면 “하늘의 도로써承天之道” “인간의 정념과 욕망을 구속하고자以治人之情” 하는 것인데, 여기서 구속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바로 황제와 그 자리를 탐하는 군상들이었던 것이다. 내부요인으로 인해 쇠퇴한 선진적 정치문화는 여진족 금金나라에 의해 남송시대에 더욱 위축됐다가 몽골의 원元나라에 의해 완전히 소멸한다. 국가를 왕조의 가산으로 신하를 황제의 노비로 여기는 유목민족의 정치문화가 득세한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한족이었지만 다시 이를 받아들여 재상직위조차 철폐하고 일인천하를 만든다. 그는 정보기관을 이용해 대신들을 상시적으로 사찰했고,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신과 간관들을 공개적으로 태형에 처하는 제도를 만들어 목숨을 빼앗거나 노골적으로 명예를 훼손시켰다. 사대부가 중앙정치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명나라의 역사에도 “미리 관을 짜두고 황제에게 직소하러 간다”는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한 충신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지만 실제로는 “침묵하는 대다수”와 “정의로운 극소수 <또라이>”라는 이분법적 기호가 고착됐다. 이는 중국지식인과 인민들을 정치에서 소외시킨 역사적 기원을 제공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만주족인 청의 황제들은 외견상 유가의 이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지만, 소수민족의 통치체제와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수인 한족신민을 늘 감시와 지배의 대상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중국역사학자들은 영국이 대헌장제정과 명예혁명을 거치며 점진적으로 국왕의 권력을 나누고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마련하여 현대적인 민주국가로 진보한 것과 중국 정치문화의 퇴행의 역사를 곧잘 비교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아직도 현대적 민주국가로 진화하지 못한 중국체제에 대한 아쉬움이 있기 때문일까. 제정시기의 제도와 문화에 대한 비판 몇가지가 더 있다. 첫째, 중앙정부가 지방관료들의 임면권조차 독점함으로써 지방정부가 지역민의 복리보다 중앙의 이익과 의지를 중시하는 수隋나라부터 시작된 경향이 있었다. 지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 이전 한나라의 경우 지방정부의 최고위급 간부만 중앙에서 임명하고, 나머지 지역 공무원은 현지인으로 충당되어도 큰 문제없이 제국이 운영됐다는 반례가 있다. 또다른 문제는 황제와 중앙의 실정을 감추기 위한 희생양문화이다. 황제 제도의 기생물일뿐인 환관과 지역의 말단 공무원인 리吏가 만고불변의 적폐세력으로 지목되는 것이 그 대표사례이다. 불합리한 제도를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 그 제도의 결과물에 모든 죄를 덮어 씌운다. 흔히 “중앙의 정책과 지방의 대책”을 이야기하는 현대중국정치체제는 과연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곰곰이 되짚어볼 일이다. 저자는 정치제도뿐아니라 송의 생활문화가 중국인들의 전통적 라이프스타일을 완성한 것으로 본다. 이를테면 중국의 주방살림을 뜻하는 땔감, 쌀, 기름, 소금, 간장, 식초, 차柴米油鹽醬醋茶라는 한마디 표현이 만들어진 것도 남송시대이고, 그전까지 옷을 만드는 재료였던 비단과 마를 대체하는 면의 재료인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두 책의 미덕중 하나는 엄선된 전통시대 회화의 적극적인 사용인데, 그림마다 과거의 제도와 생활상이 생동감있게 묘사돼있고, 그중에서도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는 베이징 고궁박물관 소장품들을 대표하는 국보급 걸작이다. 글로 남겨진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의 자세한 묘사도 이 모습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저자도 이 당시로 타임슬립하고 싶을까? 그는 누가 권한다해도 거절할 것이라고 단호히 대답한다. 전통시대가 아무리 현대인들의 상상속에 휘황하게 빛날지라도, 우리가 지금 누리는 수준의 자유와 풍요를 제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인 그가 당시 규방을 벗어나 연구자로서 업적을 쌓고 그에 걸맞는 명성을 누릴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 역사는 아무리 느리더라도 그리고 설령 뒷걸음질치거나 돌아가더라도 조금씩 진보하는 과정인 것이다. 나가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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