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체제론은 어떻게 생각할까? 2017년 말~2018년 초 ‘창비담론 아카데미’ 모임은 필자가 제안한 ‘양국체제론’에 대해 길게 언급하면서 “갑자기 어느 날 만들자는 것” 같아 보인다고 비판한 바 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까? 2017년 겨울까지라면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을 이해는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게는 분명히 그 전망이 보이는 데 전혀 안 보인다고 하면 더 이상 무어라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2018년 1월 1일 벽두부터 남북 대화를 제의하고 평창 동계올림픽 대표단 파견을 언급했던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를 듣고 난 이후에도, 그리고 (극우냉전파의 싱거운 패배로 끝났지만) 그 1월 내내 시끄러웠던 곧 열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의 한반도기·인공기 논란을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생각의 변화가 없었다면 이는 좀 문제가 아닌가 싶다.(이 책 2부 6장과 7장 참조) 현실의 큰 흐름을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다.
‘창비담론 아카데미’의 마지막 총화인 7회차 모임에서는 발제자부터 양국체제론 비판을 시작한다. 그 발제가가 비판의 재료로 인용했던 것이 (그 책에서 밝힌 모임 일자를 볼 때) 그 모임의 하루 전으로 보이는 2018년 1월 29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필자의 칼럼 「코리아 양국체제와 평창 올림픽」이었다. “우리가 이미 중국, 러시아와 수교하고 있는 것처럼, 미국과 일본이 북을 인정하고 수교하게 되면, 코리아 양국체제는 안정궤도에 접어든다. 그럴 때 북의 비핵화도 현실화될 수 있다. 이것이 한반도 평화만이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한 대한민국의 역할이다”이라 쓴 부분인데, 이를 인용하면서 그 발제자는 “정말 너무 간단하고 속편한 발언”이라고 간단하게 무시하고 있다.
그 발제자가 인용해주었던 칼럼의 바로 앞 대목은 이랬다. “세계 여론은 3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될지도 모를 한반도 전쟁의 가능성을 진정으로 우려했다. 누가 김정은 – 트럼프 간의 막가는 치킨게임을 일시적이나마 중단시켜 대화의 물꼬를 텄는가? 주변 어느 국가도 하지 못했다. 분단체제 신봉자들은 물론 언급의 대상이 못 된다. 결국은 성숙한 대한민국 촛불시민들의 힘이다. 일점의 폭력도 없이, 다시 1987 이전을 꿈꾸던 박근혜 신 유신 세력을 단번에 끌어내린 힘이다. 외신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나타난 대화 기조는 평화를 바라는 대한민국의 민의의 승리라고.”(이 책 2부 7장)
그런데 그 발제자는 아쉽게 이 대목에서도 그 칼럼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촛불혁명 이후 현실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었는지를 전혀 읽지 못했던 듯하다. 그렇지만 그 ‘창비담론’ 모임의 종료 이후에 숨 가쁘게 이어졌던 판문점 선언, 싱가포르 선언, 평양 선언과 그에 수반되었던 여러 일들을 직접 목격하고 난 이 시점에서는, 아마 그때 양국체제론을 비판했던 분들의 생각도 조금은 양국체제론을 이해해보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보고 싶다. 이제 북미 수교는 사실상 두 나라의 공식 어젠다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후로 평양에 미국의 연락사무소가 진출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시사인》의 북한전문기자는 2018년 10월 23일 자 기사에서 “(평양) 연락사무소 설치는 수교 전 단계다. 연락사무소 설치는 신뢰 구축 및 북한 체제 인정 면에서 보면 종전선언보다 상위의 단계다”라고 쓰고 있다. 북미 수교가 코앞에 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북 수교는 어떨까? 이미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개성에 설치되었다. 남측 초대 소장은 대한민국의 통일부 차관이 임명되었다. 이 공동연락사무소의 다음 단계는 평양과 서울의 상주 연락사무소가 될 것이다. 이 단계만 되어도 공무, 언론, 경제, 학술, 친족방문, 관광 분야에서 상당한 남북 교류가 시작된다. 이 단계가 안정되면 다음 단계는 북미 수교와 마찬가지로 바로 남북 수교 즉 ‘한조(韓朝) 수교’다. 그러나 이 순서는 상황 진행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북미 수교 교섭이 지연되면 남북 교섭의 동력을 높여 한조 수교를 먼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 한조 수교는 국가 간 일반 수교의 보편적 프로토콜을 따르되, ‘일 민족이 국가로서 상호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면서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국가 대 국가의 특수한 관계’의 성격을 반영하는 ‘특수한 수교’가 될 것이다. ‘한조 수교’와 함께 서울과 평양에 각 국의 대표부를 둘 것인데, 그 대표부란 이미 상주 연락사무소 단계에서부터 그에 준하는 상당한 활동을 하여온 것이다. 수교와 함께 평양과 서울의 기존의 상주 연락사무소의 간판만 바꾸어도 바로 평양 주재 대한민국 대표부와 서울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가 된다. 한국의 조선 대표부 대표는 당연히 다른 일반 외국 대사보다 격이 높은 장관급이 될 것이고, 조선의 한국 대표부 대표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까지 이를 길이 고속도로일지 트래킹 길일지는 남아 있는 문제다. 그러나 시대의 큰 방향이 이렇게 잡혀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이야기도 ‘창비담론 아카데미’의 분단체제론자들에게는 여전히 “너무나 간단하고 속편한” 것이고 아직도 “갑자기 어느 날”일까?
이론가들 사이에는 ‘비관론이 늘 이긴다’는 농담이 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붕괴론’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에서 비관론이 낙관론을 1848년 유럽혁명 이래 올 2018년까지 170년 동안 이겨왔다고 할 수 있다. 역시 비관론이 안전하다. 분단체제론에도 그런 멘털리티가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존속하는 한 분단체제는 끝나지 않는다? 현재 남북, 북미 간 진행되고 있는 양국체제의 흐름은 결국 그래봐야 반짝하다 말 것이고, 결국은 분단체제가 또 이기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분단체제는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하더라도 결국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인가? 백낙청 선생이 분단체제론을 입론할 때 크게 의지했던 월러스틴의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modern capitalist world system)’론도 그 세계체제가 이제 시스템 전환의 분기(bifurcation)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는데,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론은 이제 분단체제를 세계체제보다 더 장구할 체제로 보는 것일까?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분석해온 바 있다. 그러한 분석을 통해 지금 중층적 세계체제는 새로운 단계, 즉 ‘후기근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해왔다. 또 그러한 후기근대의 상황이 한반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그런 ‘세계체제의 대변동’에 관한 큰 이야기 이전에, 도대체 분단체제론은 바로 눈앞의 우리 현실, 즉 촛불혁명이 일으킨 ‘구조적 단절’의 힘, 그 힘의 역사성을 얼마나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필자가 촛불혁명 이전부터 줄곧 강조해왔던 점은 이미 세계사적 지각변동이, 한반도의 경우, 87년 6월 시민항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계기는 소련·동구권 붕괴와 미소 냉전의 해체라는 세계사적 대사건과 맞물리면서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이어져 분단 이후 최초로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의 전환’의 첫 움직임이 태동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태동은 내외의 역량과 조건의 한계로 짧은 시기에 마감되고 말았다.
촛불혁명 이후 양국체제의 두 번째 기회가 열리고 있다. 이 두 번째 기회는 첫 번째 열림보다 훨씬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촛불이 분열되지 않고 탄핵과 대선에서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판문점 선언, 싱가포르 선언, 평양 선언에 보내준 압도적 지지도 촛불은 여전히 진행 중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공할 ‘분단체제의 마의 순환고리’를 이윽고 끊어낼 절호의 기회가 이제 우리 앞에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분단체제의 ‘장구성(long-duration)’을 다시금 강조하는 분단체제론이 실천적으로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분단체제를 오히려 지속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을 뿐 아닌가?
분단체제는 다른 체제로 ‘체제전환(system transformation)’됨으로써 사라진다. 분단체제가 어느 날 쾅! 하고 무너져 폐허만 남는 게 아니고, ‘체제전환’이 이렇듯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위에 웅장한 새 건물을 지어 올리는 일도 아니다. 분단체제 안에서 성장해온 힘이 이 체제의 작동을 정지시키면서 새로운 체제로 전환해가는 것이다. ‘촛불혁명’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체제전환의 계기, 출발점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렇듯 분단체제가 체제전환을 통해 환골탈태해야 한다면, 그렇듯 환골탈태한 새 체제란 과연 무엇일까? 남북의 적대가 해소되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체제 아니겠는가? 그래야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가 이윽고 끊기지 않겠는가? 그것이 한국과 조선이 서로를 인정하여 수교하는 양국체제, 즉 양국 평화체제, 양국 공존체제 아닌가? 그것이 ‘분단체제에서 양국체제로의 체제전환’인 것이고, 이것이 촛불을 진정 ‘혁명’으로 만드는 징표가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과연 분단체제론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에 대한 답을 직접 들은 바 없지만 짐작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백 선생이 바로 얼마 전 《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 권두에 특집으로 실은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라는 글이 그것이다. 여기서 백 선생은 양국체제의 가능성을, 아마도 선생으로서는 최초로, 시간을 들여 검토해보고 있다. “남북이 항구적 분단에 동의한 두 개의 독립국가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라고 한 후, 두 페이지 반을 그 시나리오에 바쳤다. 양국체제가 왜 ‘항구적 분단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를 전제로 가정을 진행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혁·개방을 하더라도 중·일·러·한 등 자신보다 훨씬 부강한 국가들에 둘러싸인 채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숨 막히는 경쟁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수년 내로 물러날 트럼프 대통령의 호의가 큰 버팀목이 될 리도 없으며 한국 또한 다음 정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다 …… 대한민국은 어찌 되는가? ……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거치며 입지를 굳혀온 세력들의 특권수호 의지는 여전할 것이며 ‘빨갱이’ 운운하는 색깔론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 북한 당국이 경쟁국 한국에 얼마만큼 호의적일지 의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본의 북한진출로 이 나라 대중의 생활이 얼마나 향상될 것이냐는 것이다 …… 아무런 범한반도적 조절장치 없이 여타 외국에나 마찬가지로 대북 자본진출이 이뤄진다면 국내의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하다 ……환경 문제도 …… (한국 개발세력을) 제어하기는 훨씬 힘들어질 것이다 …… 성차별 문제는 어떤가? 여성차별은 …… 공공연한 가부장주의보다 한층 음험하고 비열한 성차별주의로 진화 …… 분단체제 아래 더욱 폭력적이며 대대적인 여성혐오로 번지고 있기조차 하다. 이 문제를 공존하는 두 성차별적 국민국가의 ‘쎌프개혁’에 맡겨서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까? 물론 남북연합으로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건 아니다. 그야말로 문명의 대전환을 수반하는 과제라 보아야 옳다 …… 그 밖에 ‘갑질문화’라든가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로 인해 일그러진 인간심성 등 평화공존 속 보통국가가 치유 못할 병폐가 너무나 많다. 다만 (거듭 말하지만) ‘평화공존 속 보통국가’라는 것 자체가 탁상공론이요 상상해본 가정일 뿐이므로 그걸 전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이며 어떻게 촛불혁명에 부응하는 남북연합을 만들까 하는 한층 실질적인 고민으로 돌아오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긴 내용이지만 요점을 잡아 줄여본다면, 양국체제가 되어봐야 여전히 분단체제라는 뜻이겠다. 양국체제가 되어봐야 자본주의 체제의 질곡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계급, 국가, 성, 환경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백 선생은 일찍부터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하위체계라 하였으니, 분단체제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질곡이 끊기지 않았는데, 분단체제가 사라질 리가 없기는 하겠다. 물론 양국체제론은 그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의 해결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양국체제론은 지금 꼭 필요한 것, 분명하고 확실한 것만 말한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중기적이다. 양국체제에서는 분단체제에 비해 남북, 북미 간 적대가 분명히 완화되고, 교류와 협력이 확실히 증대한다. 현재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고 절실한 변화 아닌가?
그러나 백 선생의 위 인용문은 그렇듯 명백한 예상은 굳이 다 외면한다. ‘평화공존 속 보통국가’에 대한 요구는 비현실적으로 너무나 높게 잡아놓고, 양국체제가 열어줄 상황에 대해서는 상식적 예상보다 훨씬 비관적인 가정만으로 일관한다. 주문은 최상가로 해놓고 물건 평가는 최저가로 매긴 셈이다. 이 글대로라면 중국과 베트남이 세계경제의 일원이 된 후 그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거나 실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평범한 인민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북미 간 북핵문제 공방도 이제는 미국의 다음 정부가 어떻게 되던, 북미 수교와 비핵화를 교환한다는 틀을 바꾸기 어렵게 되어 있다.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위 인용은 촛불혁명이 일으킨 ‘체제전환’의 파급력을 매우 사소하게 보는 듯하다. 촛불이 소멸시킨 ‘기울어진 운동장’이 금방 내일이라도 멀쩡하게 복구될 것만 같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단체제의 역풍’이 정말 심각하게 몰아치기 시작했던 2009년에는 분단체제의 강화가 “흔들리는 분단체제의 안정회복을 꿈꾸는 인사들”의 “일방적인 꿈”일 뿐이라고 가볍게 보더니, 막상 분단체제가 촛불혁명으로 영영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번에는 분단체제란 “뿌리가 깊고 신축자재한 것”이어서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재생될 수 있다”면서 ‘분단체제 불사론’을 지핀다. 그러면서 양국체제가 된다고 해봐야 분단체제는 끄덕도 없을 것이라는 취지의 비관적 가정으로 일관한다.
위 인용문에 대해 더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그보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따로 있다. ‘애당초 안 될 이야기니 고민할 필요 없다’로 마감하긴 했지만, 백 선생이 바로 이런 예상을 해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새롭게 느껴진다. 무엇이든 미리 배격해놓고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백 선생이 이런 방향의 고민을 해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백 선생의 이 고민을 시작으로 분단체제론 측에서도 양국체제의 전망에 대한 공감적 이해가 더 깊어지기를 기대해본다.
부분 인용한 백 선생의 글 전체의 요지는 결국 ‘남북연합이 정답’이다. “물론 남북연합으로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건 아니다”라고 덧붙이고 있기는 하지만(그야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다), 어쨌거나 양국체제는 실현 가능성이 없으므로 현재 이미 시작되어 있다는 남북연합을 열심히 하자는 말씀이다. 나는 남북연합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나로서는 남북연합이든 국가연합이든 양국체제가 전제되지 않는 그 연합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아서 의문이었을 뿐이다. 서로 국가로서 정식 인정하고 있지도 못한데 서로 반신반의하면서 회담하고 또 그런 회담을 정례화하면 그것이 바로 국가연합이 되는 것일까? 내가 아는 한 그것은 국가연합이 아니다. 수교 전 단계의 접촉일 뿐이다. 양국체제의 안전장치 없이 남북연합, 남북연대를 한다고 앞서 나가기만 하면 오히려 역공과 역풍을 부르기 쉽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문자 그대로 ‘분단체제의 역풍’이 부는 것이다. 실제 그런 역풍에 많이 당해보지 않았던가? 백 선생은 여러 곳에서 국가연합, 남북연합이 위태로운 남북관계를 지켜줄 안전장치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양국체제 없는 국가연합, 남북연합이야말로 위태로운 것이고, 양국체제야말로 그 연합을 지켜줄 안전장치다.
그러나 내 생각이야 어떻든 백 선생은 이미 그 국가연합은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에서 바탕을 깔아줬고, 6·15 선언에서 길을 열었으며, 10·4 선언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이미 남북 국가연합은 이미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듯 이미 있었기 때문에 올 들어 판문점 회담도 가능했다고 할 것이다. 지금 북미 정상회담도 마찬가지로 국가연합의 바탕이 이미 돼 있으니까 가능했던 것이겠다. 물론 그게 아직은 다 된 것은 아니고 조금 덜 되었으니 다 될 때까지 열심히 국가연합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꼭 부가하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내가 아무리 보아도 거기에 국가연합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데, 선생은 줄곧 거기 있다고 하니 나로서는 더 드릴 말씀이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앞서 예상해보았던 대로 북미, 남북 수교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것은 선생이 보고 있는 그 국가연합에는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내 생각에는 굳이 나쁠 게 없는 일일 것 같다.
마침 나는 그 글에서 국가연합을 백 선생이 그동안의 어떤 설명보다 쉽게 풀어준 대목을 찾을 수 있었다. 백 선생이 생각하는 남북연합이란 “미국이 어느 시점에 변심하여 북을 다시 침공하거나 적대정책으로 되돌아갈 태세가 되었을 경우, 이것이 곧바로 대한민국이 가담한 국가연합에 대한 침공 내지 적대가 될 수밖에 없도록 제도화해놓는 일”이라는 구절이다. 결국 북(DPRK)과의 군사적 동맹까지 생각하는 것이고, 이는 외교관계 중 가장 높은 단계인 ‘포괄적 전략적 동맹관계’가 된다. 이런 관계가 국가 간 수교 없이 가능할 수 없다. 수교관계 중에서도 특별히 높은 관계에 해당한다. 한국과 조선이 수교관계를 맺으면 이는 한 민족 두 국가가 맺는 특별한 수교일 것이니, 애초에 특별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그렇듯 특별한 것이지만 수교하자마자 바로 포괄적・전략적 동맹관계로 시작할 수는 없다. 어찌 첫술에 배가 부르겠는가. 그 가장 높은 단계까지 가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백 선생이 생각하는 국가연합이 그런 가장 높은 단계의 동맹관계를 뜻한다면 그것은 이렇듯 수교를 이룬 후 많은 노력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해왔던 바이기도 하다. 국가연합은 양국체제가 안정되면서 이뤄가야 할 다음 단계의 목표다.
그럼에도 여전히 백 선생이 양국체제는 ‘탁상공론’이요 ‘비현실적인 가정’일 뿐이라고 내치시는 이유가 뭘까? 미리 양국체제에 (내가 보기에) 여러 비현실적인 전제 조건을 걸어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양국체제는 아주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여러 일들이 벌어질 것을 전제할 때야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겠지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앞서 양국체제는 “항구적 분단에 동의”, “영구분단에 동의”한다는 전제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정말 너무나 비현실적인 전제일 뿐이다. 수교할 때 상호 국가로서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하면 되는 것이지, 왜 ‘항구적 분단에 동의한다’고 못을 박아야 할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양국체제 자체가 바로 통일은 아니지만 ‘항구적 분단’은커녕 통일을 촉진시키는 가장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경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백 선생의 이 글에서는 양국체제 ‘실명비판’의 대상이 내가 아닌 최장집, 박명림 교수 등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 주장을 ‘항구적 분단에 동의’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듯하다. 나로서는 ‘정말 그럴까? 그건 꼭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당사자가 아닌 바에 거기에 대해 뭐라 확실히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통일을 원천적으로 배제”해야 양국체제가 가능하다는 전제 자체가 이렇듯 비현실적이고, 더 나아가 이런 가정 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한국의 헌법 조항과 북의 노동당규약 및 건국이념을 깡그리 부정하는 대역사(大役事)가 전제되어야 양국체제가 될 수 있다’는 가정 역시 과도하고 순서가 바뀌어 있다. 우선 양국체제가 정착되어가면 헌법을 비롯한 여러 법과 제도의 개편이 뒤따른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꼭 그것이 전제되어야 양국체제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사고법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예들 들어 국가보안법은 남북이 연락사무소를 두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공무, 사업, 연구, 관광, 친족방문 등 여러 목적으로 남북을 오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문화될 수밖에 없다. 수없이 많은 평범한 일반인들을 모두 범죄자로 모는 법이 무슨 법이 될 수 있겠는가? ‘외계인’처럼 누구에게나 눈치를 받는 이상한 법이 될 수밖에 없다. 국가보안법은 그때 가서 더는 의미가 없으니 폐지하자고 하면 된다. 그게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미리 폐기해놓아야 양국체제가 가능하다는 가정은 실은 양국체제로 가는 길에 불필요한 장애물을 미리 세워두자는 것과 같다.
헌법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금 상태로도 대한민국헌법 3조의 영토조항(“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은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우리가 남북 정상회담을 도대체 몇 차례나 했는가? 특히나 촛불혁명 이후 남북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헌법 3조의 개정은 필연적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 조항의 폐기를 내일모레 하자고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없는 빌미를 잡아보겠다고 손톱이 빠지도록 긁어대고 싶은 쪽이 저기 아직 엄연히 있는데 공연히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어디 있는가? 헌법 개정은 남북, 북미 수교가 이뤄진 후에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게 국제법과 국내법의 연동관계다. 물론 그 전이라도 해당 조항의 개헌이 가능한 상황을 예상해볼 수는 있다. 이미 양국체제로의 진행에 대한 공론화와 여론의 지지가 충분히 형성되고, 평화공존 세력이 국회의 개헌선 이상의 확실한 다수파가 된 상황이 그렇다. 그때라면 ‘헌법개정 시민의회’를 통한 공론적 사전합의를 거친 후, 그 합의를 국회에서 압도적 지지로 가결하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실이 먼저 가고 법과 제도가 따라간다.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이런 순서는 북도 동일할 것이다.
이상의 검토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양국체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과 제도,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분명하고 확실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반면 분단체제론은 이러한 변화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분명히 제시한 바 없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 하나만 해도 이것을 어떻게 없애가겠다는 것인지 방침이나 전망이 불분명하다. 헌법 3조의 개정에 대해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연히 분란만 부를 일이라고 미리 접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 ‘양국체제론’이 공연히 그런 분란을 부를 것이라고 거꾸로 비판한다.
왜 그럴까.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극복’을 항상 강조하지만, 막상 분단체제가 어떻게 극복된다는 것인지 애초부터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단체제가 여전히 계속된다고 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폐지나 헌법 개정이 실은 난망하게만 보이는 것 아닐까? 분단체제론이 상정하는 국가연합 단계도 여전히 분단체제인지, 분단이 극복된 체제인지 불분명하다. 그 애매한 연합 상태가 바로 “두루뭉수리 …… 어물어물 진행되는 통일” 과정이라고 한다. 이것이 분단체제론이 내세운 ‘과정으로서의 통일론’, ‘과정으로서의 남북연합론’인데, 결국 이 이론에 따르면 이 전 과정에서 분단체제가 계속 존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 선생과 함께 오랫동안 창비에서 활동해온 최원식 교수(2018)는 ‘분단체제론의 남북연합론은 분단체제를 상정하는 것’이라 하였으니,(이 책 3부 1장) 분단체제가 존속해야만 가능한 것이 그 남북연합일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과정으로서의 통일론’ 그리고 올해 새로 더한 “과정으로서의 남북연합”론에서 ‘분단체제’는 이제 결코 더 이상 부정적이기만 한 상태가 아닌 듯하다. 분단체제란 남북이 분단돼 있기는 하지만 불일불이(不一不二)로 ‘두루뭉수리하게’ ‘연합’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분단체제’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 180도 뒤바뀌고 만다. 더 나아가 그 분단체제를 극복한다는 것은 남북 분단만이 아니라, 계급 분단, 성분단, 인간/자연의 분단까지 극복하는 “문명의 대전환”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하니, 실로 그 ‘분단체제’는 남북 적대와 통일의 여부를 떠나, 그를 한참 초월하여 앞으로 오랜 시간 존속하지 않을 수 없는 실로 장구한 체제일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쯤 되면 ‘분단체제’가 한반도 남북의 분단과 적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분단체제론’을 위해 존재해주어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남북, 북미 수교가 이뤄지고 양국체제가 정착되면 분단체제는 사라진다고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단체제론’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문명 대전환’의 원대한 기획과 철학으로 존속해가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대해 굳이 내가 무슨 예상을 해볼 이유나 자격은 없기도 하다. 다만 이 정도 밝혔으면 분단체제론이 양국체제론을 굳이 그렇게 배격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분단체제론이 주장하고 옹호해온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 ‘국가연합’, 더 나아가 ‘평화로운 통일을 이룬다’고 하는 큰 목표를 양국체제론 역시 확실하게 같이하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현실적인 경로 역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분단체제’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와, 그 ‘분단체제’의 존속 여부에 대해서는 생각을 분명히 달리하고 있지만, 그런 차이는 차이대로 두고, 같이 나누고 있는 큰 뜻과 목표에 맞추어 협력해가면 되는 것 아닐까?
이제 양국체제론에는 백낙청 선생의 ‘포용정책 2.0과 같은 방법’과 ‘남북연합에 대한 사고’가 없다는 분단체제론 측의 비판에 대한 답은 충분히 되었다고 보지만, 그래도 미진한 게 남았을까 싶어 가필해본다. 양국체제의 성립과 안정은 ‘포용정책 2.0’이 추구하는 목표를 충분히 이루어준다. 그리고 양국체제가 성립될 때 ‘국가연합’은 비로소 현실적인 발판을 갖게 된다.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은 통일로 가는 길에 일정한 중간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매우 중요하고 현실적인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그 중간단계가 양국체제일 것인가, 국가연합일 것인가. 그 차이일 뿐이다. 양국체제는 국가연합의 전망을 배척하지 않는다. 양국체제가 국가연합의 바탕을 깔아준다고 했다. 그런데 분단체제론은 양국체제가 국가연합의 길을 가로막는다고 보았던 듯하다. 지금껏 밝힌 바와 같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오해는 이제 풀린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적절하고 현실적인 중간단계를 거쳐 평화통일로 가야 한다는 대명제 아래 두 입장이 협력할 수 있지 않겠는가.
더하여 ‘창비담론 아카데미’ 모임에서 직접 제기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용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비판이 있다. 양국체제론에는 민중주도, 시민주도 통일에 대한 생각이 없지 않느냐, 국가만 있고 시민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겠다. 이 역시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양국체제가 성립되면 정부 간 교류만이 아니라 민간 교류의 물꼬가 크게 트인다. 양국체제론은 대대적인 민간 교류의 현실적 방법론이다. 양국체제가 안정되어 갈수록 민간 교류가 정부 간 교류를 압도할 것이다. 동서독의 사례를 보면 이는 명백하다. 분단체제론이 강조해온 ‘남북 민중주도’, ‘시민주도 통일’의 길이란 이런 상태에서야 비로소 관념이 아니라 제대로 된 현실의 발판을 찾게 된다. 분단체제가 존속하는 한 민중주도, 시민주도 통일이란 역경과 고난의 좁은 길일 수밖에 없다. 여전히 분단체제의 ‘마의 순환고리’와 싸우면서 결코 그 고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헤쳐가야 한다. 같은 뜻을 더 크고 당당하게 펼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마의 순환고리’로 인해 실패가 예약된 형극의 길을 굳이 가야만 할까. 혹시나 고난과 고통의 길만이 정당성과 순수성을 보장해준다는 생각이 있다면, 이는 60~80년대의 ‘운동권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너무나 크게 변했고, 앞으로 더욱 크게 변할 것이다. 과거의 관성을 단호하게 탈피해야 한다.
분단체제론에는 근대 국가 자체를 (남이든 북이든, 더 나아가 현 세계체제 속의 모든 국가 체제 자체를, 그리고 그 국가 간의 일체의 관계를) 불신하는 이론적 경향이 깔려 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한몸을 이루고 있음을 보는 모든 이론 전통의 공통된 배경이기도 하고, 필자 역시 그 전통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대 국가 체제를 극복하는 길은 국가와 시민의 2분론으로 결코 열리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필자가 이미 책으로 정리해 몇 차례 출간한 바 있다. 활발하고 건강한 시민운동은 국가기구를 활용한 국가 자체의 변화를 결코 백안시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그를 통해서 시민사회 영역과 시민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양국체제는 이 길을 크게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코리아 양국체제’에는 여기에 더하여 이러한 일반론 이상의 추가적 의미가 있다. 서로 참혹한 전쟁을 하고 70년을 서로 적대해온 ‘한 민족의 두 국가’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과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외부의 적’의 존재를 자체 존립의 근거로 하고 있는 근대 국가 체제 자체의 존재적·인식적 기반을 흔들고 변화시켜 나갈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발본적 변화의 싹이 한반도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EU(유럽연합)나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USAN(남미국가연합) 등에도 그런 요소가 있다.
양국체제는 통일을 분명히 촉진하지만 그 자체가 통일인 것은 물론 아니다. 통일이 어떤 방식으로, 언제쯤 이루어질지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양국체제가 성립되어 남북의 교류가 점차 활발해지면 통일은 이미 남북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그 자리, 그 마음들 속에서부터 형성되어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70년간 분단되어 적대하며 살아왔으니 여러 작지 않은 차이와 거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이전 천년 넘게 한 나라로 살아오면서 공유해온 언어와 문화와 전통의 공통성은 그보다 훨씬 크고 깊다. 양국체제는 이 차이와 공통을 융화시켜가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 융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때, 통일 역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백낙청 선생의 신념처럼, 이 역시 나의 신념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 인류 역사를 보편적으로 관통하는 민주적 뿌리와 그것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 「맹자의 땀, 성왕의 피」(2016), 「미지의 민주주의」(2011) 등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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