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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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1세대

전북의 1세대 민주화운동 어른으로는 세 분을 꼽을 수 있다. 은명기(1921~1996), 조용술(1920~2004), 강희남(1920~2009). 세분 다 목사님이다. 그리고 생전에는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였다. 그러면서도 각기 뚜렷한 개성과 경륜을 가지고 일생을 산 분들이었다.

은명기 목사는 정읍 고부 출생으로 강희남 목사님과 1947년 한국신학대학에 함께 입학한 동기생이다. 은명기 목사는 1972년 10월 박정희가 한국 민주주주의를 말살하는 10월유신을 단행했을 때 그에 대해 처음으로 비판한 분이었다. 그 해 12월 13일 은 목사는 10월유신에 대해 비판하는 설교를 함으로써 최초로 구속된 성직자가 되었다. 은 목사는 강희남 목사와 함께 전북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끈 동지이면서 강 목사에게는 늘 든든한 후원자였다.

조용술 목사는 익산 함라 출생인데, 강희남 목사와 1920년생 동갑이지만 1963년 한신대를 졸업하고 1965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목사가 되었다. 출발은 늦었지만 복음교회 총회장(1977~83), KNCC 총회장(1982~84) 등을 역임하여 한국 기독교의 거목이 되었다. 70세가 되어 은퇴하는 해인 1990년, 남, 북, 해외동포가 모이는 베를린 3자회담에 남한 대표로 참석하여 범민련 결성에 합의하였고, 귀국 즉시 구속되었다. 강희남 목사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면서 항상 부드러운 미소와 세련된 매너로 강직하고 대쪽 같은 강 목사를 돕고 뒷받침한 분이었다.

1970년대에 가톨릭에서 이 세분들과 함께 활동한 분으로는 문정현 신부가 있는데 1940년생이니 나이로는 세분들보다는 한참 젊은 셈이다. 세분 목사님은 모두 돌아가셨으나 문 신부는 아직도 제주도 강정에서 미군기지 반대운동 일선에서 정정하게 싸우는 운동가로 살고 있다.

강희남 목사는 전북의 세 어른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은명기 목사는 75세에, 조용술 목사는 84세에 지병으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강 목사는 2009년 6월6일 전주시 삼천동 자택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89세까지 살았으니 병석에서 종명(終命)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연세였으나 유서를 남기고 자결(自決)함으로써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왜 그는 그 연세에 자결을 선택했을까?

칼럼_181214(1) 경향신문

 

1차 투옥

강희남 목사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1977년 란산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시무하던 때였는데, 박정희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설교와 강연을 계속하다가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되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5월 5일 양일동의 통일당 연차대회에서 초청연사로 강연한 직후에 체포되었다. 본인 표현대로 하면 이때부터 “박정희에게 정면 도전장을 내고 반골로 주목 받는 목사가 되었다.”(『한 목사의 생애와 사상』, 흰돌강희남기념사업회, 2016, 54쪽)

강 목사는 당시 자신의 발언에 대해서 같은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목사라는 것은 하느님의 집을 지키는 번견(番犬)이다. 그러므로 그 개는 도적이 오는 것을 보면 짖는 것이 본분이다.” 그리고 “ ‘총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지금도 어덴가 숨어서 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의 펜 끝이 무서운 것이다.’라는 신념, 그리고 심하면 하느님이 주신 입으로 말이나 바로 하다가 죽는다.”라는 생각으로 발언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 재판은 민주화 진영의 큰 주목을 받고 재판 때면 4-5백명의 방청객들로 재판정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서울에서도 윤보선, 이희호, 백기완 등 많은 인사들이 내려와 방청하고 돌아갔다. 자원 변호사를 포함한 9명의 변호인단도 꾸려졌다.

이 사건으로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강 목사는 감옥에서 문익환 목사를 만난다.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전주교도소에 수형 중이었다. 만났다지만 운동시간에 먼 발치에서 서로를 보고 손을 흔들어 아는 체를 한 것이 전부였다. 강 목사는 “옛날 재 너머 한되 쌀을 주고 받던 가난한 선비들의 심정에서” 아껴두었던 여름내의 한 벌을 문 목사에게 보냈다. 문 목사는 답례로 그의 저서 『새것, 아름다운 것』 1권을 보내왔다.

이 때의 해후가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의 시발이 되었는데 당시 이런 예감이 강 목사에게도 있었는지 강 목사는 이 때의 만남에 대해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력사 속의 실존』, 도서출판 두레문화, 1989, 46쪽)

 

(세조 당시 사육신으로 함께 죽었던) 박팽년에게 하위지는 우장(雨裝)을 빌려주면서 거기에 시 한수를 적었다.

南兒得失古猶今 남아의 득실은 예부터 있는 법

頭上分明白日臨 우리들 머리 위의 백일은 분명한 것이니

指贈蓑衣應有意 이 도롱이를 그대에게 주는 뜻은

五湖煙雨互相尋 이 땅에 비바람칠 때 서로 만나자는 것이다

라는 시인데, 이것은 남아가 세상에 나서 옳은 일을 위해 한번 죽고 사는 것이 있는 법이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생사를 같이 하자는 것이다. 박팽년은 이 시를 보고 심회(心會)의 눈짓을 했다. 목사님이 그 안에서 그 책을 나에게 주신 것이 하위지가 박팽년에게 준 도롱이가 아니었던가?

강 목사는 이 재판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광주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역시 10년으로 확정된다. 그리고 광주교도소에서 2년, 대전교도소에서 10개월의 징역을 살고 박정희가 10.26으로 피살된 뒤 1980년 1월1일 석방된다.

 

성장과정과 목회활동

강희남 목사는 1920년 1월 13일 전북 김제 중농의 집안에서 부친 강학용 선생과 모친 류성녀 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유학자인 조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9세가 되어서야 마을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완고한 강씨 가문 전통에 따라 중학교에 가지 않고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강 목사의 풍부한 한학 실력은 이 때 기초가 다져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에 장성하여서는 일청(一靑) 김형제 선생과 담재(澹齋) 김봉문 선생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한학 수업을 받았다.

강 목사는 그러나 서당에서 한문공부 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혼자서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계기가 재미 있다. 추석이 지난 가을 강희남 소년이 벼논의 새를 보러 갔다. 그런데 옆논에 새 접근을 막기 위해 쳐 놓은 새끼줄 사이사이로 50센티 간격으로 책장이 꽂혀 있었다. 호기심에서 빼어보니 그로서는 처음 보는 글자인 영어로 쓰여진 것이었다. 강희남은 그것들을 모조리 빼어 가지고 와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후에 강 목사는 사전도 없이 그 책장들만 가지고 어떻게 알파벳을 알아냈는지 자신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술회하였다.

5대째 종손인 강희남은 조부의 강권으로 겨우 15세에 같은 김제군의 죽산면에 사는 처녀 정복님에게 장가를 들었다. 처가 정씨네는 일찍이 예수를 받아들여서 크리스찬 집안이 되었는데 강희남도 결혼 후에는 그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예수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선영 제사를 모셔야 하는 5대 종손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문중의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희남은 꿈 속에서 예수와 12제자를 만나고 조상제사를 버리고 예수를 택하는 용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그 댓가로 장자의 가업을 동생들에게 넘겨 주고 빈손으로 집을 떠나 처가살이를 하게 된다.

빈손으로 나왔지만 처가가 근동에서도 알아주는 대농이어서 강희남 부부는 처가가 나누어주는 3000평 정도의 토지에 의지해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농사일은 부지런한 아내의 몫이었고, 강희남은 강의록으로 중고등 과정 공부를 계속했다. 그래서 그는 동네에서 그저 영어 콘사이스를 들고 논두렁길을 다니는 사나이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8.15를 맞았는데, 그는 또 어느 날 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빨간 포도주 한 잔을 받아 마시고, 신학교에 갈 뜻을 품게 된다. 그래서 1947년 조선신학교(현재의 한국신학대학) 군산 교회고시부에 응시했다. 중학교 졸업장이 없는지라 중학 검정고시와 신학 입학자격시험을 연달아 봐야했고, 군산 응시생 18명 중 유일하게 합격했다. 논두렁을 다니면서 강의록 공부를 한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신학교에서 만난 사람이 평생 친구 은명기 목사였고, 고형로 목사, 이병선 목사 등도 동기생이었다.

1952년경 신학교를 졸업한 강희남은 교회 봉사를 하면서 익산 군산 등지에서 사립 중학교 교사를 교편을 잡았다. 당시 농촌교회의 사정이 열악하기도 했고, 본인도 자급전도(自給傳道)를 희망했다. 1955년 군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금구교회, 전주 시천교회, 성광교회 등에서 봉사하고, 한편으로 군산 영명 중학교, 전주 영생 중고등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 일했다. 그가 교직에서 떠나 처음으로 담임목사가 된 것은 1965년 김제 란산교회에서였다.

가족들을 동반하고 란산교회에 부임했지만 담임목사에게 지급되는 사례비는 그저 식구들이 먹고 살기에 빠듯할 정도였다. 강 목사는 그 적은 사례비 중에서도 10분의 3을 교회에 다시 헌금하고, 또 10분의 2쯤은 교인들에게 지출했다. 슬하에 4남 3녀, 7자녀를 두었는데, 아이들 교육비와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하는 것은 오롯이 부인의 몫이었다. 부인은 자신이 오랫동안 손수 짓던 농토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거기서 나오는 적은 돈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하였다.

 

민통련 대의원회 의장

1977년 전주교도소에서 만났던 문익환 목사와의 인연은 강희남 목사의 예감대로 그후 1985년부터 다시 이어진다.

1980년 1월 출소하여 목회자로 돌아온 강희남 목사는 그 해 5월 수천명이 희생당한 광주항쟁 소식을 광주에서 피신해 나온 고민영 목사로부터 들었다. 바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광주항쟁에 호응해야 했지만 당시 무시무시한 계엄상황에서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강희남 목사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자신의 비겁함과 무능함을 두고두고 통탄했다.

자책감 속에서 살던 강희남 목사에게 1984년 경 서울에서 문익환 목사를 만난다. 함께 강원도 어느 세미나에 가면서 문익환 목사가 제안을 해온다. 정당 하나 해볼 생각이 없으시냐고. 강 목사가 나는 정당 같은 것은 생각이 없소 하니까 문 목사가 다시 그럼 우리 국민운동 같은 걸 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강 목사가 그것은 좋습니다고 대답하였고, 그럼 그거 합시다 하여 두 사람이 합의가 되었다. 바로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독재에 대항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라는 통일전선 조직을 결성하는데 합의한 것이다.

1985년 3월 문익환 목사를 의장으로 하고 재야 민주세력의 총집결체인 민통련이 창립하면서 강희남 목사는 대의원회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강희남 의장은 지방에 있기 때문에 자주 서울에 올 수 없었지만 중요한 회의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문익환 의장도 강희남 목사를 자신과 동렬의 지도자로 깍듯이 대접했다. 장충동에 있는 민통련 본부 사무실에는 항상 강희남 목사의 전서체 글씨가 족자로 표구되어 걸려 있었다. 당시 하얀 두루마기 차림에 베레모를 멋스럽게 쓰고 올라온 강희남 목사의 모습은 마치 지방에서 올라온 명문 종가집의 선비 같았다.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쾌도난마와 같은 정부 비판은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 주었다.

 

2차 투옥과 40일 단식

1986년 5월 강희남 목사는 전북대에서 한 강연으로 두 번째 투옥된다. 강 목사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을 말하면서 전두환 같은 자를 어떻게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여기에서 강 목사는 전두환을 어머니를 강탈해 간 악한(惡漢)에 비유하였다. ‘어머니와 산다고 해서 악한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강연을 하고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전주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강 목사는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해가 바뀌어 1987년, 1월에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에서 고문으로 사망하고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민심이 술렁이고 6월항쟁의 서막이 열린다. 이 때 전두환이 정면돌파의 카드로 꺼내든 것이 4.13 호헌조치였다. 전두환이 집권 야욕을 백일 하에 드러낸 것이었다.

전주교도소 옥중에서 이 소식을 들은 강 목사는 깊이 고민했다. 감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식 밖에 없는데 당시 몸 상태로는 15일을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10일 동안 망설이며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결심했다. 그는 하느님께 ‘이곳에서 죽어 이 감방을 민주산실로 만들고 하나의 밀알이 되어 땅 속에 들어가 썩겠읍니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4월 23일 아침부터 결사단식에 들어갔다. 그의 단식투쟁은 곧바로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양심수들의 연대 단식투쟁으로 확대되었다.

그의 단식 소식은 밖으로 전해져 반독재투쟁에 나서고 있는 민주인사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각처에서 성직자들이 지원단식에 들어갔다. 그가 담임목사로 있는 란산교회 청년들과 전북의 청년목회자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회원들은 교도소 밖에서 천막을 치고 풍물을 치면서 날마다 시위를 했다. 민주인사들의 격려 방문도 줄을 이었다.

그의 목숨을 건 단식은 40일간 계속되었다. 단식 20일, 30일이 지나면서 생명의 위험신호가 왔다. 그러나 15일을 못 넘길거라는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35일이 지났지만 쇠잔한 가운데서도 강 목사의 건강은 유지되었다. 초조해진 강 목사의 지인들과 가족들이 단식 중단을 애소했지만 강 목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마침내 김대중, 김영삼 씨까지 나서서 당의 장기욱 변호사를 보내 단식을 중단할 것을 설득했다. 야권이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국민항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강 목사는 자신의 목적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생각하고 예수가 광야에서 금식한 40일을 채우고 마침내 단식을 끝냈다. 7월 하순 강 목사는 단식을 끝내고 53일만에 석방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6월항쟁의 위대한 성취가 있었고, 6.29선언으로 바햐흐로 직선제 개헌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87년 대선과 민통련 해체

강 목사는 감옥에서 면회 온 장남 세현으로부터 6.29선언 소식을 들었다. 강 목사는 아들에게 “이것으로 다 된 양으로 이렇게 생각하는데 절대로 이거 안된다. 이대로 그냥 그대로 치고 나가서 뿌리까지 뽑아야 이게 된다. 밖에 나가서 이렇게 말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양 김씨가 환영성명을 발표하고 국민들의 관심도 대통령선거로 이동하고 있었다.

대선국면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은 대통령후보를 둘러싸고 ‘비판적지지’, ‘후보단일화’, ‘독자후보’ 3진영으로 분열되었다. 강 목사는 김대중 씨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호남 지역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김대중 씨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김대중 씨와 오랜 동지적 관계를 가져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통련이 공식적으로 김대중 씨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민통련이 공식적 지지를 결의함으로서 내부가 분열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10월 18일 민통련 중앙집행위원회는 김대중 씨에 대한 ‘비판적지지’를 결정했고, 강 목사의 우려대로 민통련은 분열됐다. 이런 민통련의 모습에 강 목사는 몹시 상심했다. 1988년 11월에 쓴 <분열되면 망한다>에서 그런 당시의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운동권이 소위 작년 대선 이후로 서로 이념의 차이도 있는 것 같지만 감정적 요소도 끼어 사분오열되었다. 이는 여간 애석한 일이 아니었다.”라고 쓰고 있다.(『력사 속의 실존』, 도서출판 두레문화, 1989, 34쪽)

87년 대선은 결국 노태우의 승리로, 양 김씨의 패배로 끝났다. 대선 패배를 바라보는 참담한 심정을 강 목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피력한다. “이것이 운이다. 6.29를 이렇게 만들게까지 했지만은, 우리가 말이여, 산중농사 지어서 호랭이 좋은일 시키드라고 말이여. 노태우 좋은일 시켰다 말이여.”

이런 참담한 심정으로 대선 후 민통련 해체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민통련 해체 후에 전민련으로 다시 통합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위의 책 다른 글 <우리 민족의 성탄절 “1월 21일”>에서 강 목사는 “사실 나도 어찌 섭섭한 마음이 없을 리 있나. 문익환 의장과 더불어 5년 전 발족 시부터 내 딴으로 심혈을 기울여 왔던 민통련이다. 그러나 이 마당에서는 이것을 무(無)로 돌려야 한다.”이라고 썼다. 그리고 1989년 1월 21일 전민련 창립식 직전에 향린교회에서 있었던 민통련 해체식에서 허전해 하는 민통련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보고 무슨 말을 하라고 하기에 나는 농촌에서 보는 우렁의 비유를 들었다. 어미 우렁이 자기 속에 새끼를 배어 그 새끼들이 자기 창자를 다 뜯어먹고 자라게 하고서 자기는 빈 껍질만 남아 물 위에 떠가는 것이다. 오늘 우리 민통련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다….(중략)…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식구들은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이 일에 임할 것을 말했다.”

 

통일운동

1988년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통일운동과 반미운동의 열풍이 휘몰아쳤던 해이다. ‘반전반핵 양키 고우 홈’을 외치고 분신한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이 있었고, 6월에는 전대협을 중심으로 남북학생회담 추진운동으로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올림픽 남북 공동개최라는 이슈가 통일운동 차원에서 제기되었다. 이러한 남북통일제단에 또 한사람 소중한 목숨을 바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조성만 열사였다. 1988년 5월 15일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서울대 화학과 2학년 학생 조성만이 남북 공동올림픽개최, 미국축출, 군사정부 퇴진 등을 요구하며 할복 후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조 열사의 고향이 전북 김제였고, 전주 해성고를 나온 인연으로 강희남 목사는 조성만 열사 장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강 목사는 경희궁 공원 장례식장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조사를 낭독했다. “조성만 통일 열사는 결코 자살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코 타살 당한 것이다. 그를 죽인 자들이 누구냐? 오늘날 조국통일을 가로막는 불의한 세력들이다….” 서울 시청 앞에서 노제를 마친 운구차는 고향으로 향했다. 전주에 도착하여 열사의 본가를 지나 모교 해성고등학교에서 간단한 장례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전주를 출발하여 광주 도청 광장에서 노제를 하고 밤늦게 망월동 묘지에 안장하였다.

원래 강희남 목사는 목사이면서도 누구보다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안병무 박사는 “만일 예수가 군대를 끌고 한국에 쳐들어 온다면 아마 강 목사님은 이에 대항해서 싸울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뜻에 복종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강 목사는 혼례식의 고천문(告天文) 낭독이나 조상을 모시는 제사제도도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일찍이 통일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선민주 후통일’의 입장을 취해왔었다. 즉 민중의 착취구조나 독재 같은 계급문제 해결이 선행되고 통일과 같은 민족문제 해결은 그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지 입장의 변화가 생겼다. 즉 계급문제와 민족문제의 동시 해결, 민주와 통일의 동시병행으로 입장이 선회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강희남 목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그 계기라고 특별히 말할 것은… 우리 민족 안에 계급문제부터, 독재, 어떤 이런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중에, 통일 문제는 그 다음에 일이다고, 그렇게 하다가 내가 깨달은 것이 있어. 아! 이것과 민족문제가 별개가 아니다. 아니고, 동전의 안팎에, 이것과 이것이 안팎이다. 그런고로 이제부터 통일문제 민족문제와 같이 일을 해야 한다.” 강 목사가 분명히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마도 1988년 학생들의 통일운동과 조성만 열사의 장례가 아니었을까?

강희남 목사가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1991년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으면서부터였다. 바로 전 해인 1990년 11월 20일 베를린에서 남,북, 해외동포 3자 대표들이 모여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 결성에 합의했는데, 이 회의에 남측대표로 이해학, 조성우와 함께 강 목사의 오랜 친구 조용술 목사가 참석하였다. 이 회담 직후 남측대표 3인은 귀국 즉시 체포되었으나 베를린 3자회담의 합의대로 각 지역 범민련결성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남한에서는 91년 1월 23일 문익환 목사를 중심으로 31개 단체가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했으나 결성 직후 정부당국의 탄압으로 관계자 문익환 목사, 이창복 등 10여명이 구속되거나 수배되고 범민련결성준비위는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활동이 불법화 되었다. 강희남 목사는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가 문익환 위원장이 활동할 수 없게 되자 그 직무대행을 맡아 범민련 조직 결성의 총대를 매게 되었다..

이후 강 목사는 2000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을 사임할 때까지 범민련 남측본부 대표로서 통일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범민련 해외본부는 90년 12월(의장 윤이상), 북측본부는 91년 1월(의장 윤기복)에 결성되었으나 남측본부는 정부의 탄압과 통일운동 진로를 둘러싼 운동 내부의 이견 차이로 우여곡절을 겪다가 95년 2월에 와서야 결성되었다. 강희남 목사가 초대 의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1994년 7월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사망했다. 이 때 강희남 목사는 판문점을 통해 김일성 조문을 가겠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친필로 쓴 “북에 조문간다. 길 비켜라!”라는 휘호를 앞세우고 판문점 행진을 하다가 체포되어 국가보안법으로 투옥된다(3차 투옥).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으로 취임한 직후에도 범민련 관계 인사 29명과 함께 투옥되어(4차 투옥) 1996년 보석으로 석방될 때까지 1년간 징역을 사는 등 고난의 길을 걷는다.

이 10년 동안의 통일운동은 강 목사 개인 뿐 아니라 우리 통일운동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아직은 객관적 평가가 이르고 지면의 한계도 있어 자세한 서술은 후일을 기약할까 한다.

 

산 그림자의 집

2000년 범민련 의장을 사임하고 나서 강희남 목사는 운동권 일선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그러나 변함없이 꼿꼿하게 민족의 진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활동을 이어갔다. 연세도 80대에 들어서 있었다.

이 시기 강 목사의 활동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2004년 6월 우리민족련방제통일추진회의(련방통추) 결성하고 의장으로 취임한다. 2005년에는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으로서 이라크 파병 저지 운동으로 노구를 이끌고 목포에서 서울까지 도보행진시위를 감행하였다. 2006년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철폐를 위해 련방통추 양키추방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원 앞 길에서 천막을 치고 7개월간 농성투쟁을 벌였다. 동북 3성과 2차에 걸쳐 유럽여행도 다녀왔다. 집필에도 힘을 써 ‘민중주의’(1996)에 이어 ‘동북3성을 가다’(2003), ‘정리된 상고사’(2008) 등 2권의 저서도 새로 출간했다.

이 시기 강 목사님에 대한 필자의 추억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강희남 목사는 서울에 사는 전북 출신 민주인사들의 모임인 전북민주동지회에 자주 참석하였다. 이 모임은 매달 한번씩 음식점에서 정례토론회를 하고, 통일산악회라는 이름으로 월 1회 산행을 했다. 당시 필자는 동지회 회장으로 가끔씩 토론회에 목사님을 연사로 초청하여 그의 해박한 한중 역사와 고문헌에 대한 이야기와 칼날 같은 시국담을 듣곤 했다.

2003년 겨울, 흰 눈이 온 산에 소복이 쌓여 있는 12월에 우리 민주동지회 회원13명이 강희남 목사님을 모시고 전북 내장산 서래봉으로 겨울산행을 갔다. 눈 덮인 내장산의 설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목사님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생각보다 눈이 많이 쌓인데다 산행 시작 시간이 늦어 목사님을 숙소에 남기고, 서둘러 산행에 나섰으나 길을 찾지 못해 결국 산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5시쯤 우리도 일찍 숙소에 들어왔다.

숙소는 필자의 오랜 친구 이홍규의 고향 누님 내외가 하는 펜션이었다. 푸짐한 저녁 밥상이 차려지고, 정성껏 담근 복분자술이 동이째 나왔다. 주인 내외도 함께 하는 자리에 강 목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건배사와 함께 선창으로 건배하였다. 겨울 밤은 깊어가고 우리는 고담준론(高談峻論)과 음주가무(飮酒歌舞)에 흠뻑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인 내외가 우리를 별채에 마련된 서예방으로 안내했다. 서예공부를 하는 부인이 정성껏 먹을 갈고 강 목사께 글씨 한 점을 청했다. 강 목사는 ‘山影(산 그림자)의 집’이라는 별채 당호(堂號)를 지어주고 붓을 들어 특유의 날아가는 필체로 글씨를 남겨 주셨다. 부인은 두 손으로 글씨를 받아들고 공손하게 감사 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숙소를 떠나면서 받은 대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돈이나마 미안한 마음으로 전하려 했지만 부인이 한사코 사양하여 부인의 뜻을 고맙게 받도록 했다. 우리 일행이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간에서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두 주인 내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이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2009년 6월 6일 오후 7시 45분 흰돌 강희남 목사가 전주시 삼천동 자택에서 목을 매 자결하였다. ‘이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라는 붓글씨 한 점과 ‘남기는 말’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유서 마지막 문장이 “제2 6월 민중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로 되어있어 그 직전5월 23일에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자결의 직접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나왔다. 그러나 전후 맥락으로 보면 이명박 정권의 반생명•반민중적 정책과 반통일 정책에 대한 항의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사실 강희남 목사가 당신의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바치기 위해 훨씬 전부터 준비했다는 것이 작고 후의 유품 정리 과정에서 드러났다. 유품 중에서 자결하기 한 달 전에 쓴 8천만 동포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고별사’가 나왔다. 강 목사의 대쪽 같은 기백과 불의에 대한 불같은 분노, 애국지사의 결연한 심회가 잘 드러난 명문장이다. 몇 부분을 인용한다.

더는 그만두고 왜놈들이 강제로 1905년 (을사)륵약 체결 때만해도 민영환, 송병선 등 애국지사 10여명이 순절했는데 그 중에도 민영환 선생을 모시던 인력거꾼이 뒤를 따라 자살했고 송병선 댁 소녀 식모 공림이 식도로 목 찔러 죽었다. 송병선 선생은 “나라는 망했지만 의(義)조차 망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 말씀이 항상 식민지 백성된 내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중략)

통일운동은 바로 양키추방운동과 직결된다는 신념으로 오랫동안 싸워본다고 했지만 이 땅의 괴래(뢰) 정권과 보수주의 매국노들의 세상에서 이란격석(以卵擊石)이 아니던가? 이 치욕스러운 력사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략)

나는 민족적으로 못하면 개인적으로라도 그들에 대한 노예신분 청산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몰려 있음을 어이하랴? 내가 대전 감옥에 있을 때 꿈에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운명하신 최익현 선생을 뵈었는데, 내가 선생을 부액해(부축하여) 모시고 가면서 춘추를 물으니 73세시란다. 그렇다면 나는 선생보다 17개년을 덤으로 살았으니 이것도 하나의 죄의식으로 남는다.(중략)

나 자신도 그동안 기막히게 고독하고 서러운 운동의 세월을 살았고, 이제 또한 오자서처럼 양키추방과 련(연)방제통일 만이 이민족의 살길이라는 신념 하나를 멍든 가슴에 안고 내 집을 양키 대사관 앞이라 여겨 입 대신 몸으로 말하려고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조국과 민족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목숨으로 말이다.

단기 4342(2009)년 5월 1일

 

강희남 목사 장례는 민주 통일 단체들과 민주인사들에 의해 통일 민주사회장으로 5일동안 치러졌다. 빈소는 전북대병원에 차려졌고, 10일 오전 8시 발인하여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고, 광화문에서 노제를 한 뒤에 벽제화장장에서 화장했다. 고인의 유골은 원래 통일을 열망하던 고인의 뜻에 따라 북녘 땅에 모실 생각이었으나 여의치 않아 두 개의 유골함으로 나누어 하나는 고향 전주 삼천동 그린피아 추모관에 모시고, 나머지 하나는 마석 모란공원 추모관에 안치했다. 언젠가 통일의 길이 열리면 북녘 땅으로 가기 위한 임시 거처인 셈이다.

공동선, 2017년 9-10월호 136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

권형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민청련 부의장, 민통련 사무차장, 현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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