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주류사회에 외면당하는 농촌지원 하향운동
예전에는 대학 내부의 양극화 현상이 그리 심하지 않았고, 농촌 출신의 학생들이 상당수를 점했다. 이들은 자신의 고향의 가족, 친척, 이웃의 농민들이 사회적 약자이고, 농업과 농촌이 쇠퇴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삼농이 심각한 사회문제임을 알고, 대학내의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농촌 지원 동아리를 조직했다. 그때, 마침 중앙이 삼농문제를 중대 국가 전략으로 받아들이는 역사적 전환을 맞아, 동시에 우리는 신향촌건설을 통해, 농민위주로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자발적 동아리 활동을 통해, 하향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두가지 과업이 신향촌건설의 키가 된다. 하나는 농민조직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학생 동아리를 통해 농촌지원활동에 참여하게 하는 것. 이 두가지가 시대배경하에 만들어진 신향촌건설 운동의 좌우 방향타였다.
2000년에 나는 농업부에서 국무원체제개혁사무소國務院體改辦로 자리를 옮겨, 중국경제체제개혁잡지사의 사장겸 총편집인 역할을 맡게 됐다. 나는 조직의 법인대표 신분을 활용하고 ‘중국개혁’이라는 매체의 플랫폼을 이용하여, 100년전 진행됐던 향촌건설을 부흥시키게 된다. 당시 삼농문제에서 내가 관심을 갖은 것은, 역시 주로 농민조직화와 청년농촌지원의 두가지 업무였고, 잡지사내에 농촌지원연구를 하는 소조직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각지의, 향촌건설사업에 뜻을 둔,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들게 된다. 그중에는 톈진과학기술대학에서 온 류샹보劉相波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역자 주 – 농민들이 주로 그를 부르던 류라오실劉老石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대학생농촌지원동아리를 만들고, 이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실제 활동에 힘을 많이 기울였다. 그와 함께 협력한 치우졘셩邱建生이 있었는데, 그는 주로 농촌에서 농민이 참가하는 커뮤니티대학社區大學(역자 주 – 대만에서 시작된 지역사회운동으로, 대만과 교류가 많은 푸졘성福建 출신인 치우졘셩 등이 이를 참고하여 푸졘성의 농촌마을에서 실험적으로 운영하였다), 협동조합 만들기에 힘을 쏟았다. 그들이 잡지사 농촌지원연구팀의 이 두가지 방면의 실체 책임자였다. 민국시절 량슈밍梁漱溟, 옌양추晏陽初, 루쭤푸盧作孚와 같은 선배들의 일을 이어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나중에 류샹보는 량슈밍향촌건설센터를 만들었고, 치우졘셩은 옌양추평민교육사상연구회를 만들었다.
객관적으로 말해, 우리의 프로젝트와 당시 주류 사회가 추진하던 시장화개혁은 정반대 방향이었다. 소위 당시의 ‘경제체제개혁’은, 시장화를 통해, 불가피하게 빈부격차를 확대할 수 밖에 없다. 또 시장화개혁은 필연적으로 시장의 조절 위기현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시장경제는 어떻게 위기에 빠지는가? 사회적 약자를 돕는 구조를 파괴하고, 빈부격차를 확대시키기만 할 뿐, 좁히지 못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양극화이다. 그래서, 중국은 이런 개혁과정에서 주로 도농이원화 구조를 통해, 명확한 도농간의 격차를 초래했고, 이는 객관적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당시 나는 월러스타인의 발언을 빌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행복한 도시는 다 엇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농촌은 각양각색의 불행한 양태를 보인다. “ 지금 생각해도 도농이원구조의 폐해를 드러낸 적절한 표현이다.
도시에 대량의 자본이 집중되면서, 그 효과로 도시 수입은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농촌의 세가지 생산요소 유출현상이 나타난다. 자금, 토지, 노동력 이 삼대 기본요소가 모두 장기적으로 대규모로 농촌에서 빠져나가고, 사람들은 농촌을 외면하게 된다. 어떤 영역이든, 삼대 요소가 장기적으로 빠져 나가면, 쇠락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종합적인 삼농문제를 간과하고, 주로 시장경쟁력을 중심으로 농업문제만을 강조하다 보면, 당연히 농민의 빈곤화, 농촌의 쇠퇴, 농업의 약화로 이어진다.
이것은 객관적 결과이고, 시장화를 통해 나타나게 됐다. 그러므로, 시장화 개혁을 주장하는 국무원체제개혁사무소의 목소리가 주류가 되어, 우리가 강조하는 삼농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일 이를 받아들이면, 자본이 도시와 산업으로 집중화 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개발 속도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발전주의가 주류 개혁이론과 개혁정책의 신념이 돼, 일반적으로 우리의 삼농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내가 주도하는 잡지사가 삼농 문제에 주목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당시의 주류 시장화개혁노선과 점차 갈등을 빚게 된다. 결과적으로 나도 그들의 눈밖에서 벗어나 주류 체제안에서 밀려나게 됐다.
그외에도, 당시 전국의 매체가 시장화 개혁에 발맞추어, 독립 재정을 요구 받았다. 거기에다 벌어들인 소득중 일부는 다시 주관 기관에 관리비로 납부해야 했다. 관영 잡지사임에도 국가에서 전혀 재정지원을 하지 않았고, 스스로 돈을 벌어 살림살이를 꾸려야 했다. 경영 독립을 위해서는 결국 광고가 필요하고, 기업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다. 즉, 자본가의 입맞에 맞는 기사를 생산해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백명의 잡지사 직원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나? 잡지사 내부의 편집자들과 기자들도 점차 농민 편에 서고자 하는 우리들의 논조에 반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우리 향촌건설 자원활동가들은 그렇게 다시 적수공권 상태로 시작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처음에는 잡지사의 자원을 활용했으나, 약자인 농민 편에 서려는 우리의 움직임은, 기업가들과 농민의 권익 보호 문제로 시끄러워지는 것을 싫어하는 지방정부의 반감을 샀다. 잡지사는 더 이상 광고를 실을 수 없게 됐고, 자금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됐다.
내가 잡지사에서 향촌건설 운동을 진행한 결과로, 외부 주류 세력의 반발을 샀고, 잡지 내부 인력의 밥그릇 걱정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잡지사 법인 대표였으나,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염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대표직을 사임하게 됐다. 그렇게 향촌건설은 다시 제도권에서 밀려 났다.
잡지사에 재직한 2001년부터 2004년 사이 대략 3년간, 향촌건설은 어쨌든 백년후 새출발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그후에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겪는 어려움을 스스로 체감할 수도 있었다. 2004년 전후로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잡지사에서 쫓겨 나면서, 의탁을 할 기관이 따로 없어졌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다행히도 삼년간, 우리는 이미 전국 각지에서 상당수의 학생동아리를 키워냈고, 십여개의 농민협동조합을 만들어냈다. 대학생들은 청년 자원활동가로서 농촌으로 가서, 농민들과 협력하고 있었고,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어, 우리는 객관적인 존재감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류샹보의 량슈밍향촌건설센터는 둥지를 잃었음에도 나름의 생존방법을 모색해 나갈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허베이河北성 띵定현의 자이청翟城마을에 옌양추향촌건설학교를 만들고, 치우졘셩의 옌양추평민교육연구회가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됐다. 주로 마을안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량슈밍 향촌건설센터의 주업무는 대학생들이 교육에 참가하고 농촌으로 가서 지원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지만, 당시 사무실을 빌릴 여유가 없었고,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테이블을 놓아 둘 공간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베이징 교외지역에 자리를 잡았는데, 초기에는 안정되기가 힘들었지만, 이후에 후원기관들이 조금씩 생겨나서, 프로젝트 경비지원을 받고, 청년들이 장기적으로 농촌에서 실천하는 것을 지원하도록 자리잡았다. 이것이 농촌인재육성계획, 줄여서 인재계획이라고 부르는 프로젝트이고, 청년 자원활동가를 매년 농촌으로 보내서 일하게 한다.
이처럼, 당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나와 류샹보 모두, 이 운동이 ‘신시대상산하향운동’으로 발전해서, 지금과 같은 큰 사회적 흐름과 영향을 만들어 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4. 제도권 교육의 전복
청년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내려가서 자원활동가로 일하도록 독려하면서, 우선 이들 지식인들의 지식체계 자체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다. 이들은 과연 농민들과 두 손을 맞잡고 협력할 수 있을 것인가 ? 이 문제는 청년, 학생들 혹은 교사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난 백년간의 산업화 역사의 유산이다. 산업화 시대의 교육은, 산업화의 요구에 부응할 수 밖에 없다.
산업화시대의 요구란 무엇인가 ? 내가 좋아하는 비유가 있다. 아마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란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영화속에서 생기넘치던 채플린이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는 기계에 맞춰, 표준화된 동작을 취하게 된다. 이 희극은 사람을 기계로 만드는 것을 비판하는데, 산업화 시대의 교육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기계화에 다름아니다.
소위 현대 교육은, 인류를 인력자원으로 보고, 인력자본의 도구로 삼는다.
현대교육에서 중요한 이론중 하나가 교육을 도구로 삼는다는 것이다. 인력자원을 성인노동력자본으로 전환시키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성인노동력자본이란 무엇인가? 산업자본에 협력하고, 산업자본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교육체계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의 기타속성, 사회속성, 자연속성 등을 최대한 약화시키고, 산업자본이 요구하는 인력자본 속성만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교육이 훈련시킨 청년학생의 지식구조는 근본적으로 농촌의 다원화된 사회적 존재 형성에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농촌은 지역마다 특성이 상당히 다르고 농업은 자연, 자원, 기후, 지리 등의 조건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서, 농업 지식은 근본적으로 로컬화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천차만별의 농업에 통일된 표준 지식체계를 적용할 수 없다. 그래서 미국중심의 제도권 농업학문지식을 참고하는 것이 현재 큰 곤란을 겪고 있다. 젊은이들이 농업관련 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꺼리지만, 학문지식을 표준화하면 할수록, 이렇게 습득한 지식을 농촌에 가서 사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농촌은 다양성이 기본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르침과 배움간의 대립과 갈등이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대해, 학생들이나 학교를 탓할 수 없다. 그보다는, 산업화를 추구하면서 하나의 표준화된 지식체계를 좇아온 과거 백년 역사를 탓해야 한다. 중고등학교 교육도, 초등학교도 모두 표준화된 제도권 교재를 사용하고, 그것도 전국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교재를 사용한다. 이곳은 고산지역이고, 저곳은 비옥한 흑토, 또 여기는 붉은 흑, 저기는 황토, 이곳은 석회암 지역, 저곳은 해안가, 임업지대, 초원, 습지 이렇게 지역마다 로컬한 지식을 생산해야 하는데, 현재의 교육체계는 당연히 이의 실현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우리가 청년지식인들을 조직해서 농촌에 갔을 때,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지식이 향토사회속에서 실천을 하려할 때, 무용지물임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첫번째 문제이고,
두번째 문제는, 90년대 후반부터 소위 교육 대약진을 시도하면서 이루어진 교육의 산업화이다. 애당초 원인은 당시의 생산과잉문제였다. 불경기속에, 대량의 청년들이 취업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정부가 정원을 늘려, 홍수예방을 위해 댐에 물을 고수위로 저장하듯, 잠재적 취업예비군을 학교에 잠시 머물게 했다. 당시 대학이 정원을 늘리기 위한 좋은 명분이 됐다. 그래서 과거의 전문대학이나, 직업훈련학교가 4년제 대학으로 승격이 됐다. 이러한 학교들은 4년제 대학으로서 학생들을 교육시킬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이 돼버렸다. 동시에 정부가 민간이 투자한 사립대학을 설립할 것을 독려했다. 이러한 사립대학들은 교육 산업화를 통해, 이윤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우후죽순처럼 학교가 생겨났다. 하지만, 당시에 준비된 교수 인원이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고등교육의 질은 저하하면서, 학비는 증가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또, 저소득층인 농민과 노동자 자녀들의 진학률이 떨어졌다. 학력이 낮아서 다시 경제적 하층민이 양산되는 사회불평등과 이원화 구조가 심화됐다.
현재 중국에는 수천만명의 대학생이 있다. 매년 7~8백만명이 졸업하기 때문에 세계 최대규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학생들이 졸업하자마자 실업자가 된다. 특히, 비명문대학 학생들이 그러하다. 이런 학생들은, 명문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함으로써, ‘신분상승’을 꾀하기도 한다. 하지만, 명문대학들은 이들에게 기회를 잘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입학력고사가 평생을 좌우하게 된다. 이런 시스템은 반드시 정부의 제도권 교육을 통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엄격한 표준화 교육이 전제가 된다. 이렇게 중국의 학생들은 암기에 능한 사람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 갈 수 있다. 하지만, 혁신능력은 어느정도, 남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질, 또는,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하는데, 이런 학생들은 이렇게 융통성없는 과정을 거치는 제도권 교육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되면, 교육계는 내부적으로 매우 심한 배타성을 지니게 된다. 교육계 내부에 양극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최고 명문대학에 정말로 우수한 인재가 입학할 수 있을까 ? 그저 암기능력이 좋은 학생이 훌륭한 학생인가 ?
그리고 중국의 대학교육은 90년대부터 서방의 교육 체제를 그대로 카피해서 사용하고 있다. 특히 대학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교과서를 그대로 수입, 번역할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일본이나 한국, 유럽의 학문적 성과도 참고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중국이 미국과 같은 사회인가 ? 교육 시스템의 변화는 이미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고, 심지어는 국제사회에서도 비판을 받는다.
다시 정리해보자, 모두가 중국 교육이 제대로 된 인재를 배출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왜일까? 첫째, 산업화와 관련이 있다. 표준화된 제도권 교육만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두번째,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원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교육산업화가 초래한 악성 부채와 교육비 증가가 만들어낸 매우 복잡한 난맥상을 아직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제도권 교육으로 배운 표준화된 지식을 들고 농촌으로 갈 수 있을까? 농민들과 쉽게 협력할 수 있을까? 그래서 량슈밍향촌건설센터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후에는, 매년 농촌으로 갈 인재를 육성하는 계획을 실행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갈수록, 이런 고학력 청년들이 농민, 농촌, 농업과 어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삼농의 객관적 필요와 고등교육 시스템이 배출한 인재의 능력 사이에는 상당한 갭이 존재한다.
이 일을 수행하면서, 재미있는 일도 많이 겪었다. 많은 기업가들이 내게 말한다. “원교수님, 이런 식으로 배출된 인재들이라면 얼마든지 저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량슈밍 향촌건설 센터에서 지금까지 2백명이 넘는 인재를 육성했지만, 실제 수요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급진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보낼 때, 우선 대학에서 배운 쓸모없는 지식은 한켠으로 치워두라고 요구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들이 머리에 금테두르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내가 명색이 대학생인데라며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마라. 사실 머리 속의 지식들은 쓸모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발밑의 뜨거운 대지가 요구하는, 향촌생활에 적합한 것들이 아니다. 역으로 청년들이 일단 삼농의 요구에 맞출 수 있게 되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 특권의식 따위는 내려놓고 농촌에 가서, 농민들과 함께 뒹굴면서 일년을 보내고 나면, 무슨 일에 임하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이런 각도로 보자면, 량슈밍향촌건설센터의 농촌우수인재계획은 실질적으로 현재의 교육산업화가 만든 모순과 형식주의적인 제도권 교육체제가 만든 폐해에 대해서 일종의 돌파구를 여는 혁신을 일으킨 셈이다. 상대적으로 완전히 서구화되고, 표준화된 지식으로 제도권 주입식 방법을 통해 인력자본화한 교육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혁신이다. 오늘날 모두가 혁신에 참여하는 시대에, 정말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급진적 혁신이다. 인재계획은 사회의 광범위한 수요에 부응하는 인재를 배출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진정한 교육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재계획은 실천, 중국의 현실에 발을 딛고 농민과 결합된 ‘일동양애’형 인재의 교육방식이다.
5. 탈엘리트주의의 향촌건설
적수공권으로, 대사를 치르기 위해 나설 때, 균형을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성인이 되고, 이렇게 많은 일을 벌이고 다닐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사실, 나서고 싶지도 않았다. 만일 한 사업의 성패가 특정인 한명에게 달려 있다면, 이것은 매우 리스크가 큰 상황이다. 거버넌스 이론에 의하면, 이 사람을 제거해야 한다. 아니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시작할 때부터, 매우 명확한 집단적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수십년간 이렇게 많은 청년학생들을 동원해서 농촌의 삼농사업에 참여하게 하면서, 늘 생각해온 것이 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일이 아니라, 대중의 일이라는 것이다.
최근 강연에서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향촌건설의 큰 특징중 하나가 탈엘리트주의이다. 나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한다. 우리 세대는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경험했고, 적지 않게 고생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남아 사회적 발언권을 갖게 된 사람들은 5%에 불과하다. 이중에는 대학에 진학한 이들도 있고, 외국으로 간 이들도 있고, 기업가가 되는 등, 모두 중국 사회의 엘리트가 됐다. 하지만, 우리는 나머지 95%를 잊지 말아야 한다. 대다수의 동년배 지식인 청년들이 하방의 경험이 있다. 함께 대중운동에 참여했고, 나중에 도시로 돌아와서 일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나중에 정리해고를 당한 이들은, 저소득층으로 전락했다. 이게 95%가 겪은 일들이다. 승자가 된 5%는 주위의 95%를 잊어서는 안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 95%에 농촌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소망으로 말하자면, 탈엘리트주의 사회를 실현하고 싶다. 이를 실현할 여유가 없고 능력과 노력이 부족한 것에 탄식할 뿐이다. 나는 주위의 훌륭한 인재들에도 못미치고, 공부도 부족하다. 그래서 영원히 분투할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나는 탈엘리트주의를 자각하게 됐고, 내 주위의 95%를 잊지 않게 됐다, 역으로 5%의 주류 엘리트 사상을 좇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의 사상을 인정하면, 세상의 재화를 인정해 버리게 된다. 이 부는, 엘리트 그룹이 사회를 이끌며 만들어낸 수익이다. 당연히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엘리트들이 분배한다. 그리고 엘리트들은 2차분배를 통해 남은 몫으로 약자를 지원한다. 이것이 제도의 역할이며 주류적 사고이다. 나는 여기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우리 엘리트가 승자가 됐지만, 이러한 방법밖에는 없을까? 더 공평하고 정의로운 방법, 공정한 방법이 없을까 ? 95%가 함께 누려야 할 부분을 엘리트가 독점하고, 그저 나머지를 다시 재분배해야 하나 ?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기에 대중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일종의 다원성 공생 사회이다. 일종의 지속가능한 발전 방식이고, 인류의 생계와 생태가 결합된 생태문명이다. 이는 현재의 주류 사상과는 구별되는 대안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향촌건설 사상이 일종의 탈급진화(역자 주 – 저자는, 서구적 산업화를 급진화로 표현한다. 그의 대표 저서 “100년의 급진”은 이를 뜻한다.)를 추구하게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옛 문명의 계승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삼성오신三省吾身, 음양지도陰陽之道, 상선약수上善若水와 같은 사상을 공부하는 것이다. 일단 탈엘리트주의를 받아들이면, 자연히 상대적으로 생태환경과 조화하면서, 지속가능한 포용적 발전사상도 인정하게 된다.
나는 성악설을 믿지 않는다. 사회에는 비록 수많은 악이 존재하지만, 사람됨을 갖춘다는 것은, 성악설을 믿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상선약수를 실천할 수 있다. 나쁜 짓은 사소한 일이라도 해서는 안되고, 선한 일은 사소한 것이라도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한걸음 한걸음 실현해 나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다… “세계는 우리의 것이고, 일을 이뤄내기 위해 우리 모두가 서로 의지해야 한다.”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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