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을 입은 한 성인 여성이 힘차게 성큼성큼 걷고 있는 옆모습이 보인다. 옆의 흰 벽에는 그림자가 비치는데 이 여성의 그림자는 아닌 것 같다. 키가 훨씬 작다. 그림자는 짧은 고수머리를 뒤로 묶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 대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해 11월 8일 소셜미디어에서는 이 이미지가 이슈가 됐다. 성인 여성은 미국 역사상 첫 ‘흑인·여성’ 부통령으로 당선된 카멀라 해리스다. 그림자 소녀는 미국 흑인 민권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루비 브리지스다. 1960년 여섯 살 소녀이던 루비는 백인들만 다니던 학교에 맨 처음 등교한 흑인 학생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브리아 골러가 만든 이 이미지는 해리스 당선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First. First. First.”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워싱턴포스트의 정치평론가 로빈 깁핸은 “역사는 항상 바로 거기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며 이렇게 감격을 표현했다. ‘최초(First)’라는 표현을 세 번 쓴 것은 여성이자 흑인, 그리고 아시아계(인도)로서 각각 최초로 부통령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3중의 장벽을 한꺼번에 무너뜨린 셈이다.
트럼프인가 아닌가, 지난 미 대선이 온통 거기에 쏠려 있는 동안 해리스는 조용히 부상했다. “그것(해리스의 당선)이 도래했을 때 체제에는 비명 섞인 충격이 나오지 않았다. 체제는 솔직히 말해 무감각했다.”(깁핸) 바이든의 승리가 확정되자 미국은 바이든보다는 오히려 부통령 당선인에 기대를 하는 모습이다. 대통령보다 부통령 당신이 더 의미 있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미국 언론 폴리티코는 “조 바이든 당선자의 승리가 알려진 날, 소셜미디어엔 (대통령 당선자보다) 그의 러닝메이트에 대해 더 흥분한 사람들의 열기가 분출됐다”고 전했다.
해리스는 당선이 확정되자 대선 승리를 알리는 연설에 하얀색 바지 정장에 ‘푸시 보’(pussy bow) 차림으로 등장했다. 흰색은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권 운동을 벌인 여성 운동가 ‘서프러제트’를 상징하는 색이다. 푸시 보는 상의 목둘레에 커다란 리본을 묶는 패션을 통칭하는 말로, ‘여성의 타이’로 불린다. 여성들이 당당한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연출할 때 썼던 액세서리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다. 해리스는 승리 연설에서 “흑인, 아시아계, 백인, 라틴계,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세대들이 이 순간을 위한 길을 닦아왔다”며 “그들은 우리 민주주의의 중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고 했다.
혼란 끝에 흑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
해리스는 196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샤말란 고팔란은 인도 출신으로 19세에 UC 버클리대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미국에 정착했다. 아버지 도널드 해리스는 자메이카 출신으로 역시 UC 버클리대 유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원생 시절 만나 결혼했다. 두 사람 모두 이민자 출신이었지만 인정받는 학자였다. 해리스의 아버지는 흑인으로는 최초로 스탠퍼드대 경제학부에서 정년을 보장받은 교수였다. 어머니는 유방암 전문가로 암 연구자였다.
어린 시절 해리스는 인종차별을 몸으로 겪으며 자랐다. 버클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버싱(busing)’ 정책이 시행됐다. 버싱 정책이란 1954년 미연방대법원이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는 위헌’이라는 판결(브라운 대 교육위원회)을 내놨음에도 여전히 주거지에 따라 같은 인종끼리 학교를 다니는 일이 굳어지자 나온 방안이다. 흑인 거주지 학군과 백인 거주지 학군 사이에 버스를 이용해 학생들을 서로 상대 학군의 학교로 보내서 섞이도록 한 것이다.
해리스가 들어간 반은 이 정책에 따라 생긴 두 번째 학급이었다. 시행 초기 도끼눈을 치켜뜬 사람들 사이에서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백인들이 주로 사는 부유한 동네의 초등학교로 등교를 해야 했던 해리스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해리스는 훗날 “리버럴한 버클리에서도 대법원의 명령을 이행하는데 20년이 걸렸다”고 회고했다.
해리스가 5살 무렵 부모는 별거에 들어갔고, 7살 때 이혼했다. 주말에 아버지가 있는 팔로알토로 놀러갔을 때 흑인이기 때문에 이웃 아이들과 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했고 맥길 대학병원에서 유방암 연구원으로 일하게 됐다. 어머니와 살게 된 해리스는 고교 시절을 여기서 보냈다. 백인이 대부분이고, 프랑스어가 주류인 지역에서 느꼈을 소외감과 차별감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과학자였지만 쇼핑을 하러 가면 가정부로 오인받기도 했다.
백인 위주의 환경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해리스는 ‘흑인들의 하버드대’라고 불리는 명문 하워드대에 진학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역사적으로 흑인을 위한 대학으로 설립됐으며 흑인 엘리트들이 선호하고 대다수의 학생이 흑인인 학교에서 그는 새롭게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했다. 해리스는 “하워드는 나의 존재에 대해, 또 그 의미와 이유에 대해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밝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하워드대는 변호사 시절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의 승소를 이끌어냈고 훗날 최초의 흑인 연방 대법관이 된 서굿 마셜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런 점이 대학 선택에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
해리스는 하워드대에서 정치·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은 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 헤이스팅스대 로스쿨을 마쳤다. 1994년에는 캘리포니아주 앨러미다 카운티의 지방검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998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지방 검사장인 테런스 할리난의 제안을 받아 그곳에서 지방검사로 근무하게 된다. 해리스는 형사부에서 일하면서 살인, 성범죄, 폭행, 음주운전 등의 사건을 주로 맡았다.
선출직에의 첫 도전은 2003년 샌프란시스코 지방 검사장 선거였다. 해리스는 자신을 영입했던 테런스 할리난을 상대로 검사장에 도전했다. 선거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 시장을 지낸 윌리 브라운과 해리스의 관계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1994년 윌리 브라운이 캘리포니아주 의회 의장이었던 시절 해리스와 연인 사이였고, 브라운이 주 실업보험항소위원 자리 등을 해리스에게 제공하면서 고액의 연봉을 받게 해 줬다는 것이었다. 여성에 대한 전형적인 공격이었지만, 해리스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반대자들은 내 자신의 노력은 전혀 없는 것처럼, 내가 누군가의 창조물이라는 외설적인 이야기를 선택했다”고 맞받았다.
해리스는 검사장 선거운동 때부터 절대 사형을 구형하지 않겠다고 공약했다. 검사장 취임 후 2004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경찰관이 총에 맞아 살해당한 뒤에도 사형을 구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민주당 출신 상원의원들조차 해리스가 사형에 반대하는 걸 알았더라면 검사장 선거에서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럼에도 해리스는 꿋꿋이 신념을 지켰다.
그러나 훗날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이 된 이후 이 신념을 뒤집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오렌지카운티 소재 연방지방법원은 2014년 캘리포니아주의 사형 제도가 실제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면서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지연된다며(1978년 이후 사형 선고 800명 중 13명만 집행) 잔혹하고 통상적이지 않은 처벌을 금지한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이에 해리스가 항소하겠다고 밝혀 얼핏 사형제를 옹호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항소법원은 해리스의 손을 들어줬다.
해리스는 범죄자를 교도소에 보내는 것보다 직업 훈련, 정신건강 치료, 약물 재활 등의 범죄예방 프로그램이 더 중요하다고 오랫동안 강조해 왔다. 해리스는 자신의 책에서 “범죄 근절을 위한 강력한 처벌”과 “초범에게 필요한 관용과 지원”이 서로 모순되는 목표가 아니라고 밝혔다. 동시에 추구해야 하고 또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는 것이다. 해리스는 실제 검사장 시절 경범죄 초범들에게 무사히 교육을 마치면 범죄 기록을 없애주는 ‘궤도 재진입(back on track)’ 제도를 실시했다. 이 제도로 50%에 달하던 경범죄자의 재범률을 10%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해리스는 ‘경찰의 안전’과 ‘피의자의 안전’ 같은 상호 모순된 가치에 대해서도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정책과 교육으로 지원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해리스는 2010년에는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에 출마해 선출됐다.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으로서는 최초의 여성·흑인이었다. 2016년에는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에 선출됐다. 역시 캘리포니아 최초의 여성·흑인 상원의원이었다. 미국 전체를 통틀어서도 두 번째 여성·흑인 연방 상원의원이기도 했다.
워싱턴 정가에서 해리스는 ‘전사’로 자리매김했다. 2018년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청문회 때 보수 대법관 후보를 몰아붙이는 송곳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지난 대선에서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지난해 6월 경선 1차 TV토론에서는 조 바이든을 향해 ‘버싱’ 정책 반대에 협력했다며 공격해 바이든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해리스는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매일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던 작은 소녀가 인종차별로 상처를 입었고, 그 소녀가 바로 나”라고 몰아붙였다. 순간 지지율도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갔다.
존재만으로도 가능성을 보여준 해리스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중도 사퇴했지만 바이든은 경선 승리 이후 해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유색인종으로서 해리스의 강점이 부각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한 지명도를 가진 여성이자 유색인종 후보군은 찾기 어렵기도 했다.
해리스는 부통령 후보 지명 이후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토론회에서 시시때때로 말 중간에 끼어드는 펜스를 향해 “부통령님, 내가 말하고 있잖아요”라고 단호하게 대처했다. 지지자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유세 기간에는 검은색 스키니진과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나와 춤을 추는 등 틀을 깨는 행보로 화제를 모았다. 해리스는 49세에 결혼했는데, 남편인 더그 엠호프 변호사는 선거 기간 부통령 후보의 남편으로서 ‘이해충돌’이 발생하지 않게 변호사 업무를 휴직하고 아내를 지원했다.
해리스는 유세 시간 동안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때는 자신의 가족들을 소개하면서 ‘치티스(여성 가족구성원을 소개하는 인디언 언어)’라는 단어를 사용해 인디언들로부터 큰 갈채를 받았다. 선거에는 불리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공격이 나왔다. 반대편에서는 해리스를 ‘성난 흑인 여성’이라는 전형적인 이미지에 가두려고 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성난’ ‘고약한’ ‘끔찍한’ 등의 수식어로 해리스를 표현했다. “흑인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괜찮겠냐?”며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카멀라의 이름을 갖고도 말이 나왔다. 카멀라는 인도식 이름으로 ‘연꽃’을 뜻하지만 미국식으로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데이비드 퍼듀 상원의원은 트럼프 지지 연설에서 “카-말라, 카-마-라, 카멀라 멀라 멀라”라며 여러 차례 해리스의 이름을 발음하며 조롱했다.
흑인·여성·아시아계의 고위직 진출이 구조적 문제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지만, 해리스는 존재만으로도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의 입법정보 공유사이트인 고브트랙(GovTrack)은 해리스를 두고 “100명의 상원의원 중 가장 진보적인 의원”이라고 평가했다. 해리스는 임신중단, 마리화나 합법화, 더 엄격한 총기규제에 찬성한다. 이민자들에게는 더 관대한 정책을 약속했다. 플로이드 사건 이후에는 흑인 차별 문제와 경찰개혁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환경 규제 강화도 주장했다.
반면 의료보험에 대한 태도는 불분명하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내놓은 ‘메디케어 포 올(전 국민 단일 의료보험)’에 서명한 민주당 의원 중 한 명이었지만, 대선경선 초기 이를 철회했다. 주 법무장관 시절, 경찰의 민간인 총격 사건 처리에서도 소극적인 대응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친밀해 기술 산업 규제에도 소극적이란 지적도 나온다.
“조, 우리가 해냈어요.” 해리스는 당선 확정 직후 조 바이든 당선자와 감격의 통화를 나누는 장면을 트위터로 전했다. “저는 첫 여성 부통령이 되겠지만, 제가 마지막은 아닐 겁니다. 오늘 밤 모든 소녀들이, 이 나라가 가능성의 나라임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리스 당선자는 당선을 알리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그의 어머니가 “네가 가는 길이 최초가 되더라도, 마지막이 되게 하지 말라”며 생전에 딸에게 강조한 말이기도 했다.
해리스는 역대 그 누구보다 강한 ‘실세 부통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인은 77세의 고령임을 감안하면 재선에 도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해리스가 부통령이 된 후 능력을 인정받으면 현직 프리미엄으로 2024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강력한 대선후보로 나설 수 있다. 바이든 당선인이 해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가능성’이라는 말을 언급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4년 뒤 해리스는 어떤 모습으로 유권자 앞에 서게 될까.
참고자료
[워싱턴포스트 2020.11.7.] Kamala Harris made history with quiet, exquisite power
[LA타임스 2015.9.30.] How race helped shape the politics of Senate candidate Kamala Harris
[경향신문 2020.11.9.] 카멀라 해리스의 그림자 속 그 소녀, 루비 브리지스
[경향신문 2020.11.9.] 해리스 부통령 당선자가 하얀색 정장을 입은 이유
[경향신문 2020.11.11.] 4년 후, 카멀라 해리스와 미셸 오바마가 겨룬다면
[경향신문 2020.11.13.] 정은진의 샌프란시스코 책갈피 – ‘잘못된 선택지’를 거부해온 해리스, 그 경험과 지혜로 좋은 부통령 기대
[경향신문 2020.11.8.] 미국 부통령 당선 카멀라 해리스는 누구
[경향신문 2020.11.8.] 미국 정치의 얼굴을 바꿀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
[한국일보 2020.11.8.] 유리천장 깨부순 ‘최초’ 신화… 2인자 해리스는 누구
[연합뉴스 2020.8.12.] 백인들 틈바구니서 설움 겪던 소녀…’여자 오바마’로 뜨다
[피렌체의 식탁 2020.8.21.] 유정훈 칼럼 – 바이든의 ‘승부수’ 카멀라 해리스…그가 상징하는 미국의 ‘possibilities’
[연합뉴스 2020.8.22.]딸이 부통령 후보됐는데…멀리서 지켜만 본 해리스 아버지
[뉴시스 2020.8.12.] 해리스, ‘인종 정의’ 앞장…의료보험·기업정책 오락가락 행보도
황경상
경향신문 미래기획팀 기자. 사회부, 문화부, 정치부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미디어 환경 변화에 발맞춘 새로운 콘텐츠를 고민하고 있다.
후원으로 다른백년과 함께 해 주세요.
Hello to every body, it’s my first pay a quick visit of this blog; this website includes remarkable and actually
good material for visito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