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세기 동안 인간의 물질적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자본제 시스템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자유주의 그리고 시장기제와 함께 출범했다. 그러나 성취한 풍요 뒤에는 1%의 소수를 위하여 대부분의 시민들이 극빈적 실업 상태 아니면 현대적인 노예 생활을 감수해야 하는 역설적 조건이 형성되었으며, 통제불능인 자본의 탐욕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와 극심한 자원 낭비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자연 훼손이 심각해지면서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올여름 지독한 더위는 이러한 위기를 피부로 생생하게 체험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팽창과 이익 실현이 주동력인 사회경제적 활동 범위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군사적 영역은 국가 또는 지역 단위에 머물면서 패권 국가 간 또는 지역 간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어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우려가 점증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라 이름 짓든 현재의 사회경제적 시스템과 이에 대응한 정치군사적 체제로는 결코 인류의 미래가 안전하게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의 한 축을 이루는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필자가 지난해 1월 9일 자 ‘다른백년 칼럼’에서 자세히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관련기사: ‘한국, 자유주의 결핍인가, 과잉인가’ )
존 롤스는 ‘정의론’이라는 저술에서 수요와 공급의 합리적 조정과 자원의 배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정보와 판단기준을 제공해 주는 시장기제는 체제와 상관없이 가치 중립적으로 적용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자본주의에서 역할을 하듯이 사회주의에서도 공히 같은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다는 해석으로 현재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중국의 괄목할 경제발전의 성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해당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핵심적 주제는 시장의 기제를 넘어서 배후에 존재하는 이념적 성격인 ‘인간 품성에 대한 견해’와 ‘부와 빈곤의 원인’에 대한 해석이다.
소위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이데올로기에 항상 인용되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완벽하게 조작된 신화적 거짓말이다.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윤리학에 속하여 있던 경제라는 영역을 별도로 분리하여 독립된 학문으로 개척한 스미스는 단순히 분업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노동가치설, 자본축척론, 특혜와 독점에 대한 비판 등을 주창하였고, 주 연구 분야인 윤리학 분야의 저작 ‘도덕감성론’을 통하여 인간사회의 도덕과 정의, 질서 등 광범한 주제를 다루었다.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원용된 표현과는 반대로 그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평생 상당한 기부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공동체의 도덕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곡간에 쌀이 가득해야 인심이 넘친다’는 판단으로 물질적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분업이라는 천재적인 발상을 저술한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수공업적 가내공업에서 공장제 대량생산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고, 다수의 가내 수공업적 공급체계라는 조건 속에서 이상적인 분업과 시장적 균형이론이 실제로 잘 작동하였다. 본디 애덤 스미스는 오히려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가공의 ‘스미스’와는 정반대로 미래에 다가오는 공장제적 대량생산이 가져올 독점적 폐해를 매우 걱정을 했다고 한다.
애덤 스미스만큼 잘못 와전된 또 다른 인물이 찰스 다윈(1809~1882)이다. 위대한 그의 진화론은 생명과 자연생태계를 상호관계와 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실천적 방법론이고, 완성된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 조건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화두(話頭)였다. 그의 자연(환경) 선택론은 여전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대상이 생물계의 개체에서 군락으로, 그리고 인간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역사로 영역을 확장되고 있는 주제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스펜서 등 일군의 학자들이 진화론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같이 저급하고 잘못된 이론으로 축소·해석하면서, 자본제 생성 시기에 맞불려 살인적 노동자 수탈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었다. 성장기에 있는 유소년들을 하루 18시간 이상 장기간 노동시키는 것도 약육강식의 논리로 정당화되었고, 뼛골이 빠지도록 일을 해도 가난과 빈곤을 못 벗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못난 탓으로 돌려졌으며, 탐욕스러운 귀족과 자본가의 풍요 역시 적자생존의 자연스러운 법칙에 따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다.
현대 생물학적으로 밝혀지는 내용은 인간의 DNA 대부분은 잠재적으로 불용상태에 있으며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에 따라 활성화되면서 부단히 다양하게 적응하고 진화한다고 한다(stochastic theory). 인간의 사회적 진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하버드 대학의 거두 로베르토 M. 웅거 교수는 <주체의 각성(The Self Awakened)>(이재승 옮김, 앨피 펴냄)에서 인간은 고정된 품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환경과 제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가소적(plastic) 가능성의 존재임을 확인하고 있다.
‘경제적 동물’과 ‘약육강식’이라는 단순한 규정과 천박한 이론이 자본증식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탈바꿈 등장하여 시장과 결합하면서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으로 찬란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던 인류의 역사를 오늘날 끝없는 수탈과 처참한 전쟁과 고통스러운 빈곤, 그리고 노동소외로 퇴행하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자본의 탐욕과 이를 정당하게 포장하는 논리와 실제로 작동하는 시장이라는 기제가 함께 맞불려 칼 폴라니가 표현했듯이, ‘악마의 맷돌’로 변질되면서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는 괴물이 된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구호는 실상 잘못된 현실을 은폐하고 기존의 기득권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강력한 지배의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시장은 도구일 뿐이다.
오히려 최근의 현대적 게임이론 등을 통하여 밝혀진 바에 의하면, 도덕의 핵심인 인간의 이타성은 긴 역사를 통하여 공존의 규칙으로 수용되고 정착된 것으로 밝혀졌다. 예외적으로 자본주의의 핵심 논리인 탐욕적 인간이라는 가정은 18세기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기득권을 옹호하고 자본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되고 강제로 적용된 억압이자 이탈이다. 한마디로 대화적 언어를 공유하고 사회적으로 협동할 수 있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제도와 환경에 의해 유도되고 진화하며 성숙되는 신적(至誠)인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자연스레 산업사회 초기부터 자본의 탐욕에 대한 문제점과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에서 전개되었던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를 재해석하고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한계를 드러낸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일로 다가온다.
유토피아를 상상한 토머스 무어, 자연재의 공유개념에 기초하여 기본소득을 제시한 토마스 페인, 무제한적 사유제를 비판한 시몬 드 보부아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시종들을 해방시킨 귀족 출신 생 시몽, 그리고 아래에 언급할 사를 푸리에와 로버트 오언 등으로 연결되는 산업혁명 초기 시절의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는 일로 문제가 많은 현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대에 와서 화려하게 재평가받는 사를 푸리에의 천재적 제안과 로버트 오언의 실천적 실험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푸리에의 시각에서는 가난과 실업에 시달리는 한 노동자의 권리라는 것이 단지 종이 위에만 존재하는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인민주권론의 원칙과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의 개념은 생활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한다. 그에게는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박애는 의미 없는 망상과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당대에 유행하던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상들도 가난한 인민들에게 품위 있는 생활 수단을 제공해주고, 최고의 자연권적 권리인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시대적 명령에 무지하다고 반발한다. 가난한 인민들은 곧 정치철학에 의해 버림받은 존재들에 지나지 않았다. 하여 그는 노동할 권리의 보장을 절대적인 요구라 주장하며, 이 노동할 권리 없이는 여타의 모든 권리가 무용지물임을 선언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푸리에는 노동의 문제를 계급적 관점보다는 자연적 인간 존재라는 방식에 기초하여 고찰하면서, 인간의 내면적 열정을 쫓는 즐거운 노동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참조로 푸리에의 열정과 즐거움에 근거한 노동의 개념은 후에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진우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다시 현대적 의미로 부활한다. 이러한 생각을 실현하려는 시도로써 그는 ‘팔랑주(phalange, 적이 공격할 수 없는 잘 짜인 밀집 방어진)’의 건설을 꿈꾼다. 농업과 산업 활동의 결합체이며, 그 운용방식은 노동의 형태와 생산물의 분배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공동노동, 업적 및 도급에 의한 차등분배, 조직원의 최저생계보장, 생산단위 간의 업적 경쟁 등을 기초로 하여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팔랑주의 밑그림을 기획한다.
애초에 내면의 열정과 즐거운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나, 현실적으로는 힘들거나 쾌적하지 못한 노동이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고, 새로운 생산공동체 체계 속에서도 사회적 차별, 임금의 차등, 사유재산제도 도입, 사적 자본의 공헌(일종의 기부금) 등 어쩔 수 없이 불평등적 요소가 존속함을 제한적으로 인정한다. 팔랑주 간에 생산물의 상호교환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공정성이 유지되도록 정치 경제적 최고의 권력이 개입하도록 제안하기도 한다. 규모에 대해서는 최소 80가정과 400여 명 수준의 개인에서 최대한도로 300가정과 1500~2000명 정도를 상정하고 이 단위가 점차 연방적으로 결합하고 궁극적으로 세계체제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유치한 상기 팔랑주의 구상에서 우리는 현대적 협동조합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푸리에는 자신의 글 ‘통일의 이론’에서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연대의 개념에 처음으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 △ 보험의 원칙, 위험과 빚에 대한 공동의 책임 △ 재산의 공유원칙,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려는 자세 △ 사회적 집단적 연대, 공동체적 소속감을 위한 원칙 △ 공공부양의 원칙, 최저생계의 보장 등 역시 현대적 복지국가의 개념을 시도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모범적으로 잘 이루어진 팔랑주가 표본이 되어 결국 세계적 변혁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 않은 그는 이의 건설에 필요한 자금의 충당을 위해 여러 내각 대신들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나 아무도 그의 호소에 응대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을 누군가가 자신의 기획, 팔랑주의 실현을 지원하기 위해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자신을 찾아오리라 굳게 믿으면서 매일 정오에 자신의 집에서 기다리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푸리에가 몽상적 휴머니스트라고 조롱을 받는 배경이다.
그러나 그가 제기했던 맹아적 주제들은 마르크스 등에 의해 ‘과학적 인간해방론’으로 되살아나고 20세기에는 정치적 권리를 넘어선 노동과 생활권 개념으로 발전하였으며,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개념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고, 현재에 일고 있는 기본소득 운동의 역사적 동력을 미리 일깨운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푸리에 이후 이론보다는 산업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로버트 오언은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기업가이며,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장인 역시 규모가 제법 되는 방직공장의 소유주였다.
당시 산업계에는 기업가와 노동자 양측이 끙끙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한편으로는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규율이 무너진 노동자들의 불량하고 게으른 근무 태도였다. 이를 잡기 위해서 기업가들은 협박, 벌금, 해고 등 강압적 수단에 의지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장기간 노동, 열악한 환경, 저임금과 학대, 영양실조 등으로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스스로 높이고 싶어도 높일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상황을 안고 있어서 앞뒤의 두 가지 문제들이 뒤엉키어 악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장인인 데일 씨는 당대의 보기 드문 양심적인 기업인으로 뉴라니크 공장에 이미 소년소녀들의 기숙사를 각각 분리 제공하였고, 양호한 급식, 깨끗한 작업환경을 제공하며 야간학교까지 운영해 왔다. 오언은 이에 더하여 고임금 정책을 유지하고. 10세 미만의 아동노동을 금하고, 인원 감축 없이 최신 설비를 들여와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또한 당시 평균 노동시간이 14시간 이상인데 반해, 10.5시간으로 대폭 줄였다. 장인이 기초를 만들었던 여러 가지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복지시설을 더욱 확대하였고, 근무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언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노동자들의 교육문제였다. 그는 개인의 행복이 공공적 보편적 행복으로 확대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고 교육이야말로 이성적 사회실현의 참된 지렛대라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교육의 지향은 한마디로 사회교육이었고 교육환경론이었다. 노동자들이 교육과 학습을 통해 스스로 자각하고 새로운 인간형으로 거듭나면, 노동의 주체로서 객관적 능력향상과 주관적 품성을 갖추는 것이 사업성공의 요체로 굳게 믿었다.
실제로 20년간 오언은 자신의 믿음을 확실하게 실천하여 동일한 노동자 숫자로 생산량을 두세 배 증대시켰고, 순익도 두 배 이상 증대하는 등 대단한 성공을 이룩하였다. 이윽고, 뉴라나크 방적공장은 사회개량 운동의 산지로 각지에서 명사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생기는 법, 외부적 경영환경이 악화되자 다른 주주와 동업자들은 오언의 운용방식이 자본의 논리에 어긋난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파산의 위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동업자들과의 불화가 오언의 절절한 오랜 꿈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지분을 처분하고 1825년 홀연히 미국을 향해 떠난다.
영국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는 경험 중에 최신기계와 기술을 도입하면서 증대된 생산물과 성과가 생산물을 만들어낸 노동자들에게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그는 증대된 생산물을 선순환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야 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위해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면서, 단기적인 자본주의 이익에 매달리는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적인 모순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증대된 생산물과 성과를 온전한 기여자인 노동자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해결된다는 취지로 푸리에가 구상한 팔랑주와 비슷한 생산협동의 공동체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구상을 실현시키기에는 조국인 영국은 너무나 전통적 보수적 관행에 젖어 있었고 경제 불황과 실업의 확대 속에 처해 있었다. 동시에 동업자 간 불화가 그를 동요하게 한다. 선천적으로 낙관적인 오언에게 미국은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신천지로 등장한다. 그는 독일인 목사가 인디애나 주에 창설한 종교공동체인 ‘뉴하모니’를 사들이고 푸리에가 이상적인 숫자로 제시한 900여 명의 주민들과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예비실험에 들어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실험은 4년만인 1829년에 실패로 끝나고, 그는 다시 영국 사회로 돌아온다.
뉴하모니 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그의 신념과 구상을 홍보해냈고 1836년 다시 햄프셔에 퀸즈우드라는 공산적 공동체를 건립하였으나 이도 18년 뒤인 1854년에 와해된다. 2년 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세계에 중요한 진리를 가져왔다. 세상이 그것을 존중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다.”
여기서 섣불리 오언의 다양한 시도에 대한 실패 원인을 쉽게 언급할 수는 없다. 혹자는 그의 관념적 성급성을 비난할 수 있고, 또는 기존 조직원의 종교적 관행과 오언의 사회경제적 신념의 충돌과 부조화를 지적할 수도 있고, 그의 철저하지 못했던 공동체적 방법론을 탓할 수 있다. 사회 전반적 변혁 없이 부분적 지역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명백한 한계도 언급될 수 있다. 혹은 기회의 땅이었던, 그래서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주의에 의존하던 미국적 풍토에 오언의 공동체적 이상은 처음부터 궁합이 맞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오언의 변혁적 운동에 대한 실패에 대해 어떠한 단정적인 판단은 유보되어야 한다고 본다.
참조로, 우리에겐 고전적 교과서가 된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길 펴냄)의 저자 칼 폴라니는 실패한 오언을 근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의 한 사람이며 인본적 실천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언의 실험적 시도가 실패한 후에 뒤따라온 것은 19~20세기를 장식한, 강철 같은 조직을 통하여 노동계급 주도의 투쟁과 혁명,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20세기 후반 인간 품성을 무시한 소련 연방의 참담한 실패를 목격한다.
푸리에와 오언의 주요 활동은 한마디로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것, 물질적 생산 기반과 인간의 해방적 공간을 정합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인본주의적 상상과 헌신적 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붙인 ‘공상적’이라는 형용사는 이제부터 ‘인본적’ 사회주의자라는 찬사로 바뀌어야 한다.
사유재산의 무제한적 허용, 기득권 방어적 거래의 일방적 제도화, 자본만을 중심축으로 하는 회사의 설립과 계약에 관한 법, 이들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제도와 서민적 참여를 제어하는 복잡한 우회 구조, 평범한 사람들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문화적 흐름과 사회적 관행 등에 대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 비판과 대안을 찾으려 했다면 인본적 사회주의자들은 개인의 도덕적 품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인간과 사회의 해방적 조건을 모색하고 실현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회과학이 발달하고 정책적 경험이 누적된 현재, 우리는 가난과 빈곤 그리고 질병에 고통을 받는 힘없는 서민들의 입장에 서서 현안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 의지가 절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제3섹터 경제론은 유용한 도구로서 과학적 방법론을 뼈대로 삼고, 전망적 좌표로서 인본적 사회주의자들이 지녔던 도덕적 의지를 신경줄 삼아 새로운 모색의 길로 나서고자 한다.
(푸리에와 오언의 이야기는 서강대 박호성 명예교수의 ‘공동체론’에서 원용하였습니다. 필자)
다른백년 명예 이사장, 국민주권연구원 상임이사. 철든 이후 시대와 사건 속에서 정신줄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으며, ‘너와 내가 우주이고 역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서로 만나야 연대가 있고, 진보의 방향으로 다른백년이 시작된다는 믿음으로 활동 중이다. [제3섹타 경제론], [격동세계] 등의 기고를 통하여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논리를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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