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유래 없는 불화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에도 간헐적인 망언이나 충동적인 민족주의 발호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서로 적대적 조치를 취하면서 결별의 수순을 밟는 듯한 모양새는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처음이다.
일본은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한국을 끝내 배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국은 이에 맞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결정했다. 전통적으로 한·일 갈등을 중재해왔던 미국도 뒷짐만 지고 있는 형편이다.
문재인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에 소홀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갈등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나 그 이전 정부에서 벌어진 일본군 ‘위안부’ 합의 때문에 운신의 폭도 좁았다. 일본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한 전략과 더불어 전 세계적인 정세 변화를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일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도 낙승했다. 비록 개헌 발의선인 전체 3분의 2의 의석 유지에는 실패했지만 무난한 승리를 이끌었다. 당분간 아베 독주 체제에는 균열이 나기 어려울 전망이다. 최근 개각에서는 극우 성향 인사들과 한국에 강경한 측근들을 전면 배치하면서 한·일 갈등이 해결하기 어려운 늪으로 빠져들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아베 신조와 기시 노부스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이하 아베)는 195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베의 출생과 사상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A급 전범 용의자’인 기시 노부스케(1896~1987)다. 기시의 고향은 조슈번(현 야마구치현)으로 메이지 유신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다. 정한론을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은 이곳에서 이토 히로부미 같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는 제자들을 길러냈다. 조선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역시 그의 제시다. 기시도 이 같은 분위기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아베도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꼽은 적이 있다.
도쿄제국대를 졸업한 기시는 상공관료로 출발해 만주국 총무청 차장을 거쳐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이 된다. 태평양 전쟁 때는 전시 물자를 관리하는 군수차관으로서 전쟁의 최고 책임자 중 하나였다. 전쟁 후 기시는 연합군총사령부에 의해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지만 기소되지 않았고 1948년 석방됐다.
기시는 미국의 점령정책과 평화헌법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953년 정계에 복귀한 기시는 개헌을 위해 보수 세력을 통합한 거대 정당 ‘자유민주당’(민주당)을 창당했다. 1957년에는 총리에도 올랐다. 그러나 미일안보조약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했다가 시민들의 거대한 반대 물결, 이른바 ‘안보 투쟁’에 부딪혔고 총리직에서 내려왔다.
일본 자민당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보수 본류’와 ‘보수 방류’다. 보수 본류가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발전에만 주력하자는 입장인 반면, 보수 방류는 일본의 자주·안보와 개헌에 방점을 두고 있다. 보수 방류의 대표주자가 바로 기시다.
아베가 그런 영향을 받을 기회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베의 친할아버지인 아베 간(1894~1946)은 도조 히데키 내각의 집요한 방해공작에도 중의원에 당선됐고, 의정활동 기간에 무모한 전쟁을 맹렬히 비판한 평화주의자였다. 아베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1924~1991)는 강제 징집 후 가미카제 특공대에 지원했다가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전쟁의 참상을 몸으로 겪은 탓인지 반전평화주의자였고 “세계대전은 일본을 망국의 위기에 빠뜨린 매우 잘못된 전쟁”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재일동포와도 깊은 친분 관계를 유지했고 북일 관계 개선과 러시아와의 평화조약 체결에 애쓰기도 했다. 한때 유력한 총리 후보로도 거론되기도 했지만, 췌장암으로 일찍 숨지고 말았다.
아베는 친할아버지, 아버지보다는 외할아버지인 기시에게 더 흠뻑 빠졌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아버지는 늘 바빴고 어머니 역시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야마구치의 지역구를 관리하느라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반면 기시는 바쁜 총리 시절에도 자주 외손자를 불러 시간을 함께했다고 한다. 아베는 ‘안보 투쟁’ 당시 다섯 살배기에 불과했지만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다정한 외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어렸을 적부터 품게 됐다.
아베가 중학생 시절까지도 건강했던 기시는 안보조약이나 국가와 역할 등에 대해 물으면 알게 쉽게 설명을 해 줬다고 한다. 아베의 정치의식은 그렇게 서서히 형성됐다. 고교 때는 안보조약 폐지를 주장하는 선생님에게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던 그로서는 기시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오히려 그 반대로 기시를 더욱 따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아베는 기시로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국의 점령정책, 평화헌법으로 대표되는 전후 체제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사상을 물려받았다. 태평양 전쟁은 불가피한 ‘자위전쟁’이었다는 기시의 생각을 계승한 아베는 “침략에는 정해진 정의가 없다”고 말한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전통을 되살려 메이지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자고 생각한다.
아베는 소학교부터 대학까지 일관 교육을 하는 세이케이학원의 소학교에 진학했다. 학창 시절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조용하고 성실한 학생, ‘곱게 자란 도련님’ 정도로 알려져 있다. 대학도 일본에서는 명문대로 꼽히지 못하는 세이케이대를 자동으로 그냥 진학하는 편을 택했다. 반면 아베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도쿄대 출신이다. 아버지는 아베에게 “도쿄대에 진학하라”고 다그쳤지만, 아베는 와세다, 게이오대도 지원할 실력은 되지 못했다. 아베가 적지 않은 ‘학력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 내각에 도쿄대 출신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뒤에 나온 이유다.
대학 시절에도 아베는 공부에는 거의 취미가 없었고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양궁 동아리 여학생들과 어울리거나 마작을 하는데 열중했다. 외할아버지인 기시는 아베가 졸업후 관료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베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베는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매일 수신자 부담으로 도쿄의 집에 전화를 걸어서 국제전화비만 한 달에 10만 엔 이상이 나왔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이 녀석이 우리를 파산시킬 셈인가”라고 화를 내며 2년 만에 귀국시켰다고 한다.
귀국 후 아베는 부친의 주선으로 1979년 고베제강소라는 철강회사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1982년 11월 아버지가 외무상에 취임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외무대신 비서관이 됐다. 아버지가 죽은 뒤 뒤를 이어서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에 출마했고 중의원 의원에 당선됐다. 신인 정치가로서 일성이 바로 “일본국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됐다”는 것이었다.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되는 아베
기시의 역사관을 물려받은 아베는 일찍부터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정주의적 입장에 있었다.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련해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않겠다”는 고노 담화를 발표한다. 아베는 이에 반대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 사무국장을 맡았다. 1995년 무라야마 일본 총리는 종전 50년을 맞아 과거의 식민지배와 침략행위를 반성하는 내용을 담은 국회 결의안을 준비하는데 초선이었던 아베는 이에 반대하는 자민당 의원 모임의 사무국장 대리로 발탁된다.
아베가 결정적으로 주목받는 정치가 반열에 오른 것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보이면서부터다.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과 북일 정상회담 과정에서 북한이 납치한 일본인 중 일부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일본 열도가 들끓었다. 당시 관방 부장관이던 아베는 일본을 일시 방문한 납치 생존자들을 귀국시키지 않도록 정부 방침이 결론 내려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강경한 대북 대응책으로 아베는 단숨에 ‘납치의 아베’라는 별칭을 얻으며 원칙을 지키는 당당한 정치인 이미지로 국민적 지지를 받게 됐다.
2006년 9월 아베는 전후 가장 젊은 총리에 오르며 ‘아름다운 국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국정교과서를 부활시켜 일본 역사를 천황의 건국 신화부터 가르치도록 강제했다. 개헌을 위해 국민투표법을 정비했고,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했다. 그러나 능력보다는 아베의 측근 위주로 구성된 내각에서는 각종 비리와 망언 등이 터져 나왔고 지지율은 급락했다.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대패해 1당의 지위를 내줬다. 그럼에도 아베는 개각을 단행하고 총리직을 계속 수행하겠다는 연설을 했지만, 그 연설을 한지 이틀 만에 총리직을 내려놓겠다고 해 물의를 빚었다. ‘무책임한 도련님 정치가’의 이미지가 아직까지 어른거리는 이유다. 한때 도중에 일을 내던진다는 뜻의 ‘아베한다’는 단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아베가 급하게 총리직을 던진 이유는 오랫동안 앓아 온 궤양성대장염이 급속히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정계 은퇴까지 고려했지만 건강을 차츰 회복하면서 다시 중의원에 당선됐다. 재기 과정에서 아베는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경험하게 된다. 아베는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개헌이나 안보 문제가 아니라 경제와 생활에 집중해야 한다는 측근들의 조언을 받아 ‘아베노믹스’의 근간이 되는 정책들을 준비하게 된다.
이어 벌어진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긴장 고조는 극우정치인 아베가 설 발판을 다시금 마련해준다. 아베는 자민당 총재로 다시 복귀해 중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2012년 12월 다시 총리 자리에 앉는다. 총리를 한 번 했던 인물이 다시 총리가 된 것은 1955년 이후 처음이었다.
아베는 담대한 양적완화를 통해 일본 경제에 드리운 디플레이션을 걷어내려 했다. 대기업의 실적이 나아지고 실업률이 낮아지는 등 효과도 봤다. 닛케이평균지수도 2012년 말과 비교할 때 두 배가 넘게 올랐다. 기대만큼 효과가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극우 이미지와는 다르게 아베는 국내적으로는 저출산·고령화를 막기 위해 육아와 사회보장 정책을 강화했다.
안보 면에서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한 헌법 해석을 바꿔서 자국이 공격을 받지 않더라고 미국 같은 동맹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 이에 무력 대응할 수 있게 됐다.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련 ‘안보법제’도 강행처리했다. 아베의 최후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개헌이다. 아베는 개헌을 자신의 ‘라이프 워크’라고 표현한다. 정치 생명이 끝날 것을 무릅쓰고 총리직에 다시 도전한 것도 기시의 ‘개헌 의지’를 이어받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021년까지 임기를 둔 아베가 그 기간 동안 개헌을 언제 추진할지도 관심사다.
한일 관계 면에서 아베는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를 답습 혹은 계승한다고 표명하면서도 교묘하게 둘을 해체시켜 버렸다. 2015년 아베 담화에서 ‘침략’이나 ‘사죄’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교묘하게 주어를 비틀거나 꼼수를 부려 사실상 자신의 입장 표명을 피했다. 한국 정부의 미숙한 대응을 놓치지 않고 12·28 합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고 선언했다.
아베는 2006년 9월 내놓은 <아름다운 나라에>라는 책에서 “나는 일한 관계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이라며 “한국과 일본은 자유와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 법의 지배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과거에 대해 겸허하고 예의 바르게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갖고 사귀어가는 한 양국 관계는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갈 것”이라고 했다. 한국이 그가 생각하는 “과거에 대해 겸허하게 예의 바르게 미래 지향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아서였을까. 한·일 관계는 1965년 이후 최악을 달려가고 있다.
이 상황이 한동안 개선될 기미도 없다. 자민당 당규 개정으로 기존에 ‘2연임 6년’으로 되어있던 총재의 임기 제한이 ‘3연임 9년’으로 늘어나면서 아베는 이변이 없는 한 최소 2021년 9월까지는 임기가 보장돼 있다. 2012년 12월부터 무려 9년 동안 일본을 통치하는, 전전과 전후를 통틀어 헌정 사상 최장기 정권이다. 전후 최장수 총리는 아베의 작은 외할아버지였던 사토 에이사쿠 총리였다. 지지율 역시 견고한 편이다. 한때 모리토모 학원 비리 등으로 지지율이 20%대로 고꾸라진 적도 있었지만 점차 회복됐고 최근 한일 갈등이 부각되자 60% 가까이 치솟기도 했다. 이에 비해 야당은 지리멸렬한 상태다.
아베와 일본회의
아베 정권을 설명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본회의다. 2014년 9월 3차 아베 내각의 각료 19명 중에서 아베 자신을 포함해 16명이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 소속이었다. 일본회의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일본회의는 아베 주위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일본회의의 웹사이트에는 일본회의가 지향하는 목표가 있는데, 요약하면 황실 중심, 개헌, 야스쿠니 신사 참배, 애국 교육, 자위대 해외 파견 등이다.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그 내력과 세력을 뜯어보면 무서운 면이 있다.
일본회의의 역사는 길다. 1974년 설립된 ‘일본을 지키는 모임’, 그리고 1978년 ‘원호 법제화 운동을 목표로 조직된 ‘원호법제화실현국민회의’를 모태로 하는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1981)가 1997년 합쳐서 생긴 단체다. 여기에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1930년 창립한 우익 반공 종교단체 ‘생장의 집’이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생장의 집 신도 자녀들로 구성된 ‘생장의 집 학생회전국총연합’은 1960~70년대 일본의 안보투쟁, 전공투 운동 등 좌익 계열의 학생운동에 맞선 우익 단체로 활동했다. 이들은 나가사키 대학을 점거하고 있던 좌익 학생들을 몰아내고 ‘정상화’하는데 성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나가사키 대학 정상화 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가바시마 유조는 이후 일본청년협의회 서기장이 됐고, 일본을 지키는 모임에 가담했다. 그는 현재 일본회의의 사무총장이다. 일본회의는 의회 진출에도 성공해 뒷날 ‘참의원의 교황’이라고 불리게 되는 무라카미 마사쿠니도 배출한다. 이들은 무라야마 총리가 낸 ‘전후 50년 결의안’의 참의원 부결을 이끌었다. 아베가 당시 반대 의원 모임의 사무국장 대리를 맡은 것과 묘하게 겹쳐진다.
현재에도 그 인연은 계속된다. 아베 총리의 최측근이자 총리보좌관을 지냈고 이번 개각에서 인 1억총활약상 겸 오키나와·북방영토 담당상에 발탁된 에토 세이이치는 일본청년협의회의 간부다. 아베 정권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고 아베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일본정책연구센터 대표 이토 데쓰오 역시 과거 ‘생장의 집’ 학생운동을 했고 그 간부 출신이다. 현재 종교단체로서의 생장의 집은 정치활동과 연을 끊었지만, 이를 거부하는 원리주의 단체인 ‘다니구치 마사하루 선생을 배우는 모임’이 있는데 그 단체에는 한때 일본 최초 여성 총리감으로도 꼽혔던 아베 내각의 이나다 도모미 전 방위상 등이 참여했다.
일본회의의 활동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좌익·진보 진영의 그것을 빼닮아 있다. ‘아름다운 일본의 헌법을 만드는 국민의 모임’(1000만명 네트워크)처럼 개별 목표를 이루기 위한 별동단체를 두고 있다. 개별 사안마다 각 지방조직이 나서 지방의회에 압력을 가하고 의견서 채택 운동에 나선다. 역사 교과서 채택운동이 전형적인 성공 사례다.
일본회의의 정체를 파헤친 저널리스트 스가노 다모쓰는 <일본 우익 설계자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 것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일이다 라며 일본 사회가 합세해서 실컷 바보 취급하고 조롱하고, 발길질해왔던 데모·진정·서명·항의집회·스터디 등 ‘민주적인 시민운동’을 계속해왔던 것은, 매우 비민주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시민운동’에 대한 인식과는 반대로 그 운동은 확실하게 효과를 낳고, 아베 정권을 지탱할 정도로 성장하고, 국가의 헌법을 변경할 정도의 세력이 되었다. 이대로 가면 ‘민주적인 시민운동’이 일본의 민주주의를 죽일 것이다.”
일본회의의 무서운 점은 이런 동원력이다. 일본회의 임원의 3분의1 이상이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선거에 즈음해 공언한 대로 숫자를 낸다’는 믿음을 준다. 정치인에게 이처럼 무섭고도 든든한 점은 없다. 일본회의의 영향력에서 일본 정치인이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일본회의의 핵심이 비밀에 싸여 있으며 그 중심에 있는 안도 이와오라는 인물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도 다소 오싹한 느낌을 준다. 책임지지 않는 위치에 있으면서 실제 정치를 주무르려는 속성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비선 실세’를 닮았다.
아베가 아니라 일본이 왜 그러는지 주목해야
아베나 일본회의에 주목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행동이 지지받을 수 있는 세계정세 자체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겨레 길윤형 기자는 저서 <아베는 누구인가>(돌베개)에서 “현재 동아시아에는 한일 간 새로운 우호관계의 문을 연, 한일 파트너십이 가능했던 전략적 상황이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난 4년 동안 이어져 온(2013~2017) 한일 간의 갈등은 어쩌면 앞으로 닥칠 ‘거대한 불화’의 서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홍기빈 칼폴라니연구소장도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굴기함에 따라 미국의 방어라인이 새로 그려지고 있다. 기존 일본-한반도-대만 라인이 아니라, 미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인도-중동-유럽 라인이다. 이 방어선을 확고히 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막겠다는 게 미국의 인도-태평양 방어 전략이다. (…) 이 구상이 완성된다면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는 뚝 떨어진다. 한미일 동맹 체제는 냉전 시대에 생겨났다.”
장부승 일본 간사이외대 교수 역시 그간 이런 점을 꾸준히 지적해 왔다. 그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한일관계를 단지 양자관계만으로 보면 안 된다. 거대한 국제 질서의 역학관계를 토대로 봐야 한다”며 “‘아베 왜 이러나’를 묻지 말고 ’일본 왜 이러나’로 바꿔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아베 이후 누가 차기 총리가 되더라도 한·일 관계가 호전되기 어렵다고 본다. 그는 일본이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으며 “한일관계를 뿌리에서부터 재구성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본다.
장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 지도자들은 지난 20여 년간 한국과 새로운 협력 틀을 모색해보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고 보는 것 같다. (…) 이번 수출 규제는 이쯤에서 한국에 부여해온 특수 지위를 철회하고 한국을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 중간에 있는 국가 정도로 대우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한 것이라 본다.”
미국과 중국의 역학관계 변화라는 새로운 국제환경 속에 한국 외교는 갈림길에 서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마침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제74차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오는 22일 미국을 방문하고 한미정상회담도 갖는다. 어떤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 글은 <아베는 누구인가>(길윤형 지음, 돌베개)와 <일본 우익 설계자들>(스가노 다모쓰 지음·우상규 옮김, 살림)을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 참고링크
[프레시안 2019-08-30] 지구적 관점에서 본 일본은, 끝까지 가기로 마음 먹었다
[신동아 2019-08-21] “트럼프 입만 보는 외교로는 일본 못 이긴다” 국제관계 전문가 장부승 일본 간사이외대 교수
경향신문 미래기획팀 기자. 사회부, 문화부, 정치부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미디어 환경 변화에 발맞춘 새로운 콘텐츠를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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