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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근대철학은 데카르트에서 출발하여 자아의 주체성과 진리의 절대성, 즉 자아와 이성의 실체성(여기서 실체라함은 타자와 독립된 존재로서 단일한 속성을 지니며 고정불변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로 대표적인 예로 플라톤의 이데아, 중세의 신, 근대의 자아 및 현대의 표상성을 들을 수있습니다)을 추구하였는데 그 근거는 자아는 이성적 존재이므로 이성과 과학에 의해 불변의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뉴튼의 근대물리학 성과를 철학적으로 반영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아와 진리의 실체성을 증명하지 못하게 되자 칸트에 이르러서 선험적 주체와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진리를 주관화하면서 데카르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근대의 한계, 즉 자아와 이성의 실체성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플라톤도 인정하였듯이 자신이 제시한 실체 개념은 근원적으로 사유의 산물, 즉 관념이지 결코 현실적 실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여 근대의 자아와 이성은 중세의 신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복종 프레임을 벗어나기위해 초월적인 신을 우주밖으로 축출해버린 후 인간만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성적 존재인 자아를 실체로 인정하려했던 근대의 기획은 실패로 돌아가 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해석해주는 실체론의 허구성을 버리지 못하고 현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근대는 이성을 지닌 인간만이 감성으로 이루어진 자연을 지배할 수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정당화하기위해 이성과 자아를 절대적인 실체로 간주하였으나 그러한 이성은 인간만이 지닌 실체도 아니며 또한 이성(분별지의 한계는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의 한계로 인해 다시 신을 보증인으로 호출해야하는 한계 나아가 칸트의 이율배반에서 보듯이 이성으로는 절대로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현대에 이르러서야 직접 몸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성의 한계를 파악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며 과감히 실체론을 해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와 더불어 맑스는 기존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프로이트는 주체의 의식을 무의식의 산물에 불과 한 것으로 보며 근대의 주체와 진리의 실체성을 폐기하기 시작합니다.

니체는 서구철학의 뿌리인 플라톤의 정적이고 점적인 시간관을 영원회귀의 동적이고 선적인 시간관으로 전환시키면서 고정불변의 존재라는 것은 단지 인간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영속적으로 변화, 생성하기에 고정불변인 실체는 이미 죽었으며 따라서 대표적 실체인 신 역시 죽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이미 플라톤이 이데아를 인간의 사유에 의해 만든 허구의 관념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후 현대에 들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여 니체를 계승한 푸코와 들레즈 그리고 데리다가 근대를 완전히 해체하게 되는데 이와는 별개로 하이데거와 화이트 헤드는 근대의 존재론을 바닥부터 의심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여 왔습니다.

한편 근대철학 입문서인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는 근대철학을 주체와 대상의 인식 그리고 진리라는 3가지 기준을 가지고 근대의 특징인 주체철학과 과학주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체와 인식과 진리라는 삼각점을 이어가면서 근대철학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다보니 서구 근대철학을 ‘인식론’의 측면에서만 파악하고 비판하는데 그쳤으며 서구의 ‘존재론’인 실체론을 근원적으로 비판, 해체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게됩니다. 즉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서구의 존재론인 실체론을 현대과학의 존재론에 입각하여 비판하다보면 서구 근대철학의 한계와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적 관점에서만 비판하다보니 현대철학의 정수와 흐름을 존재론적으로 이해시키기가 다소 어렵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여 필자는 근대물리학이 제시한 존재론인 실체론과 현대물리학이 제시하는 존재론인 비실체론(생성론,사건론,과정론,관계론)을 비교, 분석하는 차원에서 현대철학을 설명해야 현대철학의 흐름, 즉 포스트모더니즘과 과정철학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해보자면 푸코나 들레즈 및 데리다는 실체를 동일자라고 똑같이 호칭하고 있는데 다만 동일자에게 포섭되지 않거나 배제되어버린 ‘다름’을 푸코는 ‘타자’ 들레즈는 ‘차이’ 그리고 데리다는 ‘차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동일자, 즉 실체를 해체하고 ‘다름’의 고유성과 등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 근거는 현대물리학은 고정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고 모든 존재는 시공간상 사건들의 인과적 과정이라는 과정론을 존재론으로 확인하였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철학에 도입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됩니다.

한편 동일자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푸코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를 가르는 경계를 없애자고 주장함으로써 비실체론 중에서 ‘관계론’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들레즈는 기존의 차이가 없는 동일성 개념을 해체하고 동일성의 의미를 차이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꾸자고 주장합니다. 이는 ‘차이가 없는 동일성’을 ‘차이가 있는 동일성’으로 대체함으로써 기존의 차이가 없는 동일성 즉 실체를 해체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는 비실체론 중에서 ‘과정론’의 측면을 부각시킨 관점이라 할 것입니다.

들레즈는 동일성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지 않고 굳이 유지한 이유를 지식담론의 생산적 효과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푸코도 평생 동일성을 해체하는데 전력을 다하였으나 말년에 이르러 해체해야 할 지식담론이 오히려 개체가 사회화되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필요악이기에 그나마 지식담론 즉 동일성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라는 태도로 변경한 것과 동일한 입장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해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동일성’ 개념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고 ‘연속성’ 개념으로 대체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현대물리학에서는 존재는 시공간 사건들의 인과적 연속체이기에 들레즈가 언급한 차이의 반복이라는 의미를 정확히 담아내는 개념으로서는 동일성보다 연속성이 훨씬 정합적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써 지금의 내 몸은 태어나서 현재까지 차이의 반복 즉 현재의 몸은 태어날 때와 동일한 몸이 아닌 차이들이 연속된 몸이기에 동일성이 아닌 연속적 존재라는 개념이 더 실재와 부합한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연속성 개념은 생성과 연기의 일종인 윤회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유용하다 할 것입니다.

한편 데리다는 서구문명을 실체와 비실체의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이루어진 불평등의 계서적 문명으로 보았기에 아예 동일성 개념을 폐기함으로써 실체를 해체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사건과 사물은 모두 차연(차이의 연기라는 의미로 들레즈의 차이의 반복과 같은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동일자 즉 실체란 인간이 만든 허상으로 실재 세계에는 있을 수 없으므로 소위 동일자인 텍스트를 직접 해체하여 동일자 뒤에 숨겨진 타자들의 진정한 차이 즉 타자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세상에 등가적으로 드러내어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 동일자와 타자로 가르는 서구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과감히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비실체론의 ‘사건론’의 측면을 부각시킨 관점이라 할 것이며 푸코나 들레즈와 달리 동일성의 유용성(개체를 사회화시키고 질서를 유지시키는 효과성으로서의 유용성)마저 인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실체를 해체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결국 현대철학은 크게 생성론의 과정철학과 해체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대별되고 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로지 해체만 언급하였기에 새로운 비실체론적 존재론을 재구성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들레즈는 자신이 새로운 존재론을 제시하는 태도가 자신이 해체하고자하는 동일성을 재부활시키는 작업일지도 모르기에 이를 거부한다고 밝히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존재를 ‘동일성의 실체’가 아니라 ‘연속적인 과정’으로 존재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게된다면 우리는 세계를 전혀 새롭게 해석할 수있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는 차후 불교의 연기와 중도를 설명할 기회에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일성, 즉 실체를 해체만하는 입장이기에 대안으로 현대물리학의 존재론에 입각하여 비실체론적인 존재론, 즉 연속성의 생성론, 과정론의 존재론을 재구성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과정론의 존재론을 받아들여 현대과학에 부합하는 철학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자본은 고정불변의 동일자(실체)가 아니며 노동 또한 항상 타자가 아니다. 하여 자본과 노동의 경계를 없애 버리자.‘

박헌권

수십 년간 시민운동의 경험을 통하여 얻은 성찰을 토대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의 융합을 통하여 21세기의 새로운 존재론과 우주론을 추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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