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공화와 일원공화
지난번에 보내주신 편지에서 천도교의 ‘삼일정신’과 원불교의 ‘삼동윤리’를 연속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양자를 분석하는 시각은 아마 처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두 종교가 ‘개벽’이라는 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정도의 지적만 있었으니까요. 개벽종교를 하나의 ‘파’나 ‘학’으로 묶어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자기 교단의 교리나 운동에만 관심을 기울이거나, 아니면 동학농민전쟁에만 주목을 해왔으니까요.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관점에서 개벽파를 다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개벽파 연구의 중요한 방법론을 제시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장 그 방법론을 개벽파의 ‘공화제’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천도교의 천인공화(天人共和)와 원불교의 일원공화(一圓共和)도 공화제의 연속적 전개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내용상의 차이는 있지만요. 정산 송규의 “주의는 일원주의요 제도는 공화제도라”라는 말을 천도교식으로 바꾸면 “주의는 하늘주의요 제도는 공화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문환 선생님의 고전적인 논문 「천도교(동학)의 민주공화주의 사상과 운동」(2007)에 의하면, 천도교에서는 이미 1911년에 ‘천인공화’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鄭桂玩 「三新說」, ?天道敎會月報? 제9호). ‘천인공화’는 “하늘과 사람이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천인공공(天人公共)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선생님식으로 표현하면 ‘천인합작’이 되겠지요.
천인공공과 천하공공
‘공공’이라는 말은, 일찍이 교토포럼에서 김태창선생님이 발견하셨듯이, 사마천의 『사기』에 “모두가/모두와(公) 함께(共) 한다”는 의미의 동사로 처음 나오는데, 11세기의 성리학에 이르러 본격적인 사상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公共之理’(공공지리), 즉 “모두가(公) 함께하는(共) 도리(理)”라는 개념입니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천리(天理)는 누구나 공유하고 있고(=본성으로써 구비되어 있고), 또 공유되어야 한다(=사회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公共之理’를 줄인 말이 오늘날 수학에서 사용되는 ‘공리(公理)’입니다. 그리고 성리학에서는 公(공)과 共(공)이 서로 뒤바뀌어 쓰이기도 하고 단독으로 동사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공공’의 용례가 폭발적으로 나오는 것은 다름 아닌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사실입니다. 가타오카 류 교수님의 연구에 의하면, 600여 차례가 넘는 용례가 나오고 있는데, 그 예문도 다양해서 천하공공(天下公共), 만세공공(萬世公共), 고금공공(古今公共), 거국공공(擧國公共), 공공지의(公共之議), 공공지론(公共之論), 또는 신인공분(神人共憤), 신인공노(神人共怒), 신인공쾌(神人共快), 신인공환(神人共歡) 등등 끝이 없습니다. 이 무수한 용례들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무엇을 중시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희노애락을 함께하고 다수와 생각을 공유하는 ‘천인공공(天人公共)’, ‘중인공공(衆人公共)’의 정치입니다.
공공(公共)에서 공화(共和)로
저는 유교의 핵심은 바로 이 ‘공공(公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 사유(私有)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公有)해야 한다는 것이 유교,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 주자학의 이상이었습니다. 맹자에 나오는 ‘여민(與民)’이나 세종의 “여민가의(與民可矣)”(백성과 함께 하면 된다)도 ‘공공’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민’과 ‘공공’을 양자를 합치면 ‘여민공공’(與民公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천도교와 원불교의 ‘공화’ 개념은 조선 주자학의 ‘공공’ 개념의 개벽파적 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천도교와 원불교의 ‘공화’를 분석해보면, 천도교의 ‘공화’는 “하늘과 함께해서(共) 모두가 어우러지는(和)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원불교의 ‘일원공화’(一圓共和)는 “일원과 함께해서(共) 모두가 어우러지는(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화’ 개념 자체만 분석해 보면 “함께(共) 어우러진다(和)”이지만, 그 어우러지게 하는 공통가치가 성리학적인 천리(天理)가 아니라 ‘하늘’과 ‘일원’인 것입니다.
하나를 공공한다
‘하늘’과 ‘일원’을 개벽파의 공통어휘로 바꾸면 ‘한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울’은 대종교, 천도교, 원불교가 공공하는(공유하는) 개념으로, 천도교 사상가 이돈화에 의하면 ‘큰 울타리’라는 뜻으로 ‘우주 전체’를 말합니다(『신인철학』, 1930년). “우주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원불교의 정산 송규는 이것을 ‘한울 안 한 이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도교의 천인공화이든 원불교의 일원공화이든 그 공통점을 추출해 보면 “하나임을 공유하는 것” 또는 “하나와 하나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학에서는 ‘理’와의 공공을 강조했다면, 개벽학에서는 ‘一’과의 공공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주자학에서 말하는 “리는 하나이지만 나뉘어져서 달라진다”고 하는 리일분수(理一分殊)에서, 주자는 공공의 대상을 <다름의 理>로 보고 있다면, 개벽학에서는 그것이 <같음의 一>로 이동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一>을 동학에서는 ‘하늘’(天)로, 원불교에서는 ‘일원’(一圓)으로, 천도교에서는 ‘한울’로 약간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산 송규의 삼동윤리(三同倫理)에서 말하는 동(同)도 이 一(하나)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요.
리일(理一)에서 기일(氣一)로
더 중요한 것은 주자학에서는 리(理)가 다르게 드러나는 원인을 기(氣)의 차이에 두고 있다면, 개벽학에서는 동학의 일기(一氣)나(『동경대전』) 원불교의 동기(同氣)에서(「삼동윤리」) 알 수 있듯이, 기(氣)의 동질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리일(理一)에서 기일(氣一)로, 일리(一理)에서 일기(一氣)로 전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주자학과 개벽학의 근본적인 철학적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자학에서는 만물간의 구분과 차등을 인정한 상태에서 윤리를 말하고 있다면, 개벽학에서는 만물 사이의 같음과 동질을 전제한 상태에서 도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설명해보면, 유학의 수기치인에서는 己(자기)와 人(타인)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즉 수양하는 주체는 위정자이고 다스려지는 대상은 백성입니다. 백성들은 원칙적으로 수양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개벽학에서는 모두가 수양을 합니다. 그래서 己와 人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수양하는 이와 다스려지는 이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나로 통한다
이처럼 개벽학에서는 상위자와 하위자의 위계가 사라지니까, ‘다스린다’(治)나 ‘교화한다’(敎)는 개념보다는 ‘모신다’(侍)나 ‘섬긴다’(事) 또는 ‘공경한다’(敬)나 ‘감사한다’는 개념이 중요해지게 됩니다. 동학‧천도교에서는 모두가 하나의 하늘이니까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고”(事人如天) “만물을 공경하라”(敬物)고 하고, 원불교에서도 모두가 하나의 원(圓)처럼 연결되어 있으니까 만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천지의 은혜’(天地恩)나 ‘동포의 은혜’(同胞恩)이라고 하는데, 윤리적 실천 덕목이 모두 ‘하나’라는 우주론 또는 존재론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원불교에서는 이 ‘하나’의 세계관을 만물뿐만 아니라 각각의 종교들에까지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삼동윤리에서 말하는 “세계의 모든 종교적 진리는 근원적으로 같다”고 하는 동원도리(同源道理)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원불교의 종교관은 ‘종교다원주의’라기보다는 ‘회통주의’, 더 쉽게 말하면 ‘하나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원주의가 상대방의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면, 회통주의는 각 종교들이 근저에서는 하나로 통하고 있다는 통교적(通敎的) 차원으로까지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2세기 원불교학
원불교도 이제 10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2세기 원불교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원불교 내부에서도 많은 논의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역시 중요한 것은 교학의 시대화와 대중화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의 눈높이에 맞게 교리나 사상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것이지요.
가령 정산 종사의 ‘삼동윤리’는 꼼꼼히 분석해보면, ‘윤리’라는 범주로 다 포괄되지 않습니다. 먼저 ‘동원도리’는 “세상의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는 말이니까, 윤리론이라기보다는 진리론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리하나론’, 또는 ‘진리동원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두 번째의 ‘동기연계’(同氣連契)도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나의 기운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이 역시 윤리론이라기보다는 우주론이나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의 ‘동척사업’(同拓事業)이야말로 “모두가 함께 같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윤리론이나 실천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동원도리와 동기연계도, 모든 것이 하나라는 진리를 알아서 대동화합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윤리론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엄밀히 구분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삼동윤리’보다는 ‘삼동론’이라고 부르고, 그 삼동론 안에 동원진리론, 동기존재론, 동척윤리론이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원불교 교리나 사상을 현대적으로 범주화하고 체계화하고 풀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2세기 천도교학
천도교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한살림’이 동학의 생명사상을 한글로 멋지게 풀어냈듯이, 천도교 또한 이 시대와 호흡하는 언어와 사상을 궁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 관건은 동학의 ‘하늘’ 관념을 오늘날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하늘’ 이야말로 한국인의 영성을 대변하는 말로 지금도 우리의 일상어에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사상적 접점도 이 ‘하늘’ 관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특히 되살리고 싶은 용례는 1910년의 『천도교회월보』에 실린 동사로서의 ‘하늘’입니다. “내 마음을 하늘같이 내 기운을 하늘같이 한다”(天我心, 天我氣)는 것이 그것인데, 많은 시사점을 주는 용례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고전에서는 ‘天’이 이렇게 동사로 사용되는 용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니다. 그것은 아마도 중국에서의 ‘天’은 하나의 ‘중심’으로 상정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한국의 ‘하늘’은, 특히 동학이나 천도교에 이르면 “하는 님”(윤노빈)이나 “일하는 하늘님”(김지하)이라는 해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의 ‘활동’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늘이 동사로도 쓰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활동하는 하늘
이와 같이 중국의 天과 한국의 ‘하늘’은 그 성격이 다릅니다. 마치 고대 중국에서는 제천의례가 황제 일인에 제한되는 특권이었지만 고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만인이 참여하는 축제였다는 차이가 있듯이, 天의 의미도 중국에서는 내 밖에 있는 명사적인 어떤 것을 가리켰다면 한국에서는 그것이 내 안으로까지 들어와서(侍天主) 내 안에서 활동하는 무한한 생명력을 가리키게 됩니다. ‘하늘’이 ‘天’에 비해 혁명적이고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생각합니다. 天이 혁명을 상징하는 용어라면 하늘은 개벽에 어울리는 개념입니다.
동사로서의 ‘하늘’ 관념은 원불교의 ‘원’을 역동적으로 해석하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천도교에서 하늘이 동사가 되었다면, 원불교에서 말하는 원(圓)도 동사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니까요. 이 경우에 ‘원’은 ‘둥글게 한다’가 되겠지요.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고 생각해 온 점을 참고하면, 전혀 터무니없는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천도교의 ‘하늘한다’에는 ‘(하늘처럼) 둥글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건국론』에 나오는 일원주의를 “각지고 모난 마음부터 원만하고 원대하게 다듬고 보듬어야 한다”고 해석한 것과도 상통합니다. 이것이 제 나름대로 천도교와 원불교를 회통시키는 방식입니다.
포함하는 하늘
‘하늘한다’가 ‘원만하게 한다’와 상통한다는 사실은 ‘하늘’의 어원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초기의 성리학자 권근은 하늘(天)을 ‘큰(大) 하나(一)’로 쪼개어 설명했습니다(『입학도설』「천인심성분석지도」). 이돈화가 한울을 ‘큰 울타리’라고 한 것과도 상통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종교학자 박규태 선생님은 ‘가장 큰 체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이란 어느 하나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원만함입니다. 가장 큰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한다’는 좌우나 남북으로 가르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아우르고 보듬으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자기를 비워서 타자를 수용하는 열린 자세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늘한다’는 신라시대 최치원이 말한 ‘포함하다’와 유사합니다. 최치원은 화랑도의 풍류를 설명하면서 “유불도 삼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경우에 ‘포함한다’도 어느 하나도 배제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포함한다’는 ‘하늘한다’의 다른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과 혜강 최한기는 ‘동서’를 포함하려고 했고, 천도교와 원불교는 개벽과 개화를 아우르려 했고, 지금의 개벽학도 이 하늘하는 길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사는 사람들
남남갈등이 심화되고 남북교류가 진행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가치로 공화(共和)를 이룰 수 있을까요? 종교와 이념과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 어떤 공통의 가치를 추구해야 할까요? 항상 고민하는 문제이고 자주 받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한국사상을 연구하는 제 입장에서는 고대 한반도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 관념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통가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늘’은 기독교의 하나님, 천주교의 하느님, 천도교의 한울님, 원불교의 일원상, 『천부경』 등의 한철학 등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적 포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울러 어느 하나의 중심주의를 고집하지 않고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개방적 태도를 상징합니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상승을 지향하는 한국인의 역동성과 활동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늘은 한국인이 자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사상용어라고 생각합니다. 2세기 개벽학 역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다시개벽'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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