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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oblivion’이라는 제목의 영화도 있지만 여기서 망각을 떠올리게된 이유는 첼리스트인 스테판 하우저가 연주한 피아졸라 작곡의 망각oblivion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게 되다보니까 저녁마다 산책 중에 자주 듣게 되는데 어느 날 문득 뜬금없이 망각과 뇌구조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뇌 과학에서는 측두엽의 해마가 일반적으로 새로운 사실을 학습하고 기억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측두엽의 해마는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후상부 두정엽도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고 자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존재와 구별하여 공간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후상부 두정엽 못지않게 스스로 시간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측두엽의 해마 또한 하나의 인격체로서 생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뇌 과학은 신지학의 대가인 크리슈나무르티의 우주 및 타자와의 합체 경험이 지고한 정신적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다만 후상부 두정엽이 기능상 장애를 갖게 되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함에 따라 발생한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정신이상 현상이지 결코 직관지의 발현이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만 필자는 과연 해탈이 측두엽 해마의 이상현상에 불과한 것인지 밝혀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특히 일반적으로 어떤 존재가 과거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과거 기억에 담긴 정보의 동일성 여부와 기억의 통시적인 연속성 여부가 좌우하고 있기 때문에 측두엽 해마는 시간적인 측면에서의 정체성을 구성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에 대한 기억이 동일하고 나아가 그러한 기억들이 현재 기억과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런 기억을 지닌 존재 사건들을 우리는 동일한 인격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크리스토펴 코흐는 ‘삶은 기억이다’라고 축약하였으며 영화제작자인 부누엘은 ‘나는 나의 기억이다’라고까지 갈파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의 역할에 대해 실제로 이루어진 HM(헨리 몰레이슨)이라는 간질환자에 대한 실험에서 수술 실수로 측두엽 해마를 손상당한 그는 평생 30초 이전 사건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여 그는 30초마다 기억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항상 30초마다 새로운 인격체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그의 물리적 사건(육체)은 연속성을 이루지만 심리적 사건(정신), 즉 기억은 계속 새롭게 형성된다할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그의 인격적 정체성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남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몸이라는 물리적 사건의 시간적 연속성외에도 마음이라는 심리적 사건의 시간적 연속성이 중첩된 존재라 할 것이기에 만약 마음, 즉 기억의 연속성이 없다면 동일한 인격체라고 할 수가 없다할 것인데 그렇다면 해마가 손상되어 심리적 사건의 연속성이 결여된 위 HM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인격체라 할 수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는 존재론의 관점에서도 야기되는 문제인데, 예를 들면 실체론의 입장에 서게 되면 존재라함은 단일한 속성을 지닌 고정불변의 실체를 의미한다할 것이므로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주에는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는 실재하지가 않는다할 것입니다.

즉, 뭇 존재는 시공간 속에서 끝없이 생성하는 존재이기에 고정불변의 실체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할 것이므로 결국, 단일한 속성을 지닌 동일한 존재는 실재할 수가 없다할 것이기에 결국 실체론의 입장에서는 존재의 정체성을 묻는 것은 관념적 세계에서는 가능하지만 실재계에서는 아예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무의미하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실체론의 입장에 서게 되면 위에서 본 HM은 전혀 동일한 실체가 아니므로 정체성에 대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할 것입니다.

한편 실체론과 달리 생성론, 특히 사건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존재라함은 사건들의 연속적 인과 과정이라 할 것이기에 만약 물리적, 심리적 사건들이 과거, 현재, 미래를 걸쳐 연속적으로 전개된다면 이는 같은 정체성을 지닌 동일한 존재라고 평가할 수가 있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를 사건의 연속적 과정으로 보는 생성론의 입장에서 서게 되면 과거의 정보와 현재의 정보가 인과적으로 연속성을 가지고 전개되기에 정보에 대한 기억이 동일하고 또한 미래도 기억이 연속된다면 이는 동일한 존재, 즉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라 할 것입니다.

만약 확대해서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의 윤회도 당연한 존재 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즉, 윤회라 함은 죽음이후에도 죽음 이전의 물리적, 심리적 상태와 동일한 상태의 정체성이 유지되어 연속적으로 존속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삶과 죽음을 전후하여 물리적 사건과 심리적 사건이 연속적인 인과과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므로 윤회는 존재 사건들의 연기를 삶과 죽음의 관점에서만 특수하게 표현한 개념에 불과할 것일 뿐이므로 결국 뭇 존재는 연기적으로 윤회한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물리적 사건은 연속되는데 심리적 사건의 연속성이 사라져 버리거나 차단, 단절되어 버린다면 그러한 사태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해석해야할까요?

달리 말하면 기억이 단절되거나 사라져버려 하등의 과거 정보를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의식활동의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이에 대해 위에서 HM의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현대 뇌 과학에서는 해마를 손상당해 과거의 기억을 저장하지 못하는 경우에 흔히 치매 등으로 이름하며 정신적 질환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심리적 사건의 연속성이 사라져 버리는 사태를 정신병리학의 측면만 들여다보면서 단순히 질병으로 치부할 수만 있을까요?

예를 들면 위에서 HM은 비록 30초 전의 기억을 재생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연속적인 정체성을 구성하지는 못했지만 결코 정신병리학적으로 비정상의 판정을 받은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평생의 훌륭한 인격체로 온전하게 살다 갔습니다(이는 마치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평생을 바쳐온 했던 푸코의 기획을 증명하는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에 대해 불교는 아주 생소한 해석을 내립니다.

예를 들면 불교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비록 심리적 사건의 연속성이 사라진 사태에 대해서도 정신병리적 진단을 내리지 않고 도리어 역발상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유식사상은 말하기를 사건에 대한 정보를 아뢰야식storage이라는 제8식에 저장을 하게 되는데 이를 ‘업식’이라고 부릅니다. 즉, 제8식에 과거 사건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가 제7식determination인 마나식을 통해 분별을 한 후에 밖으로 나타나 의식 전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인간은 무의식인 제7식과 제8식의 지배를 받아 결정론적으로 행동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불교의 유식사상이 뇌 과학, 즉 신경과학의 유물론적 결정론과 다른 것은 불교는 지관 수행을 통해, 특히 마음공부인 정념sati 수행을 통해 무의식을 삭제하고 순수의식에 따라 자유자재하게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물론 선불교에서는 참선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북방불교는 지, 즉 사마타 중심으로 마음공부를 하고 초기, 남방불교는 사티 수행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 행복을 위한 수행은 병행해야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과거 기억의 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음을 관하는 사티 수행을 통해 무의식인 아뢰야식을 삭제delete하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자유의식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은 뇌 과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숙명론적인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무애자재하게 자유의지로 살아간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불교에서는 위의 HM의 상태를 비정상적인 뇌질환상태가 아니라 도리어 과거의 업식을 벗어난 자유의식을 지니 무애자재한 상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하다면 해탈이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해탈이라 함은 탐과 진과 치의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의지로 무애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하다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과거의 업, 즉 무의식의 아뢰야식을 삭제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심리적 사건의 관점에서 바라본 해탈이 아닐까요(물론 물리적 사건에서의 해탈은 그리 간단하게 해석할 문제가 아닌 것이 인간 또한 물리적 토대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으므로 모든 인간이 이를 적정하게 보장받는 경제적 생산양식은 존재론적으로 더욱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즉, 과거의 사건 정보를 보관하는 기억을 삭제하고 빈 바탕의 마음인 도화지위에 무애하게 미래 사건을 그려가는 것이 해탈이 아닐까요?

그러하다면 위에서 본 HM은 해탈한 존재가 아닐까요?

물론 극단적인 표현을 하였습니다만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여 항상 탐진치라는 바람 앞에 너무도 가볍게 흔들리는 깃털 같은 존재입니다.

이러한 바람 앞에서 우리는 탐진치에 대처해온 습관적인 타성으로 젖어있는 과거 기억의 업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관성적으로 따라만 갈 때 우리는 영원히 번뇌의 노예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실체론에 기초하여 만들어온 서구문명이 탐진치에 대처해온 방식, 즉 인간의 소비능력을 넘어서는 지나친 과잉 잉여를 축적하기 위하여 타자를 약탈하고 지배해오던 과거의 방식에 대한 강고한 기억은 우리를 더욱 새로운 존재론인 생성론(우주는 한 몸으로 기꺼이 서로를 나누며 상생하는 유기체를 만들어 가는 존재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여 우리는 이제라도 과거의 기억을 삭제하는 수행을 통해, 물론 각 종교마다 숱하게 많은 수행방식이 있습니다만 결국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을 통하여 과거의 업을 벗어나서 자유자재하게 순수의지로 선택하는 해탈의 삶을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하여 과거의 기억, 과거의 사건, 과거의 정보에서 해탈합시다.

– 기억으로부터 해탈을!

박헌권

수십 년간 시민운동의 경험을 통하여 얻은 성찰을 토대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의 융합을 통하여 21세기의 새로운 존재론과 우주론을 추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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