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새로운 전환을 위한 담론을 모색하는 다른백년에서는 촛불 혁명 1주년을 맞아
집중 기획 <한반도 평화 구축 방안>을 주제로 한 어젠다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권력을 탄생시킨 촛불혁명은 아직 진행중인 미완의 혁명이며 그 완성의 하나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다른백년은 당장의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군사적 긴장의 완화는 물론 한반도의 지속적이며 항구적인 평화체제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놓고 연말까지 두 달 동안 국내외 전문가들의 기고와 포럼을 연속적으로 내보내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촛불혁명의 완성은 한반도를 지난 수십년 동안 짓눌러온 ‘독재의 순환고리’를 한반도 양국체제로 끊어내는 데 있다는 김상준 교수의 칼럼입니다.
한국사회의 새로운 전환과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분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1. 촛불혁명의 세 단계
2016년 10월 29일 시작된 대한민국의 ‘촛불집회’는 3차 째인 11월 12일의 100만 집회에서부터 ‘촛불혁명’으로 전환되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자진퇴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함에 따라 이때부터 촛불광장의 요구가 국민에 의한 ‘하야’와 ‘퇴진’으로 분명해졌고 이 요구를 여러 미디어에서 받아 ‘촛불혁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듯 혁명적 요구를 장착한 거대한 대중행동은 이어 4차(11월 19일, 95만), 5차(11월 26일, 190만), 6차(12월 3일, 230만) 집회를 통해 국회의 대통령 탄핵 가결을 압박했고, 결국 국회는 12월 9일 찬성 234명 반대 56명으로 대통령 탄핵을 가결했다.
이 ‘합헌적 혁명’의 경로는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 결정을 승인하고 대통령에게 파면 선고를 내림으로써 그 1단계가 완료되었다.
대통령 탄핵-파면 이후 촛불혁명은 다음 단계인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1야당인 더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41.08%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국회 내 탄핵을 주도했던 야3당후보의 득표율을 합하면 68.66%(국민의당 21.41%, 정의당 6.17%), 촛불의 압박 아래 탄핵 지지로 돌아선 새누리당 이탈 세력의 지지율(6.76%)을 더하면 75.42%에 이른다. 유권자 4분의 3 이상이 탄핵지지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가운데 제1야당의 후보가 여유 있게 당선되어 정권을 안정적으로 교체한 이 대선 과정이 ‘합헌적 혁명’의 제2단계라 할 수 있다. 대선 이후 ‘촛불정부’가 들어선 이제 합헌적 혁명으로서의 ‘촛불혁명’의 제3단계가 진행 중이다. 이 제3단계를 온전히 마무리하였을 때 촛불혁명은 비로소 완성·완수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렇듯 세 개의 단계를 경과하여 진행 중인 촛불혁명의 지향 또는 목표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목표나 지향은 무엇보다 우선 이 사건의 역사적 위치, 위상을 객관적으로 점검할 때 비로소 분명해질 수 있다. 그러한 위상이란 한국현대사 속에서의 위상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사, 더 나아가 세계사 속에서의 위상을 포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다. 이 혁명이 어디쯤 있는 줄 알 때,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가 분명해진다.
필자는 2016-2017년 촛불혁명의 역사적 위상을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한국 현대사 차원에서 볼 때 두드러진 점은 이번 촛불혁명이 1960년의 4·19 혁명과 1987년의 민주항쟁에 이은, 대략 30년 간격으로 터져 나온 거대한 민주열망의 세 번째 분출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4.19도, 87년 민주화도, 각각 이후 30년에 걸쳐 점차 그리고 결국은 강고한 독재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거대한 민주적 열망을 냉혹한 독재체제가 회수하고야 마는 ‘마(魔)의 순환 고리’ 또는 ‘독재의 반복 고리’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번 촛불혁명도 꼭 같은 순환고리에 포획되고 말 운명인가? 촛불혁명의 완성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이 점을 심각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반복강박 증상과 매우 유사한 이 불쾌한 역사적 순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질 때, 2016-2017 촛불혁명의 제1과제는 바로 그 ‘마의 순환고리’를 분명히 끊어내는 것에 맞추어지게 된다. 반면 이러한 반복성과 그 뿌리 깊은 구조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못하면 촛불혁명은 다시 한 번 자기혼란 속에 퇴행 소멸할 수 있다. 이것이 지난 60년간 한국 현대사에서 두 차례 반복된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의 작동’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이번 촛불혁명의 두 번째 역사적 차원은 기존 민주주의 시스템이 세계 곳곳에서 한계와 오작동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에서 유독 이를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돌파하는 새롭고 거대한 힘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한국의 촛불혁명에 세계가 놀랐던 이유다. 외국의 여러 주요 언론이 썼던 바와 같이 이번 한국에서의 촛불혁명의 에너지는 더 이상 ‘민주주의 선진국’의 발자국을 뒤따라가는 후발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체와 퇴행에 빠진 세계 민주주의 상태에 새로운 활력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보다 고양된 수준으로 이끌어가는 선도자의 힘이다.
끝으로 필자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러한 선도적 에너지가 세계사의 단계가 ‘서구주도근대’ 단계를 넘어 ‘후기근대’로 들어서는 상황에서 표출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후기근대의 주요 특징의 하나는 일극중심 문명체제에서 다극균형 문명체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변동은 커다란 기회와 함께 위기를 함께 수반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한편으로 정상사회, 정상국가로의 전환의 계기가 형성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전환을 오히려 신냉전기류의 고조를 통해 모면하려는 흐름이 생겨난다. 현재 북미간의 비상한 군사적 긴장고조는 여기서 비롯된다. 이러한 상황을 어떤 방향으로 풀어가느냐에 따라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세계 전반의 안녕이 큰 영향을 받게 된다. 20세기적 또는 냉전적 행동패턴, 분단체제적 사고패턴과 과감하게 작별하는 새로운 발상, 담대하고 창의적인 접근이 긴요한 시점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촛불혁명은 한국현대사에서 30년 간격으로 되풀이 되었던 ‘마의 순환고리’를 확실히 끊어야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목표는 세계사 차원의 거대한 지각변동에서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이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과 깊이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표, 과제, 역할은 단기적 시야에서는 포착되기 어렵다. 눈앞에서 쉴 새 없이 진행되는 현상에 매몰될 때 촛불혁명의 제3단계는 방향을 잃고, 이 속에서 앞서 언급한 ‘마의 순환고리’는 다시 한 번 거대한 작동을 시작하게 될 수 있다.
이 글은 이상 촛불혁명이 놓여진 역사적 위상과 여기서 도출되는 목표에 대해 가능한 구체적으로 적시해 보려 한다. 그것은 ‘독재의 순환고리 끊기’와 ‘한반도 양국체제의 정립’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 두 목표·과제가 뗄 수 없이 긴밀히 연관된 것임도 이 글은 밝혀 보일 것이다. 이 두 과제의 달성은 진정 ‘체제전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만이 이번 촛불혁명은 진정 그 이름에 부합하는 혁명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본다.
2. 한국 현대사에서 ‘마(魔)의 순환고리’
4·19와 87년은 대한민국 정치사, 민주주의 역사의 기념비적 봉우리였다. 이제 2016-2017년의 촛불혁명은 이를 잇는 세 번째 봉우리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두 번의 봉우리가 세계의 주목과 경탄을 받았던 만큼, 그 역사적 대분출 이후의 역사는 독재의 깊은 골짜기로 거듭 굴러 떨어지곤 하였다. 그리하여 ‘민주의 대분출과 독재로의 회수’라고 하는 매우 불쾌한 사이클이 한국 정치사에 30년 주기로 반복되어 왔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그리고 널리 인식되게 된 데는 박근혜 정부의 등장과 귀결이 큰 역할을 했다. 그 이전 이명박 정부 출범은 참여정부 실패의 결과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독재 회귀의 큰 사이클에 대한 인식이 아직 대중적으로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박정희 체제로의 회귀라는 상징성이 강했고, 실제 재임 동안 그러한 회귀가 정부의 공공연한 이념공세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물론 이 사실의 확인은 87 민주항쟁 이후 30년 사이클의 대미를 박근혜 정부의 유신 귀환 행태가 장식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우선 박근혜 정부의 독재화 가속 현상은 최근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은 이명박 정부 시기의 전방위적 블랙리스트 정책(감시·배제 체제)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이전 김대중-노무현 민주화 정부 10년도 독재 회귀의 큰 사이클을 결코 끊지 못했다. 그 연원은 멀리 87년 하반기 민주화 진영의 분열과 대선패배로부터 기인하는 바, 이 30년의 전체 흐름에 대한 조망은 이 글 4절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박근혜 정부가 대미를 장식했던 독재 회귀의 피날레 현상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부터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과 군 정보기관의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선거개입(이명박 버전의 ‘비상국가체제’의 작동)에 의해 출범할 수 있었다. 이렇듯 국가 기관의 대규모 선거개입에 대한 검찰수사를 박근혜 정부는 유신체제를 연상시키는 매우 강압적인 방식(박근혜 버전의 ‘비상국가체제’ 작동)으로 종결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박근혜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서 보여준 무능과 불통·불감, 통진당 해체에서 보여준 냉전 극성기의 배제와 억압, 국정교과서 추진에서 보여준 시대착오적 이념적 강압으로 시종 일관하였다. 이러한 오만과 강압은 2016년 4·13총선 공천 과정에서 전통적 지지층마저 고개를 돌릴 만큼 무제약적인 것이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통·불감, 억압·배제의 일방 통치와 오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언론은 4·13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의 압승, 더 나아가 개헌선 이상의 여당 승리에 따른 제2의 유신 개헌 가능성을 예상하였다. 그 만큼 신유신 체제로의 회귀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보였다. 때는 마침 87년 항쟁의 30주년에 임박해 있었기 때문에 87년의 민주주의의 희망찼던 큰 진전과 그 30년 이후 민주주의의 암담한 추락의 대비가 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4·13 총선의 결과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전혀 예상 밖에 조성된 여소야대의 상황이 박근혜 체제의 유신 회귀 질주를 멈추게 한 것도 아니었다. 전방위 블랙리스트 압박과 국정교과서 개정, 사드 배치, 일제 위안부 문제의 종결(소위 대못박기)을 위한 강박적 정책이 집요하게 추진되었다. 10월 말 최순실 국정개입·농단의 구체적 증거가 언론에 폭로되기 시작하면서 급전직하로 진행된 박근혜 정권의 극적인 몰락 역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리 독선·독주를 해도 철옹성처럼 견고해 보였던 박근혜 지지층을 단번에 해체해버린 11월, 12월의 거대한 대중행동은 자연스럽게 30년 전, 1987년의 거대했던 민주대항쟁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렸고, 많은 미디어(이 ‘미디어’에는 페이스북, 트위터, 카톡, 텔레그램,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이 지지하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확산·유포·공유하는 ‘일인 미디어’ 역시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된다)가 이 대비를 부각시켰다. 1987년 역시 철옹성 같았던 군부독재체제가 그처럼 물러설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험과 기억의 중복 속에서 한국 정치사의 반복성은 평범한 국민대중의 인식 차원에서도 분명해져갔다.
그러한 반복의 시간에서 희열은 짧고 고통은 길기 마련이다. 희망의 짧은 시간은, 길고 둔중한 망각과 냉소와 자학과 고통의 시간에 묻히고 만다. 실제가 그러했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란 그렇듯 짧고 날카로운 희망과 압도적으로 길고 둔중한 절망의 시간의 반복 메커니즘을 말한다. 혹시나 이렇듯 확인된 반복성이 ‘아무리 어두워도 새벽은 또 오고야 만다’는 식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로 도치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다. 중증 반복강박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어두운 회귀 구조의 압도적인 불행과 불쾌와 고통에 주목해야 마땅하다. 역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묘하게도 4·19, 87년 6월, 2016-17년의 세 개의 봉우리는 30년을 주기로 솟아올랐다. 또한 그 사이에 낀 두 개의 시기(1960~1987년과 1987~2016년)의 전개 양상, 즉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장기(長期) 메커니즘’의 작동은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했다. 이 패턴은 극과 극이 대체되는 것으로서, ‘제도 밖의 대중행동이 제도를 변화시키고 점차 보수화되는 제도를 다시금 제도 밖의 대중행동이 변화시킨다’라고 하는 기존 사회변동의 교과서적 일반론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4·19나 87년 6월 대투쟁은 (이번 촛불혁명도 마찬가지다) 반전이 도저히 불가능하여 철옹성 같아 보이는 독재상황, 즉 독재가 외적 구조만이 아니라 멘탈의 내면까지 깊게 장악하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규모와 방식으로 매우 극적으로 분출하였다.
이 글이 주목하는 ‘마의 순환고리’란 이렇듯 정상적인 수준이나 패턴을 넘어서는 지극히 극단적인 독재 수렴 구조의 작동을 말하고, 이러한 극단적 패턴이 반복되는 배후에는 매우 특수한 한반도의 상황이 존재한다. 이 강고한 순환고리의 ‘마성(魔性)’은 거대한 대중행동·민주열망이 제도 안으로 수렴되어 제도를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사회변동의 일반론이 작동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행동의 봉우리가 아무리 높고 거대해도 ‘마의 순환고리’ 자체는 끊기지 않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같은 패턴의 ‘독재수렴’이 반복된다.
그러한 ‘마성’의 효력을 마치 영구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반도적 상황’이란 무엇일까. 2차대전과 한국전쟁 후의 동서(동방/서방) 그리고 남북(코리아) 간의 극단적인 적대적 대립이 지정학적 꼭지점에 2중으로 중첩되어 있는 상황을 말한다. 그로 인해 ‘2중의 독재권’이 중첩하여 증폭하게 된다. 이는 극히 예외적-극단적인 상황이지만, 그렇듯 특이해 보이는 국가 독재권의 작동 원리가 근대국가 주권론의 일반론에서 반드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근대국가 주권론의 이론적·이념적 순수형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장 선명한 이론적 표현은, 필자가 아는 한,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에 의해 주어졌다. 그는 근대 국가주권의 핵심 권능과 표징이 국가 내외에 적(=예외)을 설정하는 권한(비상대권)의 독점, 즉 독재권에 있다 하였다. 이 점은 서구 근대국가 주권과 유형적으로 비교되는 초기근대 제국 질서의 주권 개념과 크게 차별되는 것이다. 제국 질서에서는 다른 종교, 이념, 민족, 국가가 느슨하게 병존할 수 있었다. 제국 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근대 주권은 국내적으로 종교, 이념, 민족의 배타적 통합을 축으로 하고 대외 관계 역시 그 연장선에서 동맹이냐 적이냐의 결정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배타적 주권론에 입각한 세계차원의 패권적 질서가 근대 제국주의인데, 이 시기 식민본국(식민국)과 식민지 간의 주권 관계 역시 느슨한 병렬과 중층의 삼투관계가 아니라 배타적으로 명확히 획정된 지배-피지배 관계였다.
냉전 시기 이 원칙은 국가 간이 아닌 동서 ‘진영’ 간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상황에서 슈미트적 의미의 국가주권의 배타적 권능(=독재권)이 가장 강력하게, 이론적으로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출되었던 곳이 한반도의 남북이었다. 남북의 두 국가가 하나의 주권을 두고 다투는 상황은 남북 상호를 절대적 적(=예외)으로 설정하게 함으로써 남북 각각의 주권이 절대성(=독재권)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진영 간 대립과 분단국가 간 대립이 가장 극단적 형태로 중첩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극단적인 상황은 남북 내부에 정상적 정치 경쟁의 공간을 허여하지 않았다. 칼 슈미트가 근대 국가주권 행사의 정화(精華)라고 보았던 최고통치자의 비상대권이 항시적·일상적으로 작동하는 ‘비상(非常)국가체제’ (the permanent emergency state system), 그것이 남북한의 국가 상태였다.
한국의 경우 그러한 항시적 비상국가 상태에 파열구를 내곤 하였던 것이 4·19였고 87년 6월항쟁이었으며, 이번 촛불혁명이었다. 비정상 상태에서는 비정상이 정상이고, 정상은 비정상이 된다. 오직 그러한 비상상태를 정지시킴으로써만 정상은 정상이 되고 비정상은 비정상이 된다. 즉 비로소 ‘정상상태(normal state)’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에서 세 차례의 민주분출은 비상국가를 정상상태로 되돌리려는 거대한 계기들이었고, ‘마의 순환고리’란 그러한 거대한 계기를 다시금 비상상태로 되돌리려는 ‘마적(魔的) 시스템의 회복력’ 또는 ‘비상국가의 자기회복 시스템’이라 하겠다.
정상상태란 우선 거대한 민주열망의 분출이 정상적으로 제도화되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민주화의 일차적 징표일 것이다. 그러나 4·19와 87년 이후 각 30년은 거대했던 민주열망을 정상적으로 제도화시키는 데 실패했던 과정이었다. 초기 얼마간은 과거 독재기에 비해 유사 민주화가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표피의 변화로 그치고 점차 비상국가체제의 독재·독점의 힘이 민주의 열망을 분산·둔화·왜곡시켜 결국은 몽땅 삼키고 만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러한 ‘마의 순환고리’가 지극히 강고하다는 것을 제대로 입증해준 것은 4·19이후 30년이라기보다 오히려 87년 이후 30년의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4·19 이후 30년은 세계적 동서 냉전이 맹렬하게 진행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비상국가 상태를 근본에서 종식시킨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던 반면, 87년 이후 30년은 동구권 붕괴와 소련 해체를 통해 동서 냉전이 종식됨으로써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를 강제하는 국제적 구속력이 크게 약화된 역사적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는 그 거대했던 87년의 민주동력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회수하여 다시금 또 다른 독재체제로 회수하고야 말았다. 동서냉전이 종식되었고 ‘북방정책’을 통한 대소·대중 해빙이 있었음에도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는 강고하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3. 비상국가체제의 작동과 균열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의 핵심에 ‘비상국가체제’가 있다고 한다면, 우선 그 체제의 작동 방식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상국가체제는 최고권력자의 독재권과 상당히 광범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기득권층과의 동맹관계를 통해 작동한다. 최고권력자의 정치적 독재권은 사회 각 부면의 권력과 자원의 독점권·기회획득권을 기득권 상층에게 배타적으로 보장해 줌으로써 비상국가의 지배동맹은 성립한다. 이 체제의 위기는 지배동맹의 균열·약화와 국민적 저항이 맞물렸을 때 발생한다.
이번 촛불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임기 2~3년 차에 들어 (특히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박근혜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실망, 회의, 반발이 누적되었음에도 대통령에 대한 30~40%에 이르는 ‘콘크리트 지지층’은 2016년 10월 말에 이르기까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40%에 이르던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4·13총선 이후였다. ‘친박 독선·독주에 대한 응징’으로 풀이된 총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자신에 대한 지지율은 놀랍게도 콘크리트 밑바닥인 30%대를 굳건하게 유지했다(아래 그림1).
(그림1) 박근혜 대통령 임기 지지율 추이 (한국갤럽, 리얼미터, 알엔서치의 조사를 합한 것임)
그러나 이 40%대에서 30%대로의 변화 과정에는 지배동맹의 균열과 약화라는 중대한 변수가 끼어 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일단을 흥미롭게 정리해주는 기사가 JTBC의 최순실의 태블릿 공개 직전인 2016년 10월 23일자 [미디어오늘]에 “조중동에게 노무현보다 박근혜가 최악인 다섯 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떴다. 당시 조중동 기자들의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풀이한 기사다. 주요 내용은 2014년부터 시작된 ‘비선실세’ 의혹의 각종 보도에 대해 정부가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것(그 소송의 주역은 김기춘·우병우다), 언론사 수익원을 (역시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막고 있다는 것, (조중동과 같은) ‘언론사’ 출신을 배제하고 (MBC, KBS와 같은) ‘방송사’ 출신만을 청와대가 애호하고 있다(=감투를 주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번 촛불혁명 과정에서 상세히 밝혀진 ‘비선실세’ 건은 이미 2014년부터 ‘문고리 3인방’ ‘정윤회’ 보도로 시작되었고 관련 풍문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은 2013년부터 언론에 드문드문 나타나다 2014년 8월 3일 일본 산케이 신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 정윤회와 관련’이라는 스캔달 식 보도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팩트는 2014년 11월 20일자 세계일보의 보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동년 1월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VIP측근(정윤회) 동향’이라는 제목의 감찰 보고서를 입수하여 보도한 것이다.
, 2015년 초부터는(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이후) 조중동이 한목소리로 대통령이 이 문제를 덮으려 한다고 비판해왔다. 권력과 자원을 조중동, 그리고 그들이 대변하는 사회 기득권층과 공유하고 대통령 개인의 사적 비선실세와만 나누려 하는 행태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권력 공유에 대한 묵언의 지배동맹, 계약을 위반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항의였던 셈이다. 이러한 불만 표출에 대해 청와대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좌파세력이 우병우 죽이기에 나섰다”고 예의 그(=박근혜 전대통령의) 매서운 표현 방식으로 응수했다(2015년 8월 21일).
중요한 점은 박근혜 정부와 조중동은 국내의 여러 이권에 대한 입장만이 아니라 국사교과서 국정화, 대중·대러시아관계, 유라시아 외교, 일제위안부 문제 합의 건 등 이념과 국제관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미묘한 불일치와 마찰을 심심치 않게 보여 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2015년경부터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하여 2016년 들어, 특히 4·13 총선 이후 빈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 시절과 다름없는 구시대의 이념과 외교관, 정치행태를 점점 더 강하게 표출함에 따라 지배동맹의 이념 전선에도 균열과 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방증하는 사례의 하나로 대통령이 ‘주류언론’에 대해서조차 이념적으로 지극히 적대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사실을 들어본다. 지난 8월 2일 삼성 이재용 특검 재판에서 나온 이재용 부회장의 증언이 그것인데,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2월 15일 그를 청와대에서 독대하는 자리에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을 언급하면서 “(중앙일보 계열 언론사인) JTBC가 왜 정부를 비판하나”라 항의하면서 홍회장에 대해서는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럴 수가 있나’라며 ‘이적단체’라는 표현까지 썼다”고 하였다.
‘이적단체’란 ‘좌빨·종북’과 동급의, 한국의 비상국가체제가 비판세력을 말살하고 정치적 독재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던 지극히 폭력적인 언어다. 이제 그러한 정치적 비상(砒礵)=극독을 삼성-중앙일보라고 하는 한국 보수의 대표적 주류 기관의 수장들을 대상으로 들이밀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상황은 국내 자본 그리고 온건 보수의 입장에서도 과거 유신 시절과 같은 강고한 구냉전적 자폐(自閉)와 대결 일변도의 정책이 결코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한미 동맹은 유지하되 동시에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중앙아시아·중동이슬람권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통로에 자유롭게 진입하고 싶은 것이 해외 상대의 사업을 하는 층과 온건 보수층의 일반적인 심정이었다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라도 (이명박 정부 이후) 꽉 막힌 대북관계를 어떻게든 풀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대중·대러시아 정책은 이명박 정부 때보다 더욱 경직되어 있어 그런 방향의 유연한 타개를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본과 온건 보수의 입장에서도 불만과 우려가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되어갔던 것이다.
이렇듯 겉으로는 강고해보였던 박근혜 체제의 보수동맹은 임기 중반(대략 2015년 경)부터 내부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2016년 4·13 총선을 계기로 그 균열이 가시화되었고, 결국 2016년 10월 말 이후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백일하에 폭로되면서 정권이 급속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기적처럼 되돌아온 거대한 대중행동이었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의 열기가 별다른 성과 없이 소진된 이후 심화되는 양극화와 ‘헬조선’의 현실 속에서도 무기력한 패배감과 냉소·자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민심이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다시 크게 경각하기 시작하여 결국 촛불혁명의 거대한 힘으로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2017년 5월 촛불혁명의 힘에 의해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다. 이렇듯 크게 이완·약화된 비상국가체제를 이제 완전히 역사의 뒷장으로 넘기고 이윽고 정상상태의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4·19, 87년 항쟁, 이번 촛불혁명의 공통점은 권력교체기에 권력 최고층의 도를 넘어선 독주와 권력 남용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데 있다. 기득권층의 일정 부분이 권력에서 소외·이반·이탈하면서 민주화의 요구가 압도적 민심이 되었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앞서 두 차례의 거대한 대중행동(4·19와 87항쟁)은 비상국가체제를 종식시키는 데 결국 실패했다. 구 권력의 최고 담당층만을 밀어냈을 뿐, 비상국가체제를 작동시키는 구조와 논리, 이념을 종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비상국가체제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미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동안 ‘마의 순환고리’가 몇 차례의 커다란 타격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부활하곤 하였던 것은 우선 한국이 처한 역사적·지정학적 내외조건의 구조적 강제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강제의 힘을 별 수 없이 수긍하게 된 또 다른 수동적 민심의 (동의가 아닌) 수용이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문제적이라 하더라도 상당 기간 존속해 온 체제에는 나름의 현실 근거가 있게 마련이고, 그렇듯 오래 존속해 온 것은 비판이나 반대만으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선 현실이 변해야 하며, 그렇듯 변화한 현실을 정확히 읽어야 하며, 새로운 현실에 걸맞는 분명한 방향제시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그 동안 운명처럼 받아들여 왔던 ‘역사적·지정학적 내외조건’이 크게 변하여 더 이상 옛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의거했던 ‘비상국가체제’는 변화한 현실과 오히려 크게 부조화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랬을 때 새로운 현실에 맞는 새로운 사회의 방향도 선명해질 것이다.
4. ‘제2의 87년’과 다시 한 번의 기회
앞서 한반도 비상국가체제는 남북의 극단적 적대에 기인하고, 그러한 적대의 극단성은 동서진영대립과 분단국가대립의 중첩 속에서 탄생했다 하였다. 그런데 진영대립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의 동구권 붕괴와 소련해체로 이미 종식되었다. 극단적 적대가 생겨나는 원인의 한 축이 이미 무너졌던 것이다.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한국의 87년 민주화 이후 과정과 맞물렸다. 이 시점은 한국사회가 후기근대 상황으로 접어드는 때로 볼 수 있다. 대항쟁으로 표출되었던 민주화 동력이 온전히 발휘되었다면 한반도 비상국가체제 종식의 계기를 분명히 마련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마의 순환고리’는 그 과정에서 작동기제가 해체되어 가고 민주화는 순탄하게 정상상태에 이르기까지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했던 시기에 놓쳤던 기회에 대한 엄정한 복기(復碁)가 필요하다.
실패의 싹은 87년 민주화 동력의 분열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분열한 절반(김영삼 지지세력)은 이후 구체제 세력과 합류했다(삼당합당). 이 상황은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었고, 이는 ‘마의 순환고리’가 재작동하는 텃밭이자 온상이 되었다. 구체제에 합류한 김영삼 정부는 노태우 정부보다 오히려 더욱 강경한 대북정책을 고수했는데 그 배경에는 경쟁 정치집단(김대중 지지세력)에 대한 견제논리가 강하게 작동했다. 대북 온건정책이 경쟁세력의 집권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는 YS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불거진 일이었다. 1992년 대선에서 민자당 대선후보로 YS가 확정된 이후 벌어진 동년 8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측 안기부장 특보역인 이동복의 ‘대통령 훈령조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고위급회담 지속 의지에도 불구하고 대선후보-안기부장-특보 라인은 훈령을 조작까지 하면서 고위급회담의 합의를 막후 저지했던 사건이다. 막상 대통령 당선 후에는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도 같은 민족보다 가까울 수 없다’고 하였으나 그 얼마 후인 93년 3월 북의 NPT 탈퇴 선언(실제 탈퇴는 2003년에 있었다) 후 초강경정책으로 급전환하여 전쟁 발발에 가장 가까이 근접하는 등 널뛰기 정책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냉전해체에 적극적 행보를 보였던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사라지고 공격적인 흡수통일 노선이 들어섰는데, 이러한 대북 강경책은 북한을 선군주의와 핵무장에 올인하도록 밀어부쳤다. 이런 상태에서 국가부도와 IMF 사태라는 돌발적 상황에서 출범한 김대중 정부와 그를 이은 노무현 정부는 과감한 대북 화해 정책(햇빛정책)을 폈지만 결국 장기적 실효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없다. 북한은 민주정부 10년의 기간에도 핵무장 노선을 결코 놓지 않았고(2006년 1차 핵실험), ‘기울어진 운동장’은 이를 ‘마의 순환고리’를 재작동시키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했다. 냉전세력은 남(南)의 화해 정책과 대북 지원이 북의 핵개발을 조장했다고 공격했고 이는 민주정부의 신자유주의 양극화 추세 억제 실패와 맞물려 민주진영 집권 10년은 급격한 지지 하락으로 마감되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이런 배경에서 출현하여 이윽고 87년의 민주화 동력을 철저히 소진시키고 ‘마의 순환고리’를 다시금 완벽하게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의 순환고리’는 완성되어 극점에 이르는 순간, 자체의 과잉으로 붕괴를 자초하는 역사적 패턴을 보여주었다. 결국 ‘국정농단’이 박근혜 탄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독선·독단에 따른 여러 실정(失政)에 대한 불만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그 중에는 무대책이 된 대북 강경책의 완벽한 실패(2~5차 핵실험과 SLBM, ICBM 등 발사체 개발에 무대책으로 일관) 역시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박근혜 체제가 오작동을 거듭하면서 비상국가체제의 절대무기인 ‘종북’, ‘이적’ 공세가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촛불혁명은 제2의 87년과 같은 상황을 조성하였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사라진 것이다. 그 결과 촛불을 끄자며 한때 가두를 요란하게 메웠던 태극기-성조기 집회와 일베식 폭력성은 오히려 구 보수의 자폐적 기이성을 노출하였을 뿐, 어떠한 확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대외 상황에 대한 인식은 87년보다 진전되었다. 87년 당시 급변하는 대외 상황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매우 미약한 것이었다. 반면 이제는 냉전종식에 이어 미국 일극주의도 종식되었다는 것, 이제 한국의 활로는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넓게 보는 데서 찾아진다는 사실이 상당히 넓게 공유되는 일반적인 인식이 되었다. 전방위로 활발해진 sns 소통, 정보 생산과 유통에서의 민주화가 낳은 한 귀결이기도 하다. 새로운 번영의 기회가 유라시아 길로 열리고 있고 세계는 일극체제가 아닌 다극체제로 변모하고 있음을 이제는 일반인들까지 널리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87년 당시 놓치고 말았던 ‘마의 순환고리’를 이윽고 끊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다시금 보다 좋은 여건에서 확보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구질서의 해체과정에는 불확실성과 새로운 위기가 수반되기 마련이지만, 그러한 상황일수록 내적으로 결집된 힘의 주동적 역할이 중요하게 된다. 이 점에서 세계가 경탄한 촛불혁명의 주역인 각성한 시민사회, 그리고 그 힘 위에 서 있음으로써 특별히 강한 정통성을 갖게 된 새 정부가 들어선 현재의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중요한 변화를 이뤄낼 수 있을 만큼의 내적 역량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렇듯 중요한 변화의 핵심고리가 ‘한반도 양국체제’의 정립으로 모아진다고 주장해왔다(김상준(2017a), 2015년 12월 17일 <백년포럼> 강연, 2016년 5-6월 <다른백년> 주최의 4회 강연 참조).
한반도에 양국체제가 정립될 때, 그 동안 운명처럼 보였던 ‘마의 순환고리’도 ‘비상국가체제’도 이윽고 종식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5. 한반도 양국체제
대한민국(ROK)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은 1991년 9월 유엔에 동시 가입한 두 개의 국가다. 2015년 12월 현재 한국의 수교국은 190개국, 조선의 수교국은 160개국이며, 동시 수교국은 157개국에 달한다(외교부, 『2016 외교백서』). 국제법상, 현실의 국제관계상, 어느 모로 보나 한국과 조선은 두 개의 별개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이 객관적이고 엄연한 사실을 두 나라가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상호 인정하고 정상적인 수교관계를 맺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한반도 양국체제다. 따라서 한반도 양국체제란 필자가 인위적으로 고안하여 제기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현실에서 1991년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통해 최초로 그 초기형태가 출현했던 것이다. 당시의 정세에서 동시가입 상태에서 양국체제로의 진행은 그다지 멀지 않은 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은 92년 하반기 대선국면에서부터 남북화해정책 기조가 역전되기 시작하면서 닫히기 시작했다. 이제 2016~2017년의 촛불혁명으로 다시금 양국체제로의 진입의 가능성이 열렸다.
그렇지만 그렇듯 당연한 현실이 현실로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남북의 현재의 상태다. 이 두 국가는 서로 상대의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다만 자신 주도의 통일에 의해 소멸시켜 흡수할 대상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양국 헌법 모두 현재의 남북은 하나의 나라가 분단된 상태임을 전제하고 있고, 그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명시하고 있다. 그로 인한 남북 간의 극심한 적대와 긴장, 사회 전 부면의 비정상 상태를 대략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지식계에서는 ‘(남북) 분단체제’라 지칭해왔다. ‘분단체제’ 자체가 부정적으로 정의되어 있으므로 이 용어를 구사하는 편에서 분단체제란 분단체제 비판론이지 않을 수 없었고, 분단체제 비판의 목표는 그렇듯 부정적인 분단체제의 극복, 즉 통일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1991년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이전까지 분단 담론은 좌/우, 남/북을 막론하고 압도적으로 통일지향이었다. 국가차원에서 보면 남북 정부 수립 이후부터 남은 북진통일, 북은 조국통일이 공식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립화 통일론’이 통일 담론의 두드러진 한 축을 이루기도 했는데, 4·19를 경유하여 1960년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에서 그러했다. 70년대에는 74년의 7·4 남북공동성명이 천명한 ‘평화통일론’이 내부 독재 강화를 위한 기만임이 드러나면서 민주화와 함께 분단극복이 함께 강조되기 시작했다. ‘분단체제’란 말은 80년대 중반 사회구성체 논쟁이 진행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1987년 6월 이후 백낙청이 주로 『창작과 비평』의 지면을 통해 여기에 개입하여 이를 ‘개념’ 차원으로 엄밀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의 입장은 분단된 남북을 서로 연관된 하나의 체제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분단체제론’이지만, 그 논의의 실천적 지향을 고려하면 ‘분단체제 극복론’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점에서 기존의 분단체제 비판론은 여기서 주장하는 양국체제론과 크게 다르다. 양국체제론은 1991년 유엔 동시가입 이후 한반도 남북이 두 개의 별개의 국가가 되었다 보고, 이 두 국가의 상호인정과 평화공존을 우선적 목표로 삼는다. 양국체제론은 80년대말~90년대 초반의 미소 냉전해체와 동서해빙, 그리고 1991년의 남북 유엔동시가입과 동년 12월의 남북기본합의서의 교환을 남북 분단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전환지점으로 보고 있다. 그 이전까지의 ‘분단극복론’은 현실적 가능성이 희박한 저항적 당위 차원의 논의였다. 엄혹한 냉전대결 상황에서는 남의 북진(또는 멸공)통일론과 북의 조국통일론의 지배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소 냉전해체와 1991년 남북유엔동시가입을 계기로 부정적인 의미의 ‘분단체제’를 긍정적인 의미의 ‘양국체제’로 전환시킬 현실적 가능성이 열렸다. 양국체제론은 두 국가의 통일을 당면한 우선적 목표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었을 때야만 오히려 남북의 극단적 적대관계를 실제적으로 해소하는 단초가 열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기존 연구 중에서 이러한 생각을 체계화하여 이를 ‘양국체제’ 개념으로 명시했던 주장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PD 계열의 논의는 ‘선(한국)민주(화) 후통일론’으로 한국민주화와 남북 간 긴장해소를 별개로 또는 단계적 과제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이 글의 논지와 차이가 있다. 이후 논의 중 이 글의 ‘양국체제론’과 비교적 가까워 보이는 것은 최장집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다: “남북한 간의 이상적인 관계는, 얼마라고 예측하기 어려운 장기간에 걸친 남북한의 평화공존과 경제협력 관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북한이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독립된 국가로서의 지위와 안정성을 갖게 되는 기초 위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단일민족–>분단–>통일된 국가로의 복원이라는 명제는 자동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1민족 2국가’의 다음 단계는 완전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도 한국의 실제적 민주화(substantive democratization)와 남북 간 긴장해소의 연관을 소극적·부차적으로 보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분단체제 비판론은 반독재 투쟁에서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결국 분단체제의 강박적 적대가 오히려 강화되는 순환기제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그 순환기제의 작동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분단체제에서는 남북 상호간과 남북 각각의 내부에 여러 겹의 적대적 대립이 서로 맞물려 순환적으로 상승한다. 한국전쟁 종전 이후 공식적으로 정전(停戰)상태에 있는 남북의 상태는 남북 모두 전쟁이 미완·미결의 상태로 남아 있다고 보고 있다. 잠시 쉬고 있는 상태일 뿐, 전쟁은 심리적으로 내연(內燃) 중인 것이다. 따라서 전시적 비상사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이 지속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통일세력과 반통일세력의 구분이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자체가 남북 쌍방 모두 통일을 하겠다고 벌렸던 일이다. 이러한 전시적 비상사태 의식은 권력의 비상한 독점 즉 강력한 독재체재의 심리적 온상이 되고, 이러한 상태는 사회 전 부문으로 관철된다. 권력. 부, 기회의 독점이 전시적 비상상황을 빌미로 지극히 폭력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에 그 독점과 독재는 기형적으로 심화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비상국가체제’다. 실제 전쟁 상태가 아님에도 이러한 상태가 지속될 때 이에 대한 반발과 비판이 강력하게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러한 문제적 현실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정당한 것인데, 이 비판세력이 제기해 왔던 논리의 주요 흐름이 분단체제(비판)론이었다 할 수 있다.
역대 독재정권은 이러한 비판을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음에도) ‘이적’ ‘용공’ ‘친북’으로 몰아(=조작하여) 탄압해왔다. 이들이 통치체제를 비판하면서 주장하고 있는 통일이란 결국 대치하고 있는 적의 편에 동조하는 통일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체제의 차이만 있을 뿐 남과 북에서 동형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분단체제란 이러한 분단체제 비판세력을 식량으로 먹어치우면서, 즉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탄압하면서 자신의 몸체를 괴물처럼 더욱 키워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독재정권이 비판세력을 ‘적’으로 상정하고 탄압하는 한, 극악한 탄압을 당하는 비판세력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독재정권을 ‘적’으로 상정하고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독재정권은 비판세력이 자신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이적단체’에 불과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강변해왔다. 이로써 상호를 적으로 간주하여 투쟁하는 상승적 순환 구조가 남과 북의 정권 사이에서, 그리고 남 내부와 북 내부 각각에서 형성되고 교차하면서 가속도를 얻어 작동한다.
이러한 악순환의 상승압이 ‘마의 순환고리’와 ‘비상국가체제’의 에너지원이 되었고, 87년 이후에도 30년 가까이 이러한 상승적 악순환은 끊기지 않았다. 이제 촛불혁명이 그 악순환을 비로소 끊어낼 기회를 주고 있다. 그 핵심은 양국체제의 정립에 있다. 민주정부 시기 10년의 대북 화해정책 역시 그러한 상승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했다.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오히려 반발세력의 강한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이들 반대세력은 민주정부의 남북화해정책을 친북적 분단체제 종식 운동으로 간주하면서 이에 맞서는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분단체제론의 담론 구조 안에서는 남북의 어느 정치세력이든 당면 목표로 분단 종식 즉 통일을 앞세울 때 (또는 그렇다고 간주될 때) 분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통일인가, 누구를 위한 통일인가 매우 복잡하고 갈등적인 논란이 시작되고 이러한 상황 자체가 적대의 상승적 악순환을 부채질하게 된다.
이렇듯 작동하는 분단체제의 순환적 상승압은 비상국가체제를 강화시켜 사회 전반의 정상화를 결정적으로 가로막아 왔다. 그런 비정상의 장기지속의 결과가 이번 촛불집회에서 적시된 ‘적폐’일 것이고, 그 적폐를 청산해 갈 핵심고리가 양국체제 정착이 될 것이다. 비상국가체제의 역사가 길었던 만큼 적폐청산의 리스트도 길다. 그러나 리스트가 길어질수록 무엇이 핵심목표인지 모호해질 수 있다. 오래 겹겹이 누적된 폐단이 단칼에 모두 해결될 리는 만무하다. 증상의 노드를 찾고 그 노드들의 핵심노드를 찾아 순차적으로 힘을 집중할 때 적폐청산의 과제도 점차 해결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양국체제 정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소멸 또는 부재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결국 우파 흡수통일론이 우세한 여론 장(場)을 말하고, 그 핵심에는 한국전쟁 시의 ‘미완의 북진통일’을 완수하자는 생각이 있다. 이 역시 분단체제론의 일종, 즉 우파 주도의 분단체제 종식론(=통일론)이라 할 수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해소는 이번 촛불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과인데, ‘정상상태’란 기울어진 비정상이 기울어짐 없는 정상으로 회복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기울어짐 없는 정상상태란 분단체제적 사고관습으로부터의 탈피를 전제한다. 분단체제론의 인식장에는 반드시 좌와 우의 기울기가 있기 때문에 그 운동장은 좌로든 우로든 기울게 되고, 그러한 기울어짐은 반드시 상호적대의 순환적 상승압을 고조시킨다. 두 번의 ’마의 순환고리‘의 작동, 지난 60년의 한국정치사가 그렇게 작동해왔다. 이러한 악순환은 양국체제가 안정적으로 정립될 때야만이 근본에서 끊을 수 있다.
촛불혁명 이후의 현재 상황에서 양국체제 정립을 주도할 일차적 힘은 대한민국에 있고 그 최대의 수혜자도 대한민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양국체제의 정립으로 비상국가체제의 비정상을 종식시켜 정상상태에 이를 때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대한민국의 민주적 동력은 만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측 역시 생존의 강박에서 벗어나 정상적 내부개혁의 경로를 차분히 개발해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렇듯 상호 적대와 긴박한 생존의 강박에서 벗어날 때 남북이 협력하여 공영을 모색할 수 있는 영역은 오히려 넓게 열릴 수 있다. 한반도의 억압되어 왔던 잠재력이 해방되어 다극구도 상황에서 유라시아와 태평양으로, 세계로 힘차게 펼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양국체제론에 대해 예상되는 반대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반통일론, 분단고착화론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분단체제 비판론 중에서도 강경한 입장에서 제기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반대편에서의 비판인데 ‘북한’을 절대로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또 다른 강경론이다. 이 입장은 북한 정권 타도를 전제로 한 흡수통일을 주장한다. 이 두 입장은 극과 극의 반대로 보이지만 한반도 두 국가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뒤집어져 있을 뿐 구조적 동형이다. 양국체제가 평화통일의 전망을 실제적으로 열어준다는 점이 잘 설득된다면 이러한 반대들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겠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입장은 이번 촛불정국에서 등장한 ‘태극기-성조기 집회’와 중첩되는 것으로 이후 양국체제론에 대한 적극적 반대 집단으로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촛불정국에서 보았듯 이 집단의 여론 확장력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아울러 이러한 두 입장을 강경하게 견지하는 층은 양적으로 그다지 크지 않고 세대적으로 점차 축소되어 가는 추세다. 젊은 층일수록 이러한 입장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양국체제의 편에 있다.
양국체제론은 우선 대한민국에서 진보보수를 떠나 합리적 다수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크게 완화함으로써 한국의 경제적·문화적 활로 개척에 큰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사라지고 일베식 보수가 크게 위축된 여건은 양국체제 정립을 위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흔치 않은 역사적 기회를 주고 있다. 관련 헌법 조항(3,4조) 개정 등을 포함한 적절한 절차를 통해 국민적 합의를 이룬 후 이 합의를 북측(조선)과 주변국으로 확장해감으로써 한국은 동아시아-태평양 평화정착의 주요 행위자로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이러한 이니셔티브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설 명분이 어떤 주변국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북측 역시 이러한 대한민국의 국민적 합의에 굳이 반대하고 나설 이유가 없을 것이다.
분단체제에서는 남북이 서로 적대할 수밖에 없다. 반면 양국체제에서는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한다. 양국체제란 1민족, 2국가(one nation, two states) 상태를 말한다. 양국체제에서 양국관계의 제도적 디테일은 별도의 글이 필요한 큰 주제다. 분명한 것은 그 동안 진보·보수 양측에서 통일로 가는 중간 형태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어 왔던 여러 종류의 1국가 2체제론과 분명한 선을 긋는다. 어떤 취지에서든 1국가를 전제하는 한 분단체제적 긴장은 존속된다. 양국체제는 2국가 체제다. 이 점이 제1원칙이고 통일을 전제로 하는 논의는 오히려 괄호 안에 넣는다.
이 상태로 진입해야 주변국과 얽힌 긴장과 마찰의 매듭도 풀 수 있다. 정부와 민간을 막론하고 진보·보수를 불문하고 영향력 있는 여론주도자들은 통일에 대한 미사여구를 풀어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통일을 정말 진지하고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순서는 반대임을 알아야 한다. 통일보다는 상호인정과 평화공존이 우선이다. 통일을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한 현실의 긴장과 대립은 오히려 격화된다. 단추를 거꾸로 채울 수는 없다. 상호인정과 평화공존을 우선 과제로 명확히 설정하고 흔들림 없이 이 목표에 충실할 때, 통일은 비로소 어느 날 현실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양국체제는 그저 ‘대북 정책’에 그치지 않는다.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의 체제전환>은 ‘촛불혁명’이 진정 혁명이었음을 입증하는 최종 증거가 될 것이다. 그 동안의 분단체제의 현실이야말로 총체적 비정상의 근원이었다. 촛불이 제기한 ‘적폐청산’ 역시 양국체제 정립을 분명한 목표로 할 때 제대로 순서와 방향을 잡아 차근차근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6. 결론
2016~2017년에 걸쳐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출범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촛불혁명’이라 불리어 온 거대하고 평화로웠던 대중행동이 진정 ‘혁명’의 이름에 부합하는 결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체제(앙시앙 레짐)에서 새로운 체제로의 ‘체제변화’를 수반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한국사회가 이루어야 할 그러한 ‘체제변화’를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의 이행’으로 집약해 보았다.
이러한 체제변화는 한국현대사에서 적대적 분단 상황이 강요해왔던 ‘비상국가체제’를 종식시키고, 4·19, 87년 민주항쟁과 같은 거대한 민주적 열망의 분출을 독재체제로 반복적으로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를 구조적으로 끊어내, 한국사회를 새로운 질적 단계로 접어들게 할 것이다. ‘분단체제’가 남북이 서로 상대의 주권과 존재를 부정하고 적대적 긴장을 고조시킴으로써 항시적 비상상태의 ‘비정상’을 영구화시켜온 반면, 양국체제에서는 남북이 서로의 주권과 존재를 인정하여 이러한 항구적 비상상태의 근거를 해소함으로써 양국 모두가 ‘정상상태(normal state)’로 진입해갈 조건을 조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7년 10월 현재까지 촛불혁명의 진로에 조성되었던 가장 심각한 장애는 지난 9월 3일 북한의 6차 고강도 핵심험 이후 활발해지고 있는 남북대결세력의 재결집 현상이다. 이 글에서 분석한 ‘마의 순환고리’가 또 다시 작동을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좌라 할 수 있다. 또한 남북 간 긴장요인을 최소화시키는 양국체제 정립이 이러한 순환고리의 작동을 근본에서 끊는 길이며 이를 통해서만 촛불은 혁명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이 글의 논지를 역으로 입증해주고 있는 현상이라 하겠다.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 인류 역사를 보편적으로 관통하는 민주적 뿌리와 그것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 「맹자의 땀, 성왕의 피」(2016), 「미지의 민주주의」(2011) 등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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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이네요. 시대를 넘어 더 나은 세상의 열림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이 담론을 내어 외치는 자의 소리들이 될 때 시대는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겠죠.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됩니다
박정희 신드룸, 환상적인 신격화, 이를 잊지 못하는
세대들로 하여금 무뇌아적인 그의 딸을 앞세워
권력을 거머쥐고 부를 축적해 온 친박 친일 군부
세력들, 이젠 끈 떨어진 신세되고 더 이상 그 환상들을
이어가 줄 제3의 인물은 없는 듯 하네요
문제인 정부를 필두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고
나라다운 나라로 쭈욱 이어 가도록 깨어있는 국민들이
지켜 내야지요 세계화 되어가는 더 큰 그림은 위정자
들이 잘 그려내 주리라 믿습니다 북한과의 관계설정도
서서히 자리를 잘 잡아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