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은 이제 5년마다 한 번씩 한 정당에 투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 일정과 각각의 현안에도 개입하여 수백에서 수만에 이르는 동료 시민들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레퍼렌덤 실시 요청에 서명한 제안들에 대해 직접 결정하고 싶어한다. 각 개인의 직접적인 참정권은 수많은 현대 헌법에서 기본권의 핵심을 구성한다.
주로 레퍼렌덤 권한에 기반을 둔 직접 민주주의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직접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의민주주의에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보완책으로서 더욱 완전하게 시민 주권을 표현하고, 결정 과정에서 더욱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표결권을 양도할) 사람들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 및 국가, 그리고 머지않은 장래에 유럽연합을 위해서도 더 중요한 구체적인 현안들을 직접 결정하기 위한 제도이다.
정치적 참여는 기본적인 권리이다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온전히 실현되고 있지 않은 직접 참정권은 다양한 법률과 국제 조약 상에서 정치적 대리인들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의 성격 외에도 기본적 정치권으로 합의된 권리이다. 1966년 12월 19일에 발표된 “시민 및 정치인의 권리에 대한 국제 규약” 제25항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모든 시민은 직접적으로, 또는 자유로이 선출한 대리인을 통하여 정치에 참여할 (…) 권리와 기회를 갖는다.” 또한 1948년 12월 10일에 선언된 “세계인권선언” 제21조 1절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1) 모든 사람은 자신이 직접 참여하든 또는 자유롭게 선출한 대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참여하든, 소속 국가의 국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2) 모든 사람은 소속 국가의 공직을 맡을 평등한 권리가 있다.
3) 국민의 뜻이 정부 권력의 토대를 이룬다. 국민의 뜻은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일련의 선거를 통해 나타난다. 이 선거는 보통선거와 평등선거로 이루어지고, 비밀투표 또는 비밀투표에 준하는 자유로운 투표 절차에 따라 시행된다.
이탈리아 헌법의 여러 조항에 명시된 법률 제안으로서 국민의 입법발안권(이탈리아 헌법 제71조)과 함께 레퍼렌덤 권리 또한 규정되어 있다. 제75조는 이탈리아 국민은 법률이나 법령의 일부를 폐지할 권한을 지닌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탈리아 헌법 제123조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주들은 각 주 법률에 주의 행정법령이나 조례 관련 레퍼렌덤 권리를 규정할 의무가 있다. 제138조는 의회에서 2/3 이상의 찬성 없이 헌법 개정안이 승인되었을 경우, 시민들에게 헌법 개정 법률에 대한 확정적 레퍼렌덤 권리를 인정한다. 끝으로 헌법 제118조, 제4항은 다음과 같다.
▪국가, 주, 광역시, 현 및 기초자치단체들은 보충성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보충성의 원리: 행동의 우선권은 언제나 ‘소단위’에 있고, ‘소단위’의 힘만으로 처리될 수 없는 사항에 한해서 ‘차상급단위’가 보충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행동에 대한 우선권에 수반해 그 책임 역시 당연히 하위계층인 소단위에 있겠지만 소단위가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면 그 다음 단계로 책임을 져야 하는 차상위 계층이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역자 주─위키백과 참조>)를 기반으로, 공동의 관련 활동 전개와 관련하여 개인 혹은 단체의 자격으로 시민 자율발안을 장려한다.
이탈리아에서는 1990년 기초자치단체(코뮤네Comune)들의 자치권에 관한 법률 제142조가 기초자치단체 차원에서 레퍼렌덤 요구 권한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현재 모든 기초자치단체 법률에 이를 반영하고 있다. 트렌티노 알토아디제 자치주에서는 2015년부터 기초자치단체 법률 개정과 관련하여 확정적 레퍼렌덤 권한이 마련되었다. 유럽연합에서도 2009년 리스본 조약에 최초의 유럽 시민들의 참정권인 ‘유럽 시민들의 발안제’European Citizens’ Initiative: ECI를 도입하여, 2012년 4월부터 시행하였다.
정당만이 독점하지 않는 참여의 권리
현재 민주 제도의 발전 과정에서 정당은 국가의 시민들과 정치 기구들 사이에서 드라이브 벨트2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과거에 정당은 수많은 당원과 촘촘한 지부 조직망을 갖추고 시민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조직이었으며, 모든 정치 현안에 대한 토론이나 논쟁의 본거지 역할을 하며, 정치적 인물을 선발하거나 준비하기 위한 정치적 의지의 온상으로서 필수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 거의 모든 정당들이 그러한 초기의 역할에서 한참 멀어져 단순한 선거 운동 조직이자 자리 나눠 먹기의 도구로 변신했다. 집권 중앙당은 점점 더 온갖 이익 집단들과 투명하지 못한 로비와 불가사의한 권력 집단들이 오가는 장소가 되었다. 비록 득표율도 감소하고 정당원의 숫자도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기존 정당들은 사실상 국가와 사회 사이에 놓인 조직적인 본거지 역할을 악용하고 있다. 정당의 위기는 시민들의 직접 참여권을 늘려야 한다는 요구를 더 강화시킨 것이 틀림없다. 이탈리아보다 정당에 대한 신뢰가 덜한 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직접 민주주의는 대의 기구의 보완책으로서 도입되고 있다.
민주 국가에서 실제 주권자는 정당이 아니라 국민population, 즉 시민이다. 의회민주주의 헌법은 흔히 첫 조항에서 이 기본적 사실을 환기시킨다.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people에게서 나온다”(독일 헌법, 제20조 2항),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은 헌법에서 규정한 형식과 한계내에서 이를 행사한다”(이탈리아 헌법, 제1조 항목). 5년 동안 시민들은 정치적 권력을 자유비밀선거를 통해 기초자치단체와 주 의회 및 상, 하원
의원, 유럽의회(유럽 연합 의회 의원 선거 선출) 의원들에게 위임한다. 우리 대의원들에게 이양한 이 “백지 위임장” 외에도, 시민들은 레퍼렌덤 투표를 통해 직접적인 형태로도 자신들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참여 권리는 앞에서 보았듯이 대부분의 민주 헌법에 존재한다. 일정 인원 이상의 시민들이 특정 현안에 대한 결정을 내릴 권한을 주권자인 자신들이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 볼 때, 시민들은 그 결정권을 회복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직접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정치적 의지를 명확히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시켜 주며, 시민들은 정당이라는 여과 장치를 넘어서서 지방의회(기초자치단체의 의회나 주 의회)는 물론 의회의 직접 교섭 대상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게 된다.
직접 민주주의는 의회를 대체하지 않는다
직접 민주주의는 공권력의 분배라는 개념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준다. 단지 국가의 삼권분립과 여러 단계의 정부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유권자와 선출된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은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 특징이다. 시민은 수동적인 관객으로 머물도록 선고 받은 것이 아니라 발안권과 거부권을 부여받았다. 레퍼렌덤을 시행하는 순간, 결정권은 주권자 곧 투표권을 지닌 모든 유권자들에게 되돌아간다. 다시 말해 ‘1인 1표’라는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정치적 무게나 경제적 역량이 없는 사람이라도 직접 민주주의의 실시를 통해 동등한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의 존엄을 다시 확보한다. 동등한 정치적 권리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이다(차별 없는 보통 선거권을 얻기 위해 벌였던 투쟁들을 떠올려 보자).
레퍼렌덤 절차는 의회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지의 조합 측면에서 보완하는 것이다. 정당이나 선출된 정치인들, 곧 전문 정치인들의 생업을 빼앗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치인들은 가끔 특정 주제에 대해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치적 결정권을 시민들과 나누어야 한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기능을 수행해 낼 수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 시민들이 공동 목표를 위해서나 특정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를 조직해 낼 수 있을 때는 그들이 어느 정당에 속하는가, 혹은 개인의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인이나 정당과 얽힌 이권 관계에 상관없이 직접 정치적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직접 민주주의를 향한 직접적인 접근 경로가 생긴다.
어떤 경우든 의회민주주의에서 정치 조직은 시민단체가 아무리 비판적이며 적극적이고 열심히 감시하더라도 이들에게 권력을 양도할 수는 없다. 복수 정당제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기둥이다. 의회 내에서 반대당은 매우 중요한 견제 기능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독재 체제에서는 “국가 정당(일당제)”을 만들어 내어 자유로운 정치 단체 결성을 저지하고, 정치 세력이나 후보들이 선출되는 것을 방해하거나 걸러내며, 정보 기구에 대한 동등한 접근기회를 박탈하는 등의 행태로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이탈리아 헌법도 정당을 조직할 권리를 옹호한다. “시민들은 형법상 규정된 개별 정당 설립이 금지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전 허가 없이 자유로이 정당 설립의 권리를 지닌다”(헌법 제18조). 직접 민주주의는 구조적으로 안정된 정치 세력을 조직할 필요성을 없애지는 않지만, 시민들이 피부로 직접 느끼는 현안들에 대해 정당을 넘어 스스로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 직접 민주주의는 오늘날 오직 대의제 체제에서만 존재하며, 대의제 원칙을 대체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스위스에서도 99% 이상의 정치적 결정을 국민이 아닌 선출된 정치인들이 내린다.
소통을 실천하는 민주주의
현대 민주주의는 이제 고대 아테네나 중세 스위스처럼 시민들의 집회를 기반으로 하는 고전적 민주주의와 비슷하지 않다. 집회는 논의하기에는 좋지만,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집단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열리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정치적 대의원에 대한 자유비밀선거권은 투표소에서 하는 투표, 우편 투표, 컴퓨터 온라인 투표 등 여러 구체적인 형태의 레퍼렌덤 투표권과 같다. 어떤 경우 집회에서 하는 결정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스위스는 무엇보다 기초자치단체 의회 차원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 민주주의의 일반 원칙은 국민투표이다.
이 최종 행위가 있기 이전에 직접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정치적 의사일정이나 의제에 제시할 권한을 부여한다. 다뤄야 할 주제가 정부나 정당 내 권력 단체들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적극적인 시민 행동으로 제안된다. 의회라는 경로와 정치인들과 유권자들 사이의 직접적인 소통 외에도, 직접 민주주의는 시민들 스스로 시민의식을 가질 기회를 더해 준다. 투표를 매개로 시민들은 직접 자신들의 제안을 의회에 알리고, 동시에 공공 여론이나 다른 모든 동료 시민들에게도 알림으로써 그저 단순한 청원서가 아니라 명확한 요청 사항에 대한 서명을 이끌어 낸다. 일정 인원수의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들이 제안한 것을 실행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그들은 국민 다수를 설득해야 한다. 권력의 정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 소수만이 다루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정치적 소통 작업은 오늘날 새로운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더욱 수월해졌지만 홍보 캠페인을 펼칠 예산이 부족한 작은 단체들이나 발안에는 여전히 커다란 숙제로 남는다. 직접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열린 공공 장소에서 펼쳐짐으로써 소통에 바탕을 둔 정치를 만들고, 정치가 단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하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준다.
직접 민주주의를 ‘인스턴트 민주주의’나 여론 조사와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토론과 정치적 대립에는 시간과 숨돌릴 틈이 필요하다. 대체로 레퍼렌덤 절차는 수년에 걸쳐 길게 이어진다. 시민들은 더 이상 그저 관객의 역할을 하거나 수동적으로 결과를 수용하고 정부에 청원이나 탄원을 하는 피지배자의 역할을 도맡는 위치에 있지 않으며, 사실상 발안을 하고 결정 과정에 영향을 주거나 박차를 가하거나 제동을 걸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의 대상은 늘 구체적 문제이며 현안이지,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나 선거도 아니다.
직접 민주주의의 영혼은 토론이다. 국민발안권은 달리 해결되지 않을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온 사회에 맞서고자 투신하는 소수 시민들의 권리로 여겨질 수도 있다. 확정적 레퍼렌덤은 이미 논의를 거쳐 의원들의 승인을 받은 어떤 법령에 대해 의회 밖에서 추가 토론을 요청할 소수자들의 권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국민의 권리 모두 우리 사회에서 더욱 활발한 정치적 토론을 조성하여, 수많은 크고 작은, 사적이고 공적이며, 즉각적이거나 조직된 토론을 일으킨다. 이런 토론은 해당 발안의 정치적 정당성을 높여 주거나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발안권의 경우 새로운 생각을 더욱 정당화하고자 하는 반면 레퍼렌덤을 통해서는 아직 시행되지 않은 법령에 맞서서 유권자들이 이를 저지하려 한다. 이러한 토론이 더욱 빈번하고 진지할수록, 비판의식이 더욱 형성되고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지 않는 선택이나 실수를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다.
사회적 불평등의 개선책으로서 직접 민주주의
산업화된 나라의 민주 사회는 구조적 불균형이라는 실수를 저지른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에서도 경제력이 자신을 내세우고 무게감을 얻고 정치적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돈과 시간, 전문 지식과 미디어 권력은 정치 생활의 결정적 요소들인데 하나 같이 얻어내기가 녹록치 않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자원의 공평한 분배는 없다. 그러므로 민주 사회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정치 의지의 형성 과정, 곧 정치적 관심을 조직하는 일이 미디어 권력을 갖춘, 자금력이 막강한 단체들 사이에서만 독단적으로 펼쳐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레퍼렌덤 권리는 가진 것도 영향력도 적은 시민들 편에서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한다. 수입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 각자가 공동 목표를 중심으로 단체를 결성한다면, 이슈와 현실 참여를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절차를 개시할 기회를 얻는다. 여기서 일상에서 주어지는 과제는 시민 과반수 이상을 설득하여 레퍼렌덤 국민투표 시 그들 제안에 투표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막강한 권력과 거대 이익 집단들 또한 레퍼렌덤 도구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정치적 제안을 제기할 수 있으며 성공한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나 레퍼렌덤 캠페인 차원에서 이러한 권력들도 마찬가지로 어쨌든 전체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을 설득해야 한다. 그저 정부의 영향력 있는 몇몇 집단이나 정당의 저명 인사 몇 명 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일하는 것은 막후의 로비 활동과는 다르다. 레퍼렌덤 투쟁의 용병들은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서 동등한 “무기”를 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는 의회에서 수렴되지 못한 분위기나 관심, 요청들을 사회에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그 거울은 한 사회의 정치 상황을 비추지만, 또한 비추는 모습에 대해 책임을 진다. 레퍼렌덤에 대한 법률에서 규정한 최소 인원의 시민들이 내놓은 제안은 어떤 사안이든 정당하듯이, 수적으로 어떤 문제에 도전하거나 맞서는 데 필요한 인원을 겨우 갖춘 소수 집단의 요청 또한 정당하다. 정치 무대는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제안의 정당성 여부는 투표함에서 드러날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도덕적 정당성은 아니며, 의회 내의 표결이나 선거와 같은 숫자의 힘에 기초한 정당성이다. 일종의 민주적 게임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게임에서는 어느 누구도 애초부터 다른 이보다 더 빛나는 권력을 가졌다고 우쭐댈 수 없다. 직접 민주주의는 광범위한 공공토론을 거친 후, 기본적으로 한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입장들을 부각시킨다. 이는 마치 스냅 사진처럼 바뀔 수도 있지만, 어쨌든 투표인 과반수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정당성을 얻는다. 자신이 속한 정치 집단의 강령에 의해서만 표를 행사할 소지가 다분한 소수의 의원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항은, 직접 민주주의는 해당 사회에 사회적 통합의 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레퍼렌덤을 계기로 시민사회와 정계의 대표들, 거대 조직이나 언론계 모두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토론하고 경청하고 입장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행동하도록 초대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이 더 좋은 위치를 선점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에게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할지 투표소에서 결정하기 때문이다(단, 정족수가 없을 경우). 이런 방식으로 시민들은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자기 의사를 표명하고, 여론을 형성하며, 정보를 잘 갖추고, 다양한 입장을 마주하게 된다. 직접 민주주의는 모두를 관여하게 하며 모두가 참여하고 개입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은 법규정에 달려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처럼 법이 잘못되어 있다면, 공공 토론은 잘 뿌리내리지
못한다. 장기적으로 직접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질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결속력도 강화시킨다.
레퍼렌덤 권리: 아직 갈 길이 먼 이탈리아
이탈리아 헌법 또한 직접 참여를 강조한다. 법률 폐지를 위한 레퍼렌덤권 조항에서만이 아니라 헌법 제118조 4항에서도 직접 참여를 강조한다. 이 조항은 소위 말하는 ‘수평적 보조성’horizontal subsidiarity(다양한 사회 즉 주, 국가, 국제적 차원에서 사람들의 공동체는 언제든 각 개인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의미─역자 주)을 규정함으로써, 공익 활동의 전개를 위해 시민들과 각 개인, 단체들의 자율적 발안을 장려한다.
법률폐지, 법률제안 및 자문형 레퍼렌덤 방식이 2001년 이탈리아의 5개 자치주 법령에 보강되었다. 유감스럽지만 이 개혁은 이탈리아 각 주와 코뮤네Comune(이탈리아의 기초자치단체─역자 주)에서 매우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형태로 적용되었다.
주 관할 사항에 대한 주 차원의 레퍼렌덤 권리는 이탈리아 헌법 123조 3항에 규정되어, 각 주에 해당 법률의 폐지, 제안 및 자문 레퍼렌덤 실시를 규정하도록 자유재량권을 부여한다. 2001-2011년에 걸쳐 주 입법권이 강화되었으며, 수년 간 재정적 연방제를 논의하고 준비하기까지 했지만, 나중에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2017년 10월 베네토 주와 롬바르디아 주에서 자문형 레퍼렌덤이 실시된 후, 주 단위 자치 수준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적어도 북부의 (자치주가 아닌) 일반 법률 체계를 가진 주에서는 그랬다. 주의 역할이 더 커질수록, 시민들이 주 의회와 주 정부에 대한 통제 역할이나 국민발안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더욱 적극 참여해야 할 필요성도 커진다.
최근 몇 년간 토스카나나 에밀리아 로마냐 같은 몇몇 이탈리아 주들은 주 조례와 규칙을 통해 코뮤네나 주 차원의 심의 과정에 시민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주 가운데 어느 주도 의도적으로 레퍼렌덤 (발안 및 국민투표)권을 완전히 도입하거나, 시민들 편에서 그 권리를 활용하기 위한 법률을 채택하거나 참여 정족수를 폐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구속력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시민 참여와 자문은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 위한 준비 과정에 시민들을 참여시키는 데는 효과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언제든 주권자인 시민이 원할 시에는 시민에게 최종 발언권을 주고, 서명을 모아 어떤 논제에 대한 시민들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의 직접 참여는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미 없는 관행이 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선출된 대리인들을 시의적절하게 통제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이끌어 내며 명백히 국민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부측의 결정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하다.
시민들에게 더 가깝고, 정치적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수월한 코뮤네(기초자치단체) 차원에서도 이탈리아 지방 행정기구 법령TUEL 제8조에 입각하여 레퍼렌덤이 법규에 도입되었다. 2000년부터 법적 의무가 생겼지만 다수의 행정기구들이 전혀 실행 법규를 마련하지 않음으로써 법 규정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코뮤네에서는 그 이상으로 자체 법률에 법률 자문이나 폐지만이 아니라 법률 제안을 위한 레퍼렌덤 또한 도입했다. 그러나 코뮤네 차원에서 레퍼렌덤의 구체적인 활용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걸림돌이 있는데, 참여 정족수, 정부 관료 앞에서의 서명 공증 의무, 높은 서명 인원수, 법률로 규정된 내용 외에 레퍼렌덤에 부칠 수 있는 사안 수효의 엄격한 제한, 또는 유럽 및 국가 차원의 선거 시 동시에 국민투표를 실시하도록 규정하지 않는 것 등이다.
다른 한편으로 레퍼렌덤 도구의 개혁안들이 계속 진행되지 않았는데, 엘리트 정치인들, 특히 집권 정당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기존 정당들은 아직도 엘리트주의에 사로 잡혀 국민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듯 참여에 적대적인 법률을 고려한다면 이탈리아에서 레퍼렌덤 표결이 드문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실행 도구가 없고, 법규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기초자치단체 단위에서조차 제대로 정치적 실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초자치단체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안건에 대해 시민들이 최종 발언을 할 수 없을 때, 의원들과 행정관들에게 시민들의 제안이나 선호를 진지하게 고려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다른 한편으로 정보 전달이나 공익 관련 현안에 대한 이해 및 시민들과 행정관들 사이의 직접 대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민들은 적절하게 다른 정치적 선택권에 대한 여론을 조성할 수조차 없다. 이런 두 가지 방식의 참여 모두 시민들이 각 개인으로나 사회 단체로서 공동 심의와 결정 과정에 들어가는 데 꼭 필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시민들의 직접 정치 참여가 우리의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대의제 체제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훼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에서 거의 모든 정치적 결정들은 계속해서 기초자치단체(코뮤네)의 의회와 정부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대의 정치의 장소들 외에, 시민, 관료, 전문가, 전문 관료, 선출된 정치인들이 동등한 선상에서 함께 만나는 공공 장소들이 더욱 생생히 부각된다. 이런 방식으로 시민들도 공동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함께 일하고, 개인적으로도 책임을 맡을 동기를 얻게 된다.
직접 민주주의의 장점
직접 민주주의의 목표는 시민들에게 일정한 조건 하에서 입법권의 일부를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주권자들 편에서 함께 중대한 정치적 현안들을 재결정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의회의 교착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모두가 책임 의식을 지니고 참여하게 하며, 시민들의 역할을 강화하면서도 우리 민주주의의 대의적 본질을 그대로 지킨다. 모든 정치체제는 가장 작은 공동체나 기초 지방 차원에서도 의회 기구가 필요하다. 그 주요 목표들은 다음과 같다.
▪직접 민주주의는 민주적 대의 기관들에 필요한 통합책이다. 많은 시민들은 선거를 치르고 나서도 만족스럽게 느끼지 않는다. 국민의 대표자들이 일단 선출되면, 시민들은 향후 5년간 더 이상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없으며 선출된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백지 수표를 맡긴 듯한 기분을 갖는다. 국민발안과 확정적 레퍼렌덤은 이 “현안에 대한 목소리”를 일부 되찾아 주고, 정치인들은 시민들과 대화나 직접 협상을 시작하여 시민들의 레퍼렌덤 제안에 응답할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는 대의 기관을 대신하지는 않으며, 선거일 외에도 시민들의 정치력을 확장시킨다.
▪직접 민주주의는 제동장치 역할을 한다. 그 어떤 정치도 시민들 다수의 의지를 거스르지 못한다. 꽤 많은 국민들이 통치자들이 선택한 것에 선뜻 동의하지 않을 때 확정적 레퍼렌덤을 요청한다. 이 간단한 도구가 정부와 시민들 사이의 지나친 단절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잘 법제화된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정치인들은 항상 국민들의 정서를 의식해야 한다. 지나치게 유권자들의 뜻에서 멀어지게 되면 “국민 거부권”을 행사하기 위한 레퍼렌덤이 요청될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는 개혁의 동력이다. 법제안을 위한 레퍼렌덤은 대개 다양한 시민 집단에서 시작하여 정당으로 귀결된다. 능동적인 시민들이 함께 모여 정당이나 정치인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들의 제안을 정치적 차원에 제시한다. 의회에 들어가지 못한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직접 참여할 수 있다. 통치자들은 더 이상 정치적 현안에 대한 생각과 해결방안을 독점할 수 없다.
▪직접 민주주의는 정치력을 더 키우도록 자극한다.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기에는 지닌 정보가 너무나 적다. 마치 정치인들만이 자신들이 모든 것의 전문가인 듯 행세한다. 많은 결정이 막후에서, 전문가 위주의 독단으로 이루어지며, 공공 토론도 없다. 직접 민주주의에서는 레퍼렌덤이 있을 경우 이해 관계가 맞물려 있는 모든 시민들은 판단할 만한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종종 레퍼렌덤 이전에 광범위하고 논란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사안을 명확히 하는 토론이 펼쳐진다.
▪직접 민주주의는 구체적인 사안들에 관한 것이다. 레퍼렌덤에서는 누군가를 선출하거나 인물들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와 잠정적인 해결책들이 논의의 중심이다. 많은 시민들은 일련의 정치적 현안에 대해 현저한 역량과 지식을 획득하는데, 종종 그러한 현안에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참여시킴으로써 다수가 동의하는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유익하다.
▪초대받은 사람은 거절하지 않는다. 종종 “정치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말을 한다. 결정에 대한 영향력이 없는 시민들은 포기하고 참여에 소극적이다. 레퍼렌덤 도구들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격려한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뭔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느낄 때, 정치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다.
▪많은 시민들은 직접 민주주의로 함께 결정을 분담한다. 정치인들이 내리는 결정은 그저 이익 집단이나 각 정당이 바라고 지지하는 결정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반면, 레퍼렌덤으로는 다수의 입장이 부각되며 패배한 소수자 또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민주적인 정당성을 갖게 된다.
▪직접 민주주의는 더욱 책임감 있는 정치를 가져 온다. 매달 의회나 지방 의회는 큰 영향력이 있는 법률을 승인하는데, 그 법은 종종 현재 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삶의 조건들 또한 좌우한다. 사회적, 생태학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장기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때는 적어도 국민 대다수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는 것이 유익하다.
직접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달한다는 것은 계급적 권력이 덜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종 사람들은 재력이나 큰 로비 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긴다. 직접 민주주의로 로비 능력이나 재력이 없는 시민들도 의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지니게 되며, 공공 자원의 남용이나 낭비를 막을 수 있다. 이는 약자와 소수의 힘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달하는 것은 사회가 더 평화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직접 민주주의 도구들은 정치인들에게 맞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인들에게 국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 준다. 엄청난 로비력으로 인해 분배의 정의가 흐트러지고 약회되는 것을 다시 균형을 잡아 주기 위해 어떤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로비로 얻어내려 하는 프로젝트나 목표가 국가나 시민들에게 유해하고 비용이 많이 들며 심지어 무모한 것이라면, 시민들은 긴급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적 평화도 커진다. 그 누구도 모든 것이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다른백년 출범 3주년을 기념하며 자축하는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더 많은 권력을 시민에게” 제목으로 21세기 새로운 흐름인 직접민주주의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현재의 한국정치로는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1%의 소수를 위한 정치에서 99%의 시민을 위한 정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비례성을 100% 강화하는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하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비판하고 결정하고 통제하는 민치 – 시민권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책의 내용을 격주를 통하여 약 10개월 간 연재하고자 합니다. 직접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시중의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을 통하여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백년 출범 3주년을 기념하며 자축하는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더 많은 권력을 시민에게” 제목으로 21세기 새로운 흐름인 직접민주주의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현재의 한국정치로는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1%의 소수를 위한 정치에서 99%의 시민을 위한 정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비례성을 100% 강화하는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하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비판하고 결정하고 통제하는 민치 – 시민권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책의 내용을 격주를 통하여 약 10 개월 간 연재하고자 합니다. 직접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시중의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을 통하여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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