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아래의 글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 내 한국연구센터의 객원(fellow)연구원으로 있는 브라진스키 교수가 지난 11일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칼럼을 본인의 동의에 따라 한글로 번역한 내용이다. WP게재 당시 미국 내 시민사회에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댓글 역시 당일에만 백여 개 이상 달릴 정도로 독자들의 열기가 뜨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분 들의 삼성 휴대폰과 태블릿 가격이 곧 오를지도 모른다. 이유는?
과거 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잔혹행위에 관한 분쟁으로 인해 일본과 한국이 경제전쟁 직전의 상황에 맞닥뜨려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은 한국경제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무역제재의 조치를 실시하였다. 일본은 수출절차 우대국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였으며, 특히 반도체 소재의 수출을 규제하였다. 한국 대통령 문재인은 일본에 이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언명했으며, 맞대응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이 대상 중 일부 반도체소재를 대한민국으로 수송하는 것을 지난 수요일에 허가하였지만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일본의 행보는 이미 메모리칩 가격의 급등을 불러 왔으며, 글로벌 기술시장에 냉각효과를 주고 있다. 도쿄는 제재의 이유로 국가안보라는 문제를 들고 나왔으나, 대부분의 전문가는 이를 제2차 세계대전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기업들의 배상책임을 명시한 한국 대법원의 최근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보고 있다.
두 나라는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와 관련하여 수십 년간 의견을 달리해 왔다. 과거 잔혹행위에 대해 청산하지 못한 것은 이제 동아시아를 넘어서는 세계적 규모의 경제적 파급을 가져올 지 모른다. 따라서 보다 평화롭고 번창하는 미래를 위해, 해당 국가들은 아무리 추한 과거라 하여도 이와 대면하여야 한다.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의 끝에 제국을 포기한 이후로, 한국과 같은 과거 식민지에는 일본에 대한 뿌리깊은 분노가 남아 있다. 더구나 가해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이에는 수십 만 명의 ‘위안부’를 성적노예로 동원한 것, 그리고 한국의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배우도록 강요함으로써 한국문화를 말살시키려 한 것 등이 포함한다.
1945년 미군이 일본과 남한을 점거하였을 때, 일본과 과거 피해자들간의 화해는 우선 순위가 높지 않았다. 대신, 미국은 피해국 당사자의 과거에 대한 분노를 무시하고 식민지 시대에 형성되었던 경제의 관계망을 재건하게 하려 하였다. 공산주의를 저지하는데 초점을 두었던 미국은 일본과 한국이 연합하여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해야 한다고 믿었다. 때문에 미국 외교관들은 (한국민의 정서에 반하여) 일본정부와 한국정부가 협력하고 역사적 분쟁을 빠르게 해결하도록 압박하였다.
결국 1965년 한국은 존슨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 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는 두 자리수의 경제 발전율을 달성하고자 하였고, 선임 대통령들과 반하여 일본과 타협할 용의를 갖고 있었다. 조약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상당히 좋지 못하였으나, 박정희는 강력한 공안기구를 동원하여 정치를 독재적으로 통제하였고 덕분에 국회에서 조약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 조약은 일본과 한국 간 새로운 경제관계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일본은 한국에 8억 달러 상당의 지원금과 차관을 제공하였고, 한국정부는 일본이 식민지배와 대동아 전쟁 중 한국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식적으로 배상받을 권리를 포기하였다.
이후 20년간, 한국은 약속된 개발원조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일본무역과 투자의 주요한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파트너십으로 한국과 일본경제가 큰 이득을 얻음에 따라 서울과 도쿄는 과거사에 대해 다투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해당 조약은 일본이 과거 잔혹행위에 대한 청산을 피할 수 있게 하는 면피용이기도 했다. 두 정부 모두 협상 시 피해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고, 때문에 조약은 일방적으로 개별 시민이 일본정부에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무효화시켰다. 대신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자들에게 지급할 수 있는 배상금을 일본으로부터 총액형태로 지급받았고, 일본정부는 과거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이후 군사정권이 민주정권에 자리를 내어 줌에 따라, 이전에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였던 일본 잔혹행위의 피해자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일본군에 의해 성적노예로 동원된 피해자들인 ‘위안부’가 가장 큰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이전의 조약은 그들의 고통을 다루기에는 완전히 부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부당함이 두 나라를 여전히 갈라놓고 있다. 한국인들의 분노 대부분은 피해자들에게 재정적 보상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도 없이,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일본정부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2015년, 박정희 딸인 박근혜 전 한국 대통령은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50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타결시킨 조약 때와 거의 다름없는 수준으로 결함투성이의 합의를 일본과 체결하였다. 일본은 과거 ‘위안부’들을 지원하는 재단에 총 890만 달러를 출연하는데 합의하였다. 협상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또 다시 배제되었고, 합의는 거센 비판을 불러왔다.
문재인은 입장을 180도 바꾸어 조약에 의해 지원을 받던 재단을 지난 11월에 해산시켰고, 합의를 무효화 하였다. 대신, 문재인은 한국과 일본기업이 모두 기여할 수 있는 합작재단을 새로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도쿄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에 관하여 최근 한국 사법부가 우호적인 판결을 내린 것은 문재인의 제안과 같은 원칙을 반영하고 있다. 일본기업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돈이나 배상금에 대한 기대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한국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지율이 악화되었을 때 일본을 공격대상으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역사와 관련한 분노가 존속하도록 그냥 두는 것은 거의 모든 대통령들이 한자리 수의 지지율로 집권을 마무리하는 나라에서 유용한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역시 속죄에 대한 무성의한 태도로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1990년대 이후로 일본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과거 과오에 대한 사과와 뉘우침을 표하는 성명을 수십 번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해명발표 후 악명높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 그들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하는 행위들에 참여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이러한 성명의 취지를 훼손하였다.
일본사회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저지른 일을 인정하고 뉘우침을 표하지 않았다. 독일과 달리, 일본은 공공 추모관이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잔혹행위를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교육하기 위한 박물관을 만들지 않았다. 현재 총리인 아베신조는 전임의 총리들에 비해 역사적 문제에 대해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해왔으며, 현재 내각 하에서 더 이상의 사과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20세기 초 일본의 침략과 전쟁 행위들은 단순히 실리를 추구한 것이라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일본의 젊은 세대 역시 일본의 지난 과오에 대해 사죄해야 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경향성 모두가 국수주의적으로 공유된 기억을 확고하게 하며, 현재 진행중인 무역분쟁을 악화시키고 있다.
급격히 확대되고 있는 무역전쟁이 지역과 세계경제에 파문을 일으키기 전에 일본과 한국이 타협점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분쟁이 해결된다 하여도 일본이 해당 이웃국가들과 화해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노력을 보이지 않는 이상, 아시아는 또 다른 경제적 혹은 군사적 위기에 항상 불안정하게 근접해 있을 것이다. 곤란한 역사를 청산하지 않는 것은 양국 간 번영의 전진을 제한할 것이고, 세계 모두가 이러한 결과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 있다.
Gregg A. Brazinsky (브라진스키 교수)
조지 워싱턴 대학교 내 한국연구센터의 객원(fellow)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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