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1. 강남역 살인사건
얼마전 강남역에서 젊은 여성이 살해당했다. 범인은 20대 남자.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싫어서 앙심을 품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미디어는 해당 남성이 조현병을 앓고 있었으며, 담배 꽁초를 던진 여성이 직접적인 범행의 계기가 되었다고 가해자를 두둔하기 바빴다.
이에 대해 여혐 반대를 기치로 내 건 메갈리아(Megalia) 등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강남역에서 집회를 열었으며 이것이 여성혐오에 기초한 범죄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사건 2. 소라넷과 ‘골뱅이’
소라넷은 일명 ‘골뱅이’라 불리는 인사불성의 여성을 함께 강간하는 일이 모의되고 실행되는 사이트. 해당 여성의 남자친구나 남편 등이 ‘초대남’ 혹은 ‘초대남편’이라는 이름으로 해당사이트 유저 남성들을 불러모아, 수 년 간 그 수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성들에게 강간을 해 왔다.
메갈리아 등을 위시한 여성들이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고, 경찰은 마지 못해 수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소라넷 폐쇄라는 성과를 이끌어 냈으며 소라넷 운영자가 구속직전이라는 뉴스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10월 중으로 재오픈한다는 또 다른 뉴스가 들려오고 있다.
#사건 3. 만연된 몰카(몰래 카메라) 범죄
화장실과 탈의실, 언제부터인가 여성들이 옷을 벗는 곳에서는 온갖 몰카 범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올림픽 대표였던 수영선수마저 선수촌에서 동일한 범죄를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메갈리아를 중심으로 여성들은 몰카 반대, 여혐 중지를 위한 스티커 붙이기 등 각종 캠페인을 시작했고, 덕분에 이전의 ‘몰카를 조심하라’는 피해자 책임 전가형 문구 대신 ‘몰카는 범죄입니다라’는 가해자 각성 촉구형 문구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여성을 향한 폭력들
여성혐오(이하 여혐), 미소지니(misogyny), 바야흐로 21세기 한국의 초상이다. 여혐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최근 들어 여혐의 사건 사고들은 더욱 더 기승을 부리는 듯하다.
아울러 이에 대한 여성들의 충격과 반발, 염오 역시 깊어지는 듯한데, 이러한 작금의 상황은 그간 수면 아래 있었떤 여혐의 문제가 사회 일반의 의식적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는 징후라 할 것이다.
여혐이 공적인 아젠다가 될수록 이로부터 여혐과 그 해악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활발해질 수 있을 테니, 이는 차라리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희망이다. 쉽게 낙관하기에는 여혐의 역사와 뿌리가 너무도 공고하거니와, 이것이 과연 여혐 척결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을지 말지는 바로 지금부터이다.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가 작금의 시점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 책은 2012년 번역 출간되었으나 최근 앞서 말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올들어 더욱 주목을 받게 된 감이 없지 않다. 바야흐로 한국은 지금 여혐과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여성혐오 사회의 등장
우에노 치즈코는 일본에서 여성, 돌봄, 가족 등에 천착해 온 페미니스트 사회학자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브 세지윅(Eve Kosofsky Sedgwick)의 주요 개념과 이론적 틀을 차용해 여혐 사회 일본을 해부한다.
여혐 사회란 말 그대로 여성에 대한 혐오가 만연된 사회를 말한다. 즉 남성은 이를 ‘여성에 대한 멸시’로, 여성은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로 체험하게 되며, 따라서 여혐 사회에서는 누구도 여혐으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짐작하다시피, 여성혐오 사회는 근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은 자신들만의 호모소셜(homosocial)한 연대(남성간 유대)를 기초로, 여성과 동성애자를 배제하고 멸시한다. 이 사회에서는 남성성만이 유일하고 보편적인 기준이 되며, 여성과 여성성, 여성적인 모든 것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남성들은 여성을 두 가지 상반되는 대립적 범주, 즉 정결한 성녀(성모 마리아)와 유혹하는 창녀(막달라 마리아)로 이분화한다. 이 때 성녀는 가부장제가 보호하고 할 현모양처이자 욕망이 거세된 정녀(靜女)로서, 반대로 창녀는 가부장제 바깥에서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위한 배설구로서 표상된다.
따라서 ‘여자를 지켜주겠다’는 순정남들이나 ‘바람둥이’라 불리는 남자들이나 어느 쪽이건 실은 적극적으로 여혐을 체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여성을 고유한 한 인격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 하기에, 자신들을 구원해줄 이상향이나 성욕의 배설구로서 이해할 뿐이다. 곧 전자는 여성을 숭배함으로써, 후자는 멸시함으로써 타자화한다.
이러한 여성상 어디에도 여성은 없거니와, 여혐사회에서는 남성이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여성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남성은 결코 여성을 알지도 이해하지 못하며, 여성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엄마처럼 살지마”
여성들 역시 여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딸은 가부장제 하의 희생양인 어머니를 보면서 자라며, 어머니의 자기혐오를 물려받게 된다. 어머니는 딸의 ‘여자 같은 부분’을 증오함으로써 딸에게 자기혐오를 심어준다.
‘짧은 치마 입지 마라’, ‘늦게 돌아다니지 마라’, 여혐 사회에서 딸을 보호하기 위한 어머니의 모든 말들은 기실 딸에게 자기혐오를 촉발시킨다.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의 모든 딸들은 어머니로부터 멀어지려 하나, 안타깝게도 지난 날 여성들의 역사는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가까운 기획이라는 것을 예증한다.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은 어떤 딸들은 적극적으로 아버지 동일시 전략을 취하게 되는데, 즉 이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남성이 되고 싶어 한다. 경제성장에 힘입은 고학력 여성들은 열등한 여성성을 탈피하여 아버지의 딸로서 가정 내에 갇힌 삶이 아닌 자아실현의 사회적 삶을 살고자 한다.
이른 바 ‘명예남성’으로 불리는 이들은 자신을 다른 여자들과 다른 ‘특권적 예외’로 설정하고 출세에 골몰한다. 그 결과 이들은 필연적으로 여자의 적이 되거니와, 이는 남성 기득권의 유구한 지배 전략 ‘분할하여 지배하라(divide and rule)’가 적용된 또 다른 예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들 명예남성들의 출세 전략은 여성 혐오를 확대 강화하게 될 것이며, 명예남성들 자신은 상징적 남근의 획득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딸이 된 딸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자신이 딸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바랐으나, 막상 아버지의 딸이 된 딸을 보며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딸이 가부장제의 노예로 살지 않도록 딸의 교육과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는 정작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딸의 성공 앞에서 기쁨과 질투를 동시에 경험한다.
딸이 어머니가 인정할 만큼 훌륭한, 그러니까 여혐이 덜하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신랑감을 골라 결혼할 경우에도 이러한 양가적(ambivalent) 감정은 다르지 않다. 이 경우에도 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딸이지 자신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적으로 성공까지 한 딸 역시 가부장제 속으로 편입된다는 사실 앞에서 좌절한다.
아울러 그러한 딸을 질투하면서 동시에 질투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되거니와, 딸이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어머니는 질투와 비참, 우울과 죄책감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여혐사회에서 딸과 어머니의 화해는 이토록 지난하다, 이보다 더 완벽한 지배전략이라니!
근본주의적 설명의 한계와 대안적 실천의 가능성
이상의 내용들은 이미 페미니스트인 이들에게는 그리 낯선 이야기들이 아니다. 메리 울스튼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에서부터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 베티 프리단(Betty Freidan),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의 역사는 1세대, 2세대를 넘어 3세대에 이르고 있다.
특히 어머니와 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을 비롯한 여성주의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서 논의되어 왔는데, 프로이트와 달리 이들은 오히려 초기 대상관계 형성에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근원적임을 강조한다.
우에노의 논의는 미국의 페미니즘 비평가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의 이론적 틀을 그대로 가져왔기에 그의 한계 역시 고스란히 답습한다.
일찍이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이 남근을 선험적 기의로 파악함으로써 오히려 상상의 가능성과 변화의 단초를 봉쇄하였다고 비판했다. 마찬가지로 우에노 역시 라캉의 ‘욕망의 삼각형’을 차용함으로써 여혐사회의 선험성을 확증한다. 이러한 구조주의적 구도에서는 남성성에 종속되지 않는 여성적인 것의 발견이나 여성의 권능화(empowerment)를 개념화하기 어렵다.
즉 여성이나 여성성을 남성이나 남성성의 이항 대립항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상상하기 위해서는, 남근이성중심주의에 갇히지 않는, 그것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이론적 틀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뤼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와 엘렌 식수(Helene Cixous)는 남근과 남성성에서 출발하지 않는 여성적 주이상스(Feminine Jouissance)와 여성적 글쓰기 등을 논의해 왔으며,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는 보봐르의 언명을 한층 발전시켜 젠더란 어디까지나 수행에 기초하며 그것을 통해 창조되는 것임을 명시하였다.
이들의 엄밀한 이론적 지향과 입장은 각기 다를 수 있겠으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의식이 있다면 여성/여성성이, 남성/남성성과 마찬가지로, 발명품(invention)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남근이성중심주의를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그 강팍함에 지속적으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그리고 실천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여성/여성성을 상상하고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투쟁과 마찬가지로 패배주의를 넘어 언제나 지치지 않고 즐거이 희망을 좇을 때,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려줄 것이다.
다른 관계, 다른 공동체가 소중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규정하지 않는 다른 여성과 여성성을, 관계 와 공동체 속에서 상상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세상은 딱 그만큼 달라질 수 있다.
성적소수자(LGBT)와 동성애자 부부, 1인 가구와 비혼 가정, 이 모든 이질적 성정체성들과 공동체를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 이들이야말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넘어, 새로운 섹슈얼리티와 공동체의 땅으로 우리를 안내할 최전선의 척후병이기 때문이다.
여혐과 동성애를 둘러싼 오늘날 한국사회의 소란과 불화는, 그러므로 더욱 시끄러워야 하고 더욱 첨예해야 한다. 갈등과 투쟁 없이, 대안과 공존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 소란과 불화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의 삼각형에 금이 갈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 했던, 그러나 언제나 바라왔던 그 곳으로 탈주할 수 있을 것이다.
OO녀…여성에 투사된 좌절된 수컷들의 욕망
이 책은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통해 일본사회를 미시적으로 들여다 보고 있다. 일찍이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모든 사회가 일본화되어 갈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이는 후기자본주의 일본 사회가 가진 모든 모순들이 자본주의의 궤도를 따라가는 여타의 사회에서도 발견되리라는 것을 말한다.
이 책 속에서 분석된 여혐 현상들은 상당 부분 오늘날의 한국사회에도 발견될 수 있는 대목들이기에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여사, 된장녀, 맘충,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각종 여성혐오적 언어들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요약한다.
경제상황의 악화와 더불어 이전 시기 가부장들이 누리던 권력을 누리지 못하게 된 루저 남성들이 그 분노를 여성에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 최근 한국 사회 여혐 범죄의 근본적 배경이라 할 것인데, 일자리가 없기에 결혼이나 출산, 가정은 꿈도 꿀 수 없게 된 남성들이 그 분노와 좌절을 엉뚱하게도 가장 약한 고리인 여성을 향해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은 OECD 기준 여성의 임금이 남성의 70퍼센트를 넘지 못하며, 경제 위기에서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는 것은 남성이 아닌 여성들이다. 가사노동과 생계를 동시에 책임지는 여성가장은 언제나 남성 가장 못지않게 많았으며, 경제 위기에 가장 먼저 퇴출되는 고학력 여성들(이른 바 경단녀, 곧 경력단절녀)’이다.
일자리를 가진 사회적 여성들은 직장 노동과 가사노동의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 절대적 노동의 양은 오히려 남성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다. 가부장제의 바람막이 없이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비혼모’의 현실에서 언제나 비난받아야 했던 것은 ‘행실이 나쁜’ 여성들이었으며, ‘도망간 아내’들이 처한 현실은 언제나 간과된 채 모성이 결핍된 존재로서 마녀사냥 당했다.
남성도 굴레를 벗어야 할 때
남성들이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브레드 위너(bread winner)로서의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하게 된 것도, 그 결과 ‘전원결혼사회’를 뒤로 하게 된 것도, 그 어느 쪽도 여성들의 탓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지금껏 남성들이 주도해 온 이 사회가 자본의 탐욕을 우선시하며 어떠한 사회적 안전망도 확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남성들 자신이 이를 수수방관한 채 그 이익만을 먼저 그리고 앞서 누리려 했기 때문이다.
월급을 빌미 삼아 가정 내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려 했기 때문이며, 가사노동과 육아로부터 스스로를 면책시켰기 때문이며, 가부장제의 모순을 외면하고 여성을 동등한 인간이 아닌 사적 소유물로 좌지우지하려 해 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모순을 개혁하려 하기보다 그 안에서 편하고자 했고, 세상의 절반 여성을 사회적 장면에서 배제하려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숱한 ‘◯◯녀’ 사전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 남성들이여,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마냥 남성연대를 만들고, 역차별이라며 옹색한 항변을 꺼내들기 이전에 부디 무엇이 진정 문제인지 돌아보길 바란다.
남성들에게만 짐지워져 왔다고 주장하는 가장의 무게나 사회생활의 고단함은, 여성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의도한 결과일 뿐이다. 이제라도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여성에게 더 많은 몫과 자리를 허락한다면, 당신들만이 생계를 책임져야 할 일도 가정으로부터 소외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부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해를 멈추기 바란다. 남성과 여성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해 가든가, 아니면 지난날의 뒤틀린 영광에 사로잡혀 자위하든가, 이제 당신들이 선택할 차례이다.
오늘날 남성들에게 주어진 영광된 역사적 과제는 남근성과 마초성에서 탈피해 여성을 발견하고 여성과 만날 수 있는 남성성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일일 것이다. 언제나 당신들을 사랑하고자 해 왔던 애처로운, 그러나 꿋꿋한 여성들은 그 길의 초입에 미리 당도해 손 내밀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역자 나일등은 도쿄대에서 우에노에게 직접 배운 제자이다. 페미니즘과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기초지식만 있어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사례가 풍부해 읽는 재미가 있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소한 일본 사례들이 읽기를 더디게 할 수도 있다.
독자 편의를 위해서 인용된 문헌들의 자세한 서지사항을 생략한 것이 좀 아쉽다. 이 책의 이론적 근간이 된 이브 세지윅의 서지조차 누락된 것은 특히 그러하다. 해당 서적은 Sedgwick, E. K.(1993). Between Men: English Literature and Male Homosocial Desire. Columbia Univ. Press. 인 것으로 확인된다.
순천제일대학교 교수. 서울대에서 교육인류학으로 석박사 학위 받음. 삶과 교육, 학교 그리고 여성에 대해 관심. 학력주의와 학벌주의가 우리를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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